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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루카 복음. 13,22-30
오늘의 묵상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보편적입니다.
아무도 그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일정한 한계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그 문은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찾으며,
언제나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
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왜 믿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도착점은 같습니다.
온갖 이론과 지식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안내일 따름입니다.
구원의 이론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대로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하지만 좁아도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률이 높기에 좁은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거듭해도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작아지는 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약한 모습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비참한 일이나 억울한 일로 상처받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을 불평과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작아지는 생활의 출발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 ☆ ☆ ☆ ☆ ☆ 좁은 문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된 자매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자매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또 신부라는 이유만으로는 천당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고 인간적 친분을 내세워 들어가려고 애원하지만 집 주인은 야박하리만치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아무리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친분이 있어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뽑혀서 첫째가 된 그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이 말씀은 이방인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도 비록 그 출발은
늦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따른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은 자녀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켜서 어떻게 출세를
시켰으며, 재산은 얼마나 모았으며, 얼마나 사회적 직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조건을 갖추면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요 행복한 집안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준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고 첫째로 꼽힐 사람의 기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느냐'하는 것이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관점을 지향해서 살아가며 그것밖에
모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첫째였을지 몰라도 죽어서 하느님 심판을 받을 때 꼴찌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는 덜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주 구체적인 예가 루카 복음 16장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매일 호화롭게 먹고 입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부자는 자신의
재산만 믿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부자의 집 앞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며 개들이 종기를 핥던 거지 나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첫째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료 : -서울 대 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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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25 연중 제21주일 이사66,18-21 히브12,5-7.11-13 루카13,22-30
좁은 문
좁은 문의 시대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 아니면 둘 아이를 낳는 시대이기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여지없이 좁은 문입니다.
얼마 전 성인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정요한 수도형제도
일곱 형제 중 여섯 번째 이니 오늘날 같아선 세상에 나오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네 째이니 세상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너무 좁은 문 때문에 태어나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들이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자식의 회사 합격 이야기를 기쁨에 넘쳐 전하는 자매들을 만난 일이 생각납니다.
“120여명이 지원해 마지막 면접에서 2명만 합격하는데 제 아들이 합격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이룬 경사입니다.
그 전에 제 조카가 한 명만 뽑는 시험에서 63명이 지원한속에서 최종 합격했던
일도 생각이 났고, 또 그 후 어느 자매님 아들이 200명이 넘는 중에서 한 명
뽑는 데 합격했다는 일도 생각이 났습니다.
겉으로야 기쁨을 함께 했지만
즉시 떠오른 합격하지 못한 무수한 젊은이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잡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 같이 좁은 문입니다.
바로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좁은 문의 현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현실을 원망해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눈높이만 낮춰 열린 눈으로 바라보면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좁은 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는 사람이 아주 적은 좁은 문입니다.
문이 닫혔을 때 두드리면 너무 늦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
복음의 집주인이 가리키는바 주님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들의 애소(哀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반응이 냉랭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과의 피상적 관계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희생 없는 말만의 사랑을 살았던 삶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과 무관(無關)하게 넓은 문을 살았던 삶에 대한 응보입니다.
좁은 문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시지만
넓은 문의 끝, 허무와 환멸 한 가운데 악마가 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한 정주의 삶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바로 주님은 좁은 문의 현실 가까이 현존하시며 우리를 돕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도 어찌 보면 상대적입니다.
진정 주님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 깊어질수록
좁은 문은 내적으로 점점 커지는 넓은 문이 됩니다.
요즘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역경지수(逆境指數)를 중요시 한다 합니다.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역량을 최우선시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과 사랑으로 좁은 문을 통과할수록 역경지수도 높아질 것입니다.
둘째, 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시련 없는 삶은 가치 없는 삶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자신도 모르게 약해집니다.
어느 분의 질타에 공감했습니다.
‘힐링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
지금은 전쟁상태도 아니고 일하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무슨 어려움 타령이냐’는 요지의 말입니다.
이래서 삶을 영적전쟁이라 합니다.
시련과의 싸움인 영적전쟁이요,
끝까지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온갖 시련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십니다.
사랑의 채찍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지겠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슬픔의 깊이는 기쁨의 높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모든 시련들을 하느님의 훈육으로 받아들일 때
상처가 아닌 내적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됩니다.
일주 전 정요한 수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여기 수도형제들은
서로 주님 안에서 슬픔을 나누는 형제애(兄弟愛), 전우애(戰友愛) 자체가
최고의 위로임을 깨닫습니다.
정요한 수사가 주장, 주도하여 세운 수도원 정문의 주님의 십자가와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주님의 부활상이
정요한 수사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예고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이요 나눌수록 작아지는 슬픔임을 실감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시련들을 피할 수도 없거니와
피하면 더 큰 십자가의 시련이 기다립니다.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더 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은사를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셋째,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맨 몸으로가 아닌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넘어지면 즉시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해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바로 이게 십자가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바른 길은 한자로 하면 정도(正道)입니다.
‘바름(正)’을 잃어 혼돈의 세상입니다. 불교의 팔정도 교의가 생각납니다.
불교의 실천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이 중 팔정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로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등 여덟 가지를 꼽고 있으며
이를 팔성도(八聖道)라 칭하기도 합니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참되게 살아가려는 모든 이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교육의 요체도 바로 ‘바르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일, 바른 명령, 바른 생각, 바른 정주, 바른 사유,
바른 정진, 이게 사람됨의 모두란 생각도 듭니다.
주님을 따라 항구히 바른 길을 달려갈 때
저절로 성취되는 팔정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경지를 분도 성인의 그의 규칙 서문 말미에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져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RB머리:49).
오늘 주님은 혼돈과 좁은 문의 시대를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1.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2.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견디어 내십시오.
3.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이런 삶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요,
이런 이들을 통해 많은 이들을 ‘주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 교회로 나오게 됩니다.
다음 루카의 예언 역시 이런 이들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미 예언이 실현되어 주님은 이렇게 살아 온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 미사를 통해 온갖 필요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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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자신의 신앙 체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하시고, 또한 이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굳은 믿음을 내세우십니다. 솔직히 이렇게 내세우는 신앙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개신교에서 많이 말하는 소위 신앙 간증이라는 것, 이는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치유를 해주신 다음, 치유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며 자신의 은혜 받음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그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바로 당신의 뜻이 잘못된 뜻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하나 하나를 다 사랑하셨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대중성은 사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물러나 숨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즉,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대중심리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중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등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과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답습하려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한 행동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통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나오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려하는 넓은 문으로 가려고 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좁은 문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벗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것이지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한 노력보다는 많은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9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과 하나가 없어서 열 개를 채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나눌 수 있는 사과를 9개나 가지고 있다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과를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이를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는지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소유욕에 집착을 보인다고 하지요. 지금 내 자신은 무엇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소유욕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면 그만큼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는 절대로 주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좁은 문으로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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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2013. 8. 25.)(루카 13,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대답하십니다(루카 13,23-24).
예수님의 말씀은,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인데,
이 표현만 놓고 보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체 수가 적다는 뜻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적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들어가기를 희망한다고 해서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뜻으로 생각됩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일은 비율이나 확률로 따질 일도 아니고,
'몇 명이나 들어가는가?'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일은 정원제가 아니라 자격제입니다.
정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격제이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면 모두 다 못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좁은 문'은
'하느님께서 좁게 만들어 놓으신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좁다고 생각하는 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넓고 편한 길만 찾다가 멸망으로 갑니다.
멸망으로 가는 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 문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우선 당장에 넓고 편한 것만을 찾다가 그렇게 됩니다.
한 치 앞만 보다가 궁극의 목적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마태 18,14).
그러니 일부러 그 문과 길을 좁고 험하게 만드실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문과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넓고 편한 문이고 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서 조금 힘들고 불편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 전체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와 해방을 원해서 목숨 걸고 이집트를 탈출했는데,
나중에 배고픔을 겪게 되니까
노예생활을 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이 말은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노예생활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인데,
고향으로(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버리고
멸망으로 이끄는 길로 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말린 것은
좁고 험한 길을 가지 말고 넓고 편한 길로 가라는 권유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일을 한 것이 되었고,
예수님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이었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어느 길로 가든지 도착 지점이 같다. 그러니 이왕이면 편한 길로 가라."
그러나 어느 길로 가든지 도착 지점이 같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만 있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도 있는 길입니다.)
또는 이렇게 유혹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버리고 왜 너 혼자서 다른 길로 가는가?
그들도 너의 형제들이니 그들과 함께 가라."
그러나 신앙생활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라면 혼자서라도 옳은 길로 가야 합니다.
따돌림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인다면,
사탄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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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법 >
요즘 많이 보는 영화 중 ‘숨바꼭질’이란 약간 공포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한 부잣집에 입양되어 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얼굴이 흉측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 집의 아들자리를 꿰차고 싶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형이 성추행 혐의자로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형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증언을 해 버립니다. 이 형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부모는 이 아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줍니다.
드디어 고아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누구도 간섭받지 않는 커다란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얻은 그 큰 집에 사는 마음이 편할까요? 이 남자는 결벽증에 시달립니다. 한 사람을 밀어내고 합당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 양심이 자신을 짓누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라도 깨끗하게 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도 하도 열심히 닦아서 피가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꿈에는 형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 약점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마치 감옥에서 출소한 형이 그러는 것처럼 가장하여 그 집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자신의 집을 빼앗으려는 사람의 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딸은 주인공 핸드폰에 달려있는 작은 인형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딸이 선물한 것이라 안 된다고 했더니, 아이는 무섭게 “내 꺼야~”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소리 지릅니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그냥 그것을 떼어 그 아이에게 줍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 아이의 모습에서 양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 아들을 몰아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뻐꾸기는 붉은머리 오목눈이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알은 오목눈이의 알들이 부화하기 며칠 전에 먼저 부화하게 됩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그 뻐꾸기 새끼는 자신의 몸에 닿는 오목눈이의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버립니다. 자신 혼자 살기에도 너무 비좁기 때문입니다. 영화 숨바꼭질은 바로 자신의 공간을 더 차지하려는 이런 사람들의 공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많을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그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지막 날 많은 이들이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겠지만 집주인은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찬례를 의미할 것이고, 가르침을 주는 것은 말씀의 전례를 의미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은 세례를 받았고 미사에도 참례했던 사람들이라고 항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악을 일삼는 그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미사에까지 참례하여 성체까지 영한 이들을 마지막 날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은 편하고 좁은 문은 불편합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사람과 관계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편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에 혼자 살다가 결혼하면 그 집에 둘이 살아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집에 여럿이 살아야합니다. 넓게 살기를 원하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즉 좁은 문이란 내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싫어도 선택해야 하는 희생의 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관계하면서도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고 그분의 원하는 삶,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분을 나 몰라라 한 것입니다.
KonTV '순간포착'에서 ‘아들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든 아버지’란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보았습니다.
장소는 제주시 노형동 A아파트 화재 현장이고, 화면엔 연기가 솟구치는 아파트 베란다에 4명의 가족이 구조를 요청하며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기와 불길은 가족들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가족들은 “뜨겁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다행히 구조대원들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까지 무사하게 구조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들 1명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애타는 아버지는 혼자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119 대원들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아파트로 뛰어드는 아버지. 다른 소방대원이 집 전체를 다 뒤졌는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소방대원과 함께 아무 장비도 없이 보조 공기통에 의존한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듭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찬 아파트를 빠져나옵니다. 가족들 모두 울음을 터뜨립니다. 불보다 뜨거운 부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입니다.
불 앞에 선 아버지, 그의 선택은 그냥 밖에 남아있던가 아니면 불속으로 뛰어들던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냥 밖에 있다면 스스로 아들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일 것이고, 불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나 몰라라 했다면 아들도 아버지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 밖에 쫓겨난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사 때 가르침도 받고 성체도 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희생으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희생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좁은 문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 순간 그분의 뜻과 내 뜻 앞에 서서 어떤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 마음에 들어가는 방법은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님이 당신들의 불편함으로 우리 마음에 사시게 되는 것처럼, 그분 마음에도 우리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해 그분 마음에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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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개미ㆍ꿀벌의 세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사사건건 따지는 한 젊은이에게 한 어르신이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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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동창 신부가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 하였는데, 그분은 공직자로서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비근한 예로,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과일 등의 선물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곧바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단돈 만 원 한 장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아들 신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원칙 하나가 있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단다.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선택하기 싫은 것, 바로 그것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될 거야.”
덜 원하는 것, 덜 편한 것, 덜 쉬운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복음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그려야 합니다. 그 반면, 넓은 문은 대접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하고 쾌적합니다. 이 두 개의 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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