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녕문학 48집이 도착했네요.
원고청탁, 취합, 편집에다 발간, 발송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편집위원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도 대학신문을 만들면서 경험한 바이지만
아무리 완벽을 기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오자와 탈자....
48집에 졸고 '안개꽃'이 수록된 238쪽의 상단,
'지 마누라는 가계수표를 부도내고 잠적한 놈이다'에서
'지 마누라는'이 아니고 '지 마누라'여야 하는데 '는'이 붙어
가계수표 발행의 주체가 마누라인데 약간의 혼선이 생겼네요. ㅎ
당시 가계수표는 남편 따로 부인 따로 발행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234쪽의
'30년 전 한밤중에 안개 낀 동갯들을 함께 걸었던 같은 반의 그녀였다.
달빛에 비친 밤이슬이 무지개를 만들어 주던 그 한밤중의 그녀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새하얀 허벅지를 나한테 보여준 바로 그녀였다.'
237쪽의
'영롱한 추억이 없는 메마른 세태다.
좀은 아까우나 내가 지닌 추억이라도 분양을 해야겠다.
적어도 아름다운 추억의 비축량은 그나마 내가 많은 편이 아닌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가진 자가 베풀어야 한다.'
240쪽의
'그 맑고 투명한 이슬이 어째서 혼탁해지며 안개 속의 영롱한 무지개가
무엇때문에 사기꾼에게 농락을 당해야 했는지 억울했다.'
243쪽의 중간 부분
'...그렇다면 교복 스커트를 말아 올리고 달빛에 드러낸 새하얀 허벅지는
신호였단 말인가?'
에 대한 내막은 '안개꽃' 본문만으로는 해명이 부족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관련된 사연이 담긴 수필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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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은 달빛을 품어야........
나는 올해로써 마흔 하고도 삼 년을 넘겼다.
이 도시 저 도시로 전전하며 살아 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그 밤안개 자욱하고 이슬 영롱하던 고향을 떠나 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이제 내 육신은 출근길의 촉박함에 내몰리고
영롱한 이슬대신 알코올에 젖으며 은은한 달빛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네온의 불빛에 휩싸여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고향 들판의 달빛과 그 박꽃에 대한 집념은
이젠 하나의 신앙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 이제는 진정 달빛 가득 품은 박꽃을 피우며 살아야 한다.
더구나 도시에 붙잡혀 온 나로서는...............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더욱 앓게 되는 사춘기였다.
그 날 밤도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열어 줄 도회지 학교로의 진학을 위해
한밤중까지 책을 펼쳐놓고 있다가
열여섯의 나이가 안겨 준 멍에 같은 그리움에 떠밀려
집 뒤 수수밭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초가을의 밤하늘은 미래에 대한 부푼 꿈과
주체할 길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열여섯 소년의 눈망울 속에
수 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쏟아 넣어 주었다.
8월말의 밤은 깊어감에 비례하여 낮 동안 후끈후끈 달아올랐던
대지의 열기가 신선한 초가을의 서늘함으로 교체되었고
수수밭을 뒤덮고 있던 별들도 자꾸만 생기를 더해갔다.
기어이 누군가가 찾아 올 것만 같은 밤.
터질 것 같은 그리움을 안은 채
말곳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예감하게 되는, 기어이 누군가가 찾아 올 것 같은 기분은
결코 신화 속의 정서만은 아니다.
별이 쏟아지는 수수밭에서 온갖 상념을 안고 뒹굴고 있던
나의 이름을 같은 반의 여학생이 나지막이 불렀을 때,
나는 이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그 시기를
마치 전율하듯 예감하고 있었다.
까만 교복 스커트 차림의 그녀가 그리움으로 농익은 내 앞에,
수줍음과 충분히 조화된 파격적인 대담성을 안고 다소곳이 서자,
그때까지 나를 들끓게 하였던 열병과도 같은 상념들은
갑자기 정겨운 생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반장을 은근히 좋아한다던 그녀가
별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반장이 아닌 나의 앞에 섰음에랴.
평생을 통해 그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소중한 순간들은 흘러갔다.
문득 그녀의 눈빛을 목격한 나는
또 다른 기민한 예감이 시키는 대로
나를 찾아온 목적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지는 유성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나의 상념을 단호하게 잘라놓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장의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반장은 동네에서 5 리나 떨어진 동갯들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그리움의 표적이 빗나간 서운함에 나는 잠시 주저하였다.
그녀도 나의 서운함을 감지한 듯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갑자기 들려온 풀벌레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내가 방금 확인한 허전한 공백을 마구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지하면서도
수줍은 미소가 조심스레 번져나갔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 감염되어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무 늦지 않을까?」
「난 지금이 오히려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우릴 간섭하는 어른들은 모두 잠들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밤안개 자욱한 시골 들길을 나섰다.
밤안개는 바다처럼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고
그 안개의 바다 위로 산봉우리들은 섬처럼 조용히 떠 있었다.
서쪽 하늘에 걸린 한밤중의 조각달은 이슬에 흠뻑 젖은
초가을의 산야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이제 갓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벼이삭들은
영롱한 이슬방울을 함뿍 머금고 있다가
열여섯 살 소년 소녀의 조심스런 밤나들이에 놀라
후두둑 이슬방울들을 흩뿌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밤안개 자욱한 들판의 끝을 바라보던 나는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다.
지상의 무지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밤마다 이런 장관을 펼치고 있는 사실을
어째서 까마득히 모르고 살아왔을까?
한밤중의 이슬방울들이 달빛을 받아 무지개로 변신하는 기적을
어찌하여 까마득히 모르고 살아왔을까?
자욱한 밤안개 속의 오색영롱한 무지개!
세상은 결코 잠든 것이 아니었다.
한 줌의 욕심을 위해 땀 내음이 진동하는 한낮은
차라리 무지개가 잠드는 시간이었다.
무지개가 깨어나기 위해선 땀내 나는 인간은 잠들어야 하였다.
그녀와 나는 넋이 나간 상태로
밤안개 속의 휘황찬란한 무지개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한 걸음 한 걸음씩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무지개도 우리를 앞서서 천천히 이동하였다.
우리는 속세의 어떤 사람도 밟아보지 못했을
비경의 중심부로 한없이 걸어 나갔다.
이윽고 저 멀리 섬처럼 떠 있는 산봉우리 밑으로
은은한 불빛이 보이고 그 불빛만큼이나 애잔하게,
개 짖는 소리가 겅겅 울려 올 때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가 가까웠음을 알았다.
반장의 외딴 집에도 불빛은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눈이 동그래져서 뛰쳐나온 반장은 그녀를 데리고
들판 저 켠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들판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이슬방울들이
이번에는 달빛을 정면에서 맞받아 되쏘고 있었다.
그 깨알 같은 달빛의 파편들은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황홀함에 얼이 빠진 나는 찬란한 빛다발의 향연 속에 익사할 지경이었다.
나는 인간들이 잠든 사이에 달빛과 이슬이,
그리고 밤안개가 서로 어떻게 교감하고 있는 지를 감동적으로 목격하였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무지개가 밤마다
우주적인 규모로 펼쳐지고 있는데도 세상이 잠들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이 아름다운 비밀을 내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누구에겐가 진정으로 감사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내내 그 날 밤의 황홀한 충격을
주체할 길이 없어 뒤따라오는 그녀의 존재를 망각하였다.
이슬을 흠뻑 머금은 벼이삭을 헤치면서 돌아오는 논길은
내가 입고 있던 쑥베 바지를 흥건히 젖게 하였고
마침내 신고 있던 운동화마저 쩔꺽이는 소리를 낼 지경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남학생이라 바지가 젖은 채 집엘 가도 괜찮겠지만
여학생인 그녀의 경우는? 하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그 눈부신 새하얀 허벅지!
달빛에 선연하게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의 기막힌 색상은,
그녀가 재빨리 스커트를 내려 가렸지만
이미 나의 망막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영상으로 인화되고 말았다.
「아이, 뭘 보니?」
「치마가 젖으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그랬지......」
행여 이슬에 젖을 쎄라 허리께 까지 스커트를 말아 올리고
논길을 뒤따라오던 그녀는 무지개 어린 황홀한 안개 속에서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아랫도리를 드러내 보였다.
그날 밤 그녀는 동구 밖 보리짚동 위에 활짝 피어있던 박꽃을 따서
황홀한 밤길을 안내해준 나에게 주었다.
달빛에 소담스러웠던 박꽃은 그녀의 허벅지만큼이나
형용키 어려운 신비의 흰색 바로 그것이었다.
그랬다.
박꽃은 달빛을 품어야 하였다. ▩
<1990. 4. 부산 MBC 신인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