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자기 해설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 박목월 「송아지」의 경우
— 윤동재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귀도 얼룩 귀
엄마 닮았네
박목월의 「송아지」는 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정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교과서 수록 여부와 상관없이 작품만 읽어도 첫 두 행의 되풀이, 두 연의 같은 짜임, 규칙적인 음보와 행갈이가 말의 가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가락이 두 연에 걸쳐 되풀이되기 때문에 어린이가 소리 내어 읽고 기억하기에도 쉽다.
이 작품에는 흔치 않은 자료가 따라다닌다. 시인이 직접 창작 동기와 과정을 밝힌 글이다. 박목월은 이 시를 중학생 때 썼다고 밝히면서, 시 속의 송아지가 실은 송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자 아우들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쓴 시다. 이 시에 나오는 ‘송아지’는 사실은 송아지가 아니다. 그것은 ‘나’며 나의 아우들이다.
— 박목월, 『동시의 세계』(서정시학, 2009), 210–211쪽.
그는 어린 시절 집에서 기르던 암소가 새끼를 낳던 밤도 기억한다. 갓 태어난 송아지의 귀며 코며 머리통의 생김새가 어미를 닮았다는 사실이 어린 그에게는 큰 수수께끼이자 새로운 발견이었다고 한다. — 앞의 책, 212–213쪽.
중학교에 들어가 고향을 떠나 하숙하던 어느 날, 그는 학교 뒷산 목장에서 얼룩빼기 젖소와 송아지를 보다가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고 한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어머니의 얼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그날 돌아와 쓴 시가 「송아지」라고 한다. — 앞의 책, 213–215쪽.
박목월이 밝힌 창작 동기와 과정에 따르면 「송아지」가 태어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이다.
먼저 박목월은 엄마 소와 송아지가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엄마 소가 얼룩소이니 송아지도 얼룩송아지이고, 엄마 소의 귀가 얼룩 귀이니 송아지의 귀도 얼룩 귀이다. 얼핏 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 같다. 그러나 동시에서 말하는 새로운 발견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알아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낯익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관계를 새롭게 알아본다면 그것은 발견이 될 수 있다.
「송아지」의 새로움은 ‘새끼는 어미를 닮는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그 당연한 사실을 처음인 듯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작품 속 화자의 눈에 있다.
그런데 박목월의 설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엄마 소와 송아지는 함께 있는데 자신은 어머니와 떨어져 객지에 있다. 소의 닮음을 보다가 제 얼굴을 만져 보고, 얼굴을 만지던 손으로 어머니를 느낀다. 대상에서 발견한 ‘닮음’이 자기 삶에 대한 인식으로 옮아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뀐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작품 안에서 똑같이 확인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닮음’이라는 발견은 작품 안에 분명히 들어 있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송아지가 곧 ‘나’와 ‘아우들’이라는 인식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박목월의 자기 해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자기 해설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작품을 썼는가 하는 창작사적 사실이다. 둘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 작품을 쓰게 되었는가 하는 창작 동기와 과정이다. 셋째는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작품 해석이다.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 시인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다른 자료가 없는 경우 창작자인 시인의 회고는 작품의 탄생 과정을 이해하는 데 빼놓기 어려운 자료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 시인의 말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시인은 작품이 어떻게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증인이지만, 완성된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정하는 유일한 해석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는 결국 완성된 작품의 말과 구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박목월의 말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송아지」를 읽어 보자. 작품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송아지와 엄마 소의 닮음이다. 1연에서 화자는 먼저 송아지를 보고 그 ‘얼룩’을 본다. 이어 엄마 소 역시 ‘얼룩소’임을 확인하고 둘이 닮았다고 말한다.
2연에서는 눈길이 ‘귀’라는 작은 부분으로 좁혀진다. 1연이 송아지와 엄마 소의 전체적인 닮음을 알아보는 과정이라면, 2연은 이미 발견한 닮음을 구체적인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 한 번 얻은 발견이 대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2연은 1연에서 말한 사실을 단순히 되풀이하지 않는다. ‘얼룩’에서 ‘얼룩 귀’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관찰이 한층 세밀해진다. 발견이 다시 관찰을 낳고, 그 관찰이 처음의 발견을 구체화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작품은 먼저 보여 주고, 그다음 알아차리게 한다. 어린이 독자는 ‘얼룩’과 ‘얼룩 귀’로 이어지는 시선을 따라가면서 작품 속 화자의 발견에 참여한다. 이 작품의 발견은 박목월의 자기 해설에 기대지 않더라도 작품 안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이러한 발견의 과정에는 운율도 함께한다. 두 연은 같은 문장 구조와 행 배열을 지니고 있어, 1연의 가락이 2연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셋째 행은 낱말만 바뀐 채 같은 가락을 이어 간다. 말의 가락은 거의 같지만 그 가락을 타고 움직이는 시선은 ‘얼룩’에서 ‘얼룩 귀’로 좁혀진다. 형식은 반복되는데 발견은 더 구체적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반면 박목월이 자기 해설에서 말한 어머니와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송아지가 곧 ‘나’요 ‘아우들’이라는 의미는 작품 안에서 직접 찾기 어렵다. 송아지를 자기 자신이나 사람에 빗대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표현도 없다.
따라서 작품의 의미에 고향을 떠난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보탠다면, 그것은 작품 자체에서 직접 확인되는 의미라기보다 시인의 자기 해설을 알고 난 뒤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얻게 되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다고 시인의 삶과 창작 동기가 작품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눈여겨볼 말은 ‘엄마’다. 화자는 소의 어미를 ‘어미’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른다. 짐승의 어미를 어린이가 제 어머니를 부르는 말로 부르는 순간, 소의 관계와 사람의 가족 관계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돌다리가 놓인다. ‘엄마’라는 말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히 동물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람의 가족 관계 쪽으로도 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낱말만으로 작품 속에 ‘그리움’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시인의 자기 해설을 알고 읽는 독자라면 ‘엄마’라는 말에서 고향을 떠난 소년 박목월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읽어 낼 수 있다. 그런 독법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작품 자체가 모든 독자에게 그 감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작품은 다른 방향으로도 열려 있다. 작품은 독자에게 ‘너도 엄마를 닮았다’고 일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송아지가 엄마 소의 ‘얼룩’과 ‘귀’를 닮았다는 발견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나는 엄마와 어디가 닮았을까’, ‘아빠와는 무엇이 닮았을까’ 하고 물을 수 있다. 어떤 독자는 얼굴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독자는 말투나 버릇을 떠올릴 것이며, 또 어떤 독자는 형제자매의 닮은 점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 해설 속의 시인과 해설 없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박목월은 어미 소와 새끼의 닮음에서 출발하여 자기 얼굴을 거쳐 어머니와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는 송아지에서 자신으로, 자신에서 어머니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반면 어린이 독자는 작품을 떠나지 않은 채 송아지와 엄마 소의 닮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자기 삶으로 가져갈 수 있다. 송아지와 엄마 소에서 출발하여 ‘나는 누구와 무엇이 닮았을까’라는 물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는 창작자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의 삶으로 뻗어 가는 길이다. 두 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둘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시인의 자기 해설을 통해 알게 된 길이고, 후자는 작품 자체가 독자에게 열어 놓은 길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자기 해설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의 자기 해설은 작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와 경험, 창작 당시의 생각을 이해하게 하고, 때로는 작품만 읽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자기 해설은 작품을 읽는 데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안내자가 목적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성된 작품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작품의 말과 구조에서 확인되는 의미라면 자기 해설은 그것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 준다. 반대로 작품 안에서 그 의미를 떠받치는 표현을 찾기 어렵다면, 그 의미는 작품의 확정된 의미로 보기보다 작품이 태어나게 된 시인의 기억이나 시인 자신의 해석으로 남겨 두는 편이 옳다.
박목월의 자기 해설은 「송아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작품은 시인의 경험에서 태어나더라도, 완성된 뒤에는 자신의 말과 구조로 독자를 만난다. 그러므로 작품의 이해는 시인의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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