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은 사물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사묾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존재를 이루는 몸과 마음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몸과 마음의 속성, 다시 말해 우리 존재가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이루는 근본 요소를 가지고 한다. 몸은 궁극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궁극정신인 마음과 마음부수로 이루어져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궁극물질과 궁극정신으로 구성된 몸과 마음을 있는그대로 관찰하면, 궁극물질과 궁극정신이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렇게 궁극물질과 궁극정신의 속성을 보기 때문에 모든 허상을 물리칠 수 있다.
물질과 정신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괴로움'이고, 몸과 마음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무아'다. 몸과 마음은 자체의 법칙인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일 뿐,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이 그 사이에 끼어들 틈은 전혀 없다. 상황이 이렇기에 괴로움은 불가피하며, 불가피한 괴로움은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에 저항해봤자 스스로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괴로움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서양의 정신치료에서도 불가피한 괴로움과 스스로 만드는 괴로움을 구별하여 후자를 줄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일을 한다. 무지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는다. 이렇듯 판단의 기반이 허술하니 후속 결과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본질을 보고 어떻게 사는것이 나에게 가장 이로운지를 알게 되면, 자연과 같이 된다. 불교 수행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아라한을 보면 자연과 같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경전에 나온다. 붓다 다음으로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리뿟다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화나게 할 마음으로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하지만 사리뿟다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 걸어갔다. 짐작컨대 사리뿟다는 누군가 자기 등을 때릴 만한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여기고 가던 길을 계속 간 건 아닐까.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잘 알면 그에 맞게 몸과 마음을 대한다. 몸이 계속 바뀌고 내 말을 듣지 않고 괴로움이 불가피하다고 알면 몸의 괴로움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몸이 괴롭다고 마음까지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통제할 수 없다. 괴로울 만한 상황이 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일을 벌여 더한 괴로움을 자초하는 대신, 그러한 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몸이 아플때 마음이 안 아파지도록 하고, 마음이 아플때 마음이 더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면 벌어질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괴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괴로운 그 순간에 알 수 있으면 괴로움을 보는 것이 달라진다. 그렇게 알고 보는것이 우리를 덜 힘들게 한다. 즐거운 것도 마찬가지다. 보통 우리는 즐거운 것이 사라지면 그 자체로 괴로워하며 후유증에 시달리지만, 즐거움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즐거움에 매달림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면 살아가는 것이 달라진다.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된다. 동요 없이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 삶에 도움이 되는 이유다. 수행은 종교의 측면이나 영성의 측면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첫댓글 책을 사서 보게 됐는데요... 책 말미에 있는 글인데 좋은 내용이라 올려봅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쁘게 잘 읽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글 있으면 가끔 올려주세요.
아주 반가웠습니다.
덕분에 같이 붓다의 뜻을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법계유심님을 비롯한 화엄의 모든 법우님들 부디 붓다와 함께 붓다 안에서 평온하시길 빕니다.
전현수박사님은 본인을 어떤 강의에서 소개하길 당신은 정신과 의사요 과학자로
소개하는데 의사도 과학자의 범주에 든다는 것인지 아님 부전공으로 과학분야도 했다는 것인지는 몰겠는데 암턴 ...불교를 정신과 의사적 , 논리적 ,과학적 ,일상으로 잘 이끄시는 분 같아서
갠적으론 무쟈게 편하게 느껴지시는 분입니다..아!! 저분이 어떤 강의 중에
(붓다의 딸 ,세상을 밝히다,비추다였나? 암턴)란 책을 소개했는데 우몽도 간만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 봤는데 ..우리의 공부에서는크게 해가 되지 않겠더군요 . 일독 추천)
법유님 불철주야 노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참.. 글구 위 본글 내용 중 ..궁극 물질, 궁국 정신,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갠적으로 오온을 저렇게도 쓸 수 있겠구나 싶어 그닥 거부감이 들지 않는데..언제 함 방장님께 법유님이 질문 좀 해주셔요.. 우몽은 지금 자칭 근신중이라서요 ㅠㅠ
아님 법유님이 한 말씀 땡겨 주시던지요..
남방 상좌부에서 4위 82법 가운데 물질 28가지. 마음1가지 마음부수 52가지 열반을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데 수행할때 알아차림의 대상입니다.
예전에 방장님이 궁극적이란 표현은 좀 문제있다고 하신걸로 기억하는데요.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대상인 법이라고 이해하면 될듯~
그러고 보니 구경열반이란 말도 있네요..
열반이 실재하지 않으면 사기죠..
진리니 궁극이란 말도 어떤 용례로 쓰느냐에 따라 느낌이 좀 이상해지기도 해요..가령 궁극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이는 많이 들어본 거 같습니다.
절에서는 거의 안 쓰는 거 같은데 ..혹 궁극의 부처님, 진리의 부처님 ?? 이렇게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나?
갠적으론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우몽
식견의 문젠가..
근데 전박사는 곧잘 진리니 궁극이란 표현을 쓰는데 박사라서 그런지 별 이상하게 들리지 않데요..
일부 선승들 중에서는 또 ..' 그 자리서 척 보면 말이지' 하는 표현도 종종 보는데 갠적으론 참 어휘력들도 어찌 저럴꼬 싶더군요.. 차라리 ...부처의 눈으로 척 보면 말이지라고 표현하면 좀 이상킨 해도 당신이 부처가 된 모양이다하고 들어질 거 같은데 ..뭔 자린지 벼슬자린지
마음자린지 허긴 마음자리를 잘 써란 말은 있넹..그럼 마음자리서 척 보면 말이지 이러등가..근데 마음은 잘 쓰면 됐지 척 보고자시고 할 것이 또 있나 말이지.. 마음이 보이나? 것도 글네 그 사람 심보 좀 봐 고약스럽네.. 등등으로
보이긴 하넹 .. 그럼 그렇게나 척 보면 됐지 ..뭘 더 척 보면 말이란 말이냐..
허~ 백수 되니 별 생각이 다 드누마..
법유님..법유님의 본글 댓글 지면에 외람되지만 아래 우몽이 발기한 십무기에 대해서 혹 한 말씀 청해도 괜찮겠는지요..
황벽님은 이미 참여 하신 거 같고요.. ..삼가 헤아려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