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 크게 유행되는 인사말이 “안녕들 하십니까?”입니다. 어느 대학생이 자신의 대학 게시판에 대자보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과 함께 현 사회의 문제점과 이슈를 적어 붙인 것입니다. 그 말에 공감이 가서 수 백 개의 대학교 대자보로 옮겨갔고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어느덧 정치, 사회, 경제,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사회 풍자의 인사법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가 어지럽고 힘든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철도 파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직위해지가 되고 대학생들의 취업은 점점 어려워 취업 재수생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합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경쟁은 일 년이 되도록 끝나지 않고 있으며 경제는 수출이 호조된다고는 하지만 실물 경제가 살지 않아 다들 어렵다고 합니다. 북한의 문제는 우리에게 국가 안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 닿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우리가 살아온 사회는 지금까지 늘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안녕하십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 같습니다. 모든 나라의 인사말이 비슷하지만 다른 나라의 인사말의 뜻은 감사하다. 좋다는 뜻에 비해 우리나라의 인사말은 진한 인생의 고뇌와 시련의 잔재가 묻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살아왔지만 우리는 아직도 안녕할 수 없는 것이 문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국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속에서 살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문제의 삶을 해결하고 참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법에 대해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환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운 삶과 문제 속에서도 안녕할 수 있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난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1-4)
다윗은 목동으로서 척박한 사막에서 문제투성이의 삶을 살지만 주님을 마나 인도함을 받으면서 진정한 인생의 안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려운 갈등 속에 살고 있는 요한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살아온 요한의 두 제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이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니 그를 좇던 제자들은 참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니 요한이 그가 주님이라고 알려주고 그를 따르게 합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요 1:36-37)
그들은 예수를 좇으며 메시야를 만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외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참 구원과 참 안녕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진정한 성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 1:40-41)
메시아를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인생의 문제는 세상의 것으로 구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기 위해 나를 찾았느냐? 고 묻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고 이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필요를 구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더, 더, 조금 더, 조금 더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필요를 구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무엇을 구하고 소유해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자신들의 재산 분할을 놓고 싸우다 주님께 나와 형과 동등하게 재산을 나누어 주도록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4-15)
절대로 인간은 소유로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없고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은 더 교만해지고 더 죄를 짓게 되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두 번째, 인간의 문제는 주님을 만나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속에서 해결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8-39)
요한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찾아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나이까?” 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해 주기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신의 필요를 대답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물질의 필요 때문에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영적 통찰력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라.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의 삶이며, 문제 해결의 길이며, 안녕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9)
결국 그들은 주님께 무엇을 얻어서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 임마누엘로 “우리가 메시야(그리스도)을 만났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 1:40-41)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 베드로에게 전도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성탄이 이루어진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길을 찾고 남에게도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도 만족하지 못했던 수가성 여인은 안녕치 못한 인생을 살다 주님을 만나 물동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한 후 세상 사람에게 외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8-29)
세 번째, 인생의 문제는 주님을 만나 주님의 시야로 바뀌어야 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
안드레가 베드로를 전도하여 주님께 데리고 갑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본 후 네 이름은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갈대와 먼지라는 뜻이 있고 게바는 베드로 반석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이 내 속에 사시므로 우리의 시야가 부정적에서 긍정으로, 세상적 사고가 영적으로, 나 중심의 교만한 마음이 주님 중심의 겸손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실수 많은 베드로는 주님의 시야를 가지고 사니 주님의 수제자로 반석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계에서 존경 받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대하여 전해오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9살 때 어머니를 잃고 대단히 소심하고 우울한 부정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새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링컨의 사고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새어머니는 링컨의 부정적 사고를 하나님의 사랑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링컨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링컨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god love lincoln" 이라는 글씨 위에 꽃씨를 뿌린 것입니다. 링컨에게 꽃밭에 물을 주어 잘 가꾸라고 합니다. 어느 덧 꽃이 피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링컨을 사랑한다는 말이 씌어 있는 것입니다. 링컨은 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이고 가난했던 링컨이 긍정적이고 부요한 마음으로 대통령까지 되고 노예해방을 한 인류의 위대한 업적은 남긴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시야를 가져야 승리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주님을 모시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