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3년 3월 8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의 연설을 통해 옛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규정했다. 이 문구를 집어넣자고 강력히 주장해 미소 대결을 부추겼고, 다른 연설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역사의 잿더미"(the ash heap of history)로 보내버린 수석 연설비서관 앤서니 R 돌란이 지난 11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한 병원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고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18일 보도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단 연구소 이사회의 프레드 라이언 의장이 고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며 “복잡한 생각들을 힘있고, 기억할 만한 연설로 응축해 레이건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고 냉전의 과정을 일군 고인의 능력"을 돌아봤다. 다만 사망 원인은 특정되지 않았다.
돌란은 퓰리처상 저널리즘 부문 최연소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서 발행되는 어드보케이트 기자로서 지방정부와 경찰이 결탁한 부패상을 고발하는 시리즈 기사로 퓰리처상 심층보도상을 수상했을 때 고작 스물아홉 살이었다.
레이건의 백악관에 연설비서관으로 들어가 8년을 근무한 뒤 그는 조지 W 부시 재임 기간 도널드 H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특별 자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수석 자문으로 활약했다. 그는 나아가 도널드 J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특별보좌관이었으며, 지난 1월 대통령 직속 국내정책위원회에 특별보좌관으로 임용됐다.
돌란은 배리 골드워터의 1964년 대통령 선거운동 캠프에 10대 시절 참여해 일찍이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그렇게 세 차례나 공화당 행정부에 들어가 일했으며 보수파의 포크 송들에 가사를 붙이고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노래가 최고의 정론지란 평가를 받는 신문을 패러디한 '뉴욕 타임스 블루스'였는데 가사에 “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 unless, of course, it’s anti-communist” 대목이 있었다. "모든 뉴스는 인쇄하기에 딱 맞아/ 물론 반공주의가 아니라면 말이지" 비아냥 댄 것이었다.
백악관에서, 그는 무신론을 믿는 소련에 대항해 험한 말의 전쟁을 벌이는 레이건 대통령을 맹렬하게 두둔했다. 그는 말로만 공격하지 말고 현실 정치에 터잡아 어조를 낮춰야 한다는 압력에 맞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로의 행진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역사의 잿더미로 보내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악의 제국'과 '잿더미' 모두 영화 '스타 워즈'와 레온 트로츠키의 저작에서 뽑아온 것인데 연설문에 끝까지 남은 것은 돌란 덕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 피터 로빈슨이 쓴 초고를 감수했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소련 지도자를 겨냥해 "고르바초프 씨, 이 벽을 무너뜨리세요"라고 연설하게 했다. 실제로 2년 뒤 이 일이 실현됐음은 모두 알 것이다.
돌란을 추모하는 동영상에서 로빈슨은 "진짜 신봉자들과 실용주의자들" 사이에 오간 말싸움을 떠올렸는데 "진짜 신봉자들은 연설비서관들과 로널드 레이건"이라고 덧붙였다.
1948년 7월 7일 코네티컷주 노르워크에서 점포 매니저인 부친 조지프와 모친 마가렛 (켈리) 돌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매일 성당 예배에 나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페어필드 칼리지 예비학교를 졸업한 뒤 예일대학 철학과 역사를 전공해 1970년 석사학위를 땄다.
그 해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제임스 L 버클리 대선 본부의 부공보관으로 일했으며, F 클리프턴 화이트 앤드 어소시에츠 정치 고문으로 일한 뒤 1974~80년 어드보케이트 기자로 일했다.
유족으로 가장 가까운 이가 조카딸 로버트 A 쇼틀리란 것을 보면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신문의 부고 기사에도 부인과 자녀 얘기가 없다. 누이 마이셀 쇼틀리는 지난해 2월 23일 세상을 떠났고, 형 존 테렌스 돌란은 전국보수파 정치행동위원회의 창립자이며 의장으로 활약했는데 1986년 세상을 등졌다.
돌란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2004년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추모했다. 고인은 2023년 워싱턴의 공산 희생자 뮤지엄에서 '악의 제국' 40주년 기념사를 통해 "자유는 압제를 이겨왔는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대규모 조치 덕이었다. 그의 전략을 간단한 네 단어로 요약했다. '우리가 이기고, 저들이 진다'(We win, they lose)"라고 말했다.
한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1월 9일 연두교서를 통해 이란과 이라크, 북한을 겨냥해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두 가지 풀이가 있다. '악의 제국'과 2차 세계대전 때의 주축국(Axis powers)을 적당히 섞은 표현이란 풀이가 그 하나이고, 캐나다 언론인 출신 연설비서관 데이비드 프럼이 쓴 초안의 '증오의 축'(Axis of Hatred)을 수셕 연설비서관 마이클 거슨이 슬쩍 바꾼 것이란 해석이 있다. 거슨이 단어 하나만 바꾸고 생색은 다 냈다는 후문이 전해지는데 정작 본인도 이를 극구 부인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