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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 (성령론5)
롬 8:26~28, 엡 6:17~18 I.
기도의 시작 : 아빠 아버지
우리나라에서 전화기가 처음 사용된 건 1896년 10쯤이었습니다.
궁궐 내부의 3대, 그리고 정부 7개 부처에 각 1대씩, 인천과 평양에 각 1대 12 대가 개설되어 졌습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대개 임금이었지요.
업무 지시를 전화로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전화기에 네 번 큰 절을 올립 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전화기를 귀에 대면서 엎드립니다.
그러면 임금이 업무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처음으로 우리 동리 동장 집에 개설되는 전화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동리에 한 대씩 국가가 전화기를 개설해 주었지요.
그러면 어느 집에 전화가 오면 이따만한 스피커가 달려있는 마이크를 붙들고 동장이 알립니다.
우리 집에 전화가 오면 “새말댁? 새말댁? 전화왔어요∼ 전화 왔어요∼”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버선발로 달려갑니다.
달려 가면은 3분이 지나요. “전화가 끊어졌네요” 이게 우리 동리 전화였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진화된 전화 한 대를 소개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전화기는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저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와이파이도 필요 없고요,
통화 중일 때는 절대로 없습니다
부재 중이거나 전화를 안 받는 일도 없습니다.
이 전화기 값이 얼마나 할까요? 공짜폰입니다.
아무리 자주 오래 통화해도 사용료가 없습니다.
이 전화기는 삼성이나 애플, 최신 종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전화기입니다.
이 전화기의 이름은 made in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에서 만들어진 하나님과의 직통전화, 기도입니다.
이 전화기는 자주 할수록, 많이 할수록, 기가 막힌 응답, 기가 막힌 선물을 받게 되지요.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 부르면 그게 기도의 시작입니다.
저는 어릴 때 다른 애들처럼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없이 자라는 저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 제겐 그것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기도꾼으로 살 수 있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므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엄청난 복을 받게 되는게 그게 바로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의 복입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마지막까지 제가 믿지 못했던 한 구절을 기억하시죠?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제가 못 믿던 이 말씀을 어떻게 그토록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4장 12절 다음 어떤 말씀이 나올까요?
모든 성경에 12절 다음엔 13절이 나옵니 다. 귀한 진리죠?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이 나올까요?
13절 다음엔 14절이 나옵니다.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4절 다음에 어떤 말씀이 나올까요?
15절 넘어 16절에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이 얘기는 내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정의가 가능해졌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 로 확인을 받는 겁니다. 참 쉽죠잉? 이게 기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기막힌 전화기가 고장이 나 있습니다.
교회 와서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도를 모르는 사람은 영적 가난뱅이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통화, 기도를 할 때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있습니다.
세상을 내 뜻대로 조정하는 게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 안에 세상욕심, 자기 요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 해라!입니다.
기도에서 정성이나 열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되는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자녀로써 아빠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엔 한계가 없다”는 이 말에서 엑센트는 “한계가 없다”에 있는게 아니 라 “성령 안에서”입니다.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성령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론 다섯 번째 시간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입니다.
II. 우리의 연약함들 오래전 상영된 “Bruce Almighty” 브루스 올마이티 – 전능자 브루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늘 무시만 당하던 천덕꾸러기 브루스가 7일동안 하 나님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처지를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의 기도에 Yes 응답을 합니다.
밤마다 자기 는 자야 하니까 메일로 접수를 받고 모든 기도제목에도 Yes 응답을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온 세상은 뒤죽박죽, 폭동, 전쟁의 술화통이 됩니다.
가령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권1등 당첨되게 기도했는지 복권1등 당첨이 되지 만 단돈 상금이 20원입니다.
그리고 시집가게 해 주세요, 장가가게 해 주세요. 누구랑?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임영웅 결혼식날 여자가 수만명 입니다.
원수 죽게 해 주세요?
그 다음날 천지가 장례식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시기에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가장 유익한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나의 보혜사가 되실 때 내게 가장 선한 길이 열립니다.
제가 퍽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남다른 능력이나 권세가 없습니다.
제게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면 저는 큰 실수를, 큰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아버지 원하는 대로 나를 쓰시기에 나는 부요로운 사람이 된 것이고 선한 일들이 성령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 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인지라 무엇이든 모자라도 문제이지만 넘쳐도 문제가 됩니다.
사랑 을 못 받아도 문제요 너무 과하게 받아도 문제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 8:26) 모자람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성령님께 구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연약함”이란 단어가 원문에서는 “연약함들” “온갖 연약함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 연약합니다.
코로나19로 3년 팬데믹을 통하여 인간이 바이러 스 하나 앞에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 절감하지 않았습니까?
골골 80이고 건강을 너무 자랑 해도 안되는 겁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끄럽다고 죽고 억울하 다고 죽고, 애인이 배신했다고 죽고, 1등하던 아이가 성적 떨어졌다고 죽습니다.
죽을 걸 생각하면 무엇을 못하겠어요?
연약함이 자살의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안됩니다. 굳건히 주 안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영적으로 약점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 말의 실수가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 물질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봉사하지 않습니다.
봉사는 많이하는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인 약점없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애인관계, 친구관계, 가족관계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이것 또한 참 연약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말 한마디를 해도 곱게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친구도 멀어지고 애인관계 부부관계도 유리조각 같은 겁니다.
말 한 마디에 쉽게 깨질수 있고 깨지면 서로를 날카롭게 찌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고흐는 젊은시절 광산에서 일을 하며 전도자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옷이 귀하던 때라 물건을 싸던 포장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 다.
등 뒤에 이런 글씨가 남아 있었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취급 주의!” 옷을 입을 때마다 옷을 벗을 때마다 자기 실존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깨지기 쉬운 물건이구나. 취급 주의하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도 깨지기 쉬운 물건 취급 주의! 이게 인간이더라.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 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더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정적으로 받아주십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지고 깨질 것이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령 님이 우리를 브루스 올마이티 – 전능자 브루스로 만들어 사용하지 않습니다.
삼손같은 힘쎈 장수로 만들어 세상을 살게 만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천사로 만들어 의로운 존재로 만들어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연약함 그대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미국의 훌륭한 저술가요 목회자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있습니다.
바른 목회, 정도목회를 하는 목사님이십니다. 저처럼 성령론에 약점을 가진 복음주의 목회자였습 니다.
열심히 목회를 했지만 목회가 벽에 부딪혔습니다. 사소한 문제가 일어났는데 풀리지 않는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목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병에 걸렸더랍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데 성령이 말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라. 그런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걸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성령님을 의지해요. 하나님을 의지해요. 무조건 나를 맡깁니다.
그런데 목회에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병이 나은 것도 아닌데 불안이 사라졌 습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절망이 떠납니다.
낙심이 변화되어 기쁨이 찾아오는 겁니다.
문제도 해결되고 병도 나으면서 그는 말합니다.
“나의 절망이 성령이 역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의 한계가, 나의 막다른 골목이 성령님을 만나는 접촉점이 되었다.”
여러분, 나의 절망, 여러분의 한계, 막다른 골목이 지금 이 시간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님을 만나는 접촉점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III. 도우시나니 지금도 세계 화약고로 불리워지는 중동,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 엘과 중동 아랍국가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6일전쟁이 생각납니다.
300만 이스라엘이 1억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을 단 6일만에 끝내버린 전쟁이지요.
전쟁 발발과 함께 이스라엘 특공대가 아랍권 레이더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여 교신과 정찰 그리고 제공권을 장악하므로 쉽게 끝난 전쟁이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치신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통신 레이 더 기지, 기도 기지가 예리하게 살아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의 기도 레이더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실패의 지름길임을 마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돕는다는 가치는 하나님의 나라 가치에서 대단히 소중한 가치입니다.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 라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6만교회 가운데 대표적인 한 교회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영락교회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락교회엔 한국교회 바른 신학과 목회 그리고 목회자 상의 길라잡이가 되신 한경직 목사님 이 계시지요. 영락교회를 연구한 분들이 한결같이 한경직 목사님 혼자서 이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 곁엔 아론과 훌처럼 목사님의 오른팔, 왼팔을 붙들고 계시던 김응락 장로님 과 최창근 장로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김응락장로님은 6.25때 신의주에서 내려온 교회이니까 모든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피난시키 시고, 장로 한 사람은 남아 주일이 되면 종을 치고 예배당 불을 켜고 예배드리는 한 사람, 홀로 교회를 지키시다 순교하신 분입니다.
피 흘리고 순교한 그 자리에 지금도 김응락장로님 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 최창근장로님은 신의주에서 남한산성까지 한경직 목사님 97세 별세하실 때까지 평생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힘이 되어 드리고 부족을 채우시고 약점을 덮어주시던 분은 최창근장로님이십니다.
교회 안에서도 혼자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도 혼자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사에도 서로 돕는게 소중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면, 성령님이 우리 연약함을 친히 도와주신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도우시는 성령님. 보혜사 comfort라고 합니다. 함께(com)라는 말과 강함(fort)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이 말은 엄청난 파워가, 그 힘이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우리에게는 힘이 나타난다.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구촌에 80억 인구 가운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1과 무한대가 더해지면 그 1도 무한대가 되어지는 것을.... 성령님이 우리 연약함 을 도우실 때에 1은 강력한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할 때 “도운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지난날 모든 구원의 여정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성령님 은 내일도, 성화와 영화의 모든 과정, 천국문앞까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인생의 문제까지도 도와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과 연약함을 도와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성령님은 now & here 바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나를 도우십니다. 이 자리에서 치유하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문제를 거두어가십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안되는 일을 되게 하십니다. 막힌 길을 열어주십니다. 닫힌 문을 열어주십니다.
도우시나니 now & here.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가슴 열고 숨기지 말고 나오시라는 말입니다.
IV. 성령 안에서 기도 :영적 전쟁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도우십니다.
특별히 성령님은 영적전쟁을 치루는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8절은 일반적인 기도와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신약의 교회론 에베소서 결론은 영적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로 구원 받고 구원의 여정을 살아가는 것은 단풍놀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에베소서 6장10절~16절까지 영적전쟁의 전신갑주 즉 완전무장을 하나하나 준비시킵니다.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왼손엔 방패를 들고 오른손엔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붙들고 왼손잡이는 바꿔잡고. 그 다음 이어지는 결론적인 무기가 18절입니다.
18절은 원문에서 우리말 번역에 생략된 “디아”라는 전치사로 시작합니다.
무엇 무엇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앞에 이 모든 무기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칼이 있지만 이 칼이 역사를 일으키려면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적탄이 날아올 때 방패와 흉배가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기도로 단단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가 흔들거리지 않으려면 “디아” 성령 안에서 기도를 통하여 이 모든 승리가 이루 어진다는 겁니다.
성도의 영적인 전쟁은 선택이 아닙니다. 누구나 천국가는 그날까지 치루어야 할 필수전쟁입 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 영적 전쟁 무기로서의 기도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어 백전백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마귀가 아무리 힘이 쎄도 하나님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어떻 게 이길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나 대신 성령이 싸웁니다.
하나님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얻어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훈련시키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나 공격하지 말아라.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있단다.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 마귀를 모르는 사람을 공격하면 모른다.
손에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없는 자들은 힘이 없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영적인 권세가 없는 자를 공격하면 된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항상”이란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해라.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는 겁니다.
“이 성령 안에서” 기도는 어떨 때는 내 힘으로 기도하고, 어떨 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능력이 되느니라. 할렐루야!
저는 일평생 평범한 기도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학을 다니고 청년시절을 보내면서는 너무 가난해서. 첫목회지에서는 너무 어려서. 30대 초반 어린나이에 큰교회를 맡아 갔으니 아는 게 있어야지.
철이 없어서. 개척교회 초기엔 너무 가진 것이 없어서.
지금은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그 일들이 크고 중요해서, 너무 커서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겠기에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아왔던 지난 날 돌이켜보면 신앙고백 연약함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얼마나 부요한 사람입니까?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교회 개척 초기에 힘든 일도 많고, 되는 일은 없고, 가진 것은 없고 성령 안에서 기도 하다가 매일 불렀던 찬송 한 장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제일 많이 불렀던 것 같고 혼자 있을 때도 기도할 때도 참 많이 불렀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나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나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나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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