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레오가 찾은 백년의 맛, 종가는 맛있다 (16)하동 정씨 정여창 종가
어머니 손맛 재현해낸 ‘비빔밥’
계절 따라 들어가는 나물 다르지만 석이버섯·북어보푸라기 빠지지 않아
두 재료 식감·색이 음식 품격 높여
멸치육수에 색색의 고명 올린 ‘국수’ 특별한 날에만 먹던 추억 서려 있어
고기전 ‘갈납전’·채소전 ‘부전’엔 달콤하고 고소한 종가의 맛 담겨
“종가에서 해먹는 비빔밥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지 않아요? 경남 함양에 가면 종가비빔밥을 맛볼 수 있다네요.”
강레오 셰프가 추천한 곳은 하동 정씨 정여창 종가다. 돌아가신 선대 종부의 손맛을 가장 잘 아는 종녀 정현영씨(64)가 종택인 일두고택 근처에 종가맛집을 내고 종가음식을 선보인다고 했다. 그곳에서 종가비빔밥을 맛볼 수 있다며 강 셰프가 길을 재촉한다.
종녀의 고집이 담긴 비빔밥과 종가국수
100년 넘은 고택 수십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남 함양의 개평마을. 그 입구에 하동 정씨 정여창 종가의 정현영 종녀가 운영하는 종가맛집 ‘고택향기’가 있다. 마을 고택과 어우러지는 전통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이곳에서 종녀는 어린 시절 맛봤던 어머니의 손맛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종가음식이라 해도 뭐 특별할 것 없는데 여기까지 오셨네요. 그래도 기왕 오셨으니 비빔밥이랑 국수 맛보고 가세요.”
조곤조곤한 말씨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반가움으로 손님을 맞은 종녀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들어선다. 놋그릇에 따뜻한 밥을 푸고 그 위에 고사리나물·무채나물·표고버섯·호박나물·쇠고기볶음·달걀지단을 차례로 올린다.
“비빔밥이 비빔밥이죠. 종가비빔밥이라고 뭐 특별할 게 있겠어요? 다만 우리집 비빔밥에는 석이버섯하고 북어보푸라기가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는 게 특징이죠.”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계절에 따라 달라졌단다. 하지만 매번 바뀌는 나물과 달리 항상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재료가 석이버섯과 북어보푸라기였다. 종녀는 어머니의 비빔밥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이 두가지 재료를 빼놓지 않고 넣는다.
사실 석이버섯은 값싼 재료가 아니다. 특히 종녀가 고집하는 국내산 석이버섯은 꽤 비싼 고급 식재료다. 비빔밥에 굳이 비싼 석이버섯을 넣느냐고, 빼도 되지 않겠냐고 주변에서 말도 많았지만 종녀는 고집을 세웠다. 어머니의 방식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석이버섯은 하동 정씨 집안 음식의 특징이에요. 어머니는 석이버섯을 많이 쓰셨어요. 귀한 재료라 일반 가정에서는 잘 사용하지 못하던 건데 우리집에서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석이버섯을 꼭 넣어요. 왜 국내산을 고집하느냐고요? 종가음식이잖아요. 종가에서 수입 재료를 사용하면 되겠어요?”
종녀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강 셰프가 잘 비빈 비빔밥 한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음미하더니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검정색 석이버섯과 북어보푸라기의 질감이 비빔밥을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만들어주네요. 식감과 향도 한층 더 좋게 하고요. 비빔밥에 종가음식의 품격을 입혔다고 할까요.”
종녀가 비빔밥과 함께 내준 국수는 그 모양새가 잔치국수와 비슷했다. 색색이 고명을 많이 올렸다는 것이 다를 뿐 육수도 멸치육수라 했다. 하지만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 국수에 종녀의 특별한 기억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날이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국수예요. 어머니는 직접 반죽해 면을 만드셨는데, 칼국수면처럼 굵은 면이 아니라 소면처럼 가늘게 써셨죠. 온 집안 식구들 다 먹일 국수였는데 국수 써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어머니는 매번 그렇게 해주셨어요. 그만큼 음식에 대한 고집이 있는 분이었죠. 저는 힘들어서 시판 소면을 쓰지만 옛날에 먹던 어머니 국수를 생각하면서 만들어요.”
부드러운 갈납전, 달콤한 부전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많은 음식 중에 종녀가 특히 좋아한 것은 갈납전과 부전이다. 갈납전은 동그랑땡과 비슷한 모양의 고기전이다. 돼지고기 간 것과 두부, 다진 채소를 섞어서 소금 간한 뒤 물기를 꼭 짜내서 동그랗게 빚는다. 일반 동그랑땡보다 크고 납작하게 빚는 것이 요령이다. 달걀물 입혀서 기름에 부치면 고소하고 부드러운 갈납전이 완성된다. 주로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인데, 손이 많이 가는 터라 자주 해먹지는 않지만 가끔 어머니를 떠올리며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부전은 채소전이다. 고추나 애호박 등으로 만드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대개 전은 달걀물 묻혀서 기름에 지지잖아요. 그런데 우리집 부전은 달걀물 대신 밀가루물로 옷을 입혀요. 그리고 두번 지져내죠. 밀가루물 옷을 입혀서 한번 지지고 양념장을 발라서 한번 더 지져내요.”
부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음식인 부적도 있다. 채소를 꼬챙이에 꿰서 밀가루옷을 입히고 기름에 지져 완성하는데, 꼬챙이에 꿰기 때문에 전(煎) 대신 적(炙)이라 부른다. 종녀가 추천하는 부적은 고추부적이다. 만드는 법은 이렇다. 적당한 크기의 고추를 골라 통으로 살짝 데친 뒤 꼬챙이에 차례로 꿴다. 마른 밀가루를 묻혀 고춧가루 살짝 푼 밀가루물에 담가 옷을 입혀서 기름 두른 팬에 부친다. 간장에 파, 마늘 다진 것, 참기름, 통깨를 넣어 만든 양념장을 한번 부쳐낸 전에 발라서 다시 한번 부친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정말 맛있어요. 기회 되면 집에 가서 한번 해먹어보세요. 이게 하동 정씨 종가의 맛이구나 하면서요.”
함양=이상희, 사진=김덕영 기자 montes@nongmin.com
도전! 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
매콤달콤하고 훈제향 가득 ‘돼지목살 고추장구이’
정현영 종녀가 들려준 종가음식 이야기 중에 강레오 셰프의 귀를 붙잡은 것은 돼지목살 고추장구이였다. 목살에 종가 고추장을 발라서 숯불에 구우면 정말 맛있다고 했다.
강 셰프는 고기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숯불에 굽기 전 짚불에 살짝 훈연했다. 소스는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토마토 고추장에 복분자 발효액을 섞어서 만들었다. 훈연한 목살을 숯불에 구운 뒤 소스를 발라 한번 더 구워서 완성한다. 고추장의 매콤달콤한 맛과 돼지고기의 궁합이 환상이라고.
하동 정씨 정여창 종가는
조선 성종 때 학자 정여창의 후손
조선 성종 때 학자인 하동 정씨 정여창의 후손들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정여창의 증조부가 처가인 경남 함양 개평마을에 자리를 잡은 뒤 하동 정씨들이 개평마을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뤘다. 정여창의 호를 따 이름 지은 일두(一蠹)고택이 종택이다. 현재 일두고택의 건물들은 대부분 정여창 사후 1570년대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1만㎡(3000여평) 대지에 건물 12동이 있는데, 남도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