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정신 / 양선례
개인 정보 인증서를 갱신하라는 메일이 왔다. 인터넷으로도 충분한 일이라서 은행 누리집에 접속했다. 그런데 오티피(OTP, 1회용 비밀번호) 카드가 말썽이다. 여러 번 시도했으나, 틀렸다고 나온다. 그게 한 달 전이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출장이고, 주말을 지나고 오면 갱신 기한까지 겨우 3일이 남는다. 혹여 잊어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낭패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이도저도 안 될 것 같아 지난 수요일 오후에 부랴부랴 은행에 들렀다.
직원은 발급 날짜를 확인하더니 바꿀 때가 지났다며 두 가지 중에서 고르란다. 하나는 기존 직육면체 모양의 입체형이고, 다른 하나는 얇아서 지갑에 꽂고 다닐 수 있는 신용카드 모양이다. 금액도 5,000원과 10,000원으로 신용카드형이 배나 비싸다. 별 고민 없이 후자를 골랐다. 그동안 입체형을 썼는데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학교 서랍에 두고 쓴 탓에 집에서는 일을 볼 수 없었다. 카드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카드를 자세히 살펴보니 파란색 바탕화면에 오른쪽 위에는 회색의 사각형 틀이 있었다. 이 틀은 왜 있는 거지? 이름 쓰는 곳인가? 아니, 개인 보안을 강화하려고 만든 카드에 이름을 쓰면 안 되지 않나? 고민은 짧았다. 평소에 쓰던 이름의 영어 약자 ‘Y·S·R’을 써서 넣으려는데 불현듯 이훈 교수님 말씀이 떠올랐다. 맞아. 글을 쓰는 사람은 말과 연애하는 사람이야. 이왕이면 우리 말로 써야지. 한글 약자 ‘ㅇ·ㅅ·ㄹ’를 쓰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손은 ‘ㅇ·S·ㄹ’를 쓰고 말았다. 어쩔 수 없네.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남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런 암호가 더 좋겠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갔다.
카드도 새로 발급받았으니 이제 인증서 갱신하러 가야지. 누리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었더니 아니나다를까 오티피(OTP, 1회용 비밀번호) 카드의 번호를 입력하란다. 잠깐,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분명 은행에서 친절한 직원이 시범을 보여 줬었는데. 카드를 살폈다. 오른쪽 아래쪽에 ‘온(ON)’ 모양의 버튼이 있어서 눌렀다. 아뿔싸! 숫자가 바로 내가 이름 적어둔 데 떴다. 물티슈를 가져다가 박박 문질렀으나 네임펜의 위력은 대단했다. 카드를 이리저리 움직여 곁눈질로 겨우겨우 화면에 나오는 번호를 읽었다. 그랬다. 내가 이름 쓰는 데라고 착각했던 거기가 바로 1회용 비밀번호가 뜨는 화면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곳에 이름을 썼으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지우지? 과학실에 가면 아세톤은 많이 있을 테지만 움직이기가 싫었다. 책상 서랍을 여니 짜서 쓰는 휴대용 손 소독제가 보였다. 새것이라 입구가 작은 은박지로 막혀 있었다. 그걸 떼어내고 누르니 컴퓨터 화면 전체를 닦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 쏟아졌다. 게다가 하필 사타구니 안쪽 바지에 묻었다. 열심히 닦고 있는데 실장이 들어왔다. 코 파다가 들킨 사람처럼 민망했다. 묻지도 않았건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이 여자, 박장대소다. 한 술 더 떠서 ‘지금은 라디오 시대,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에 사연을 적어 보내란다. 아니 이게 그렇게 웃긴 이야기인가. 요새 출판 기념회 준비하랴, 말썽난 이 치료하랴, 출장 다니랴, 한 주일이 바쁜 탓에 잠시 정신이 이사 간 모양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봄날처럼 포근하던 지난 며칠이 무색하게 저녁에는 공기부터 다르다. 사가망처(徙家忘妻, 이사 갈 때 아내를 두고 잊고 간다는 뜻)라더니 내가 그 짝이다. 이제 출판 기념회도 끝났고, 내일이면 이 치료도 마무리되니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첫댓글 저도 같은 실수를 해서인지 선생님 글 읽으면서 웃을수가 없었어요.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실수를 리얼하게 글로 풀어 친구에게 말하듯이 생생하게 쓰셨네요.
출판 기념회 참석 축하드리지 못했어도 책 보여 주실거죠? 하하. 이제는 수필집 출간한 공식 작가님 정선례 선생님 다시 한번 책 출간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정선례 선생님도 저만큼 바쁘시군요.
수필집 출간한 공식 작가님, 정선례 선생님!
한참 웃었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금방 따라오실 거죠?
선생님 글 읽으면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게 느껴져요. 힘 내세요. 저희 지인 한 명은 대형 마트에 갔는데 아이가 없어져서 직원한테 방송 좀 해 주라고 부탁했대요. 마트 직원이 그 손 잡고 있는 아이는 누구냐고 하더래요.
하하하.
지현씨 지인도 저만큼이나 바빴던 모양입니다.
저도 막내를 광양까지 데리고 학교에 다녔는데 집에 퇴근해서 보니 아들을 놔 두고 혼자 왔더라고요.
이제 보니 글 속에 그 내용도 넣을 텐데 그랬어요.
건망증 하면 다들 한 마디씩 할 말이 있겠지요.
@이팝나무 호호호. 저 해외 여행 중국으로 첨 가봤는데 동네 언니들이 저 덜렁대는거 아니까 애기 안 잊어버리게 조심하라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럴수도 있죠, 선생님!
그러게요.
혼자 민망해서 주절주절 시키지도, 묻지도 않았는데 막 말했네요.
하하하, 민망한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바쁜일 끝났으니 집 나간 정신 들어올 때가 됐네요.
네. 오랜만에 제 자리에 앉아 밀린 일 처리하고 답글 씁니다.
역시 제 자리가 최고예요.
편안하고 좋습니다.
이렇게 답글도 달고요.
고맙습니다. 늘!
'집 나간 정신'이라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저도 하루에 수십 번 경험하는 일이라 공감합니다.
'이사 간 정신'이라고 글감에 맞게 썼다가 고쳤습니다.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같은 얘기도 믿믿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구수하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문우님은 후자 쪽이네요. 입담이 좋아서일까요?
하하. 입담 좋은 실력을 뽐내야하는데.
기회를 주시지요. 교장 선생님!
칭찬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출판기념회 사진도 보고 싶네요. 이제 완전체 작가가 되셨네요.
사무관님의 답글에 힘입어 곧 톡으로 올리겠습니다.
초청장도 보내고 싶었는데 참았습니다.
얼른 책 내세요.
재밌는 일이었어요.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집 나간 정신 아직 멀은 거 같은데요, 또 책 보내준다고 문자 하시구서, 하하 저는 손 하나 덜겠끔 사서 보겠습니다.
그런가요?
돌아오려고 정신 번쩍 차리고 있겠습니다.
웃으면서 잘 읽었어요. 책 출간과 출판기념회 축하드립니다.
네. 원장님!
고맙습니다.
그런 비밀 카드도 있나요? 처음 들었네요. 글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