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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남조양 南朝梁 (502년~557년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양나라 세 번째 왕조
출처:중국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남조양 南朝梁 (502년~557년 )
양조 (502년~557년 [1] )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 3위왕조가 되자, 옹주(雍州) 자사소연( 刺史昭延)이 대신하여 남제를 칭하고 딩두젠캉(定都建康, 현재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다국호량(國號 梁)은 소연봉( 萧延封)이 고량군에 있어 국호를 양으로 정했다.황실의 성이 소량이라 하여 소량이라고도 한다.
양무제는 남조 각제 중에서 여정도라고 할 수 있다다스리는 황제는 그가 황제로 칭하기 전에 말단에 있었다.정권기구는 몇 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제말의 부패한 통치를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다.그래서 즉위 후 시행되는 정책들은 대부분 양(梁)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었다. [2] 남조량 후기 국정파탄 후경난, 전화위복으로 남조 사회경제는 피폐해졌다파괴. 이후 남량황실은 제위 쟁취를 위해 북제와 서위를 지원하게 되었고, 이 두 조가 허를 틈타 남량의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남조의 힘이 크게 약화되어 남약북강의 형세가 정립되었다.태평 2년(557년) 진패는 먼저 폐제하고 진을 국호로 바꾸었다.
남조 양향국 오십오 년.기타슈 다케나리 2년(560년) 북주가 장강 위에 있는 것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견강부회한 남량 잔해.또 북주에는 소연의 손자 샤오詧( 扶 。)을 강릉에 서량(西 。)으로 세우고 삼제를 전하였는데, 수멸진( 。 。陳)의 전투 전에 그 제호를 없앴다.
중문명 양외문명 Liang Dynasty 별명 남량, 소량 시간범위 502년에서 557년 도성 건강 주요도시 강릉, 양주, 복주, 익주, 회혜 등의 어종 금릉아언화물인 양철오수, 태청풍락 등의 인구수 2100만 명(기원서 539년) 주요 민족한족 국토면적 262만㎢(546년)의 개척자
카테고리
1국호
2 역사
▪ 양조초립
▪ 나날이 교만하고 사치스럽다.
▪후경난량
▪ 정국 문란
▪원제 피살
▪남량 멸망
삼강역
4 정치
▪ 선출관
▪ 법
▪ 사족
5 경제
▪ 농업
▪ 수공업
▪ 비즈니스
▪ 화폐
▪ 부역
▪ 호적
6 테크놀로지
▪ 역법
▪ 지리학
▪ 광물학
7 문화
▪ 문학
▪문학비평
▪ 종교
8민족
9인의 군사
10 사회
11번 외교
▪와 북위
▪와 동위
▪와 서위
12제왕계
국호
양천감 원년(元年, 502) 남제(南齊) 종실(宗室) 소연( 萧延)이 제(帝)의 이름으로 세웠으며, 국호를 개호하여 양(都建康, 지금의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으로 지었다.소연봉지는 고량군에 있고 고국호는 들보이다.황제의 성이 소량이라 하여 소량이라 하였다. [3]
역사
양조 초립
양나라의 설립자 소연은 서한상국(西漢相國) 소하의 25세손[4]으로, 본래 남조제의 황실에 속해 있었다.부친 소순지는 소도성대 송자립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소순지 일가는 제명제 소란( 杀 宗)이 대살종실을 짓는 동안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동란 후소보권 재위시절, 내난구흥 외적삼작[5].소연은 제나라가 통치한 지 오래되지 않아 대신할 뜻을 세웠다.그가 양양에서 암암리에 크게 '잠조 기구'를 준비한 것은, 매우 많다.대나무와 나무를 베는 격으로 단계에 가라앉으면 배처럼 밀폐된다.[6]영원2년(501년) 겨울소연이는 양양에서 거병하였다."하루니, 나옵니다.단계죽목에서 큰 배를 싣고춘일 대판'이라 했다.제나라의 통치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민심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소연기'병후' 백성이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철마를 얻는다.'오천 필, 갑사 삼만 명' 한 때기세가 크게 떨치다.전쟁, 소연한 군대가 건강으로 쳐들어가다소보권을 죽이고, 소보융을 세워라.위제. 물론 입소보융은 소연일 뿐입니다.대제칭제전 필요한 것완충 단계. 양천감원년 (502년) 제나라의마지막 황제 제화 소보융장제나라의 통치권은 양왕 소연에게 넘어갔고,소연은 정식으로 건강하여 나라를 다스렸다대들보를 위하다.
양무제 소연
양무제 소연
양무제 소연( 初期延)의 통치 초기에는 정사에 유의하면서 송(宋)과 제(齊) 이래의 병폐를 바로잡았다.그는 부임하자마자 궁녀 이천사(宮女)를 장병들에게 하사하는 것 외에 후궁(後宮)악부(樂府)서해(西解) 등에 있는 부녀자들을 모두 풀어주도록 조서를 내렸다.또한 동난후(東昏後)에 설치된 음란물 난역(亂役)을 폐지하고, 학예락(習禮樂)선갑병( 。甲兵) 이외에는 여비를 일체 금지하여 절약을 부르짖었다.그는 신체가 튼튼하여 늘 천옷만 입고 채소는 먹는다.또 겸허하게 기다려 중의를 받아들이다.그는 공동부치목석함 각각 1개씩, 다음과 같이 규정하도록 조령하였다.과연 재위자에게 미심쩍은 정사다더 이상의 의론을 하려거든, 나무로 된 함을 비방하여라.공로재능억울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돌을 던지다.편지. 그는 동으로써 후를 혼미하게 하였다.여비는 후궁으로 꽤 많다.정사를 방해하다. [7]
서진 말기 융자(永嘉)의 난 이래 한족 정권은 강남에 편안했고, 북방 소수민족 정권과의 군사 싸움에서 줄곧 끌려다녔다.그러나 경제문화에서는 북방정권보다 낫고, 남쪽에서는 동오 때부터 강남에 정권을 잡은 이래로 남조 경제문화가 가장 왕성했던 때가 바로 양조였다.이는 소연 본인의 문화적 소질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연의 문화적 수준은 남조황제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는 황제가 된 이래로 국내에는 일종의 온화한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경제 발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하고 있다.경제는 동시에 문화 발전도 중시한다.당시는 여소량 정권대치한 북위로부터효문제 탁발홍 사후국력이 급전직하했다.소연에 양나라를 세운그러면서 북위 내부는 길게 시작됐다.수십 년간의 내란과 농민 봉기,그동안 실력과 에너지가 없었다.소량에게 진공 태세를 갖추어, 소량에게 공격을 가하게 하다.군사 압력의 약화에 편승할 수 있다국내의 경제와 문화를 힘써 발전시키다.
나날이 교만하고 사치스럽다.
소량의 통치가 확고해지고 국력이 상승세로 돌아서자 소연은 점점 더 큰 공을 세우고, 아첨하며 간언하기 시작했다.마침내 경건한 불교 신자로 발전하여 그는 영불을 믿기 시작했다. [8] 혼자 불교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지배지역에서도 불교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주변의 왕공 귀족들도 불교를 믿도록 부추긴다.나라가 온통 난장판이니 정치적 부패가 뒤따른다. [9] 정치적 부패도 필수이로 인해 군사상의 무능이 가중되었다당시 북방 정권은 이미 분열되었지만, 그래도동서위에서 갈라져 나오다온 북제와 북주경각 방면을 개혁하고 정비하다끼니때기 실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전시하다.
남조 건강평면도
남조 건강평면도
양무제 때 송(宋), 제(齊)나라의 전조권이 중하고 임금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황실 골육상잔의 피해를 입혔으며, 이를 위해 정권이 소족을 위해 탈취한 점을 감안해 전비제도를 폐지하였다.이렇게 되면 제왕들은 더 이상 전비(典 签)에 얽매이지 않고 실권 있는 번진(藩鎭)이 되었다. [10] 그들이 지방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중앙에 맞서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고, 양무제의 가교에 의한 것일 뿐이다.양무제의 고심이 훗날 황실의 내란을 초래하였으니, 이는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도착했습니다. [11] 양무제나라는 또 동진이 세족의 가문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다의 지지와 유지는 나라운재는 백여 년까지 이어졌다그래서 중요시했다.세족대를 회복하고 향상시키다가권. 왕실에 대한 권리.자손과 세족과 공경 대신일률적으로 우대와 관용을 베풀어 심히방종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죄를 지어도법적 제재도 받지 않는다.양무제 '소간형' 기록법, 자공경대신, 함이국경하지 아니함.옥이라는 뜻. 간사한 관리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물건뇌물로 번진 장마당, 재적자가 많고 시왕후"자제, 얼마나 교만하고 음란한가" [12] 양무제께서도 이런 폐해를 잘 아셨지만금지하지 않았다.
양무제 후기의 정치 부패, 관리의 횡령, 사회 기풍이 겉만 번지르르하고 사치는 사치, 인민들의 도피 등은 모두 매우 심각하다.하침은 무제 상소에게 "천하의 호구(戶口호구)가 줄어들어 오늘날의 급무, 군(軍)은 주(州)의 통제를 받지 못하고, 현은 군(軍)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백성은 명령을 받을 수 없으므로 모든 일을 유배하며 큰 성에 의지하든지 마을에서 모이면 안 된다.오늘 재수는 모두 불구자를 좋아하고 염미하는 사람은 드물다. [13] "이런 정곡을 찌르는 의견들은 양무제가 전혀 듣지 않았다.바로 이렇게, 양무제가 이황을 하나 만들었다.실과 세가 대족을 중심으로 한 썩음몰락한 지배 집단.이 집단은 황제의 관용을 받고 향유하였다갖가지 특권이 있다."희첩백실, 종복.수천, 농사짓지 않고 짜지 않고금의왕식' [14] 그러나 인민은 그에게 있다그들의 착취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온다.사람마다 고생을 싫어하고, 집집마다 생각이 혼란스럽다.이것이 바로 양조 말년의 동란과 멸망이다망원적 원인.
후경난량
양무제는 말년에 내정에 실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북위와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처리하는데 있어서, 특히 후경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어리석은 일이 많았다.
천감 13년(514년) 10월, 북위에서는 사도고조를 대장군으로, 평촉대도독으로, 15만의 장병을 양익주로 진격시켰다. 또 푸는 파군 북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양지는 유성, 해강은 금행을 낳고, 견침은 검각에서 나와, 단번에 대들보를 얻으려 하였다. 전쟁은 서로 승부가 있을 뿐, 위군은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양파에서 지형을 조사 측량하러 파견된 수리 공사가는 모두 회수 부근은 모두 토사지, 아니었다고 한다.견고하여 댐을 쌓을 수 없다.양무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재서양저우에서 크게 인부를 고용하였다장병 20만 명의 날에 이르다밤에 공사를 하는데, 2년이 걸렸다.북위가 동위로 갈라진다서위 이후, 쌍방 중대.해마다 교전하다 보니, 남쪽을 상대로 하는공격은 평탄한 추세이고, 양조 역시 시작되었다쇠락, 대규모 대북조군사행동은 멈췄다. [15] 근데양무제는 늘 시기를 찾아, 대북한 조정에 집착하였다.공격한다. 중대동 2년(5)47년), 동위 대장 후경은고환지자가 고징에게 핍박을 받아 들보에 항복을 빌었다.양무제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북으로 여겼다.벌의 때가 왔다.
후경은 가오징과 갈등을 일으키며 다른 나라로 떠났다.양무제가 후경을 받아들인 것은 양강역 확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한 신중함이 부족했고, 후경의 실상을 충분히 예측하지 못해 큰 실수를 저질렀다.후경이 물러난 뒤 양무제는 태청 원년(547년) 겨울 조카 소연명을 북으로 보내 후경과 호흡을 맞추려 했다.소연명은 전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역사에 따르면 "제장은 연명(延明)과 군사, 연명(延明)은 맞으면 안 되지만 구름은 임시방편으로 만들었다. [16] "결국 양군은 동위 고징에게 대패했고, 소연명과 몇 명의 주요 장수 후귀손, 조백초는 동위에 포로로 잡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양무제는 전방의 패배로 소연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동위와 화해를 시작했다.후경은 태청 2년(548년) 봄 동위에 패해 양조의 수양으로 도망쳤다.이번 전투에서 양나라의 쇠약하고 무능이 후경에 큰 자극을 주었다.다카스미 씨는 화해를 구하는 그의 절박한 마음을 보고 후경을 샤오위안밍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양무제는 뒷생각 없이 두말없이 허락했다.후경은 양무제가 소연명으로 바뀔 것을 알고 수양에서 기병하여 건강을 진격하여 양말의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7] 사기는 이번 난을 후경지란, 일명 '태청의 난'이라고 불렀다.
후경은 태청 2년(548년) 10월 초주(지금의 안후이추 현)를 공격했고, 양무제는 조카 샤오정더에게 장강 수비를 명했다.소정덕은 큰 배 수십 척을 보내 나포했다고 사칭하고 후경을 몰래 데려와 강을 건넜다.양무제는 태자 소강에게 방역을 명했고, 소강은 선양문을 수비하는 임무를 소정덕에게 맡겼다.소정덕은 무리를 거느리고 장건교(張建橋)에서 후경을 맞으며 의양문으로 들어갔다.11월에 소정덕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후경을 정승으로 삼았다.후경군은 타이청(궁성)을 공격해 타이청을 겹겹이 포위했다.후경은 태청 3년(549년) 태성에 쳐들어와 양무제를 태성 안 문덕전에 가둬버렸다.양무제는 울분이 치밀어 식사가 끊어져 문덕전에서 굶어 죽었으며, 향년 여든여섯 살이 되었다.
후경은 건강성에 입성해 장군들에게 그의 위명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깨끗하게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젠캉은 동진 이래 본래 역조의 명승지로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경제가 번영하고 도시가 남북으로 각각 40리씩 28만여 가구에 이른다.후경의 난으로 금은보화가 약탈당하고 궁궐 도서 유물이 소실됐다.또 교통이 두절되어 식량이 들어가지 못하였고, 쌀값이 1리터에 7~8만원까지 비쌌다.의사들은 굶주린 주제에 고니와 비단옷을 입고 금옥을 안고 침상가에 엎드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양세사대부… 및 후경의 난, 살찐 피부, 걷지 못하는 체위, 약한 체위, 추위에 못 이겨 창졸자만 죽는다.[18]남조 사대부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도시 전체의 아사자가 절반이 넘는다.일찍이 여러 해 동안 번영했던 건강은 이번 전란을 통해 거의 사라졌다.후경은 태청 3년(549년)에 소정덕과 갈등을 겪었다.소정덕은 파양왕 소범을 비밀리에 불러, 그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후경을 토벌하도록 하였다.후경이 소식을 듣고 소정덕( 杀正德)을 죽이고, 태자 소강을 황제로 세우고 양간(梁 梁)의 문제(文帝)로 삼았다.대보 2년(551년) 후경은 간문제를 폐살하고 예장왕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석 달도 안 돼서 희동이를 버려두고 밀실에 가두었다.이번에는 아예 자기가 황제가 되어 한왕이라 칭하였다. [19]
정국이 문란하다
후경군은 태청 3년(549년) 건강을 무너뜨린 뒤 삼오지구로 진군했다.양오군, 오흥군에는 각각 정병이 수천 명씩, 회계군에는 정병 수만 명이 있어 저항할 수 없었다.삼오는 풍요로움으로 가장 잘 불리며, 강건한 경제의 주요 원천이다.후경군은 세 오나라에 근거하여, 사람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며, 인구를 약탈하고 북방으로 팔려가 노예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현지 생산은 크게 파괴되고 경제는 피폐되었다. [20] 대보원년(550년) 후경다른 길에 군대는 광릉을 무너뜨리고 광릉은 거의 공성이 되었다.대보원년(550년) 후경군은 장강서진을 거듭했다.대보 2년(551년)은 강주영주(호북 한구)를 깨고 강릉에 바짝 다가섰다.소서는 서위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할한중은 서위에게 주었다.후경군은 소오에게 패배했고, 소오는 강주와 구주를 탈환했다.대보 2년(551년) 소서파 대장인 왕승변은 군 동하를 거느렸다.진패는 먼저 정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왕승의 변론을 도왔다.왕승 변군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출발하여 배가 수백 리나 꼬여 있다.진패는 먼저 남강(간강수)에서 나와 왕승과 함께 백모만(백모만, 지금의 강서구강북)에 계사되었다.
왕승이 고모에 대해 변론하다.후자는 만여 명을 태우고 남주로 건너와 기슭에서 도전하면서 선적으로 전사를 물속에서 공격했다.왕승은 작은 배는 모두 퇴각하고 큰 배만 남아 양안에 정박하도록 변명하였다.후자는 왕군이 도망가려고 하는 줄 알고 앞다투어 출격하였다.왕승은 큰 배에게 그 귀로를 변명하고, 큰 북을 치며, 후군과 강 한가운데서 싸웠다.후군이 대패하고 병졸들이 물에 나가 죽은 지 수천 명이 되었다.후자감시신면만이 있어서, 산졸을 모아 건강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왕군은 승세를 타고 역양을 점령하였다.이번 수전으로 후경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후경은 후자감의 실패 소식을 듣고, "대구하여 눈물을 흘리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한참 동안 누워 있다가, '오살내공(誤殺內公)'이라고 탄식하였다. [21] "고모가 어느 것이 되었을 때 왕승 변군은 장공주로 밀고 가서 밀물을 타고 진회하(秦淮河)에 들어가 건강성 아래로 쳐들어갔다.천패는 먼저 후경에 병사가 많을 것을 보고, 여러 장수들에게 병력을 나누어 처리하게 하고, 또 활과 노를 날려 그 뒤를 2천여 명이 가로채게 하였다.후경이 대패하여 건강성으로 도망가다.후경은 승성 원년(552년) 4월 장수 양곤에게 피살됐다.이로써 후경의 난은 4년 가까이 끌어온 끝에 끝이 났다.
소연이 수용한 동위의 반신후경이 강남에서 난동을 부리고, 북제와 북주정권이 소량왕조를 통해 후경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양( 腐败)의 정치가 부패할 대로 부패했고 군사적으로도 치명적이었다.북제는 소량( 大片 土地)의 강북의 넓은 땅을 빼앗아 양조(陽朝)의 강북 화이허( 两岸河) 양안을 모두 놓쳤다.또 북주(당시 서위)도 소량의 파촉과 형양 등지를 난데없이 빼앗았다.양조(梁朝)의 국토는 불과 몇 년 사이에 3분의 2를 잃었고, 양자강 하류 일대는 아직도 들보의 통제하에 있을 뿐이다.
원제가 피살되다
왕승변, 진패선 등 여러 장병들의 권유로 소재는 강릉에서 황제로 등극했다.진패는 먼저 명령을 받들어 경구(京口, 현재 장쑤(江蘇)성 진강(鎭江)에 진을 쳤고, 왕승은 변진( 辩鎭)이 건강을 지켰다.양원제는 현허를 숭상하고, 포악하고, 포악하고, 속이 좁으며, 또 강고하여 학계의 거인이자 정계의 난쟁이였다. [22] 554년, 남조 양승성이 3년 10월 9일, 서위주국 우근, 우문호, 대장군 양충이 오만을 영병하고 강릉에 입영하였다.이듬해 정월 초이틀에 강릉이 함락되었다.왕승이 제때에 구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니, 양원제는 곧 피살되고 마흔일곱 살이 되었다. 조신과 백성 가운데 강직한 자는 모두 약탈당하고, 진패선의 아들 진창과 조카 진욱본은 양원제 궁중에서 일을 하였으나, 이번에도 장안으로 끌려갔다.강릉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23]
양원제의 조카인 고 소명태자의 아들 샤오천은 서위의 주둔 감시 아래 괴뢰의 황제로 끌려가 불과 300리 떨어진 '뒷다리'라는 작은 왕국을 건설했다.강릉은 낙후되었고, 진패선(陳覇先)과의 서신왕래를 변명(辩言)하던 왕승은 그 다음 해 2월 양원제의 9남 소방지(方方智, 543~558)를 건강(建康)으로 맞아 제위를 준비했다.강릉조정이 무너진 뒤 2월, 열세 살 난 진안 왕 소방지는 건강에서 왕승들의 변명과 진패들의 선립으로 양왕이 되었다.양조의 막중한 임무가 왕과 진의 어깨에 떨어졌다.
소방지가 건강에 이른 직후, 북제가 허를 찔려 들어왔고, 북제(동위 이미 북제선대) 문선제 고양(高洋)이 서위(西偉)의 세력 확장을 달가워하지 않고 양나라가 패한 틈을 타서 나눠 갖기 위해 그의 아우상당 왕고환(王高涣)을 남향으로 보내 동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정양후소연명(貞陽後 。明)을 호송하여 양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당왕(黨王) 고환(高涣)을 보내 그를 송환하고, 왕승에게 변명하고 맞이하라고 편지를 쓰자 왕승은 선불응이라고 변명하였다.권고가 무효되자 승성은 4년 3월 동관(지금의 안휘소호시 남동)까지 제군병을 보내, 왕승은 서주 자사배의 횡영병을 변명하여 막아내고 배지횡패당하자, 왕승은 두려움에 떨면서 직접 병사를 이끌고 출둔하고 고모숙하였다고 변명했다.그 사이 왕승은 변은 북제(北齊)와 다른 한편으로 진패선(陳 。先)과의 서신(書信)을 주고받았다.진패는 먼저 불납소연명을 고수하였으나, 왕승은 배(培)의 횡패와 함께 점차 연약해져 북제(北齊)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5월 소연명은 건강(建康), 즉 황제(皇帝), 개원천성(改元天成)하여 양왕을 세자로 삼았다고 변론하였다.
진패는 무효를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왕승이 일방적으로 주인 행세를 하며 독단적으로 폐립한 것을 미워하였고, 9월에는 서도와 후안이 모두 진패와 수륙을 병진하여 돌로 성벽을 급습하였다.왕승은 느닷없이 방심하다가 금방 포로가 되어 바로 교살되었다고 변명했다.이런 상황에서 소연명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0월에 양왕은 황제, 개원 소태는 양경제였다.진패는 먼저 상서령(尙書令)도독(都 督)을 거쳐 외제 군사(軍制)와 기마장군(車馬將軍)양(揚)남서(南書)2주(州)의 자
남량이 멸망하다.
진패선
진패선
광주 도독 진패는 기세를 몰아 자신의 세력을 키웠으며, 최근 10년 동안의 전쟁을 거쳐 진패선은 장강 하류 지역을 기본적으로 통제하였다.때가 되자 태평이년(557)에 그가 세운 양경제(梁敬帝) 소방지( 智方智)를 버리고 스스로 강건(康 。)을 세워 진(陳)나라를 세웠다.이로써 양조가 멸망하여 모두 사제와 오십오 년을 지내게 되었더라
소씨 후손은 북주의 난익 아래 강릉에 서량(西统)을 세워 국통(國統)을 이어갔지만, 서량(西梁)은 사실 북주에 딸린 정권으로 국소(國小力)이 약하고, 콧김을 받들다가 개황 7년(587년) 수(朝)에 폐위되어 선제(宣帝) 소좌( 萧 。 。)와 명제(明帝) 소좌( 。)에 이은 주소종삼세(主萧宗世宗)가 모두 33년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소씨의 역대사는 북주(北周)를 봉하고 수(隋)나라를 공경하였으며, 소박( 萧岿)의 딸은 수양제 양광지(楊廣之)의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후양국(後陽國)이 폐지된 후에도 소씨는 수나라 중앙정부와 강릉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수나라 대업 13년(617년)에 소제(弟弟) 소암(岩岩)의 손소선(孫萧萧)이 강남에서 소량( 萧梁)으로 복위하여 국토 동~삼협(三硖)·남진교지(南進交地)·북거한천(北 川漢川)을 모두 부화시켜 승병 40여만(勝兵)·무덕 4년, 당 고조(唐高祖) 이연공(李延命)·이정(李靖) 등이 소량( 萧)을 공격하여 강릉을 포위하고 백성들에게 개성으로 투항해, 장안에 투항하였다. [24]
강역
소량시주군은 대부분 소제의 옛 모습을 답습하여, 천감(天監)에 주 23, 군 350, 현 1천이백이십이십이, 그 이후에는 접혀진 것이 많았으며, 대동중(大同中)은 1707주로 늘어났다.그중 광주치소 판위.양과 북위는 화이허 남북에서 교전을 벌여 경계에 차이가 많이 난다.중대통년 동안 양인들이 대거 북벌하여 한때 회북의 몇몇 성읍을 수복하고, 이어서 한중(漢中)을 수복하고, 후경(後景)을 내리며, 양(梁)은 하남의 땅을 얻었으나, 지금은 매우 짧다.후경란에 이르러 강북은 모두 북제에 빠졌고, 촉지는 서위에 빠져서 얼마 되지 않아 양들이 죽었다.
양조강역도
양조강역도
정치
관직을 선택하다
양무제는 지배계급 내 부문인 벌대족과 한문소족의 갈등을 중시하여,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조정을 하였다.그는 한편으로는 문벌 속 사람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확대하며, 이 사람들을 정권 안정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아울러 비천한 재능과 학식을 중시하는 이들을 기무자로 기용했다.예를 들어, 그가 매우 총애하는 주이는 "오경을 두루 섭렵하다.문벌의 대족과 한족이 함께 중하였던 것은 양무제의 관리 선발의 기본 정책이었다. [26]
법률
양무제는 상서를 위해 채법도( 蔡法度)를 삭제하도록 하여 양률을 제정하였다.이후 상서령 왕량(王亮令), 이부상서범운(李部尙書범운), 상서복사(尙書 仆射)심약(沈約) 등을 개정하도록 하였다.송제는 진율만 따랐을 뿐 창제는 하지 못했고, 이때부터 비교적 완벽한 형률을 갖추기 시작했다.그러나 양율'은 '권세보다 서자에 급급해' [27] 관리들의 범죄에 대한 단속은 거의 없다.
인민은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앉아야 할 때에는 노인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모두 면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도망하면 온 집안이 모두 구금되고 힘든 노동에 처하게 된다.양무제가 추진한 '백성은 불쌍히 여겨도 우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정책에 서민은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한 번은 양무제가 남교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자, 한 노인이 어가를 막고 황제가 사용하는 법을 비난하며 백성에게는 엄격하고 권세자에게는 너무 관대한 것이 오래갈 수 없었다[28].
사족
양무제는 재위 기간 중 원래 하급 사족들을 신용하여 비서 자문 기구로 들어갔다.양무제의 주요 착안점은 저급 사족인 유학수양과 문화적 소질, 통치 경험이 기존 고급 사족을 넘어서고 있는 만큼 그들을 많이 의지해 통치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이 때문에 그는 송제군주처럼 한랭한 사람들의 지휘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정책정신은 처음부터 한미사인과 한인들이 유학수양문화적 자질을 높이도록 독려하면서, 표준에 달한 것을 각급 정으로 흡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권. 한인의 위상 변화 외에 대들보진고급 사족의 상황도격심한 변화가 일어나다. [29] 양무제천감은 송, 제2세대의 경험을 정리하여, 현실을 직시하여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특히 천감은 7년, 위진 이래의 관품 9품을 18반으로 개편하였다.
경제
농업
중대통 2년(530년) 남북 2주 자사를 제외한 진경지는 "강호제주와 함께 쉬면서 육천경을 개간해야 한다.2년 뒤면 창고가 꽉 차요." [30]영주의 서계(지금의 호남 숙포), 가장 비옥한 땅, 강북의 장수춘, 지방 천여 리에 비탈진 밭이 있다.'옹주' 양양 좌우, 전토비량, 상재야택, 곳곳에 '31'이 있다.회남군, "고숙려활… 량주미산뽕나무, 밭이랑이 마주보고, 콸콸 고함을 치며, 논두렁이 수놓아진다." [32]
농업 생산의 발전은 남방의 양식을 가득 채웠다.또한, 남조정권의 곡식 비축도 크게 강화되어 국가의 창고는 수도 한 곳에 용수창(龍首倉, 즉 석진창), 태성년창(臺城年倉), 남당창(南堂倉), 상평창(常平倉), 동, 서태창(西太倉), 동궁창(東宮倉) 등이 있었고, 수도 밖에 대곡창(大 。倉), 구소창, 전당창(錢堂) 등이 있었다.
양나라 후기, 정치적 부패로 인한 무차별적인 계급갈등은 첨예했다.태청 2년(548년)의 후경지란(後景之亂)은 각종 갈등을 증폭시켰다.전란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강남 사회경제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6대 경제는 흥망성쇠의 전환점이 됐다.)의 전환점이 되었다.강남 농업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수공업
남조 방직 수공업의 발전이 매우 신속하여, 송시 "사면포백의 용서, 의복의 천하복귀" [33.대들보에 금박을 입힌 나사는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짜여졌다.《오월전화지(吳越錢志)》는 직문( 织文)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늘 사람 귀신 신 용 상 궁전들의 띠는 지극히 교묘하여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금의 생산량이 매우 많은데, 양후경은 장수할 것에 반하여 "금만필을 계구하여 군인이 두루마기를 입게 하였다." [34].
상업
양시의 상업은 특히 성행했다. 수입 화물은 대부분 상아, 코뿔소, 주옥, 유리, 길베(일명 고베, 목면포), 향료 등이며, 중국의 수출 화물은 대부분 능견 비단 등이다.'송서이만전론(宋書·이만전론)'에서는 외국의 진품을 말하며 부귀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에 '주박계로상(舟 舟系商상인)사(使官)가 서로 예속(交속)하였다'고 한다.양시에 외국 상선들이 때때로 일 년에 십여 차례 온다.당시에 북위의 귀족은 이미 타락하여, 남방의 상품(남해산 화물)을 소비하도록 하였는데, 양들이 남방의 물건을 많이 들여와 변진과 위가 서로 시에서 북방산을 교환하였다.품. 교광2주관이 되다니, 금세 거액이 된다.부. 송시원 대작 교주거침만사임만환대자재는 만 원이나 된다.무릇 광저우의 자사를 쓰려면, "광저우의 자사는 성문을 통과하면 3천만 위안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벼락부자가 되지 않는 법이 없다.관리가 횡령한 돈의 수로 보아 당시 중국과 외국에서 거래된 화물의 수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35]
화폐
양조천감오수
양조천감오수
남조 고도성장 경제의 특징 중 하나인 화폐의 대량 유통과 함께 국가 과세의 계산단위가 되는 것이다.가와이 교수는 "남조 관사(官私)의 균형이 필요한 화폐"라며 "호족과 상인들이 품질이 좋은 화폐를 장악하고,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현상이 일어나 화폐의 이중 구조로 변했다"고 말했다.남조의 쇠망은 화폐의 악순환 유통과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과거 역사학자들을 위해 별로 손대지 못했던 공방형의 연구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수서.식화지》에는 서술량이 있다.무제시 강남의 지역별 화폐 계산 기준요점: 자파령이동, 팔십이 남남, 이름동전이요, 강이요, 영이상이요, 칠십이상이요, 서전이요.
사실 이때 열등품의 제조 수법은 이것뿐만이 아니라, 양식도 단순하지 않다.깎는 것 외에도, 종종 여동( 铜銅)을 얻기 위해 외곽전문을 다듬는다.또, 작업 감소를 주조하는 사람도 매우 많아, 예를 들면, 동진의 '침랑오수(沈郞五铢)'와 같이, 전문을 '오주(五朱)'라 한다.남조오수(南朝五铢)와 관련된 문제를 알게 되면 남조의 경제 상황, 나아가 육조 당시의 일상을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부역
양조 때는 3조 형식의 재산세가 거의 유지됐다.양천감은 초년에 한때 '계정위포(計丁爲布)'[36]로 비단을 바꾸었으나, 후에는 '삼조'[37]가 나왔다.세금을 계산하거나 재산세를 말하는 것은 사인을 제외한 모든 개인 가구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남조의 가장 중요한 세금이다.이 밖에 남조에는 중요한 세금, 즉 관시의 세금이 있었다.
남조 관부의 장인은 돌아가며 휴가를 보낼 수 있었는데, 건무 원년부터 시작되었다.양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릇 세운 것은 재관과 무관하게 모두 고용하고 차용하여 그 일을 이루게 한다"고 하였다. [13] 징발된 것이 아니라 '개자해고'를 위한 노동자를 만드는 것은 병역법상의 중대한 진전이다.
호적
양무제는 황적을 더 이상 검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지만, 사적을 정리하는 데서 입적하여 동진가필의 《사족보(士族報)》, 송유조의 《백민보(白民報)》에 근거하여 보국(報局)을 설치하고 《백가보(百家報)》를 개정하려고 하였는데, 모두 80권으로, 동남사족이 따로 한 편을 세워서 백가 아니 되었다.양무제는 백가사족과 동남사족의 계보를 정할 수 있었으나, 부민들이 계속 뇌물을 받고 황적을 고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결국 백가토족과 동남사족과 부민들이 사족을 사칭하여 병존하여 각각 자신의 세력대로 노동민중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양곽조는 민중이 중역을 피하기 위해스스로 수족을 끊어 버리거나, 선비족에게 의탁하여 예속되다속명( 属名)이라고 합니다.이름은 동진의 사사이다부가, 호강들이 호적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줄곧 변하지 않았다. [35]
환온이 창토단하고, 양무제가 정한 《백가보》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족이 조정과 민가를 다투는 형세를 바꿀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이 때문에 창장 유역의 인구는 실제적으로 증가했지만, 우연히 남아 있는 몇 개의 호구 숫자에서는 인구 증가를 볼 수 없었다. [35]
과학 기술
역법
《대명력》에 채택된 기타일부 데이터는 모두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데이터였다.조충지(祖冲之)는 대명 6년(462년)에 유송(劉宋) 정부에 《대명력(大名力)》을 바쳤으나 총신인 다이파싱(戴法興)의 반대로 반포되지 못했다.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주야이는 양천감 3년(504년)과 천감 8년, 9년 세 차례에 걸쳐 『대명력』을 채택하도록 했다.실측으로 새 달력을 정밀하게 검증한 이 최고의 역법은 마침내 천감 9년(510년)에 정식으로 공포되어, 조충지(祖 。之)의 유망을 실현하였다. [38]
지리학
남제육징(425-494년) 160개 지기를 모아 지역별로 지리서 149권, 목록 1권으로 만들었다.양인 임방(460-508)은 육징(陸澄)의 『지리서(地理書)』를 바탕으로 804개의 저서를 추가해 『지기(地記)』 252권으로 만들었다.안타깝게도 이 저작들은 모두 실전되었다. [39]
광물학
위진남북조 시기, 재지질광물학 방면에서 비교적 큰 성과를 거두었다.양대에는 새로운 탐광 이론 저서인 《지경도》가 나왔는데, 원서는 이미 산실되어 후세 사람들의 인용문 중에서 일부 내용만을 볼 수 있었다.주요 관점은 지표식물을 지하광물과 연계시켜 지식물이 광물을 찾는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산에는 파, 아래에는 은, 풀에는 적수, 아래에는 납, 풀에는 황수, 아래에는 유기 등이 있다.그것의 이론은 식물에 광석을 찾도록 지시하거나 생물 지구 화학에서 광석을 찾는 방법의 시작이다. [40]
양대도홍경(452-536년) 어떤 광물에 대한 감별방법은 매우 과학적이었는데, 예를 들면 초석과 박소가 연소하였을 때 자줏빛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구별하였다.초석인 KNO3의 경우 불꽃이 보라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도홍경은 "불은 불로 시퍼렇게 피운다"며 "구름은 진소석"이라고 말한다.박소화는 바로 망초(Na2SO410H2O)이며, 불은 보라색이다. [40]
문화
문학
소명태자소통
소명태자소통
소연의 문화 중시도 사온 나라가 문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고, 문화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하다.위로는 황제, 아래로는 왕공 귀족까지 모두 유아를 영광으로 여기며 자신의 문화적 소질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래서 소량일조( 萧梁一朝)에는 그리 길지 않은 55년 동안 큰 업적을 남긴 문학가들과 시인들을 대거 배출했다.《소명문선》의 저자 소통, 《송서》의 저자 심약, 《남제서》의 저자 소자량, 《문심조룡》의 작가 유협, 《시품》의 저자 종두, 그리고 문학의 명사여강침수, 사출, 출출, 도개, 출정, 출정, 출정, 구지,균유옥신유소유준, 도홍경, 그리고 훗날 황제가 된 소연의 두 아들, 간문제 소강, 원제 소서도 물론 있다.어쨌든 소량일조의 문학의 성황은 중국 역사에서 성당과 북송만이 견줄 만했을 것이다.
제량·산수를 강하한 제재.자연계와 일상생활에까지 확대되는 여러 가지 물상이다.양대에는 궁체시가 다시 출현하였는데, 예술에서는 더욱 음조 선색과 수전의 속성을 중시하였는데, 게다가 시가의 격률이 점차 정형화되었기 때문에, 작품들이 더욱 정연하게 정리되었다.뛰어난 작가로는 셰, 심약, 장쑤, 허슨, 오균이 있으며 이들의 뛰어난 작품은 작품성을 벗어나지 않지만 신선하고 명려한 느낌을 준다.변려문과 천의 발전은 시와 상응하나, 문장의 응용 범위가 시보다 넓기 때문에,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재 외에도 가국의 슬픔과 궁핍함, 대세태를 볼 수 있다.그런 아이러니. 양대 후기예로부터 문풍(文風)의 나쁜 경향은 더욱 심해지고, 시문(詩文) 작가는 서릉(徐陵)과 음경(陰 。)에만 좋은 작품이 있었다.
문학 비평
문학 비평은 남조 시대에 있었다.충분한 발전. 문학 창작이 융성함에 따라 문학체제에 대한 분석과 문학적 성질의 토론이 더욱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문필의 변별은 당시의 문학 창작에 대한 인식과 요구를 반영하여, 영명성율론은 중국어의 음률이 운문에서 구성되는 미의 운용 법칙을 총결산하여, 당시의 신체시와 후세의 율시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유협의 '문심조룡'은 문학비평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대저로 체계적이고 논술이 치밀하며 문학 창작의 다양한 측면을 다뤘다.뛰어난 《시품》은 중요한 시론 전문 저서이다.오언시에 대한 생각예술 표준, 작가의 유파와 구체적인 평가에 대해 모두 매우 많은 정밀한 의견들이 있다.
종교
남조 불교에서 양무제 소연에 이르다전성기에 이르러 무제는 도교를 숭배하고 즉위한 지 3년(504년)째인 4월 8일, 속세를 거느리고 2만 명을 거느리고 중운전 중각에서 친제문을 발원하고 사도귀불하여 불교에 대한 신앙을 표명하였다.애경광택개선동태 등 제대사가 있다.만들어진 불상은 광택사의 장팔미타 동상, 애경사의 장팔찬단상, 동상, 동태사의 10방 불은상 등이다.재회로는 수륙대재, 우란분재 등이 있다.또 승민 등을 가승으로 삼았다.4부(즉, 비구 등 4중) 무차대회에서 4번 동태사에 몸을 던져 사노가군신이 1억 위안을 받다.돈을 바쳐 환궁함으로써 절의 경제를 살렸다.
양무제와 역사를 중시하노니, 하느님.감이년(監二年, 503)에는 남사문인 만돌라( 仙)와 승가 가보로( 。家波羅)에게 공통된 경서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유명한 역사의 요체는 부남에서 무제의 초청을 받아 동쪽으로 온다.그는 선사의 보지를 특히 존경한다.십송의 명가법을 도읍승정으로 뛰어넘어 스스로 백의승정이 되려 한다.또 율부가 번성하여 명법(命法)으로 《출요율의(出要 律儀)》 열네 권을 편찬하여 경내에 배포하고 모두 명령대로 행하였더라이 밖에 무제는 《네반》 등 대승경의 금육식(禁肉食)을 적극 주창하였고,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쳐 한나라 이래 승도들이 삼정육을 먹는 습관을 바꾸었다.
무제가 독실하여 불교를 좋아하였으므로, 그는장남 소명태자 소통(昭明太子 萧統), 3남 간문제(纲文帝) 소강( 萧綱550-551), 7남 원제 소오(552-554)도 좋은 부처였다.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곧 후경의 사변으로 절탑이 파괴되고 승자가 죽임을 당하며 건강불교는 쇠미해졌다.
불교 종파 중 장로사선종(善宗)에 속하며, 양보통년 남천축승인 보리달마가 중국에 건너와 선법을 전파한 후 무제(武帝)의 명성을 쌓았고, 보통 8년(527)에 건강을 맞았다고 전해진다.그러나 달마는 남조 양무제 소연( 萧延)의 어구가 많아 갈대를 건너 강북에 있는 장로사로 왔는데, 장로사는 일찍이 불교 선종의 유명한 절 중 하나였다.천백 년 동안 남경 장로사는 비바람과 창상하여 거의 폐허가 되었다.강기슭에 바짝 붙어 있는 초지(初地)의 창장(長江) 수로가 불안하고, 제방이 자주 무너지는 바람에 장로사 건물군도 파괴됐다는 기록도 있다.
민족
한나라 말 진나라 말, 북방 한나라 사람이 크다.동진남조 때에 이르러서야 한족의 문화가 점차 전파되어 원래 한인들이 이미 도착한 상술한 점선 지역을 따라 밖으로 발전하였다.남조량 때 남방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은 주로 만, 번뇌, 비속, 화료 등이다.한나라 문화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전파되면 그들과 충돌하고, 또 충돌을 통해서 점차 어느 정도 융합이 되어간다.
"만"은 남방의 여러 민족이다.그중 인원이 가장 많아 남방 각 소수민족의 통칭으로 자주 쓰인다.야만족은 1개에는 장사, 1개에는 무릉만, 1개에는 파군, 남군만이다.장사와 무릉만, 자칭 반호박 뒤.이들의 거주지역은 창사, 무릉(현 후난성) 일대다.원래 무릉 일대에 살았던 이들은 척추, 각시, 진각, 유각, 무족으로 나뉘어져 있어 5대 만으로 불렸으며 일부는 의도, 천문, 파동, 건평, 강북의 여러 군(지금의 후베이성 서부)에 살았다.
남조량 시대에는 한나라 사람이 장수하였다강 유역의 발전은 우선 '만'족과 접촉한다.한족의 통치자는 야만족 인민들이 그들에게 세를 주고 부역을 나가 싸울 필요가 있다.이 때문에 이들은 야만족 거주지역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41]
군사
자작농 경제가 계속됨에 따라쇠락하고, 국가가 통제하는 편입이 수일 동안 감소하여, 징병제의 쇠미는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샤오옌이 출병하여 모병이 주력이 되었다. [42] 소연( 萧延)은 이를 통해 얻은 만여의 정용을 주축으로 이를 다짐하며 동진을 토벌한다.후경이 난을 일으키면 주로 모병에게 의지한다.소량근왕의 사단도 수십만, 거의 모병[43]이었다.
조정과 장수들은 모병을 남발하고소농경제에 대한 해악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이렇게 많은 인구가 투모를 명분으로 탈영에 나서면 그들이 부담해야 할 노동을 다른 소농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양전•고조사론》: "양씨에게는 나라가 있다.태반의 사람이 모두 부곡을 이루다.농사를 짓지 않고 밥을 먹거나 누에를 치지 않거나 왕후를 섬기거나 장수를 의지한다.처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물건을 쫓다.번성과 함께 고기를 잡으며, 재를 도와 모뢰가 되다.죄가 없고 선량한 사람을 핍박하여 민개(民盖, 다함께 다함)가 떠돌아다니고 읍이 모두 황폐화되었다. [44] 대가족 호강인데 모병 기회를 이용하다개인 무력을 확충하라.그들의 중앙정권에 대항하는 역량을 크게 강화하였다.
사회
사회 풍토에 있어서, 사서계.삼엄함, 즉 '사서(士書)의 날, 하늘으로부터의 격'이다.혈연관계에 따라 구별되는 문벌의 고문과 차문의 형성, 고정은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일정한 인품, 관품이 한 가족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또한 남북조 후기는 문벌제도가 쇠락한 시기다.양조는 사회경제·문화의 발전에 따라 남북조 후기부터 문벌 제도가 쇠락하였다.
외교
요북위
자주 초빙 문의를 하는 가운데, 남북조.정예는 사자를 잘 뽑아서 상대에게 중시를 받았다.양과 북위의 초빙 문의가 오갔을 때 양사입 업하가 경동한다.귀 나그네 제자들이 많이 모이고 구경하여 문전성시를 이루다.위사지량 역시 [46].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서로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위와의 남조 전쟁양무제 천감 6년(507년)의 종리(宗里, 지금의 안휘 봉양 동북부) 전투는 엄청난 전투였다.먼저 천감 5년, 양출병은 북벌에 나섰고, 제제(帝帝)인 임천왕(林川王) 소홍(萧宏)은 "기구가 새롭고 군용이 뛰어나서 북인들은 남에서 수십 년도 안 된 것으로 여겼다"고 장병을 불렀다.낙구(현재 안휘회원 서남 낙하진)에 대군이 진주했다.3월에 회수가 6~7척 폭등하고, 위예승.비행기가 화공으로 진격하다. 양군이 분개하여 외침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모두 일당백이 되었다.위군은 전 전선이 무너지고, 기갑을 잃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이 10여만 명이고, 참수된 인원도 대략 비슷하며, 생포된 사람도 5만 명이다.회수와 함께 수백여 리 떨어져 있어, 시체가 서로 침적되어 있다.양전이 곡식 기구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소와 나귀와 노새가 그 수를 셀 수 없더라양에게 대해서는 매우 중대한 전투에 대한 저항과 남침 저지하다 위 군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국내 모두 일정한 의미가 있다.남북 간에 전쟁 규모가 크지 않고, 일정한 조건하에서 남조(南朝)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남방사회 경제개발에 모두 유리한 조건이다. [41]
여동위
동위 시대에는 대장 후경자공로를 믿고 동위의 권신 고환에게는 승복할 수 있었지만, 그의 아들 고징에게는 승복하지 않았다.고환이가 죽자 고징은 즉시 고환이의 명을 빌어 후경을 불러들였다.후경은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하남에 서위로 항복하였다.후에 낭중정들을 보내어 건강케 하였으니 열세 주께로 대들보를 내리라양무제가 군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논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후경이 변덕스러워서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그러나 양무제는 나후경이 '즉시적북가청( 。北可淸)'이라 하여 양수(梁水)의 유실지 복원에 도움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북벌(北 。)에도 드문 기회였다.그는 후경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하남왕을 봉하고, 하남과 북군사를 모두 감독하였다.후경이 물러난 뒤 양무제는 대동칠년(541년) 겨울 조카 소연명을 북으로 보내 후경과 호흡을 맞추려 했다.소연명은 전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양군은 동위에 대패했고, 소연명은 동위에 포로로 잡혔다.양무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동위와의 화해를 시작했다. [28]
후경은 이번 량에서 동위와 사귀었다싸움에서 완강히 싸우다.동위의 군진이 대란하여 잇달아 낙마하다.의동삼사 류펑성(劉豊生)이 타박상을 입었고, 현주(顯州)이사 장준업(張準業)도 후경에 포로로 붙잡혔다.후경은 모용소종과 수개월 동안 대치하면서 식량이 다 떨어졌다.양군은 패배하여 와서 구출할 수 없었다.후경은 이듬해(542년) 봄 동위에 패해 량수이양으로 도망쳤다.
양무제는 빈번히 동위와 의논하였다와, 소연명의 석방을 요구한다.동 위는 그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을 보고 후경을 소연명과 바꾸자는 요구를 내놓았다.양무제는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결국 두말없이 허락하였다. 아침에 너희는 소연명을 풀어주고, 저녁에는 후경의 머리를 보내 주겠다.후경은 양무제가 소연명으로 바뀔 것을 알고 수양에서 기병하여 건강을 진격하여 양말의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역사는 이번 동란을 후경의 난이라고 불렀다. [28]
여서위
550년, 대들보를 타고 내란을 향하다양충(楊忠) 우문태(宇文泰)계 대장은 량안루( 梁路)를 포위했고, 안루(安陸) 인근 제성 양수장(楊守將)도 서위에게 투항했다.이때부터 '한동의 땅 위' [47].같은 해 2월 양충은 승세를 타고 석성에 도착해 강릉 진격을 준비했다.쇼둥왕은 사신을 급히 보내 양중과 담판하고, 국토를 팔아서 서위에 복종시키기로 맹약을 맺어 위이 석성으로 봉하고,양들은 안륙을 경계로 삼아 종속되고 양성자를 보낸다"고 말했다.소서가 이처럼 관대한 것은 서위의 힘을 빌려 그와 황위를 다투던 형 소륜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다.서 위는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다.곧, 서위는 약속대로 소륜을 죽였다.소오는 553년 황제(양원제)로 불렸다.이때 그의 여덟 동생 샤오기도 이미 촉나라에서 황제로 칭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가 후경을 부탁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소해를 물리치고 왔다.소서는 다시 한 번 서위에서 구원을 청했다.우문태는 군신들에게 "촉을 가져와 들보를 만들자. [48] 그는 늦고 느린 대장군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갑사 1만 2천명과 마완필을 거느리고 산관(産關)에서 촉(蜀)을 겸행하였고, 서위는 쉽게 그해에 촉(蜀)을 점령하였다.이로써 우문태의 입맛은 더욱 커졌다.554년 11월, 서위군은 강릉을 함락시켰고, 늑대를 방에 끌어들인 소서는 피살되었다.서위는 양나라 수만 명의 인구를 얻어 장안에 들어가 삼군을 노비로 나누어 주었다.양조(梁朝)의 침범은 우문태(宇文泰)의 군사적인 성공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의 통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제왕과 세계.
묘호
시호
명휘
연호
재위 시간
대대로 내려오는 것
능호
서기 502년, 샤오제선을 거쳐 황제라 칭하고, 건국호 수량을 받았다.도읍을 정하고 강건함을 사칭한다.남량.
태조
문황제
소순지
-
-
소연지부
건릉
고조
무황제
소연
천감
보통
대통
중대통
대동
중대동
태청
502년-519년
520년-526년
527년-528년
529년-534년
535년-545년
546년
547년-549년
소순지자
수릉
-
-
소정덕
정평
549년
소연의 조카.
-
태종
약문의 황제
소강
대보
549년-550년
소연삼자
장릉
고종
소명의 황제
소통
-
-
소연장자
안녕릉
-
안황제
소환
-
-
소통장자
-
-
-
소동
천정
551년
소연증손, 소환지자
-
서기 551년, 샤오동선위 후경이 제를 칭하고, 나라를 고쳤다.한나라를 호령하고, 도읍을 정하였다.'후한(後漢)'이라는 별칭이 있다.
서기 552년, 샤오기칭제, 복국호량, 정도성도
-
무릉정헌왕
소기
천정
552년
소연팔자
-
서기 552년, 샤오독칭제, 복국호량, 도읍지를 정하다.강릉.
세조
효원황제
소오
승성
천정
승성
승성
552년
553년
553년
554년
소연칠자
영릉
-
민황제
소연명
천성
555년
소연의 조카.
-
-
황제를 공경하다
소방지
소태
태평하다
555년 10월~556년 8월
556년-557음력 10월
소오구자
-
서기 557년, 샤오방지선위 진패선제국호를 개종하여 천을 천으로 하고 도읍을 정하다건안, 사명은 남진이다.
서기 557년, 샤오장칭제, 복국호량, 정도.무창.
-
무열태자
소방등
-
-
소서는 장남이고, 소장은 장지이다.아버지
-
-
-
샤오좡
천계
557년-560년
소두장손
-
서기 555년, 샤오詧은 황제로 칭하고, 나라를 따라 대들보를 부르는 격으로 도읍을 정하다.강릉, '서량”。
고종
소명의 황제
소통
-
-
소연의 장남은 소황지이다.아버지
안녕릉
중종
선 황제
소조
대정
555년-562년
소연지손, 소통삼자
평릉
세종
효명 황제
우뚝 솟아 있다
천보
562년 2월-585년 5월
소우삼자
현릉
효정황제
소종
천보
광운
585년 5월~5월85년 12월
586년-587년
우뚝 서 있는 아들.
-
서기 617년, 샤오밀링하여 양왕을 칭송하고, 이듬해에 황제라 칭송하였다.국호의 보와 같이 악양을 수도로 정하다.。
-
안평충렬왕
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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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천의 아들, 샤오센조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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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문헌왕
샤오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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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천지손, 샤오천지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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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 프레이즈
명봉
617년 10월~618년 4월 (왕)
618년 4월~621년 (제자)
소종종종자
梁朝(502年~557年 [1] ),中国南北朝时期的南朝第三个朝代,由雍州刺史萧衍取代南齐称帝,定都建康(今江苏省南京市)。国号梁,以萧衍封地在古梁郡,故定国号为梁。因皇室姓萧,又称萧梁。
梁武帝在南朝各帝中,算得上一个励精图治的皇帝。他称帝之前,在基层政权机构干过一些年,有一定的从政经验,对齐末的腐朽统治耳闻目睹。故即位后,所实行的政策大都对梁的政治的安定,经济的复苏发展有益。 [2] 南朝梁后期国政败坏,导致侯景之乱,战火使南朝的社会经济遭到巨大破坏。随后南梁皇室为争帝位又纷纷招引北齐和西魏为援,使这两朝趁虚攻夺了南梁大片土地,南朝实力大为削弱,奠定了南弱北强的局势。太平二年(557年),陈霸先废帝自立,改国号陈。
南朝梁享国五十五年。北周武成二年(560年)北周攻灭了位于长江上游郢州的南梁残余。另外,北周还扶植萧衍的孙子萧詧在江陵建立西梁,传三帝,隋灭陈之战前取消其帝号。
中文名梁 外文名Liang Dynasty 别 名南梁、萧梁 时间范围502年 至 557年 都 城建康 主要城市江陵、扬州、福州、益州、会嵇等 语 种金陵雅言 货 币梁铁五铢、太清丰乐等 人口数量2100万(公元539年) 主要民族汉族 国土面积262万平方公里(546年) 开创者萧衍
目录
1 国号
2 历史
▪ 梁朝初立
▪ 日渐骄奢
▪ 侯景乱梁
▪ 政局紊乱
▪ 元帝被杀
▪ 南梁灭亡
3 疆域
4 政治
▪ 选官
▪ 法律
▪ 士族
5 经济
▪ 农业
▪ 手工业
▪ 商业
▪ 货币
▪ 赋役
▪ 户籍
6 科技
▪ 历法
▪ 地理学
▪ 矿物学
7 文化
▪ 文学
▪ 文学批评
▪ 宗教
8 民族
9 军事
10 社会
11 外交
▪ 与北魏
▪ 与东魏
▪ 与西魏
12 帝王世系
国号
梁天监元年(502年)由南齐宗室萧衍称帝所建,改国号为梁,都建康(今江苏南京)。以萧衍封地在古梁郡,故国号为梁。因为皇帝姓萧,又称萧梁。 [3]
历史
梁朝初立
梁朝的建立者萧衍为西汉相国萧何的二十五世孙 [4] ,本属于南朝齐的皇室。其父萧顺之在萧道成代宋自立的过程中,曾立下汗马功劳。在齐明帝萧鸾大杀宗室的过程中,萧顺之的一家没有被杀。东昏侯萧宝卷在位时期,“内难九兴,外寇三作” [5] 。萧衍看到齐朝统治已不会很久,已立意取而代之。他在襄阳暗中大作准备“潜造器械,多伐竹木,沉于檀溪,密为舟装之备” [6] 。永元二年(501年)冬,萧衍于襄阳举兵,“是日建牙,出檀溪竹木装舸舰,旬日大办”。因当时齐朝的统治已腐朽之至,完全丧失了民心,故萧衍起兵后“百姓愿从者,得铁马五千匹,甲士三万人”,一时声势大振。萧衍经过两年的战争,萧衍的军队攻入建康,杀掉萧宝卷,改立萧宝融为帝。当然,立萧宝融只是萧衍在代齐称帝前的一个必要的缓冲阶段。梁天监元年(502年),齐朝的最后一个皇帝齐和帝萧宝融将齐朝的统治权转交给梁王萧衍,萧衍正式在建康称帝,将国号定为“大梁”。
梁武帝萧衍
梁武帝萧衍
梁武帝萧衍统治初期,尚能留心政务,对宋、齐以来的种种弊端有所纠正。他上台伊始,除了将宫女二千赐与将士外,又下诏将凡属后宫、乐府、西解等处的妇女全部放遣。又废止东昏侯设立的淫刑乱役,禁绝除习礼乐、缮甲兵以外的一切浮费,提倡节俭。他身体力行,经常只穿布衣,食菜蔬。又虚己待下,采纳众议。他诏令公东府置木、石函各一,规定如果对在位者所未注意的政事欲加议论,可投谤木函;如果以功劳、才能、冤枉未为人所知,投石函。他曾以东昏侯的余妃为后宫,颇妨政事。 [7]
自从西晋末年永嘉之乱以来,汉族政权偏安江南,在与北方少数民族政权的军事斗争中一直处在被动的态势。但在经济文化上却强于北方政权,而南方从东吴开始在江南建立政权以来,南朝经济文化最盛的时期就是梁朝。这与萧衍本人的文化素质是分不开的,萧衍的文化水准在南朝皇帝中可以说是成就最高的。他当皇帝以来,在国内是实行一种温和的政策,以发展经济为重点,在发展经济的同时也重视文化的发展。当时,与萧梁政权对峙的北魏却自从孝文帝拓跋宏死后,国力急转直下。在萧衍建立梁朝的同时,北魏内部开始了长达几十年的内乱和农民起义,这期间一直没有实力和精力对萧梁实行进攻态势,使萧梁可以趁着军事压力的减弱大力发展国内的经济和文化。
日渐骄奢
当萧梁的统治已经稳固,国力开始成上升势头之后,萧衍已经渐渐变得好大喜功、喜谀恨谏起来。最后竟发展成为一个极为虔诚的佛教徒,他开始相信佞佛起来。 [8] 不仅他一个人喜欢佛教,他还在统治区域内极力营造佛教气氛,鼓动周围的王公贵族也信佛。搞的举国上下一片乌烟瘴气,随之而来的是政治上的腐败。 [9] 政治上的腐败也必然导致军事上的无能,加上当时北方政权虽然已经分裂,可从东、西魏分裂出来的北齐和北周经过各方面改革和整顿实力得到相当发展。
南朝建康平面图
南朝建康平面图
梁武帝时,鉴于宋、齐朝的典签权重,权力集中于皇帝一身,造成皇室骨肉相残,政权为素族所夺取的情况,为此,梁武帝废除了典签制度。这样一来,诸王不再受制于典签,成为有实权的藩镇。 [10] 他们在地方上胡作非为,就是抗衡中央,闹出乱子,也不过是受梁武帝一番家教了事。梁武帝的一片苦心,后来竟导致了皇室内乱,这是他所没有料到的。 [11] 梁武帝还认为,东晋是凭借世族大家的支持和维系,国运才延续到百余年,所以他特别重视恢复和提高世族大家的权利。对皇室子孙、世族大家和公卿大臣,一律加以优待、宽容,甚至放纵。即使他们犯了罪,也不受法律制裁。史书记载梁武帝“疏简刑法,自公卿大臣,咸不以鞫狱为意。奸吏招权弄法,货赂成市,在滥者多……时王侯子弟,多骄淫” [12] 。梁武帝也深知这些弊端,但并未加以禁止。
梁武帝后期政治腐败,官吏贪污,社会风气浮华奢侈,人民流移逃亡,都极严重。贺琛给武帝上疏指出:“天下户口减落,诚今之急务,郡不堪州之控总,县不堪郡之衷削。百姓不能堪命,各事流移,或依于大姓,或聚于屯封。今天下宰守,皆尚贪残,罕有廉美者。 [13] ”这些中肯的意见,梁武帝根本听不进去。就是这样,梁武帝造就了一个以皇室、世家大族为中心的腐朽没落的统治集团。这个集团,受到皇帝的宽容,享有种种特权。他们“姬妾百室,仆从数千,不耕不织,锦衣王食” [14] 。可是人民却在他们的盘剥下流离失所,以至“人人厌苦,家家思乱。”这就是梁朝末年走向动乱和灭亡的最根本的原因。
侯景乱梁
梁武帝执政末年不仅在内政上失误百出,在对外处理与北魏的关系上,特别是在接纳侯景问题上,更是蠢事不少。
天监十三年(514年)十月间,北魏以司徒高肇为大将军、平蜀大都督,将兵十五万进攻梁益州,另令傅竖眼出巴郡北,羊祉出庾城,奚康生出锦行,甄琛出剑阁,想一举取梁之蜀地,战争互有胜负,魏军无功而还,差不多就在同时,梁武帝听信北魏降人王足的建议,想筑堰,以淮水灌魏寿阳城。梁派去勘测地形的水利工程家都说,淮水附近都是沙土,不坚实,不可筑堰。梁武帝听不进去,在徐、扬两州大发民工及将士二十万人日夜施工,历时二年。北魏分裂为东魏、西魏后,双方连年交战,对南边的进攻趋向平缓;而梁朝也开始走向衰落,大规模对北朝的军事行动停止了。 [15] 但是梁武帝总想寻找时机,对北朝进行攻击。中大同二年(547年),东魏大将侯景为高欢之子高澄所逼,求降于梁。梁武帝欣然接纳,并以为北伐的时机来到了。
侯景与高澄矛盾激发,遂投奔他国。梁武帝接纳侯景是出于扩大梁疆域来考虑的。但他缺乏慎重地对待此事,未充分估计到侯景的实际状况,从而造成很严重的失误。侯景降梁后,梁武帝在太清元年(547年)冬,派侄儿萧渊明进攻鼓城,想与侯景互相呼应。萧渊明是一个根本不会打仗的人。据历史记载:“诸将与渊明议军事,渊明不能对,但云‘临时制宜’。 [16] ”结果梁军被东魏高澄打得大败,萧渊明和几个重要将领胡贵孙、赵伯超都被东魏俘虏,梁死亡士卒数万人。梁武帝听到前方失败萧渊明被俘的战报,只得开始与东魏议和。太清二年(548年)春天,侯景被东魏击败,逃到梁朝的寿阳。这次战斗,梁朝的衰弱无能,给了侯景一个很大刺激。高澄见他求和心切,提出以侯景换萧渊明的要求。梁武帝不考虑后果,竟满口答应。侯景知道梁武帝将用他换回萧渊明时,便在寿阳起兵进攻建康,造成梁末一场空前动乱。 [17] 史称这次动乱为侯景之乱,又称“太清之难”。
太清二年(548年)十月,侯景攻下谯州(今安徽滁县),梁武帝命侄子萧正德防守长江。萧正德遣大船数十艘,诈称截获,暗中接济侯景渡江。梁武帝命太子萧纲筹划防务,萧纲把防守宣阳门的任务交给萧正德。萧正德率众于张建桥迎接侯景入宜阳门。十一月,萧正德自称帝,以侯景为丞相。侯景军攻台城(宫城),将台城重重包围。太清三年(549年),侯景攻入台城,将梁武帝禁闭在台城内的文德殿。梁武帝忧愤交加,膳食断绝,被饿死在文德殿,终年八十六岁。
侯景在攻入建康城后,告诉诸将,要杀个干净,好让天下人知道他的威名。建康自东晋以来,本是历朝胜地,商业和手工业发达,经济繁荣,城南北各四十里,达二十八万多户。至侯景之乱,金银宝饰财物被抢劫一空,宫阙图书文物多被烧毁。又因为交通阻隔,粮食运不进去,米价高至七、八万钱一升。那些士大夫们,个个饿得鸠形鹄面,穿着罗绮,抱着金玉,伏在床边等死。颜之推曾这样描述,“梁世士大夫……及侯景之乱,肤肥骨柔,不能行步,体羸气弱,不耐寒暑,坐死仓卒者,往往而然” [18] 。南朝士大夫受到了一次毁灭性的打击。全城饿死者超过半数。曾经多年繁荣鼎盛的建康,经过这次战乱,几乎荡然无存了。太清三年(549年),侯景与萧正德发生矛盾。萧正德密召鄱阳王萧范,要他带兵讨侯景。侯景获得消息,杀萧正德,立太子萧纲为帝,是为梁简文帝。大宝二年(551年),侯景又废杀简文帝,立豫章王萧栋为帝。不到三个月,又废萧栋,将他锁在密室里面。这次索性自己当起皇帝来,称汉皇帝。 [19]
政局紊乱
太清三年(549年),侯景军攻破建康以后,一路向三吴地区进军。梁吴郡、吴兴各有精兵数千,会稽郡有精兵数万,都不敢抵抗。三吴最称富庶,是建康经济的主要来源。侯景军据有三吴,烧杀掳掠,无恶不作,并掳掠人口,贩卖到北方去当奴隶,致使当地生产遭到严重破坏,经济凋蔽。 [20] 大宝元年(550年),侯景另一路军破广陵,广陵几乎成了一座空城。大宝元年(550年),侯景军一路沿长江西进。大宝二年(551年)破江州、郢州(湖北汉口),逼近江陵。萧绎向西魏求援,割汉中给西魏。侯景军被萧绎击败,萧绎夺回江州和邱州。大宝二年(551年),萧绎派大将王僧辩率军东下。陈霸先率精兵三万人助王僧辩。王僧辩军从寻阳出发,舳舻数百里。陈霸先从南江(赣水)出溢口,与王僧辩会师于白茅湾(今江西九江北)。
王僧辩到了姑孰。侯子鉴率步骑万余人渡南州,在岸上挑战,一面以船载战士在水面进攻。王僧辩命小船全部退走,只留大船停泊于两岸。侯子鉴以为王军要逃跑,争相出击。王僧辩令大船断其归路,击鼓大呼,与侯军战于江中心。侯军大败,士卒赴水死者数千人。侯子鉴仅以身免,只好收集散卒逃回建康。王军乘胜攻占了历阳。这次水战,侯景军受创惨重。侯景听到侯子鉴失败的消息,“大惧,涕下覆面,引衾而卧,良久而起,叹曰:‘误杀乃公’。 [21] ”姑孰成后,王僧辩军向前推进到了张公州,乘着涨潮,进入秦淮河,兵临建康城下。陈霸先见侯景兵多,便令诸将分处置兵,又派弓弩手二千横截其后。侯景大败,逃回建康城。承圣元年(552年)四月,侯景被部将羊鲲所杀。至此,历时近四年之久的侯景之乱才告结束。
先是由萧衍容纳的东魏叛臣侯景在江南作乱,北齐和北周政权通过萧梁王朝对镇压侯景的过程中看到梁的政治已经腐败到了极点,军事上也不堪一击。北齐趁乱夺取了萧梁的江北大片土地,使梁朝江北淮河两岸之地尽失。同时,北周(当时还是西魏)也趁乱夺取了萧梁的巴蜀及荆襄等地。使得梁朝的国土在短短的几年之内就丢掉了三分之二,只有沿长江下游一带还在梁的控制范围之内。
元帝被杀
经王僧辩、陈霸先等各路将士劝进,萧绎在江陵称帝,即历史上的梁元帝。陈霸先奉命镇守在京口(今江苏镇江),王僧辩镇守在建康。梁元帝崇尚玄虚,暴戾凶狠,心胸狭隘,又刚愎自用,既是学界巨人,又是政界侏儒。 [22] 554年,也就是南朝梁承圣三年十月初九,西魏柱国于谨、宇文护,大将军杨忠领兵五万,进兵江陵。次年正月初二,江陵陷落。王僧辩未及时救援,梁元帝旋即被杀,年四十七岁。 朝臣与百姓中强壮者都被掠走,陈霸先的儿子陈昌、侄子陈顼本在梁元帝宫中值事,这次也被掳至长安。江陵几乎成了一堆废墟。 [23]
梁元帝之侄、故昭明太子之子萧詧在西魏驻军监视下,被扶为傀儡皇帝,建立了一个地方不过三百里的"后梁"小王国。江陵陷落后,王僧辩与陈霸先书信往来不断,经反复商议,于次年二月迎接梁元帝第九子萧方智(543—558年)至建康,准备称帝。江陵朝廷覆灭之后,二月,年仅十三岁的晋安王萧方智在建康被王僧辩和陈霸先立为梁王。梁朝的危亡重任,落在了王、陈二人的肩上。
萧方智到建康不久,此时北齐趁虚而入,北齐(东魏已被北齐禅代)文宣帝高洋不甘心西魏势力南扩,也想趁梁国破败,前来瓜分,派其弟上党王高涣领兵南向,护送原被东魏俘虏的贞阳侯萧渊明来登梁国帝位。派上党王高涣送他南还,并写信要求王僧辩迎接,王僧辩起先拒不允应。见劝说无效,承圣四年三月,齐军兵至东关(今安徽巢湖市东南),王僧辩遣徐州刺史裴之横领兵拦击,裴之横战败被杀,王僧辩在惊惧之中亲自领兵出屯姑熟。其间,王僧辩一方面与北齐、另一方面与陈霸先书信往来不断。陈霸先坚持不纳萧渊明,但王僧辩随着裴之横败亡,渐渐软弱下来,屈从于北齐压力,五月,萧渊明入建康,即皇帝位,改元天成,立梁王为太子。
陈霸先苦争无效,恨王僧辩单方做主,擅自废立,九月,徐度、侯安都与陈霸先水陆并进,突袭石头城。王僧辩猝不及防,很快就被俘,马上被绞杀。面对这样的形势,萧渊明只得退位。十月,梁王即皇帝位,改元绍泰,是为梁敬帝。陈霸先自任尚书令、都督中外诸军事、车骑将军、扬、南徐二州刺史。
南梁灭亡
陈霸先
陈霸先
广州都督陈霸先趁势发展壮大自己的势力,经过近十年的战争,陈霸先基本控制了长江下游地区。他见时机已经成熟,便在太平二年(557年)废掉他立的梁敬帝萧方智,自己在建康称帝,建立陈朝。自此,梁朝灭亡,共历四帝,五十五年。
虽然萧氏后代在北周的卵翼下在江陵建立西梁,延继着萧氏的国统,但西梁实际上是附属于北周的一个政权,国小力弱,仰人鼻息,最终在开皇七年(587年)被隋朝废除,共传宣帝萧詧、明帝萧岿、后主萧琮三世,存在共三十三年。 然而由于萧氏历代事奉北周、隋朝甚为恭谨,萧岿之女还成为隋炀帝杨广之皇后,因此在后梁国废除后萧氏在隋朝中央政府与江陵仍保有一定的政治影响力。
隋朝大业十三年(617年),萧岿弟萧岩之孙萧铣在江南复辟萧梁,国土东至三硖,南尽交址,北拒汉川,皆附之,胜兵四十余万,武德四年,唐高祖李渊命李孝恭、李靖等攻打萧梁,包围其都江陵,萧铣不忍连累百姓,开城投降,到长安后,被李渊斩首,萧梁的这次复辟共历五年。 [24]
疆域
萧梁时州郡大都沿袭萧齐之旧,天监中有州二十三,郡三百五十,县一千二百二十二,其后多有折置,大同中增到一百零七州。其中广州治所番禺。梁与北魏交战于淮河南北,境界颇有出入。中大通年间,梁人大举北伐,一度收复淮北若干城镇,继而又收得汉中,侯景降梁,梁又得河南之地,但为时甚短。至侯景乱后,江北全陷于北齐,蜀地则陷于西魏,不久而梁亡。
梁朝疆域图
梁朝疆域图
政治
选官
梁武帝重视统治阶级内部门阀大族与寒门素族之间的矛盾,在用人上采取调和政策。他一方面采取重用门阀中人,维护和扩大他们在政治上的地位,使这部分人成为稳定政权的支持力量。同时,也注重寒门才学之士,起用他们担任机要之职。例如,他十分宠信的朱异,“遍览五经,尤明礼、易” [25] ,就出自寒门。门阀大族和寒门并重,是梁武帝选拔官吏的基本政策。 [26]
法律
梁武帝还令蔡法度为尚书删定郎,制定出《梁律》。以后又令尚书令王亮、吏部尚书范云、尚书仆射沈约等加以修订。宋齐只沿用晋律,无所创制,至此开始有了比较完备的刑律。但《梁律》“急于黎庶,缓于权贵’ [27] ,对官吏犯罪几乎没有约束。
人民犯了罪,如该从坐,不论老幼都不得免:一人逃亡,全家都要被囚禁,罚作苦工。对于梁武帝推行的“罔恤民之不存,而忧士之不禄”的政策,普通老百姓是感觉最深切的。有一次,梁武帝到南郊祭天,一个老人挡住御驾,指责皇帝使用的法律,对老百姓太严,对权贵则太宽,这不是长久之计 [28] 。
士族
梁武帝在位期间信用一批原来的低级士族进入秘书咨询机构,以至宰相机构。梁武帝的主要着眼点在于这批低级士族儒学修养、文化素质和统治经验已经或正在超过原来的高级士族,必须越来越多地依靠他们巩固统治。因此,他虽然没有象宋、齐君主那样信用寒人掌机要,但其政策精神从一开始可以说就在鼓励寒微士人和寒人提高儒学修养、文化素质,并把达到标准的吸收入各级政权。除了寒人地位的变化外,梁、陈高级士族的状况也发生极大变化。 [29] 梁武帝天监初总结宋、齐两代经验教训,面对现实,实行了官制改革,特别是天监七年,更进一步将魏晋以来的官品九品改为十八班。
经济
农业
中大通二年(530年),陈庆之除南北司二州刺史,“江湖诸州并得休息,开田六千顷。二年之后,仓廪充实” [30] 。郢州的序溪(今湖南淑浦),“最为沃壤”,江北如寿春,“地方千余里,有陂田之饶”。雍州“襄阳左右,田土肥良,桑梓野泽,处处而有” [31] 。淮南郡,“姑熟饶旷……良畴美柘,畦畎相望,连字高薨,阡陌如绣” [32] 。
农业生产的发展,使南方的粮食充盈。同时,南朝政权的粮储也大为充实,国家的仓库,仅首都一地就有龙首仓(即石头津仓),台城年仓,南塘仓,常平仓,东、西太仓,东宫仓等,首都之外的大粮仓有豫章仓、钩矶仓、钱塘仓等,“并是大贮备之处”,此外,国家及诸州郡,各有仓库。
梁朝后期,由于政治腐败,横征暴敛,阶级矛盾尖锐。太清二年(548年)的侯景之乱,使各种矛盾更加激化。战乱长达四年之久,对江南社会经济带来极大破坏,成为六朝经济由盛而衰的一个转折点。此后,江南农业也就走上了下坡路。
手工业
南朝纺织手工业发展迅速,宋时“丝绵布帛之饶,衣复天下” [33] 。梁时镶嵌金箔的罗,已织得十分精美。《吴越钱币志》提到织文图案,有“天、人、鬼、神、龙、象、宫殿之属,穷极巧妙,不可言状”。锦的产量很大,梁侯景据寿将反,“启求锦万匹,为军人袍” [34] 。
商业
梁时商业尤盛。输入货物多是象牙、犀角、珠玑、琉璃、吉贝(又写作古贝、木棉布)、香料等,中国输出货物多是绫绢丝锦等。《宋书·夷蛮传论》里说外国珍货,为富贵人所喜爱,所以“舟舶继路,商(商人)使(使官)交属(往来)”。梁时,外国商船有时一年到来十几批。当时北魏贵族已经腐化,也需要南货(南海货)供消费,梁就多输入南货在边镇与魏互市,交换北方产品。做交广二州官,很快就致巨富。宋时垣闳作交州刺史,任满回来,带资财值钱一万万。凡作广州刺史,无不暴富,俗话有“广州刺史但经城门一过,便得三千万(钱)”的说法。从官吏贪污的钱数来看,当时中外交易的货物,数量并不小。 [35]
货币
梁朝天监五铢
梁朝天监五铢
南朝高度发展的经济的特征之一,即货币大量且普遍的流通,同时作为国家征税的计算单位。川胜指出,由于南朝官私均需货币,豪族与商人掌握品质良好的货币,产生劣币驱逐良币的现象,遂造成货币的二重结构。南朝的衰亡,实与货币的恶性循环流通有不可分的密切关联。由此可知,过去鲜为历史工作者措意的“孔方兄”,实有甚大的研究价值。《隋书.食货志》有一段叙述梁武帝时江南各地域货币计算标准的重要记载:自破岭以东,八十为陌,名曰东钱。江、郢以上,七十为陌,名曰西钱。
事实上,此时劣货的“制造”手法不仅此一种,样式也并非单一。除了剪凿之外,往往还为取馀铜而磨凿内外郭、钱文。另外,偷工减料铸造者也十分地多,如传世的东晋“沉郎五铢”,钱文即作“五朱”。了解了南朝五铢的相关问题,更有助于理解南朝的经济状况,乃至六朝时人的日常生活。
赋役
梁朝时期以三调为形式的财产税基本上维持下来。梁天监初年,一度改调帛为“计丁为布” [36] ,但后来又有“三调” [37] 。赀税或者说财产税,适用于士人以外的所有的人户,是南朝最重要的税收。此外,南朝还有一项重要的税收,即关市之税。
南朝官府工匠可以轮番休假,自建武元年开始。到梁朝时,“凡所营造,不关材官,及以国匠,皆资雇借,以成其事”。 [13] 营造工人“皆资雇借”,而不再是征发而来,是役法上的一个重大的进步。
户籍
梁武帝不敢再检查黄籍,却想从整理士籍入手,依据东晋贾弼之所作《士族谱》,宋刘湛所作《百姓谱》,设立谱局,改定《百家谱》,凡八十卷,东南士族另立一部,不在百家之内。梁武帝能定百家士族和东南士族的谱系,但不能防止富民的继续纳贿改黄籍,结果只能是百家土族、东南士族和富民冒名的士族并存,各按自己的势力去剥削劳动民众。梁郭祖深说,民众为避免重役,或自断手足,或投靠士族作附隶,称为属名。梁朝的属名,就是东晋的私附,足见豪强挟藏户口,一向保持不变。 [35]
自桓温首创土断,至梁武帝定《百家谱》,都说明士族与朝廷争夺民户,朝廷并不能改变这个形势。因此,长江流域人口实际是增加了,在偶存的几个户口数字上却看不出人口的增加。 [35]
科技
历法
《大明历》采用的其他一些数据也都是当时最好的数据。祖冲之于大明六年(462年)上书刘宋政府献上《大明历》,但因遭到宠臣戴法兴的反对而未能颁行。他逝世后,他的儿子祖暅又于梁天监三年(504年)和天监八年、九年三次上书,要求采用《大明历》。经实测检验新历为密,这部当时最好的历法终于在天监九年(510年)正式颁用,实现了祖冲之的遗愿。 [38]
地理学
南齐陆澄(425-494年)搜集了一百六十家地记著作,按地区编成《地理书》149卷,目录1卷。梁人任昉(460-508年)又在陆澄《地理书》的基础上,增加八十四家著作,编成《地记》252卷。可惜这些著作都失传了。 [39]
矿物学
魏晋南北朝时期,在地质、矿物学方面取得了比较大的成就。梁代出现了新的探矿理论著作《地镜图》,原书已佚,只能从后人的引文中看到部分内容。主要观点是把地表植物与地下矿藏联系起来,开创了地植物找矿的新领域和新方向。如“山有葱,下有银”,“草茎赤秀,下有铅;草茎黄秀,下有铜器”等。它的理论是现代指示植物找矿或生物地球化学找矿方法的肇端。 [40]
梁代陶弘景(452-536年)对某些矿物的鉴别方法很科学,如硝石和朴消,他用观察燃烧时冒不冒紫青烟来区别。硝石即KNO3,染火焰成呈紫色,所以陶弘景说:“以火烧之,紫青烟起”,“云是真消石也”。朴消即芒硝(Na2SO4·10H2O),火烧无紫色。 [40]
文化
文学
昭明太子萧统
昭明太子萧统
萧衍对文化的重视也使得举国上下充满了文化气息,文化氛围十分浓厚。上至皇帝,下至王公贵族,都以儒雅为荣,都在努力提高着自己的文化素质。所以,萧梁一朝在统治时间不算太长的五十五年里却涌现了一大批有重大成就的文学家和诗人。比如《昭明文选》的作者萧统、《宋书》的作者沈约、《南齐书》的作者萧子良、《文心雕龙》的作者刘勰、《诗品》的作者钟嵘,以及文学名士如江淹、谢出、到溉、到洽、丘迟、吴均、瘐信、刘昭、刘峻、陶弘景,当然还有后来成为皇帝的萧衍的两个儿子——简文帝萧纲和元帝萧绎。总之,萧梁一朝的文学之盛,在中国历史上可能只有盛唐和北宋可与之相比肩了。
降及齐梁,山水的题材扩展而及于自然界和日常生活中的种种物象。梁代又出现了宫体诗,在艺术上更加讲究调声选色、数典属对,加之诗歌格律逐渐成型,所以作品就更加规整工丽。比较突出的作家有谢、沈约、江淹、何逊、吴均,他们的优秀作品,虽然不脱藻绘,却给人以新鲜明丽的感受。骈文和赋的发展与诗歌相应,但由于文的应用范围比诗歌广大,除了诗歌中常见的题材以外,还可以看到家国之悲、穷通之感和对世态的讽刺。梁代后期以迄陈代,文风中的不良倾向变本加厉,诗文作家仅徐陵和阴铿还有一些比较好的作品。
文学批评
文学批评在南朝时代有充分的发展。随着文学创作的繁荣,对于文学体制的辨析和文学性质的探讨更加系统和深入。文笔之辨反映了当时对文学创作的认识和要求,永明声律论总结了汉语声韵在韵文中构成美感的运用规律,对当时的新体诗和后世律诗的形成有极大的影响。刘勰的《文心雕龙》是文学批评史上划时代的巨著,系统完整,论述严密,全面地讨论了文学创作中各方面的问题。钟嵘的《诗品》则是一部重要的诗论专著,对五言诗的思想艺术标准、作家的流派和具体评价,都有许多精辟的意见。
宗教
南朝佛教到梁武帝萧衍时达到全盛。武帝起初崇奉道教,即位的第三年(504年)四月八日,率僧俗二万人,在重云殿重阁,亲制文发愿,舍道归佛,对佛教表示信仰。建有爱敬、光宅、开善、同泰等诸大寺。所造佛像,有光宅寺的丈八弥陀铜像,爱敬寺的丈八旃檀像、铜像,同泰寺的十方佛银像等。所举办的斋会,有水陆大斋、盂兰盆斋等。又以僧旻等为家僧。还在四部(即比丘等四众)无遮大会中四次舍身同泰寺为寺奴,由群臣以一亿万钱奉赎回宫,这样充实了寺院的经济。
梁武帝并重视译事,天监二年(503年)命扶南沙门曼陀罗(仙)、僧伽婆罗共同译经。著名的译师真谛从扶南应武帝的邀请而东来。他特别尊敬禅师宝志。任《十诵》名家法超为都邑僧正,并欲自为白衣僧正。又以律部繁广,命法超撰《出要律仪》十四卷,分发境内,通令照行。此外,武帝极力倡导《涅盘》等大乘经的断禁肉食,影响及于后世者很大,改变了汉代以来僧徒食三净肉的习惯。
由于武帝笃好佛教,他的长子昭明太子萧统、第三子简文帝萧纲(550-551年)、第七子元帝萧绎(552-554年),也都好佛。但在这方面滋生的流弊,亦不一而足。不久即有侯景的事变,寺塔被毁,僧徒被杀,建康佛教顿告衰微。
在佛教宗派中,长芦寺属于“禅宗”。相传梁普通年间,南天竺僧人菩提达摩来到中国传播禅法,后为武帝闻知,于普通八年(527年)迎来建康。但达摩与南朝梁武帝萧衍语多不,乃一苇渡江,来到江北的长芦寺,长芦寺很早即是佛教禅宗著名的寺院之一。千百年来,南京长芦寺风雨沧桑,几度兴废。据史料记载,初建的寺址紧临江岸但这段长江河道很不稳定,堤岸经常塌陷,因而长芦寺建筑群也不断遭到破坏。
民族
汉末晋末,北方汉人大量南移。东晋南朝时期,汉族文化才逐渐传播开来,沿着原来汉人已到的上述点线地区向外发展。南朝梁时,南方广大地区居住的民族,主要的是“蛮”、傒、俚和僚等。汉文化传到他们居住的地区,与他们便发生冲突,又通过冲突而逐渐有一定程度的融合。
“蛮”,是南方诸民族中人数最多的,常用作南方各少数民族的通称。蛮族中有两大支:一支是长沙、武陵蛮,一支是巴郡、南郡蛮。长沙、武陵蛮,自称是槃瓠之后。他们的居住地区是长沙、武陵(今湖南省)一带。他们原居在武陵一带的,又分为椎谿、樠谿、辰谿、酉谿、舞谿,谓之五谿蛮;一部分居住在宜都、天门、巴东、建平、江北诸郡(今湖北省西部)。
南朝梁时期,汉人在长江流域的发展,首先与“蛮”族接触。汉族统治者需要蛮族人民向他们出租税、出徭役,当兵打仗。为此,他们不断向蛮族人民居住地区展开残酷的进攻。 [41]
军事
随着自耕农经济的继续衰颓,国家控制的编户数日减,征兵制衰微之势已不可免;萧衍起兵,就是以募兵为主力。 [42] 萧衍即以此召募所得的万余精勇为主力,建牙誓师,讨伐东晋。侯景作乱,主要依靠募兵。萧梁勤王之师数十万,几乎也全是募兵 [43] 。
朝廷和将帅滥行募兵,反过来又加重了对小农经济的摧残。如此众多的人口以投募为名,行逃役之实,他们应负担的摇役就转嫁到其他小农户身上。《梁典·高祖事论》:“梁氏有国,少汉之一大郡。太半之人并为部曲。不耕而食,不蚕而衣,或事王侯,或依将帅。携带妻累,随逐东西。与藩镇共侵渔,助守宰为蝥贼。收缚无罪,逼迫善人,民盖(疑为“尽”字)流离,邑皆毁荒。” [44] 大族豪强却利用募兵的机会,扩充私人武力,大大加强了他们对抗中央政权的力量。
社会
在社会风气上,士庶界限森严,即所谓“士庶之际,实自天隔”。按血缘关系区别的门阀,其高门、次门的形成、固定,大概和长时期内一定的人品、官品在一个家族中反复出现有极大关系。同时,南北朝后期是门阀制度的衰落时期。梁朝随着社会经济、文化的发展,自南北朝后期起,门阀制度走向衰落
外交
与北魏
在经常聘问中,南北朝廷也妙选使者,为对方所重。在梁与北魏的聘问往来中,“梁使入,邺下为之倾动。贵游子弟盛饰聚观,馆门成市。魏使至梁,亦如是” [46] 。这段略见,在南北朝对峙的局势中,双方也有友好往来,不是一味剑拔弩张的。
至于南朝与北魏的战争,梁武帝天监六年(507年)的钟离(今安徽凤阳东北)之役,是一次相当大的硬仗。先是天监五年,梁出兵北伐,以帝弟临川王萧宏将兵,“器械精新,军容甚盛,北人以为南数十年所未之有”。大军进驻洛口(今安徽怀远西南洛河镇)。三月,淮水暴涨六七尺,韦叡乘机用火攻进击。梁军奋勇,呼声震天,无不以一当百。魏军全线崩溃,丢掉器甲,投水而死的有十余万人,被斩的人数也约略相当,被生擒者五万。缘淮水百余里,尸相枕籍。梁战利所得资粮器械山积,牛马驴骡不计其数。对于梁来说,这是一次很重大的战役,对于阻遏魏军南侵的势头和巩固国内的统治,都有一定的意义。南北之间战争规模不大、和在一定条件下南朝在战争上的胜利,对于南方社会经济的开发都是有利的条件。 [41]
与东魏
东魏时期,大将侯景自恃功高,对东魏权臣高欢还能信服,而对他的儿子高澄却不信服。高欢一死,高澄立即假借高欢之命,招侯景入朝。侯景自知性命难保,遂以河南降西魏。后又派郎中丁和到建康,请以十三州降梁。梁武帝令群臣议论此事,许多人表示反对,认为侯景反复无常,不可置信。但梁武帝认为纳侯景“则塞北可清”,有助于梁收复失地,甚而对进一步北伐都是难得的机会。他任命侯景为大将军,封河南王,都督河南、北诸军事。侯景降梁后,梁武帝在大同七年(541年)冬,派侄儿萧渊明进攻鼓城,想与侯景互相呼应。萧渊明是一个根本不会打仗的人。梁军被东魏打得大败,萧渊明被东魏俘虏。梁武帝不知所措,只得开始与东魏议和。 [28]
侯景在这次梁与东魏交战中,打得很顽强。东魏军阵线大乱,纷纷坠马。仪同三司刘丰生被打伤,显州刺史张遵业也被侯景俘虏。侯景与慕容绍宗相持数月之久,粮食已尽。梁军溃败,不能来救。次年(542年)春天,侯景被东魏击败,逃到梁的寿阳。
梁武帝频繁地与东魏议和,要求释放萧渊明。东魏见他求和心切,提出以侯景换萧渊明的要求。梁武帝不考虑后果,竟满口答应,早上你们把萧渊明放回,晚上即把侯景的头送去。侯景知道梁武帝将用他换回萧渊明时,便在寿阳起兵进攻建康,造成梁末一场空前动乱。史称这次动乱为侯景之乱。 [28]
与西魏
550年,乘梁朝内乱,宇文泰派大将杨忠包围了梁的安陆,安陆附近诸城的梁守将,也纷纷投降西魏。从此,“汉东之地尽入于魏” [47] 。同年二月,杨忠乘胜到达石城,准备进攻江陵。湘东王萧绎连忙派使臣同杨忠谈判,缔结了出卖国土,称臣于西魏的盟约,规定“魏以石城为封,梁以安陆为界,诸同附庸,并送质子”。萧绎之所以如此慷慨,是想借用西魏力量,灭掉与他争夺皇位的哥哥萧纶。西魏乐得从中渔利。不久,西魏果然如约杀了萧纶。到了553年,萧绎已经称帝(梁元帝)。这时,他的八弟萧纪也已在蜀称帝,率水军东下,以讨侯景为名,实际上是冲着萧绎而来。萧绎再次求救于西魏。宇文泰高兴地对群臣说:“取蜀制梁,在兹一举。” [48] 他采纳了大将军尉迟迥的建议,派他率甲士一万二千人,马万匹,从散关兼行袭蜀,西魏轻易地于当年就拿下了蜀。至此,宇文泰的胃口更大了。554年十一月,西魏军攻破江陵,引狼入室的萧绎被杀。西魏获得梁朝数万人口,驱入长安,分赏三军作奴婢。对梁朝的侵犯,使宇文泰在军事上获得了巨大的成功,他的统治地位更加巩固了。
帝王世系编辑
庙号谥号名讳年号在位时间世系陵号
公元502年,萧衍受齐禅称帝,建国号粱,定都建康,史称“南粱”。 | ||||||
太祖 | 文皇帝 | 萧顺之 | - | - | 萧衍之父 | 建陵 |
高祖 | 武皇帝 | 萧衍 | 天监 普通 大通 中大通 大同 中大同 太清 | 502年-519年 520年-526年 527年-528年 529年-534年 535年-545年 546年 547年-549年 | 萧顺之之子 | 修陵 |
- | - | 萧正德 | 正平 | 549年 | 萧衍之侄 | - |
太宗 | 简文皇帝 | 萧纲 | 大宝 | 549年-550年 | 萧衍三子 | 庄陵 |
高宗 | 昭明皇帝 | 萧统 | - | - | 萧衍长子 | 安宁陵 |
- | 安皇帝 | 萧欢 | - | - | 萧统长子 | - |
- | - | 萧栋 | 天正 | 551年 | 萧衍曾孙,萧欢之子 | - |
公元551年,萧栋禅位,侯景称帝,改国号为汉,定都建安,史称“侯汉”。 | ||||||
公元552年,萧纪称帝,复国号梁,定都成都。 | ||||||
- | 武陵贞献王 | 萧纪 | 天正 | 552年 | 萧衍八子 | - |
公元552年,萧绎称帝,复国号梁,定都江陵。 | ||||||
世祖 | 孝元皇帝 | 萧绎 | 承圣 天正 承圣 承圣 | 552年 553年 553年 554年 | 萧衍七子 | 颍陵 |
- | 闵皇帝 | 萧渊明 | 天成 | 555年 | 萧衍之侄 | - |
- | 敬皇帝 | 萧方智 | 绍泰 太平 | 555年十月—556年八月 556年─557年十月 | 萧绎九子 | - |
公元557年,萧方智禅位,陈霸先称帝,改国号为陈,定都建安,史称“南陈”。 | ||||||
公元557年,萧庄称帝,复国号梁,定都武昌。 | ||||||
- | 武烈太子 | 萧方等 | - | - | 萧绎长子,萧庄之父 | - |
- | - | 萧庄 | 天启 | 557年—560年 | 萧绎长孙 | - |
公元555年,萧詧称帝,沿国号梁,定都江陵,史称“西梁”。 | ||||||
高宗 | 昭明皇帝 | 萧统 | - | - | 萧衍长子,萧詧之父 | 安宁陵 |
中宗 | 宣皇帝 | 萧詧 | 大定 | 555年—562年 | 萧衍之孙,萧统三子 | 平陵 |
世宗 | 孝明皇帝 | 萧岿 | 天保 | 562年二月—585年五月 | 萧詧三子 | 显陵 |
孝靖皇帝 | 萧琮 | 天保 广运 | 585年五月—585年十二月 586年—587年 | 萧岿之子 | - | |
公元617年,萧铣称梁王,次年称帝,复国号梁,定都岳阳。 | ||||||
- | 安平忠烈王 | 萧岩 | - | - | 萧詧之子,萧铣祖父 | - |
- | 安平文宪王 | 萧璇 | - | - | 萧詧之孙,萧铣之父 | - |
- | - | 萧铣 | 鸣凤 | 617年十月—618年四月(称王) 618年四月—621年(称帝) | 萧琮从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