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21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17,5-10
복음 루카 복음 16,19-31
◈ [서울]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올해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독립운동을 하였던 선열들이 힘들고 모진 삶을 살았지만, 그분들이
피와 땀을 흘렸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하였던 유관순 열사의 삶을 다룬 영화 ‘항거’를
보았습니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헌병이 되어서
편안한 삶을 사는 정춘영과 감옥에서 모진 고생을 하는 유관순 열사의
대화입니다. 정춘영이 유관순 열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왜 이리 고생을
하느냐, 잘 참고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유관순 열사가
대답합니다. ‘나는 자유롭다.’ 그러자 정춘영이 묻습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유관순 열사가 대답합니다. ‘자유란 목숨을 바쳐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정춘영이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자유롭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이 시키는 일만 한다. 그래서 자유롭지 않다.’
진정한 자유를 꿈꾸었던 한용운 스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또 다른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지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어야만 알게 되는 나의 죄
2019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죽어야만 알게 되는 나의 죄>
복음: 루카 16,19-31
어머니를 잃은 도라는 캘빈이라는 의붓아버지와 미국 황야지대 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기타를 치고 있던 도라에게 캘빈은 소리를
지르며 폭력적인 언어로 나무랍니다. 기타 줄까지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이지만 물줄기를 발견할 때까지 우물 파는 일을
함께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둘이 우물을 파던 중 우물 바닥이 밑도 안 보이게 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캘빈과 도라는 긴 줄에 손전등을 묶어 내려 보냅니다.
잠시 뒤 손전등은 사라지고 고대 문자가 쓰인 종이와 함께 황금
덩어리가 묶여 올라옵니다. 캘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갑니다. 밑에 누군가 있는 것이 확실해지자 도라는
샌드위치와 영어사전을 바구니에 넣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영어로
“이 음식을 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음식 값을 동봉했습니다.”
라는 편지와 황금 한 바구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라는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황금과 함께
“저희는 이것을 치킨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참 맛있어요. 또
없나요?”라는 편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 캘빈이 돌아와 황금을
끌어올리는 도라에게 소리치며 욕심 많다고 나무랍니다. 그는
손전등을 수십 개 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전등을 하나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손전등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음식 값은 없습니다.”라는 편지만
올라옵니다. 캐빈은 노발대발 하며 도라에게 10분 뒤에 끌어올리라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10분 뒤 황금이 가득 들어
있는 캐빈의 군복만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런 편지가 꽂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칠면조라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199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메이징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캘빈은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사람으로만 보았고
도라는 자신이 도와줘야 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이 둘의 캐릭터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부자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항상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부자가 자신의 가족들을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을 해석해야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도 착한 마음을 발휘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부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라자로가 부활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안엔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힘이
들어있기에 말씀을 읽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마음 안에서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믿기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으려하지 않고 또 믿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나의 결단이지만 믿지
않는 것도 나의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자가 착해서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그렇게
착할 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되는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형제들이
잘못되면 하느님 탓을 하거나 부모나 사회, 혹은 세상 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형제들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자신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옥에 오게 된다면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또 자신들을 원망하는 형제들에 의해 괴롭힘을
받을까봐 그렇게 청하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누워있는 행려자의 이름을 물어보거나 알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라자로가 그 집 앞에 오래 있었거나 혹은 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인 것도 자신이 잘 해서 그런 것이고
타인이 가난한 것도 타인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지옥가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며 동생의 죽음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7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다 그들 탓일까요?
내가 나누지 못하는 탓은 아닐까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면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녀가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듯 모든 사람은 나를 통해 은총도 받고 저주도
받습니다. 폼페이라는 도시의 사람들이 40세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도관 이음세가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납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는 부자의 죄가 그들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 존재가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세상이 온난화 되는 것도 나의 탓이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도 나의 탓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공기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변하려하지 않으며 남의 탓만 하다가 우리도
심판을 받고 나서야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다 바뀔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가족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나 이웃이 굶고 있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길거리의 개들에게 자신의
종기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도 내어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천국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웃의 죄는 나의 죄이고 이웃의 아픔은
나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당신의 것으로
여기셔서 인간의 죄를 당신이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이 당신을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세상의 죄는 나의 죄가
됩니다. 라자로처럼 은총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을
느껴야 천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2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교만이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어서 그를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것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짐승들은 아픈 데를 혀로 핥아 고통을 가라앉히고 상처를 낫게
한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귀결이라고 하신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25절)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6절)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 같은 것을 파고 마는 것이다.
그분은 부요함을 고통으로, 가난은 원기 회복으로, 자주색 옷은
불길로, 헐벗음은 기쁨으로 돌려주셨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는 말씀은 원칙이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의 탄원을 무시하신 것도
그가 땅에서 가난한 이의 탄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2) 이런 사람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이며,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 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다시 살아난 봄꽃의 신비입니다.
부자의 갈망과 가난한 라자로의 갈망이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외없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과 무관할 수 없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삶과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다시 배우게됩니다.
생명에 필요한 것은 우리들 회개뿐입니다.
회개는 절박한 우리들 믿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막는 장애물은 바로 회개를 외면하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은 생명의 길을 밝혀줍니다.
생명의 길은 영혼의 회개를 영혼의 회개는 비참한 우리 실체를
소중한 하느님 자녀로 되돌려 놓습니다.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지 않는 회개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이며 회개는 오늘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소유하려는 부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라자로의 신앙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프게 직면하고 인정하는 겸손된 갈망입니다.
교만이 아닌 겸손된 길이 생명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청주] 천국을 생각하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루카16,19-31)
천국을 생각하면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시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3월 21일 (목) - 허둥대는 인생
오늘은 ‘허둥대는 인생’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19장 11절 말씀에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
헤매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동네에서 수많은 동네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와 천사들과
잠자리를 하겠다며 집안을 둘러싸고 대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다그칩니다. 이를 막아선 롯을 잡아끌고 집안으로 들어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닥쳤습니다. 두 천사도 위기에 닥치고 부인과
딸들도 위기에 닥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롯의 집에 찾아온 우리들을 한 번에 완전히 허둥대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눈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디가 어딘지 나갈 출입구가
어디인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재앙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그들이 원했던 것은 결코 얻지
못 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눈이 어두워진 이들은 그들의 목적도 그들의 가치관도 그들의
주위 환경도 전혀 챙길 수 없는 어리석고 허둥대는 바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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