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처를 주는 모든 생각을 바꾸기로 선택할 수 있다.
1.
상실은 제대로만 지각된다면 상실이 아니다.
고통은 불가능하다.
어떤 이유로든 전혀 슬픔이 있을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꿈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것이 진리로서 처음에는 그저 말로 하고, 이어서 여러 번 반복해 말하고, 그 다음에는 많은 유보조항과 함께 부분적으로만 참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점점 더 진지하게 고려하다가, 마침내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나는 상처를 주는 모든 생각을 바꾸기로 선택할 수 있다.
오늘 나는 이 말 너머로 가고, 모든 망설임을 지나가며, 이 말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련다.
2.
아버지, 당신께서 주신 것은 해칠 수 없으며, 따라서 슬픔과 고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게 해주시고, 단지 기쁨만 당신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단지 기쁨만 진리로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
[예수의 추가 설명]
여기에 있는 많은 레슨이, 처음에 읽을 때는 진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잔인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슬픔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은, 그대의 행성에서 사랑에 대해 그대가 이해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이 생각된다.
그대는 누군가가 육체적인 형식에 종말을 고하면 슬픔을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건강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 생각,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때, 그대는 사려깊지 않고, 불친절하고 무감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형제자매에 대해 훨씬 더 연민을 느끼며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깊은 슬픔 같은 것들로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그대의 행성에서 가까운 사람이 육체적인 형식에서 비육체적인 형식으로 옮겨갈 때,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그대의 진화 과정에서는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영(靈)에게는 즐거운 시간이니 자아(ego)의 놀이터를 뒤로 남기며, 보다 자유로워지고, 원하는 게 무엇이든 더 많이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 떠나는 영의 관점에서는 오로지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뿐이며, 거기엔 자유가 있다.
에고의 무대 안에서 그대의 관점에서는 상실이 있지만, 거기는 마음이 너무도 낮은 진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육체적/물질적 몸을 그 존재라고 여기지만,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을 따라다니며,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몸이 사라진 다음에도 존재하는 의식이고 전혀 변함없는 측면이다.
그대는 죽지 않는다!
사실상 그대의 의식은 눈을 한번 깜짝거릴 뿐 계속 이어간다.
그러므로 몸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여정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 것에 설레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대 또한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니, 이 특정한 형식(몸) 안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의식 수준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설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을 바꿈으로써, 그대는 육체적인 존재의 가장 큰 부담 중의 하나를 덜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이 레슨들을 얻지는 못할 것임을 이해하면서, 굳건하게 이 길을 가라.
그대는 그 레슨들을 항상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믿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을 계속하면서 깨달음으로 이르는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갈 것이며, 마침내 모든 고통이 있는 전쟁터를 떠나게 될 것이다.
...
[알렌의 설명]
오늘 레슨은 기적수업의 실천적인 가르침을 잘 요약해 놓은 레슨입니다.
우리는 먼저 밖에서 보이는 것은 내면, 내 생각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후 오늘 레슨을 적용합니다.
만약 어떤 문제의 기원이 내 생각이라면, 나는 그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상처를 주는 모든 생각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의 밖에 있는 어떤 것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 그 문제의 해결책이 내 마음에 있으며,
완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습니다.
“제대로 지각된다면, 상실은 상실이 아니다.”
꽝! 꽝!
이 말은 실로 많은 단추를 누릅니다.
아마도 최근에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었으나, 결국 그렇게 못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상실이라고 지각하여 속상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지각된다면, 그 상실은 전혀 상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을 상실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순전히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상처는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나의 생각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나는 상처를 주는 모든 생각들을 바꾸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상실과 큰 상실이라는 마음의 척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척도의 위로 올라갈수록 오늘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어떤 모임이나 콘서트에 못 가게 된 것은 별 일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몇 년 전에 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날려버렸습니다.
몇 년간 써온 글들, 수 백 명의 주소록을 잃었고 다시 복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상실로 보지 않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똑같습니다.
상실에 대한 지각은 순전히 제 마음 안에 있으며, 모든 상실과 고통에 대한 지각은 오직 제 마음 안에만 있지 다른 어디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생각들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척도의 더 높은 곳으로 가 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어떨까요?
특히 갑작스럽게 비극적으로, 병이나 폭력이나 사고로...
이런 일들에 “제대로 지각된다면 상실은 상실이 아니다.”를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레슨은 분명히 우리가 이런 경우에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고통은 불가능하다.
어떤 이유에 의한 것이든 슬픔은 전혀 없다.
어떤 종류의 괴로움이든 단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오늘 레슨은, 바르게 지각되기만 한다면 죽음조차 비탄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똑같은 경우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입니다.
우리의 상처, 고통, 비탄의 원인은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원인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고통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삶의 주된 이슈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최근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직설적으로 “거기에 슬픔의 원인이 있는 게 아냐.”
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상대방은 십중팔구 당신을 매우 잔인하거나 냉정한 사람이라고 지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너는 그를 잃지 않았어, 밝은 측면을 봐.
이제 너는 그 남자의 잘못을 참지 않아도 돼.
이제 너를 진짜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찾아 볼 수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슬픔에는 원인이 없다.”라고 말해주려는 사람은, 친절함을 대가로 치르면서 영적으로 옳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레슨이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도, 우리 자신에게 슬픔에는 원인이 없다고 말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과정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과정이 아니며, 우리 생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합니다.
상처를 주는 모든 생각들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결국 슬픔과 고통은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우리를 해칠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오직 기쁜 것들만 주시므로, 오직 기쁜 것들만이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