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헤르만 헤세. 황승환 옮김.
며칠 전부터 목이 건조하고 마른기침이 일었다. 기어코 감기에 걸렸다. 정확히는 감기인지 다른 병인지 알지 못한다. 병원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였는데, 이틀 전부터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몸살기도 있어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났다. 토요일에 집에서 뒹굴다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여러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에도 늦잠을 자다가 급히 공원 벤치로 나갔다. 아무래도 집 안에 있다는 것은 일상의 자질구레함과 등을 맞대고 있을 수밖에 없기에, 근처 공원에 가서 요양 겸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밥을 챙겨 먹고 밀린 청소를 하고 등등을 생각하다 지체하면 일상을 벗어날 수 없기에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야 한다. 밥도 사먹고 청소 같은 일은 다 무시하기로 하였다. 가까운 공원에 가는 일이 무슨 요양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상을 떠난 곳이 바로 요양지이고 여행이다. 왜 늘 벗어나려고만 하는지 걱정이다. 무료한 시간을 메울 겸 음악을 듣기 위해 헤드폰도 챙겼고, 며칠 전에 근처 운암서점에 들렀다가 구입한 김혜순 시인의 시집도 한 권 챙겼다. 왜 갑자기 시집을 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가방에는 아직 읽지 않은 주간지가 두 권 있고, 돋보기안경, 담배 등등이 있었다. 늘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 공원 의자에 가기 전에 커피 한 잔을 사고 근처 빵집에서 늘 먹던 빵을 한 개 내지 두 개를 사서 들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이 짓도 할 수 없기에 잠시 즐길 수 있는 여유다. 가방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였다. 며칠 전부터 읽어볼 생각으로 가방에 챙겨넣은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연체에 대한 벌을 받느라 대출이 제한되었고, 새로 산 책은 아직 없고, 가지고 있는 책을 다시 읽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한 권 챙긴 책이 헤세의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다.
헤세는 머리말에서 이 소설의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있다. 클링조어는 마흔 두 살이고 꽤 유명세가 있는 화가였는데, 어느 지역의 남부에서 마지막 여름을 보냈고, 늦가을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친구들을 경악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소설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 대한 기록이다. 속물인 나는 클링조이는 크게 자살할 이유가 없었는데, 왜 자살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하긴 나 같은 속물들이란 기껏해야 ‘죽을 각오로 살지’같은 소리나 지껄일 수밖에, 비범한 죽음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소설에서는 자살이 직접 언급되지 않고 대신 몰락이라고 표현한다. 클링조이가 몰락을 선택한 그의 마지막 여름에 대한 추적이다. 평론가들이나 친구들은 그의 몰락의 이유를 정신착란, 우울증, 우수와 고통을 마비시키는 음주벽, 등의 여러 설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단서를 찾기 위해 역자의 작품해설을 뒤져보았다. 주례사 비평 등의 평가를 받지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해설이나 비평은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 몇 가지 단서는 이 소설은 1919년과 1920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한다. 유럽에서 1차 대전에 끝난 시기였다고 한다. 전쟁의 맹목성, 비참함, 광기의 경험, 유럽 문명이나 현대 문명에 대한 실망, 1914년 아들의 뇌막염, 15년과 18년 아내의 정신착락과 우울증, 몬탸뇰라로의 이사 등 개인적 불행,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 개인의 실존적 문제 등이 겹쳐 헤세는 이 시기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였다고 한다. 역자에 의하면 헤세의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였다. 이 소설의 클링조어는 헤세의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고통이 헤세만이 특별히 격은 고통은 아니었다.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이고, 누구나가 삶에서 격을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한다. 특별하고 기억해야 하는 고난과 고통도 있지만, 개인적 고통을 나만의 특별한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고통은 의외로 보편적일 수 있다. 고통이 보편적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견디는 방법은 제각각일 수 있다. 더 독하게 살기, 더 착하게 살기, 고통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내성을 키우기, 우울증, 정신착란, 술이나 약물 중독, 자살 등 여러 방편과 처세가 있을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예술가이기에 고통을 기록하고 예술로 승화하였다고 한다. “헤세는 그 탈출구로서 몰락을 통해 수행되는, 소위 /내면으로 가는 길/을 추구하게 된다”고 작품 해설에서 해설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으며, 모든 것은 기꺼이 죽어간다. 영원한 어머니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를 강조하고 나를 내세우고 살려서 내면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나를 몰락시켜 내면으로 가는 길을 헤세는 보여주고 있는가? 책 표지에는 고흐의 자화상이 인쇄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헤세의 언어로 된 자화상이며, 광기로 쓰여진 그림일지도 모른다. 어디 제정신으로 몰락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1922년 싯다르타 출간. 싯다르타에서 “너 자신이 되라, 그러면 세상은 풍요롭고 아름다울지니” 그해 여름에 몰락한 후 몇 년 후 이렇게 부활하였을까? 누구나 반할만한 말이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다. 인도의 현자인 부처에 대한 한 명의 서양의 낭만주의자의 해석이다. 나는 싯타르타도 아니고, 하루종일 정원을 가꾸어서 식량을 조달할 수도 없고. 나는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야 하고,이스라엘이 이란에 폭격을 가하고, 21세기에 쿠테타를 목격하고,
“이것이 인간이라고, 말세의 지치고, 탐욕스럽고, 거칠고, 천진하면서도 세련된 우리 인간, 죽어가는, 죽고자 하는 유럽인이라고, 악덕으로 인해 병들고, 자신의 몰락을 앎으로써 열광적으로 생기를 얻고, 똘똘 뭉친 열정이자 넌더리나는 권태, -----” 낭만주의에는 낭만이 있지만, 낭만주의자의 과장과 사춘기의 치기가 같이 버물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낭만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