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 가정(중국 명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 윤결 군과 태휘 허엽 군과 더불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 자와 월 자를 써서 시축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가 송둔암(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을 짓고, 장차 화시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하였고, 둔암 여성위(송인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을 이어받았다)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하였다. 또 임당 홍문관 교리(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 앞에서 보이는데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이 피화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줄까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영의정 이산해로, 문형을 주관하였다)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 들었네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이 모여 음복례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 3품까지는 명륜당상의 교의에 앉고, 당하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에서 보병에게 군포를 주면 본원(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과 영기를 주어 가무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를 여는데, 종장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 안에는 다만 식년시만 있고, 별시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들이 강서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가 있다. 감사는 풍헌관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 강혼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의 은대선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을 순행할 때 점심때가 되어 부상역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열두 무산 새벽꿈에 어른거려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지금 김천의 면)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