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역에서 내렸다
조선일보 웹사이트에는 출구번호가 적혀있지 않아
전날 밤 네이버 지도검색으로 찾아보고 갈까 했으나
'마포문화센터방향'이란 키워드만 있으면 문제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냥 그렇게 몸을 싣고 이대로 향했다
다행히 찾을 것도 없었다. 공중에 걸려있는 팻말은 숭덕중,고등학교 5번을 지시했다
내려가는 길은 낮게 깔리어 있었다.
내리막길이다. 구두를 신은 나의 발목에 조금 억센 힘이 들어간다
담배를 태울까 생각이 들었지만
명색이 기자인데, 꼴사나운 짓이라는 '길빵'을 할 수는 없었다
'교실 확보하고, 차분하게 피우자...'
고교 정문에 다다랐다
왼쪽으로 이제 입장하면 된다
수능 보러 들어가는 기분 비슷했다
정문 문턱을 넘어가는데, 내 운명의 문턱에 발을 디디는 기분이 살짝 든다
학교가 꽤 운치있다 13번 정도 보면 운치 없어질지 모를 그런 운치가 배어 있었다
'자 이제 번호를 확인해 볼까?'
삼삼오오 사람들이 자기 수험번호의 교실을 확인 중이었다
'닝기미...대각선 방향으로 가시오?'
대각선 방향 어디로 말인가? 우로 15도인가 좌로 15도인가
사람들은 뒷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어쨌든 따라가자'
아..어디보자..내 수험 번호가..7xx 이니까...
음 '17고사장, 4층이군'
4층은 싫다
숫자가 싫은게 아니라 너무 높다. 그런데 괜찮았던게 1층이 반지하여서
실상 3층 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참아줄만 했다.
담배를 피우러 내려갔다
나는 언제나 말보로 라이트다
"후~"
"호~"
시험관들도 근처에서 삼삼오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그들 얼굴에 즙처럼 배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 중요한 시험에서 감독을 한다는 위치
자신들도 걸어왔던 그 길을 이어 걷고 있는 후배들을 보며 느낄 묘한 열기.
나는 감독관의 음성을 귀로 좇고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수 많은 수험생들을 눈으로 좇는다
사실 처음이다
이렇게 많은 언시생들을 본건
수 많은 스터디 원들이 여기 다 모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에서, 신촌에서, 강남에서, 어디에서 어디에서 자생하고 있는
수백개의 스터디원들이 여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아랑카페가 생각났다 '아랑에서 눈팅하던 사람들 여기 다 실물로 모였구나..'
1교시가 시작되었다
고사장 여감독님이 꽤 미모가 좋으시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이신지 목소리가 작으시고, 특별히 살갑게 건내는 말도 없다
그러나 여느 사람과도 잘 어울릴, 그런 보통의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
기자이신건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나도 한 소심하기 때문에...생략.
1교시.....
문제지가 성의 없다
11페이지인데 한장씩 6번을 주면 어쩌라고..-0-
열심히 풀었다
이게 몇년만에 푸는 '언어 영역'인가
물론 언어영역보다 훨씬 쉬웠다
제시문도 굉장히 쉬웠다
사실..문제에 대한 얘기를 후기로 쓸려고 했는데, 역시 미련하게도 글의 초입을 잘못잡아
벌써부터 기력이 후달린다...-_- 아오...
한문 문제가 나왔다
"포폄" 을 쓰라
"우선순위"를 쓰라
'능력시험'을 쓰라
하나도 못썼다
능력시험은 쓸 수 있었는데
'험'자를 못썼다
ㅠㅠ
다른 문제는 그냥 무난했다
마지막 단편소설은 정말 기분좋게 읽었다
내가 가장 좋아할만한 그런 어떤 80년대의 센치한 정서가 느껴지는 2000년대 배경의 소설이었다
이게 누군가 하니,
나는 '박민규'가 아닐까 추측이 되었지만, 여러면에서 그와 닮은 문체가 있었지만,
보다 감각적이고, 보다 감상적인 면을 보자면, 위트있고 쿨한 면을 잃지 않는
'박민규'는 아니잖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박민규의 스물다섯에는 문자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어느 소설가의 작품일지 상당히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 박민규가 픽션으로 썼다면 더 좋을듯도 싶다)
아무튼 그랬다
1교시는 첫장을 내가 뽀려왔다
지금 가방안에 있는데..대략..뭐......가져왔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 ;;
암튼 1교시는 무난했다 한자시험 빼고...
그러나 첫번째 지문의 1~3번 문제는 조금 난감한 감도 있었다.
1교시가 끝나고 또 담배를 피우러갔다
재미있다
왜?!
언시생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어서 -_ -
다시 얘기하지만 이런 적이 처음이다..처음 치루는 언시이다;;
별 얘기는 없었다
스터디원들끼리 모여서, 혹은 학교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는 듯 했다
커플들도 좀 있고...
분위기는 뭐 그렇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도 많은 듯 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데, 같은 무대에 서있는 동질감을 빌어 5분의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사람들도
있어 보였다
노장들도 좀 많이 보았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서른 살 넘은 분들이 꽤 보인다는 데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2교시가 되었다
너무 재미있게 풀었다
특히 헌법 문제는 다 맞힌 것 같다
법원의 판결 문제도 쉽게 맞혔다
그 밖의 입법부, 사법부, 헌법재판소의 수장을 묻는 질문은
처음엔 김형오! 밖에 생각이 안났지만
헌재의 이강국을 시작으로 사법부의 이용훈까지 순차적으로 기억났다
기분이 좋았다
타미플루에서 막혔다
2번째 항바이러스제는
'감기미워' 라고 적었다
흐뭇했다
뭐 대부분 잘 푼 것 같다
여기서의 '대부분'이란 여러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지막 창립 기념일을 쓰라는 건데
이 문제를 보고 연도만 쓰면 되는 줄 알고
대충 찍자 -_ - 라는 생각을 품고
1908년으로 할까? 아니야 아니야 너무 이르자나
1928년쯤으로 하자 하고 답지에 쓰려는데
년 월 일
- _ -
할 수 없이 1928년 9월 20일이라고 쓰고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만 81년전이다
젠장..
대북제재결의는 처음에 1784호라고 썼다가
아무래도 조지오웰을 내가 너무 인상깊게 생각한 듯 하여
84가 걸리었다 (아니면 이치.큐.하치.욘을 봐버려서 잔상이 강했나)
그리고 신문볼때 내가 입으로 조물 거리던 그 입사위가 분명 아니었다
팔씹사 팔씹사 팔씹사..나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뭔가 낯설다..
1874 호
머리가 나쁘지 않은 건지 다시 재정리되어 생각이 났다
입으로 조물거려보니 그 입의 오물거려지는 촉이 제대로였다
아무튼 2교시 끝나고 또 담배피우러 나왔다
이번엔 좀 흥이 떨어졌다
언시생 구경하기도, 감독관 구경하기도...
3교시가 시작되었다
아참..커피를 먹었다
에너지 보충하기 위해...
논술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제목은 '세종시의 어제와 오늘 -사회,정치,경제적인 맥락에서.. 였다
한숨이 나왔다
세종시라..
세종시가 어느 부지이지?? -_ - 아이고오...
어쩔 수 없었다
세종시가 어느 부지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언급하지 말아야겠다..
그나마 알고 있는
심대평의 낙마 -> 자유선진당과 정부의 긴장 -> 정운찬의 '실언' -> 민주당, 자선당의 격비난
의 맥락하에서 써보기로 했다
글 구조는 간단하다
'도입'
1
2
3
'결'
무난하게 앞뒤로 한장을 채웠다
아는게 없어서, 헛소리를 하려다보니 말이 중언 부언,
한말 또하고 한말 또하고
'a가 b이므로 c이다' 이 말을 하고
'c는 b가 a에서 기인함으로 도출된다' 로 말 순서 바꾸기 크리를 탔다
아무리 봐도 감독관님이 안드로메다로 가실 듯 하다
눈물을 머금고 끝까지 다 썼다
결론은 '여의도에서 이전투구 할 것이 아니라, 세종시 현안을 두고 머리를 맞대라' 라는 주문이었다
시험이 끝이났다
차분하게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가는 길에 복도 가운데의 물을 마셨다
화장실 다녀와서 그런지 사람이 한산해서
커피를 9개 집어왔다
누가 볼까봐 허둥지둥 가방에 넣는 내 모양이 희극이었으리라.
교사 앞에는 이제는 삼삼오여 모여서 하교를 같이 하려는 무리로 가득했다
나는 솔로다
묵묵히 담배도 안 피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기분이 상쾌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었다
내려가는 길이 야트막해서인지 오르는 길은 평범했다
배가 고팠지만 동료가 없어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자고 있는지 응답이 없다
아니면 내가 덕이 부족한 걸까
여러가지 상념을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전동차에서 눈을 감았다
차음이 부실한 전동차 안의 소음이 정겹기만 하다
한강 철교에 들어선 기차는 나를 빠르게 횡으로 실어 나르고,
그렇게 나 이외에, 천 여명의 언시생들이 빠르게, 빠르게, 이대를 벗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의 마음 속에 한자리를 그리며,,
ps 시험들 잘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화이팅입니다 다들 너무 멋지고 똑똑해 보여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좋겠네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첫댓글 한자에 수산시장도 .. .. ;
경구용은 타미플루, 흡입제는 '릴렌자'입니다 :)
처음치는 언시인데 세종시 앞뒤 한장쓰셨다니......전 죽어야겠네요 휴ㅠ
그 단편소설 제시문. 김연수의 단편 세계의 끝 여자친구였어요ㅎ 어제 읽고 잤는데 오늘 나와서 깜짝 놀랐다는 ㅎ
오,, 저는 김연수 소설인줄 몰랐는데 문체에서 '모야, 김연수 냄새가 나는데..' ㅋㅋ 이랬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김연수였근영
같은 고사장이셨군요 ㅎㅎ 여자분도 그렇고 남자분도 그렇고 감독관님들 멋지시더라는~^^
재미있네요 ㅋㅋ 소설가나 수필가를 하셔도...ㅋㅋ
전 국어 꽤나 어렵다고 생각했는데..ㅜㅜ시간도 빡빡하더라구요~
저도요... ㅋㅋ 국어가 너무 어려워서 상식이 쉽게 느껴지는 현상.. 근데 다들 국어 쉬우셨나봐요. 말들이 없는걸 보니..ㅜㅜ
숭문중,고가 언제 숭덕중으로 바뀌었나요?ㅋ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아니구 오늘과 내일..-_-+(죄송).. 으악 조선일보 시험을 끝나는 날 읽으려고 사둔게 세계의 끝 여자친구였따는 지쟈스........
후기 잘 읽었습니다. 커피 아홉개를 허겁지겁 집어 넣으셨다니... 문장을 두 세번 읽으면 글쓴이의 당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사실 시험을 보러가지도 않아 현실적인 그림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감이 오더군요. 필기에 합격해서 면접을 보신다면 또 후기를 올려주시죠.^^
아. 정말 따스한 글이군요.. 글쓴분 술이라도 한잔 사드리고 싶다는..필명도 멋지군요..
저는 조선셤을 친구는 ssat봤는데, 둘이 만나 서로 후회했다는 ㅋㅋ 문제가 어럽진 않은데 왜 쉽다는 생각도 안 들까요? ㅎㅎ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이 기분... 비오는 오늘 한국어 시험공부는 낼부터 하렵니다 ^^
어떤 분일지 궁금하네요. ㅋㅋㅋ
저도 이런 글 쓰게 될 날 기대합니다.ㅋ
아...재밌는 글이네요...글이 쫀득쫀득 하다고 해야하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