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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내다보자
함석헌
……까만 수평선 너머를 한없이 내다보자. 눈이 시울릴 때까지 시울리다 못해 눈물이 고일 때까지, 눈물이 괴다 못해 눈이 감길 때까지 내다 봐, 내다 봐!……
멀리 앞을 내다봐야 산다
비상시란다고 저마다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꾸부리고, 숨을 죽이고, 너도 나도 각각 제 살길을 찾으려 제 발 뿌리 앞만 보려하지만, 그러다가는 죽는다. 누구만이 죽는 것 아니 라 전체가 다 망하고 만다.
베드로의 옛 이야기 못 들었나? 무덤 속에서 살아난 생명의 스승의 목소리 듣고 앞만을 보고 나갈 때는 사나운 물결이 삼키려는 줄도 모르고 노한 바다 위를 평지와 같이 걸을 수가 있었지만, 발밑을 보고 물 위인 줄 알아 겁이 난 때는 바다 속으로 흙덩이처럼 빠져 들었다.
사는 길이 결코 발끝에 있지 않고 저 먼 앞에 있다.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지금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장차 올 것에 있다. 뵈는 것에 있지 않고 뵈지 않는 이치에 있다. 힘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눈을 결코 지평선 아래로 떨어뜨리지 마라, 내다 봐라, 내다 봐라. 까만 수평선 너머를 한 없이 내다봐라. 눈이 시울릴 때까지, 시울리다 못해 눈물이 고일 때까지, 눈물이 괴다 못해 눈이 감길 때까지 내다봐, 내다봐! 그럼 별이 될 거다. 장차 오는 시대를 말해 주는 별이 보일 거다. 그럼 앞만이 아니고 위다. 하늘이다. 네 길이 하늘에 있다.
땅 위를 네가 아무리 찾아도 거기 길이 없을 거다. 조막 같은 지구 위에 헤매고 헤매다가도 제 자리에, 죽겠다던 그 자리에 도로 돌아올 것밖에 없지 않으냐? 현실에 달라붙어 네 길을 인도한다는 것들, 어느 이슥한 가시덤불 속에 끌고 들어가 너를 잡아먹자는 것 밖에 될 것 없다.
길은 하늘에만 있다. 앞의 끝은 하늘이다. 내다보면 하늘 위로 밖에 갈 곳이 없다. 길은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간다.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이 아니라 정신이다.
발을 잘못 디딘댓자 구렁에 빠지거나 독사 사나운 짐승에 부딪칠 것 밖에 없지 않으냐? 구렁에 빠지면 발목이 부러지거나 살갗이 찢어질지언정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요, 독사 짐승을 만난다 하더라도 한 두 목숨이 없어질지언정 전체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방향에 있다. 방향을 말하는 것은 하늘의 별 뿐이다. 바로잡으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 동안에 정신을 길러서 모래밭에서도 만나를 얻어먹고 반석에서도 물을 얻어 마시는 기적적인 역사를 낳을 수 있으되,전체의 방향 생각을 아니하고 당장에 먹고 즐기고 세력을 부릴 생각만을 해 계책(計策)을 꾸미는 데만 빠져 들다가는 너만 아니라 전체가 다 망한다. 애급이 지금 어디 있으며 앗시리아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늘에 환한 길을 네가 왜 외면하느냐? 햇빛의 바다 속에 생명의 노래와 춤이 약동하건만 그것을 한 번도 볼 수 없고, 진주를 쥐어뿌린 듯한 찬란한 별 속에 거룩하고 장엄한 음악이 물결치건만 그것을 한 번도 들을 수 없이, 저주 받아 가시 숲 넝쿨 밑으로만 도둑 걸음을 평생하게 되는 승냥이 여우같은 현실주의의 지배자들, 너희는 남을 죽인 썩은 고기에만 맛을 드리니 그 웬일이냐?
계책(計策)이라지만 計가 뭐냐? 곱고 또 곱아 봐도 열 손가락에서 더할 것 없지 않느냐? 그래서 十을 그렸다. 策이 뭐냐? 막대, 거기 수두룩한 나뭇가지 댓가지 아니냐? 가로 놓고 세로 놔 봐도 그 가시덤불에서 벗어날 것이 없지 않으냐? 사람이 어찌 계책 모략으로만 살며, 나라가 어찌 코에 걸어 코걸이 귀에 걸어 귀걸이 노릇하는 소위 그 법이란 것으로만 되겠느냐?
눈을 한번 크게 뜨고, 밥집 밑에서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욕심을 눌러 마음을 겸손히 하고, 대자연에 배워 보아라. 끝없는 생명의 진화의 큰 필림 위에 무엇이 나타나느냐? 낮고 더러운 것일수록 온 몸으로 땅에 붙어살지만 발달해서 올라갈수록 땅에 서는 멀리 하려 하지 않나? 여러 십 쌍의 발로 기다가 여섯 개로, 여섯에서 넷으로, 그러다가 나중엔 두발로 곧장 서지 않았나? 뭐하자고 서느냐 보기 위해서다. 듣기 위해서다. 눈과 귀를 몸의 가장 위에 둔 뜻을 모르나 곧추 서서 멀리 끝없이 내다보람 아니냐? 내다보지만 무엇이 있느냐, 없다, 없다. 까만 하늘에 끝이 없을 뿐이다. 그럼 자연 생각뿐이요 정신뿐이지 무엇이 또 있느냐? 생각을 하면 나오는 것은 도리요 진리다. 귀를 눈 보다 조금 낮추어 좌우에 둘로 둔 뜻은 무엇인가? 이리 치우치거나 저리 치우치 말고 널리 세계의 소리를 들으란 말 아닌가? 그것을 바로 한 이가 관세음(觀世音)보살이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을 건질 수가 있다.
네 몸을 굽히지 마라. 네 몸을 굽히지 않고 네가 땅속에 구렁을 팔 수 없으며 몰래하는 속삭임을 들을 수 없고, 네 몸을 굽히지 않고 남의 몸을 굽힐 수는 없다.
앞을 내다 봐라. 남의 고기 먹는 죄로 햇빛을 못 보는 저 무리들은 또 몰라도, 너 양 떼 같은 민중은 양 떼 보다도 그저 먹히우기 위해서만 나온 풀 같은 민초(民草), grass root, 씨알, 우주 엽록소(葉綠素),너만은 앞을 내다보고, 위를 우러러 보아야 한다. 거기서 새 시대가 오고 있다.
非常이 어디로 쫓아 왔나?
앞을 내다보라 함은 그저 앞만을 보고 멍청하고 섰으란 말이 아니다. 별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별이 속사인단 말이 있지만 그것은 역사는 모르고 인생의 가로 자른 면만을 보는 감상주의의 하는 소리다. 별은 속삭인다기 보다는 부르는 소리요 외치는 말씀이다. 별을 보고 가만히 서 있을 사람 없다 나아가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드는 문화 속에서 별을 바라 깬 마음은 그 부름에 따라 팔레스타인까지 갔다 하지 않던가?
눈은 앞을 내다봐야지만 발은 제 선자리를 잘 살펴야 한다. 눈만이 눈이 아니다. 발에도 눈이 있고 손에도 눈이 있다. 손톱눈 발톱눈 하지 않던가? 보는 마음이 있어, 위에 나타나 면 눈이요 밑에 나타나면 발이요 가운데 나타나면 손이다. 하나는 미래를 보는 것이며 목적을 알잔 것이요, 하나는 과거를 보는 것이며 동기를 밝히잔 것이요, 또 하나는 현재를 알고 삶을 실현해 나가잔 것이다. 그러므로 위를 본 다음엔 또 아래를 보고 앞을 봐야 한다.
이 비상시(非常時)는 어디로 쫓아 온 것인가? 역사의 걸음을 걸어 온 우리 발 더러 말을 하라면 알 것이다. 요새 이것이 이북의 침략주의로 인해, 미국의 갑작스런 정책 변경으로 인해, 중공의 유엔가입으로 인해, 일본의 재무장 경향으로 인해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옅은 관찰이다. 그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눈감고도 안다.
그 보다도 오늘 이 위기에 원인은 지금 사회에 들어찬 부정부패에 있다고 나는 본다. 당초에 5·16사건이 일어나서 지금 이 정권이 생길 때에 국민 앞에 한 공약의 중심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이 부정부패를 없애 버린다는 데 있었다. 그 때의 부정부패는 오늘에 비하면 아직도 송사리 정도 밖에 아니 됐지만, 그것이 나라의 운명에 관계되는 것인 것만은 틀림 없었다. 군인들의 그 판단만은 옳았다. 그랬기 때문에 국민의 뒷받침은 아무 것도 없이 일어난 혁명이요, 군인 정치의 여러 가지 마음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고, 정책의 잘못된 것 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이날껏 견디고 참아 온 것은 주로 이 부정부패를 제해 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약속과는 반대로 더 늘어 갔다. 이제는 송사리가 아니라 고래다. 그것을 잡아 보려고 대들던 법관이 고래를 잡으려다가 그 사납게 와들거리는 몸집에 부딪쳐 깨져 나가는 매생이 모양으로 실패하고 마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이러고는 나라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했나?
나라 구한다는 것을 자청하고 나섰으니 그 전은 말할 것 없다. 그 후의 일은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 십년을 정말 성의를 써서 부정부패를 없이 했다면 오늘에 와서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 와서야 자주국방을 말하는 것은 나는 우습다고 본다. 십년을 뭘해 왔단 말인가? 반공을 국시로 한다면서 이북 정권이 침략적인 것은 처음부터 환한 것인데 십년 동 안을 국방준비를 못했다면 무엇 했단 말인가? 우리가 떨어졌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사람으로도 우리가 많지, 땅의 조건으로도 우리가 나으면 났지 못하지 않지, 세계의 편들어 주는 나라로도 이날껏 우리가 승했지 저 쪽이 아니다. 그런데 왜 떨어졌단 말인가? 번 돈은 다 무엇했단 말이며 길러낸 사람은 다 어떻게 됐단 말인가? 이북 인구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고 민심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지만, 수로 2천만이 넘을 리 없고 자유를 허락 아니 하는 공산 정치 아래 민중의 불평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3천 5백만을 가지고 2천만 못되는 것 을 두려워하며, 자유주의를 가지고 압박 정치에 떨어진다 하니, 대체 이것이 웬 일인가?
한마디로 하자, 인화(人和) 문제 아닌가 살고 싶거든 진실을 말해라. 오늘 우리의 큰 걱정은 정부와 국민이 거의 완전이라고 할 정도로 서로 떨어지고 막혀 있는 점이다. 비상시(非常時) 부르짖음을 이래서 나온 것이다.
지난 달 호에 내가 이 정부 내놓고 또 다른 정부가 없다 했고 국민과 정부가 총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해서 혹 어떤 이들이 내가 약해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도 그 짐작을 못했던 것 아니지만 나는 인기를 얻기 위해 극단적인 말을 할 수 없다. 강한 것은 극단적인 감정이 아니요 중정(中正)의 도리다. 중정(中正)이려면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그 속에 최후까지 옳은 것의 가능성을 믿어 주어야 한다. 나는 현 정부를 반대하지만 최후까지 그 가능성을 믿어준다. 그들이 들으면 설 것이요, 아니 들으면 망할 것이다. 나는 이 정부를 넘어뜨리자는 것이 목적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 붙들자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말해서 무너지는 정부면 내가 아니라도 망할 것이요, 스스로 설만한 힘이 있다면 아무도 억지로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국민이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완전히 갈라져 있으니 큰 일 아닌가? 국민을 얻지 못하고 국방을 강화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강한 군대를 가졌단들 누구와 더불어 싸우며, 어떻게 대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다시 경고하지만 강제로 묶어서만은 절대로 인화(人和) 못 얻는다. 인화(人和) 없이는 절대로 못 이긴다. 뒤늦게 와서 공산주의식을 모방하려는가? 벌써 한 걸음 뒤졌다. 그보다 다른 길로 앞서지 않고는 못 이긴다.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못되는 원인은 돈과 권력 때문이다. 부정부패가 뭐냐? 돈과 권력이 골고루 펴져 있지 못하고 어느 한 곳 혹 몇 곳으로 치우쳐 있음이다. 몸의 각 기관이 골고루 발달하고 모든 세포가 다 같이 영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건강한 신체인 것같이, 돈과 권력을 골고루 가질 수 있는 국민이 건전한 국민이다.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갈 영양과 기능을 뺏아 어느 부분만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것이 발달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다. 나라의 특권계급이 뭐냐? 그것이다. 외국수출이 느는 것이 반드시 자랑이 아니요, 국민 소득 숫자가 올라간 것이 결코 향상 아니다. 골고루 됐나 못됐나가 문제다. 골고루 되면 겨죽을 먹으면서도 대적을 막을 수 있으되 어떤 계급만이 잘 살면 국민이 도리어 적군을 환영하게 된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인도군 환영하는 것 아니 보았나?
어렵지 않다. 이제라도 열어라. 활짝 열면 된다. 고간 문도 언론 문도 활짝 열면 국민 총화 하루 동안에 된다. 내 말이 참인가 거짓인가 한번 시험해 보라!
열면 사상의 혼란 경제의 혼란 일어 날까봐 걱정 하지만, 그것은 근본 진리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나오는 이상심리에서 오는 겁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욕심을 부려 꼭꼭 닫으니 도둑이 오지 활짝 열고 같이 살자면 절대로 도둑 아니 온다.
물질의 도둑도 사상의 도둑도 다 그렇다. 모든 도둑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제가 만든 도둑을 제가 맞아 드리는 법이다.
내 생각대로 한다면 비상시 극복은 매우 간단하다. 같이 살기를 원해 권력과 돈의 독점주의를 버리면 하란 말 하지 않아도 국민이 감격해 자진해 즐거워서 공산 침입을 막을 것이다. 공산 침입을 군대로 막자는 것은 졸렬 중에도 아주 졸렬한 생각이다. 공산군은 국민만이 막을 수 있다. 무기로 아니라 하나된 정신으로 막고 살림으로 막는다. 하라 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정신의 국방이기 때 에 그에서 더 강한 것 없다. 이 생각을 아니 하는 것이나 보기에는 답답한 일이다.
지난날 대통령의 기자 회견 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크게 놀랐다. 중공의 유엔 가입, 닉슨의 중공 방문, 일본의 경제적 부강 등을 보고 국민 중에는 곧 평화가 저절로 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의미의 말을 했는데, 그것은 국민을 전혀 모르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 국제 정세를 보고 국민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를 느끼고 어려운 우리의 처지를 걱정하는 마음이지, 어느 정신 빠진 인간이 아닌 다음에는 평화가 저절로 오려니 하는 생각을 할 사람은, 나 보기에는 절대 없다. 그런 것이 다 국민과의 사이가 막혔기 때문에 나오는 잘못된 판단이다. 제발 국민을 과소평가하지 맙소사! 국민을 우선 중세기 아닌 20세기의 인간으로 대접하고 모든 생각 모든 일을 합소사!
평화주의를 몰라서 오해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실 평화주의를 말하기는 무력주의를 주장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평화주의를 죽음이 원지 모르는 천치 바보의 하는 말인 것처럼 알아서는 아니된다. 우리 다 같이 죽도록 싸웁시다 하는 말은 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의 경우 거짓말로 되어 버린다. 대적이 악의를 가진 줄 알면서 평화를 말할 때는 죽 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고 무기보다는 더 강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하는 말이다. 현실에 충실하려다가 잘못해 시대착오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
非常의 焦點
비상시(非常時) 비상시(非常時) 하지만 非常의 정말 초점은 무엇인가?
렌즈가 쟁반 같이 크다 하더라도 그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렌즈의 렌즈됨은 오직 한 점에 있다. 그 한 점에만 가면 온 세계, 눈으론 알 수도 없는 성운 성단의 대우주까지도 볼 수가 있고, 그 자리를 만일 가리우는 물체가 있다면 대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
비상시라 할 때는 무엇이 그 가장 문제되는 요긴한 점이냐 말이다.
비상시의 초점은 양심이다. 양심의 자유를 겨누는 것이 비상시 선포의 의미다.
우선 비상시를 선포한 것이 누구냐 하는 것부터 문제다. 비상시를 우리 위에 선포한 것은 하나님이다. 대통령이 아니다. 외양으로 보면 물론 대통령이다. 그러나 외양만 보고 속뜻의 세계를 못 보는 것은 마치 샘이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 물은 돌에서 나온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명령을 대통령이 한 것처럼 대통령의 얼굴만 보다가는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대통령 뒤에는 국내 국외의 모든 정세가 서고 내외 정세 뒤에는 시대가 서고, 시대 뒤에는 역사가 서고, 역사 뒤에는 하나님이 선다.
하나님이란 말이 마음에 아니 맞으면 생명이라 해도 좋고 뜻이라 해도 좋다. 어떤 학자처럼 우연이라 부를 터면 부르고, 그것은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하여간 사람의 하는 모든 일 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어떤 큰 건드릴 수 없는 일관한 무엇이 이 우주 안에 있어 거기서 모든 것이 나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 중에 어떤 것들이 제가 잘났노라고 큰 소리를 친 것들이 있었으나 그것들이 다 이 생명의 큰 행진 위에 거품처럼 떠내려 가버렸다.
대개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그 뜻의 존재를 부인하려 하고 제 생각 제 힘만을 믿으려 한다. 그래서 초라하게 보이는 예수를 잡아다 놓고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빌라도가 “진리란 것이 무엇이냐?”하고 빈정댔지만, 오늘날 역사의 큰 흐름의 언덕 위에 우리가 서서 볼 때 어떤가? 예수는 그 강물의 음악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데 그 로마제국은 거품처럼 산산이 헤져 떠내려가고 만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비상시도 그 뒤에 숨어 있는「그이」의 뜻을 찾아보아야 한다. 라디오의 스피카가 그 하는 말을 모르듯이 정치인들이 그 하는 정치의 뜻을 모른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저희들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하는 말은 역사 위에 영원히 살아있어 그것을 이끌어 갈 말씀이다.
그럼 그 뜻을 누가 알아야 하나? 씨알이 알아야 한다. 로마제국과 그 앞에 더러운 아양을 부리는 늙은 갈보 같은 유대 종교는 하면서도 제하는 짓의 의미를 몰랐지만, 그들에게 잡혀 하잘 것 없이 죽는 예수는 알았다. 알았으므로 이겼다. 예수는 어떻게 알았던가? 씨알의 자리에 서기 때문이었다. 씨알은 씨알이기 때문에 자연 어쩔 수없이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다. 믿는 것이 씨알이다. 하나님과 씨알은 한 실 오리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알이다. 씨알 중에서도 참 씨알이 예수였다. 자기를 가르쳐 아들이라 한 것은 그 뜻에서였다. 올의 아랫 끝이 그저 곧장 윗 끝의 내려오는 대로 무한히 달려 있듯이, 자기주장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인해 하늘 뜻을 그대로 제 뜻으로 삼는 것이 씨알의 자리다.
우리는 못생겼지만 씨알의 자리에 서잔 것이 우리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그」의 뜻을 깨닫도록 힘써야 한다. 중간 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집을 가지지만 집이 우리에게 지상이 아니다. 우리 민족 없이 내가 있을 수 없지만 민족이 우리에게 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해서만 우리가 살 수 있지만 나라가 우리의 지상이 아니다. 지상은 오직 하나 「그이」뿐이다. 나라에 가장 충성한 것처럼 국가 지상이라 하면서, 민족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민족지상이라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그이」의 가르치는 진리 위에 세우려 애쓰던 양심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며 스스로 의를 행하노라 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어디 있느냐? 스파르타는 망하고 소크라테스는 오늘도 살았다. 로마제국과 그 군인들은 망하고 에픽테터스는 살았다. 나폴레옹과 그 제국은 거품으로 사라지고 자유는 살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그 독가스와 한 가지 없어지고 신앙은 본회퍼와 더 불어 부활되지 않았느냐? 레닌의 벗어진 머리는 점점 퇴색이 되어가지만 톨스토이의 그 깊숙한 뚫어보는 눈은 더욱더 빚을 발한다. 집도 민족도 나라도 세계도 문명도 그리고 우주 만물도 그「뜻」에서 나왔다. 그 뜻 없이는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옳음이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 비상시 명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요, 그 목적은 이 민족의 양심을 다듬자는 데 있다.
이 명령을 전달하는 대통령이 아무 사사 생각도 고집도 없이 맑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 뜻을 전하자는 마음에서 했다면 나라와 세계를 위해 다시 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국민의 자유를 구속하여 그 양심의 자유를 막는 일이 있다면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씨알은 또 씨알대로 제 자리를 잘 지켜 그 명령의 속뜻을 바로 파악해서 각각 제 양심을 살려내야 한다. 만일 씨알이 양심이 죽어 먹을 것에 끌리고 채찍에 몰리는 짐승과 다름이 없어진다면 나라는 서갈 수 없다.
中 正
앞을 내다보잔 것은 가운데를 걷기 위해서다. 동으로도 서로도 남으로도 북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똑 바로 가운데를 걸어야만 앞날을 가질 수 있다. 길은 앞에만 있기 때문이다.
발을 가지고야 걷지만 발이야말로 언제나 빗나가는 물건이다. 발은 눈에 복종해서만 잘못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러나 그 눈은 또 믿을 수 있나 하면 그렇지 않다. 한 순간을 가만 못 있고 회회 돌아가는 것이 눈알이다. 그러므로 바로 보려면 될수록 먼 목표를 정해야 한다. 눈 위를 걸어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도 북극성에 가 본 사람이 없으되 북극성을 정확히 바라고 나가서만 모든 방향을 압 수 있다. 북극성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는듯하지만 생각하고 보면 걸음마다 걸음마다가 북극성의 실현이다. 하나님도 그렇고 진리도 그렇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허황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확실하다. 그리고 누가 옳았느냐의 판단은 눈 위의 발자국을 보듯이 역사를 커다랗게 굽어보면 환하다. 아무리 현실주의자라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아마 양 쪽을 다 실망시키는지 모른다. 정부는 정부대로 그 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는다 해서 미워하고 반대편에서는 또 그들대로 내가 정부를 철저히 공격하지 않는다 해서 싫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이편도 아니요 저편도 아니다.
나는 아마 사회 편에서도 종교 편에서도 배척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편에서 보면 너무 종교 냄새가 난다하고 저편에서 보면 쓸데없이 정치에 관여한다 할런지도 모른다. 그것을 다 알고 있지만 나는 이편도 저편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사방에서 협잡꾼이란 말을 들을지 몰라도 그 어디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부족을 천도 알고 만 도 알면서도 내가 협잡꾼이냐 아니냐는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고 비평 비난이 와도 될수록 상관 말고 내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올의 끝을 잡아 직접 해결하고 싶다.
나더러 반정부라 해도 정부 편이라 해도 다 모르는 말이다. 나는 형편없이 부족하고 잘못이 많기는 해도 내 바리는 별은 정치보다는 높은데 떠 있다. 어리석은 헤롯의 꾀에 걸려 내 가 본 역사의 비밀을 팔아먹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바치는 예물로 진리의 왕을 사잔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찬가지 지나가는 길손이요, 올 때도 갈 때도 내 가는 길의 표준은 별에 있다.
희미는 하지만 그 별 빛에 비쳐 볼 때 사람은 제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붙잡혀 졌기 때문에, 사람을 미워해서 하는 것 아니지만, 사람에겐 복종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복종 아니하는 것이 그들 사랑함이다. 헤롯 궁을 찾아간 것이 그에 복종함이 아닌 것같이 몰래 딴 길로 간 것이 그를 미워서 한 것이 아니었다. 헤롯의 나라 내놓고 하늘나라가 또 따로 있는 것 아니기 때문에 거기 가서야 그 나라 임금의 난 곳을 알 수 있었고,그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니 알리는 것이 헤롯 나라를 아끼는 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내 일도 그런 식이다.
사람이 제하는 일을 모른다는 말은 세상 모든 일에 두 가지 뜻아 들어 있다는 말이다. 현실적인 의미, 또 정신적인 의미. 그러므로 정치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씨알은 지혜로와야 한다. 명령하는 사람은 터럭만큼이라도 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되고. 명령을 듣는 사람은 겉으로만 들어서는 아니 된다. 과일 중에 사과 같이 그대로 먹을 것도 있지만 밤 같이 험한 껍질을 벗긴 후에야 먹을 것도 있고 심하면 한번 삶아서 그 독즙을 뺄 후에야 먹을 것도 있듯이, 정치의 일도 그렇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세웠다는 말을 잘못 받아서는 아니 된다. 말대로 받을 것 있고 생각해서 받을 것 있고 싸움으로 받을 것 있다. 그것을 깨달아 구별해서 하는 것이 정말 지혜요 정말 사랑이다.
그럴 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양심의 권위에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양심을 죽여서는 아니된다. 인간 세상에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고 다만 하나 양심이 확실할 뿐이 다. 오른 손이 그 배운 재주는 혹 잊을 수 있고 동물의 본능은 혹 실수하는 일이 있을 런지 몰라도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은 변함이 없다. 어느 때 강제로 누르면 눌릴듯하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다시 살아나고야 만다.
물론 양심도 자라는 것이지 첨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그 지식적인 내용이지,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그 권위는 아니다.
하여간 믿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 그 인간 사이에 믿음이 성립되는 것은 오르지 이 “가늘고 고요한”양심의 소리 하나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양심이 한번 그 권위를 잃는다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 사회의 모든 구조가 마치 중력권을 떠난 때의 물체마냥 왼통 뒤죽박죽이 돼버릴 것이다.
집을 이루는 것도 양심이요, 사회를 성립시키는 것도 양심이요, 나라를 서게 하는 것도 양심이다.
이성계의 나라가 서간 것은 정도전이나 태종 따위 때문이 아니라 이색 정몽주 최영이 죽으면서 피로 뿌려 씨알의 가슴 속에 살렸던 양심 때문이요, 세조 같은 것이 감히 임금질을 해 먹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정인지 신숙주 따위 때문이 아니라 육신(六臣)이 죽음으로써 선비의 가슴 속에 살려준 양심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세조 자신이 일생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지 않았나? 그만이라도 했으니 나라가 남아 있을 수 있었지, 천하 사람이 다 김종서를 칼로 치던 때의 수양대군 같은 것들이었다면 민족의 씨도 못 남았을 것이다. 제발 비노니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모든 호화를 다 맘대로 해도 국민의 양심만은 짓밟지 마라. 또 미워서 죽이고 싶거든 죽여도 좋지만 하나만이라도 살려 두어 종자로 삼아라. 아니다. 너희게 부탁할 것 있느냐? 양심 그 자체가 할 것이다. 아무리 잘 죽여도 양심의 뿌리는 뽑을 수 없을 것이다. 칼날은 썩는 날이 와도 돋아나는 풀뿌리에는 변함이 없다.
감히 큰소리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어야 할 일이지만, 내 소원인즉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양심을 살리기 위해 죽는 데 있다 죽는 댔자 양심은 내 것이 아니라. 전 체의 것이요 하늘 것이다. 고마운 것은 사람이 악해도 그 낳는 자식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난다. 한 사람이 능히 죽으면 너희 자손이 그것으로 사람노릇을 하고 살 것이다.
분명히 귀에 불고 말한다. 비상시가 온 것은 하나님이 민중 속에 중정(中正)의 양심이 살았나 죽었나 보시기 위해서 한 일이다. 양심이 살았으면 너희 미래가 있을거다 죽었으면 없다! 망상하지 마라. 양심 없는 짐승 무리를 몰아서 공산군을 무찌를 수 있을 거라고. 진화의 과정에서 짐승은 지고 사람이 이긴 것을 부디 잊지 마라 너희 발뿌리 앞만 보지 마고 눈을 크게 떠 먼 앞을 내다 봐라. 땅을 드려다 보면 발 밖에 뵈는 것이 없지. 발은 짐승의 발이나 사람의 발이나 다름이 없이 뵐거다. 그러나 머리는 시람의 머리와 짐승의 머리가 다르고 그 눈은 더욱 그렇다. 사람의 눈 속에서 하늘빛을 못보고, 때리면 쫓겨 가는 짐승의 눈치만 보는 것은 사람대접 아니하는 죄 값이다. 너희 속에 인격을 대접하는 마음을 일으켜라. 간데마다에서 네 스승과 동지를 발견 할 것이다. 그때에 온 천하가 다 네 친구인데 비상시가 소용 있느냐?
문을 꽉꽉 닫는 겁쟁이게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칼날 같이 무섭지만 넓은 벌판에 서서 가슴을 헤치는 사내에게는 동·서·남·북의 바람이 다 음악이다. 문틈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원수로 알지만 사실은 그 아니면 너와 네 온 가족이 질식해 죽었을거다.
아, 하늘 진리 참 시원하구나!
서로 짓밟는 무리
거리에 나갈 때마다 나는 예수와 그 시대의 유대 나라 생각이 난다. 복음서에 의하면 그가 가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하고, 그 광경을 보고 예수는 어떤 때는 목자 없는 양 때로 비유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곡식이 다 익어 가을하기를 기다리는 상태로 말하기도 했다. 그 혼잡이 얼마나 심했던지 누가 12장에는 서로 짓밟을 정도라고 했다.
이것은 꼭 오늘 우리나라의 모양 그대로다. 이제는 종로나 세종로나 명동만 아니라 저 변자리에 가도 서로들 짓밟고 있다. 그럼 그 원인이 무엇인가? 둘에 공통된 현상이 있다면 거기 공통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을 비교하며 생각할 때 그것을 하나의 말세 현상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 가 극도로 썩어진 데서 나오는 어지러움이다.
사람은 그 천성이 본래 안정하려는 것이지 떠돌아다니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은 원시인이 떠돌아다니기를 그만두고 한곳에 안정해서 살기를 시작한 때 부터였다. 일함도 쉬고 즐거움을 누림도, 다 제자리를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생긴 것이 집과 길이다. 사람은 집과 길을 가지는 물건이다. 마음 놓고 먹고 자고 일하고 놀 수 있는 집과 마음 놓고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없이는 사람노릇 할 수 없다. 평화의 시대란 그 두 가지가 다 있는 때요, 난세란 그 둘을 다 얻기 어려운 때다.
유대 나라 말년도 그러한 때요 오 늘 우리시대도 그러한 때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우리나라 서울처럼 혼잡 한 곳은 없다. 정말 서로 짓밟고 있다. 서로 짓밟는다니 서로 사람대접 하지 않고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사는 살림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회에 어딘지 근본이 잘못된 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럼 그것이 무엇일까? 다른 것 아니요 힘 센 자가 한없는 제 욕심을 채우려 남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마구 빼앗기 때문이다 본래 정치 란 것은 그것을 금하자는 것인데 정치 자제가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어지러워 질 수밖에 없다 종로 길거리에 그 무리의 한 사람으로 섞여 밀려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너도 나도 인간이 못되누나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맹자도 그래서 2천 년 전에 탄식했을 것이다.
“인(仁)은 사람의 평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올바른 길인데 평안한 집 비어두고 있지 않고 올바른 길 내버리고 걷지 않으니 슬픈 일이로구나”
했다.
내버려두고 아니한다 했지만 그 책임은 주로 정치에 있다. 권력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넉넉지 못한 것을 가지고도 골고루 살 수 있고, 그러면 힘을 하나로 모아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데,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의 불평이 생기고, 그 불평을 그냥 두면 자기네의 권력구조가 무너질 것 같아 언론을 압박하고, 그러면 불평이 점점 더 커지고, 그러면 탄압이 더 심해지고, 그러다가 그 극도에 달한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이마를 서로 부딪치며 발등을 서로 밟고 지나가는 무리들, 결국 다른 것 아니고 먹을 것 찾고 놀 곳 찾아 헤매는 것들이다.
화려한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보면 어리석게 뵈겠지만 그것이 어찌 그렇게만 볼 것인가? 원인을 만들어 놓고 법을 엄하게 해서만 그것을 막자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다.
서로 짓밟음이 극도에 달하면 양심이 죽어 버리고 짐승의 무리가 돼 버린다. 그런 무리를 가지고 나라는 못 한다. 피난민의 무리를 순경 헌병으로 교통정리를 하려면 되던가? 전쟁을 그만둬라, 그러면 교통정리 저절로 된다. 민중은 본래 질서를 원하는 것이지. 혼잡을 원치 않는다. 혼잡을 일으키는 것은 일부의 힘센 자들이다. 그 힘센 자를 억제하잔 것이 정치지, 힘 센. 자들끼리 짜고 들어 민중을 마구 짜먹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가 그 어느 편이냐는 눈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여라. 나라 안에서 서로 짓밟는 무리를 제 자리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밖에서 오는 대적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을 하지만 집을 잃고 길을 잃어 서로 짓밟기 시작한 무리는 법과 폭력으로만은 절대 헤치지 못한다. 정말 강행하면 다 죽고 남는 것이 없을 것인데 그때 누구를 시켜 공산군을 막느냐?
나라를 망치는 누룩
서로 짓밟는 무리를 건지는 유일의 방법은 양심을 살려내는 일이다. 우선 지배자의 양심 을, 그리고 민중의 양심을. 민중은 본래 양심적이다. 양심을 어기지 못하기 때문에 민중으로 있고 길가에 헤맨다. 짓밟으며 헤매는 것은 사실은 양심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마다 뭐라던가? “이놈의 세상 양심대로 하고는 살 수 없다” 하지 않던가? 지배 계급은 그와 반대로 남의 몫을 뺏아 호강하면서도 자기는 양심대로 했거니 하고 있다. 양심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비상시의 문제의 중심은 애매한 민중에 있는 것 아니라 특권 계급에 있다. 특권 계급은 특권 계급이라는 그 명사를 들으면 불쾌를 느끼고 분노를 발하겠지만 제발 나라를 위해 참는 마음으로 반성하기를 바란다. 토끼 종자가 없어지면 여우 혼자만은 살수 없지 않은가? 잡아먹어도 멸종이 될 정도로는 아니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서 어진 일이다.
이점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가 났을 때 세상은 극도로 타락했고 민중은 숨이 막혀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민중을 보고 “우리가 노래를 불러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슬픈 소리를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했고, “무엇하러 빈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운 옷 입은 사람들이냐?”고 애소하기도 했다.
그러다 못해 그는 한 끝 각오를 했다. 그 각오란 곧 자기가 죽으면서라도 그 문제의 핵심을 폭파해 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악한 세대가 기적을 찾지만 아무 기적도 줄 것이 없고 오직 예언자 요나의 기적뿐이다”라고 했다. 요나가 한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을 보고야 니느웨 사람이 회개했던 것같이 자기 시대도 양심이 극도로 마비됐기 때문에 그 이하의 것을 가지고는 아니될 것을 알아서 한 말이었다.
그래서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공격의 표어는 “외식하는 자”라는 말 이었다.
외식이란 안팎이 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제나 타락된 시대의 특징은 그 이중성격에 있다. 정치도 종교도 다 이중적으로 돼가는 것이 썩어진 사회의 특징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다. 그러나 내용은 아니다. 내용이 민주주의가 아니면 제도를 아주 고쳐 버리면 좋을 듯한데 그렇게 아니 한다. 아주 고쳐 버리면 아니될 것이 이 시대의 대세인 줄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신문사를 없애지는 않는다. 그러나 뒤로 압력을 가해 언론의 자유는 없이 한다. 모두 이런 식이다. 종교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권력주의가 허락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하나님만을 부른다. 그러나 국가권력 앞에 가면 그것으로는 통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에 "국가 있고야 종교 있다”고 아첨을 한다. 그때에 말의 협잡이 있다. 참 의미에서 나라와 종교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와 정부와는 서로 딴 물건인데 정부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 동안에 그것을 서로 일치시킴으로써.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이중인격을 놓아서 하늘나라의 영화와 이세상의 영화를 다 차지하려 한다.
예수는 물론 그렇게는 못한다 했고, 그 때문에 반역자로 몰려 죽으면서 양 쪽에 다 충성을 했지만, 오늘의 종교는 예수보다도 더 영리하게 하잔 것이 그들의 속셈이다.
누가 12장의 말이 중요하다. 그는 서로 짓밟는 무리를 보고 먼저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바리새파의 누룩 곧 외식을 삼가라’’고 했다고 적혀 있다. 외식은 위에서 말한 안팎이 서로 다르게 하는 정치와 종교인데 그것을 왜 누룩이라 했나? 나쁜 사상은 누룩처럼 번져서 속을 썩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말한 것이다. 바리새파는 그때의 집권당이었다. 정치 종교 정교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수는 징치하잔 목적은 아니었고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럼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나 하
면 그렇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애끊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민중의 양심이 썩어버리는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바리 새 사람들이 뵈는 유대의 집권자였다면 예수가 골라 세운 그 제자들은 뵈지 않는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이었다. 운명은 뵈는 데 있는 것 아니라 뵈지 않는데 있다. 하나는 속이요, 하나는 겉이다. 겉은 썩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속은 썩으면 아주 망한다.
그래서 그 위기를 보고 제자들에게 깨우쳐준 말이었다. 말하자면 예수식의 비상시 선포였다. 이 세상 권력주의의 비상시는 사람을 강제로 묶어서 일으키려 하지만 정신의 나라에서는 그와 반대다. 사람의 마음을 살려서 자유하는 양심의 힘으로 일으키려 한다.
이중주의를 쓰는 것은 결과주의 때문이다. 권력주의는 정신을 모른다. 그들은 철저한 물질주의다. 이른바 “자 우리가 먹고 마시자, 우리가 내일을 모른다” 식이다. “죽으면 다다”하 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결과를 누리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권력주의에 참 의미의 나라는 없다. 나라는 사람이 나 밖에 남, 이제 밖에 이 다음을 아는 데서만 나올 수 있다. 철저한 권력주의는 먹을 대로 먹고 권세를 부릴 대로 부리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결과를 가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속일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속이고 억누를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억눌러도 좋다는 것이 그들의 정치 철학이다.
종교가 만일 그 누룩에 전염이 된다면 사람의 속의 세계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외식의 누룩을 삼가라고 하고는 말을 이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것이 집 위에 전파되리라”
했다. 이 말은 공자의 말과 댓쪽 같이 합한다.
막견호은(莫見乎隱),막현호미(莫顯乎微), 고군자신기독야(故君子愼其獨也)
댓쪽 같이 서로 합하는 것은 그것이 참이요 그들의 깊은 체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신문에 발표 못 하도록 압력을 가해서 억울하게 살아져 버린 일들이 다 청천백일 아래나 오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요, 지금 책으로 낼 수 없고 강연으로도 할 수 없어 만나면 서로 쓴 웃음으로 주고받는 것도 다 넘치는 강물처럼 외쳐 질 때가 있을 것이요, 다행히 잘 해 먹고 평안히 죽은 줄 알았던 압박자
들이 지옥에서 목이 타 제가 짐승처럼 학대했던 씨알에게 한 방울 물을 애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지옥이 어디 있냐? 끝없이 영원히 있어 역사를 메는 씨알의 가슴 속에 있다.
두려워 마라
역사를 지켜 갈 정신적 핵심 분자의 할 일은 압박 밑에서도 양심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을 증거하기를 끊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법은 멀 고 주먹은 가깝다. 물질의 나라는 보이는 데 정신의 나라는 볼 수가 없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는데 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인류의 역사 있은 이래 이 양심 때문에 쉰 한숨은 얼마며 홀린 눈물은 얼마일까? 만일 주먹을 휘둘러 어린 동생을 때려죽이고 번듯한 얼굴을 들려하던 가인만 이었다면 역사는 훨씬 더 쉬웠을런지 모른다. 모른달 것 있느냐? 짐승의 세계가 보여 주고 있다. 무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역사냐? 아, 이 역사란 것은 뭐냐? 데모 했다가 매 맞고,끌려가서 전기 불에 고문당하고 와서 울며 호소해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는 이 역사는 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내 모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고생을 하면서도 사람은 무시해 버릴 수 없는 어떤 가늘고 고요한 소리를 제 깊은 속에 듣는다는 일이다. 어린 동생 죽이는 것이 가인이기도 하지만 또 에덴 낙원을 그대로 놓고도 거기 못있고 산으로 바다로 땅 끝까지 헤매는 것이 가인이다. 가인(假人)이냐, 가인(可人)이냐? 가인(苛人)이냐? 가인(佳人)이냐?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인 담엔 죽음 이 문제 아닐 수 없다. 아니들으면 죽이는데 어떻게 하나? 그 줄을 알기 매문에 제자를 내보내며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떼를 이리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참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참아 못할 일이지만 차마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첫 참아는 짐승으로 건지겠지만 둘째 참아는 사람으로 건진다. 어려운 시대, 사람의 목숨을 풀같이 아는 난세에 양심을 지키라 명령을 할 때 보통 마음으로 했을 수가 없다.
“내가 내 친구인 너희게 말 하노니…”
하는 그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어떻게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내 친구여”하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거짖이 있겠는가? 그것이 만일 거짓이라면 세상에 예수처럼 악독한 놈은 없을거다. 아무 결과도 얻음이 없이 사람을 죽을 데로 몰아넣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죽으면서도 그 명령을 따르니 참 아닌가? 그러나 참인 줄 알면서도 어찌 그리 지키기가 어려운가? 문제가 바로 거기 있다. 겉만을 보고 속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정부만 보고 나라를 보지 못하며, 나라만 보고 나라를 세우는 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칼에 맞아 떨어지는 모가지뿐이지만, 눈 아닌 눈이 열려 속을 보면 목이 떨어진 후에도 그 잘라진 목을 안고 하늘로 가나 지옥으로 가나 두 길이 갈라져 있다. 그 눈이 열릴 때 세계는 바뀌어 버린다. 이 세상의 권력자란 것은 참새 한 마리 머리털 한 오리도 제 맘대로 떨어뜨릴 힘이 없고 오직 참 생명의 권세를 쥔이가 무슨 필요가 있어 한 때 허락해둔 것 뿐 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그럴 때 자연 감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에 두렵던 것이 두렵지 않고 전에 기연 미연 하던 것이 흐리터분하지 않고 햇빛 같이 환해진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 같아질 수 있다.
믿으면 있다 믿지 않으면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이 참인지 헛된 것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증 거
그러므로 이기는 길은 더 강한 무기를 만들고, 더 엄한 군율을 세우고 더 독재적인 법을 만들고, 더 취체를 심하게 하는데 있는 것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기를 서슴지 않는 정신을 기르는 데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깨칠 수 없는 법칙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 줄수록 국민은 강해지고 사람대접을 아니 할수록 약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때에 뜻있는 사람의 할 일은 공공한 증거를 하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려우니만큼 필요한 일이다. 양심은 양심에 의해서만 살아난다. 거증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일을 기억 레야 한다.
하나는 씨알 속에 자고 있는 양심을 깨워 일으키는 일이고 하나는 압박자의 속에 자기가 일부러 죽이고 있는 양심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오직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된다. 많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자기 양심의 자유를 지킨다는 생각에 정의의 싸움의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 한데 있으려 하지만 그것은 망상이다. 양심은 혼자서는 못 살린다. 양심은 본래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깨끗한 듯하나 망하는 전체를 능히 잠잠히 보고만 있을 때 그 양심은 벌써 죽은 것이요, 악을 행하는 자를 이미 소망이 없는 것으로 단념하여 버리고 말 때 또 스스로 죽은 것이다. 양심은 공공하게 증거 함으로만 살아난다.
세상 일이 지금 모양대로 돼간다면 결국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같이 극점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하지 말라.”
했다. 잡아갈 때 죄목은 물론 반국가요 반민족일 것이라. 도덕 없이 나라가 서가지 못하는 한 양심을 위해 악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결코 반국가 반민족이 아니지만 권세를 잡은 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몰아친다. 참 의미의 애국이 아닌 자기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예수도 그렇게 박해 당했고 역사상의 허다한 의인들이 그렇게 비난을 당했다. 오해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해 받기를 꺼려, 가만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일이요 정의의 법칙을 없다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오해 받을 줄 알면서 도 시비는 하나님이 가려주실 것을 믿고 제 믿는바 대로 공공한 증거를 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려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씨알이 그것을 깨달아 역사상에 밝혀지는 날이 올 것을 확신하는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네 집에 식구가 네 원수이리라 하는 말은 이 의미에서도 받아져야 할 것이다. 외국의 악법을 내가 아무리 비평해도 그 외국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제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제 나라가 제 국민을 가장 미워한다는 것은 모순이면서도 사실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악법을 반대해 증거하는 자를 그 정부를 미워하고 너머뜨리기 위해 한다는 것은 길거리에 수두룩한 정치인들의 하는 깊이 없는 소리요, 양심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진정한 애국자는, 불의의 값을 내 몸에 달게 받음으로 인해 저쪽의 속에 쭈구리고 있는 양심을 살려내기 위해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 변하면 지독한 원수가 되듯이 원수인줄 알았 던 속에 양심이 깨어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이 아마 놀라울 것이다. 아쉰 것은 히틀러가 회개를 하고 새 독일 건설에 못 나섰던 것이다. 아니다, 외형으론 아니 됐으나 멸망했던 독일 위에서 새 독일이 기적적으로 일어난 데는 완전은 못되더라도 그래도 어느만큼 회개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이북 정권이라고 못할 것 있느냐? 하물며 민주주의 깃빨을 드는 이 정권에서 겠느냐?
앞으로 오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은 인류 역사가 새 시대에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국제적이라는 말도 낡아 버렸고 세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되어가고 있다. 지난 날 에 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개인이 죽음으로써 양심을 지킬 필요가 있었듯이 이제는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개체 국가가 희생이 될 각오를 하면서도 인간양심을 살려야 하는 때가 왔다. 도덕이 아직 개인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개인으로는 높은 덕을 나라 전체에 적용할 때는 반대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현대의 정말 문제는 여기 있다. 이제 인격은 결코 개인 안에만 국한될 수 없다. 어느 개인도 참 인격적이 되려면 전체 사회를 무시하고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날껏 몇 천년 동안 개인에서 실험해서 얻은 도덕적 진리를 이제는 그대로 전체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개인에서 자기 회생이 높은 선이면 민족 국가에서도 그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날까지는 그렇지 못한 데 문제가 있다. 개인으로는 겸손이 덕인 줄 알면서도 국가적으로는 자랑 하고 거만을 부려야 잘하는 일인 줄 아는데 현대 도덕의 약점이 있다. 이제 도덕을 정말 살리려면 국가적으로 겸손해지지 않고는 될 수 없다. 생각 해 보라. 모든 약소 후진 국민을 어떻게 할터인가? 시대가 이미 약소국 무시하고는 강대국자기네도 살수 없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표면으로는 대접하는 듯하나, 내용으로는 아직 옛날의 습관이 남아 있어 그대로 실행하지 않는다. 모든 국제적 분쟁은 하나로 묶어 이 모순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 오늘의 국가관이 달라져야 하고 도덕관도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는 시기는 언제나 회생 없이는 아니된다. 싸움은 언제나 제3의 인격이 나와서야 해결되는데 그 제3의 인격은 곧 자기희생을 하는 인격이다. 그러지 않고 자랄 수 없다. 자람은 언제나 비약이기 때문에 자기희생을 해서만 새로 높은 단계의 생명이 나온다. 개인이 자기희생을 해서 제 나라의 양심을 살리는 것이 진리였다면 마찬가지로 개체 나라가 자기희생을 하여 전체 세계를 살리는 데 가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 산다는 것은 역시 진리다.
나는 살리되 남은 못살리는 것이면 진리가 아니다. 남이 내게 대해 그렇게 말할 때 무엇으로 대답하겠나? 진리는 너와 나에게, 모든 사람에게 다 권위를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나만 아니라 너도 누구도 살 수
있는 길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공산당은 다 죽여 버리자는 말이야 누가 못 하겠나? 그러나 공산당 편에서 꼭 같은 말을 할 때 무엇으로 이기겠나? 이제 남을 살리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는 단계에 왔다. 옛날에는 이것이 천재적 성인들의 이상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 됐다. 인류는 그만큼 자랐다. 이제 이것을 실천 못하는 것은 주로 지난날의 전통적 정치주의 자들의 감정 때문이다. 요새이 세계 정국 이야말로 그것 아닌가? 지난날 오만한 제국주의에 젖은 머리로서 그들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세 앞에 할 수 없다. 어렵다면 참 어려운 시대지만 상쾌하다면 참 상쾌한 시대다. 소련의 지난날의 횡포가 어디 있나? 중공이 왜 그렇게 누그러지기 시작하나? 야심은 있으면서도 일본이 왜 그렇게 점잖은 체 하려나? 미국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코를 낮춰가며까지 고민 하나? 뭔지 모르게 전체가 명령하고 내몰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화론을 내세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울 모양으로 “나로 하여금 잠깐 어리석게 자랑하게 하라.” 역사의 앞을 보는 데 내가 누구 보다 못하지 않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 데 뒤지고 싶지 않다. 공산당을 아는 데서 결코 못하지 않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평화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내 머리 위에 별이 일러주는 것이 있기 매문이다. 미우면 내 목을 가져갈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내 양심은 어떻게 못할거다. 장차 오는 날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날을 위해서는 나는 감이 우리나라가 희생 될 각오를 하면서라도 인류의 양심을 살리기 위해 증거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누가 아느냐? 이날껏 五천년 역사에 이렇다 한 공헌을 하지 못하고 실패와 모욕의 길만 걸어온 우리가 이제 그 모든
빚을 단번에 다 물고 이때까지 어느 민족이 했던 것보다도 더 큰 공헌을 이제하게 될런지!
겉으로 가장보잘 것이 없는 것은 정신으로 가장 고귀한 것을 다듬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남의 쓰다가 다 떨어진 감투를 집어 쓰며 자랑으로 아지 마라. 국가주의가 그것이다.
모든 폭력주의를 물리쳐라!
분명히 외친다. 국가의 힘을 가지고도 개인의 양심을 억눌러서는 죄악 이다.
씨알의소리 1972.1월 8호
저작집30; 8- 47
전집20; 8-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