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와인의 맛 / 이팝나무
주말 주택에 상조 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 여섯이 놀러 왔다. 작년에 처음으로 초대했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올해 또 오고 싶다고 해서 잡은 날이 하필 어린이날 연휴 전날이다. 조퇴하고 보성으로 달렸다. 이런저런 장을 봐 온 터라 어떻게 옮기나 걱정했는데 마침 주차하고 있던 친구들과 만났다. 몇몇은 지난주에 있었던 친구 딸의 결혼식장에서 만났지만 나머지는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다.
누구는 상추와 깻잎, 고추, 마늘, 버섯, 다른 친구는 전복을 씻느라 바쁘다. 나는 교자상에 신문지를 깔고 불판을 꺼내 갑오징어와 키조개, 삼겹살 구울 준비를 한다. 그새 미자는 우리 집도 아닌 앞집 텃밭에 있는 아카시 꽃을 언제 봤는지 따 와서 상추와 흰민들레 잎에 자신이 가져온 치즈까지 올려 멋진 샐러드를 만들었다. 작년에 와 봤다고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이다. 좁은 거실이 복작복작한다.
남편이 먹다가 남겨 두고는 잊어버린, 양주 반병을 내놓으니 술꾼의 환호성이 일어난다. 꾼들은 양주로, 아닌 친구는 와인 두 병으로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오른다. 오지 않은 친구를 도마에 올려 찧기도 하고, 딸 결혼, 잘 생긴 아들의 동거 등으로 화제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올해 환갑을 맞은 친구 몇이 여행 계획 세우자고 조른다. 회원의 반도 모이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도 없이 갑론을박하다가 끝났다.
개구리 합창이 요란한 밤이다. 한 친구가 바닷가에 나가잔다. 허브차를 우려 보온병 세 개에 나눠 담고 집을 나섰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한 잔 마신 친구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너희는 가면 그만이지만 난 이 동네에 계속 살아야 해. 좀 봐줘.” 애가 타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느 집 개가 컹컹거리고 짖는다.
아홉 시가 넘은 바닷가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텐트에 불 밝힌 사람도 여럿이다. 황금 같은 사흘 연휴가 철 좋은 5월에 있으니 더 그런 듯하다. 평상에 자리를 잡고 허브차를 나눠 마시며 또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파도는 쉼 없이 철썩거린다. 가로등 불빛이 빨강으로, 초록으로 흔들린다. 멀리 등대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의 봄밤이 싱그럽다. 작년엔 새벽 두 시까지 노래를 불러대더니 올핸 거실에 놓인 노래방 기계를 본체만체한다. 한 살 더 먹은 표시인 듯 나는 그게 또 아쉽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새벽잠 없는 둘은 동네 산책에 나섰고, 꽐라였던 친구는 여즉 누워 있었다. 친구도 손님인지라 어제 먹다 남은 고기를 넣어 김치찌개를 끓였다. 호박 두 개에 햇양파를 넣어 새우젓으로 간을 한 애호박도 볶았다. 아무래도 상이 초라하여 텃밭에서 부추와 방앗잎을 뜯어 아침부터 전을 부쳤다. 소휴당의 아침 식사는 대부분 떡국인데 며칠 전에 사위 본 친구가 찰밥 해 온 게 있어서 거기에 맞춘 차림이다. 급하게 차렸지만 다들 맛있게 먹어 줘서 고마웠다. ‘뚝딱 요리사’라는 말을 또 들었다.
열두 시에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갔다. 편한 옷을 벗고,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양복을 입은 남편과 집을 나서 집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예식장으로 갔다. 두 시 반 예식이라 한 시간 전부터 점심을 먹을 수 있다더니 혼주조차 오지 않아 식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온 친구 부부와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나영이 부부와 서울서 온 미희와 함께 거하게 점심을 먹으니 그때서야 광주에서 출발한 미선이가 도착했다고 연락해 왔다. 공주에 사는 숙이는 하필 조카 결혼식과 겹쳐 올 수 없어서 서운했다.
여고 시절에 만난 40년지기 친구 딸이 결혼하는 날이다. 어릴 때부터 봐 온 터라서 내 딸 시집 보내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신부가 아버지 손 잡고 입장할 때 눈물을 보이니 나도 울컥했다. 사실 영희는 사는 게 넉넉하지 않았다. 남편은 수시로 직업을 바꿨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느라 어려운 시절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이혼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친구들과 말한 적도 있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넉넉한 성품으로 항상 웃으며 사는 그녀가 친구지만 대견했다. 오늘 첫 혼사를 치르는 친구를 아낌없이 축하해 주고 싶은 이유기도 했다. 신부는 부모님께 인사하면서, 아빠의 편지글을 듣는 동안에도 내내 훌쩍였다. 도우미가 화장지를 쥐어 주다가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아예 신부 얼굴에 콤팩트를 여러 번 두드렸다. 신부와는 반대로 시종일관 싱글벙글하는 인상 좋은 신랑과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기를 빌었다.
찻집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미리 예약한 펜션으로 향했다. 내일 출근하는 나영이 때문에 한 시간이 걸리는 보성 소휴당까지 갈 수 없었다. 순천 시내에서 30분쯤 떨어진 숙소는 넓고 쾌적했다. ‘뷰 맛집’이라는 인터넷 평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옆과 뒤는 산이라서 온통 연초록 물결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숙소 부근에서 취나물을 뜯는 일이었다. 고사리를 꺾거나, 쑥이나 나물을 캐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희의 눈에 취나물이 띈 게 잘못이었다. 어느 정도 바구니를 채우자 이제는 도로로 내려서 걸었다. 내일은 비가 예보되어 있기에 오늘밖에 여유가 없었다.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둘레길은 없었지만 오가는 차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 도로로도 걸을 만했다. 여고 단짝들이라서 1년에 한두 번의 숙박하는 여행을 하지만 이번엔 오랜만에 모여서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챙겨온 찰밥과 떡으로 저녁을 간단하게 먹었다. 입만 가지고도 잘 노는 장기를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낯선 곳이었지만 잘 자고 일어나 보니 여름 장대비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숲속이라 공기는 더없이 신선했다. 누룽지로 아침을 챙겨 먹고는 변변하게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퇴실 시간 맞추기도 바빴다. 비가 하도 많이 내리는 데다 주변에 갈 만한 찻집조차 없어서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나영이는 일터로, 미선이는 멀리서 온 딸과 사위가 기다리는 광주로, 이번 2월에 명예퇴직하고 자유인이 된 미희만 나와 함께 소휴당으로 향했다. 그녀는 내려온 김에 연휴 내내 나와 놀다가 화요일엔 출근하는 나를 따라 사무실까지 들러갈 참이다.
수산물 위판장에 들러 갈치, 전복, 주꾸미까지 한 보따리 사서 소휴당 문을 열었다. 미희는 마늘종을 뽑고, 부추를 잘랐다. 앞집 할머니 밭에 가서 열무와 상추를 땄다. 나는 엎드려 일하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우산을 씌워 주었다. 간혹 머리에 비가 떨어졌지만 그쯤으로 그녀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저녁에는 감자를 넣어 갈치를 조렸다. 살짝 데친 마늘종에 고추장, 매실 액기스, 참기름을 듬뿍 넣어 버무렸다. 상추와 열무를 씻어서 채반에 가득 담아 자연식 밥상을 차렸다. 쌈을 싸서 볼이 터져라 밀어 넣었다. 아껴 둔 아이스 와인을 꺼내서 잔을 부딪쳤다. 크리스탈 소리가 경쾌하다. 달달한 와인이 술술 넘어간다. 천국이 별건가. 바로 여기가 그곳일세.
첫댓글 선생님께서는 우리 글쓰기 회원들 챙기듯이 친구들과도 아주 잘 지내시는군요. 주변에 항상 사람이 많으셔서 천국의 맛을 느낄 기회도 자주 생길 것 같습니다.
양 전도사님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네요. 전도사님이 인도하신 데가 천국입니다.
글 내용을 많이 줄이셨을텐데도 기네요. 구체적으로 쓰셔서 그런가 봅니다. 알뜰살뜰 지인들을 챙기는 마음이 잘 그려졌네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에
이팝나무가 만개했어요.
어제 비오고 바람 불더니 길에 눈이 쌓였네요.
양선례 선생님 생각났습니다.
하하. 이팝나무 보고 저 생각했다는 사람이 여기도 계셨군요.
오래전 제 블러그 친구도 톡을 보냈더라고요.
해마다 몇 명씩은 그런 전화를 해 옵니다.
이제 이팝이 졌지요?
힘 빠집니다.
참 바쁘게 사시네요. 그런 정열이 어디서 샘솟는지 궁금해지네요.
선생님의 신나게 바쁜 일상이 환한 미소를 만드나봐요. 바쁘게 자판을 두르리는 모습이 그려져 행복하게 웃습니다. 가진 능력만큼 나누시는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진짜 '리틀 포레스트'네요. 뚝딱 요리사. 부지런하고 다정한 성품이 다 보입니다.
글이 길어도 재미있습니다. 저도 '리틀 포레스트'에 깜빡 죽는 사람인데 터를 잡으신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천국의 맛을 제대로 느끼며 지내시군요.
좋은 친구들, 맛있는 음식, 그림 같은 장소, 거기에 넉넉한 마음까지 다 갖췄습니다.
마늘종 요리법 잘 배우고 갑니다. 전 늘 기름에 볶았는데 이렇게 하면 더 상큼할 것 같네요.
좋은 친구, 맛있는 음식, 넉넉한 마음의 조합.
선생님이 계시는 곳은 거기가 어디든 천국이 아닐까 싶십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어요.
구체적으로 글을 써서 그런가 봐요.
주말주택 '소휴당' 마련하신 게 신의 한 수. 하하
와,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이 나와서 침 흘리며 읽었습니다. 하하. 천국이 가까이 있어 행복하시겠어요.
선생님은 왜 이렇게 잘하는 게 많으세요?
그 넉넉한 마음, 손길로 많은 사람에게 천국을 맛보게 하는 선생님은 참 좋은 사람이네요.
'살짝 데친 마늘종에 고추장, 매실 액기스, 참기름을 듬뿍 넣어 버무린다.' 맛있을 것 같아요. 한 가지 배웠네요.
선생님 멋지게 사십니다. 소휴당에는 늘 웃음이 넘쳐나겠습니다. 그 달달한 와인 맛 언제 맛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