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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 불안전한 순종 진노의 심판
레 10:1-11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4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8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10:1-11 / [나답과 아비후가 벌받다]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자기 향로에 불을 담아 향을 피워 놓고는 여호와 앞에 갖다 바쳤다. 그런데 이 불은 여호와께서 바치라고 명령하신 불이 아니었다. 2) 그러자 여호와 앞에서 불길이 솟구쳐 나와 아론의 두 아들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3)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받은 이에게 나는 나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드러내리라. 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내가 얼마나 높디높은 이인지를 온 백성 앞에서 분명히 드러내리라.' 아론은 아무 말이 없었다. 4) 모세는 아론의 삼촌인 웃시엘의 두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들여 `너희 조카들을 이 거룩한 성소에서 메어다가 진영 밖으로 내가거라' 하고 말하였다.' 5) 그러자 그들은 모세가 명한 대로 성소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죽은 나답과 아비후를 메고 진영 밖으로 나갔다. 6) [제사장들이 초상을 당할 경우] 모세가 아론과 그의 또 다른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일렀다 `초상당하여 슬퍼한다고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마시오. 만일 그렇게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뿐만 아니라 온 공동체 식구들에게까지 하나님의 화가 미칠 것이오. 그렇지만 그대들의 형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불로 당한 재앙을 슬퍼하여도 상관없을 것이오. 7) 그대들은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제사장 일을 보도록 따로 세워진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장막 문밖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나갔다가는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 아론과 그 아들들은 모세가 일러준대로 하였다. 8) [제사장은 술을 먹지 말아라]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셨다. 9) `너뿐 아니라 네 아들들이 나 여호와의 거룩한 장막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금 이른 말을 대대로 오고오는 세대마다 꼭 지켜야 할 규정으로 삼아라. 10) 이 규정을 따라야만 너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11)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내린 명령을 제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 취임식의 거룩하고 은혜로 넘치는 분위기가 일순간 파괴됩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경솔하게 여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불순종하여 심판받은 제사장(1-2) 화려한 의복을 입은 제사장 두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어겨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 번제단에서 피운 불로 향로에 채워야 하는데(레 16:12), 두 사람은 다른 장소의 불로 향로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을 때는 여호와의 불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상징으로 내려왔지만(9:24), 이번에는 심판의 의미로 불을 내리셨습니다(2).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됩니다.
슬픔을 감춰야 하는 제사장(3-7) 제사장이 거룩을 훼손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까이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슬픈 사람은 아버지 아론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던 두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슬픈 기색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아들들이 형제의 시신을 처리하지 못하게 했으며(4),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등의 애곡을 금지하고(6), 장례 참석도 금지하였습니다(7). 이는 부정한 것에 닿지 못하게 하셔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사람 앞에서 하나님 편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레 21:10-12).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제사장(8-11)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찾아오셨습니다(8).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만 말씀하시거나(8:1), 동시에 모세와 아론 두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11:1). 레위기에서 아론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찾아오셔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직을 재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10), 가르치라고(11) 사명을 수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아론에게 다시 거룩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을지라도 다시 힘을 주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바르게 감당하도록 분별력을 갖게 기도합시다. 아론의 잠잠한 침묵(3)은 인간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법을 중시하는 삶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성도의 본분을 잊게 하는 음주(9)는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쓸 것입니다(잠 23:32). 성령에 취해 살기를 구해야 합니다(엡 5:18).
'종'의 의미에는 servant 와 slave가 있습니다. servant는 일하다가 싫으면 떠날 수 있습니다. slave는 월급도 없으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그 일이 싫어도 어디로 움직일 수 없고 심지어는 그 자식까지도 노예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종은 servant 가 아니라 slave가 원본(헬라어)의 의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다가 도리어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고 그 복음이신 예수의 종, 노예(slave)가 되었습니다.
< 설 교 >
음식 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위기 11:1-8 / 피영민 목사
서 론
레위기 11장은 음식규례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숫자 11이 젓가락처럼 생겨서 외우기도 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음식규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음식규례는 신명기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음식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늘 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케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여기 기록된 음식규례를 지키고 있고, 안식교도들도 음식규례를 지키고 있습니다. 식당 가운데도 음식규례를 지킨다고 홍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야채만 먹겠다는 채식주의자로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음식규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Ⅰ. 음식규례의 세부내용
레위기 11장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1~23절까지는 ‘정한 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구별하는 기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한 식물’은 영어로 ‘Kosher’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카셰르’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적합한’(Right, Fit)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부정한 식물’은 반대로 ‘Unkosher’라고 합니다. 먹을 수 없는, 부적합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Kosher Meat’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정한 음식으로 분류된 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한 음식만을 파는 식당을 ‘Kosher Restaurant’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3절에 기록된 생물은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지생물과 바다생물, 하늘을 나는 생물과 곤충입니다.
육지생물에게 정한 식물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3절에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두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된 생물이라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동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는 것은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대, 사반, 토끼, 돼지와 같은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면 부정한 식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다생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돔 종류같은 것들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없거나 둘 다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조개, 게, 굴, 새우, 바다가재, 뱀장어, 문어, 낙지, 오징어 등은 먹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부정한 식물입니다.
하늘을 나는 생물 중에는 20여종이 부정한 생물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 매, 까마귀와 같이 육식을 하는 새들을 ‘Predators’라고 하고, 썩은 고기를 찾아가서 먹는 새들은 ‘Scavengers’라고 합니다. 또 당아새, 뻐꾸기, 부엉이, 소쩍새와 같은 조류도 부정합니다.
곤충은 거의 모두 부정한 식물이지만,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메뚜기와 같은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24~43절까지는 부정한 생물의 주검과 접촉해서 오염된 옷이나 그릇, 사람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녁때까지 부정합니다. 저녁이 지나면 다시 정해지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까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돼지고기나 오징어를 먹었거나 그 주검을 만진 사람은 모두 부정합니다. 그릇이 좋은 그릇인 경우에는 설거지를 해서 저녁이 지나면 다시 사용하고, 값싼 그릇은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옷은 버릴 수 없으니 깨끗이 세탁해서 저녁이 지난 이후에 입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녁이라는 시간의 제한을 두고 정함과 부정함을 정하셨습니다.
셋째, 44~47절에는 음식규례를 주신 일반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될 것과 이방인들과 구별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규례를 주신 목적입니다.
Ⅱ. 음식규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들
음식규례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맛있는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낙지와 같은 것을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런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먹지 말아야 한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음식규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규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규례를 주신 이유에 대해 네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목적’입니다.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부정한 식물들은 주로 이방인들이 이방신들을 섬기고 제사할 때 사용하던 생물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불신자들이 제사지낼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물이 돼지입니다. 돼지 머리를 제사상에 두고 제사합니다. 중동지방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65장 4절에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신들을 제사하는데 돼지고기가 많이 사용되었으니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라는 견해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일부분 타당하나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위생과 건강을 위한 목적’입니다. 부정한 생물들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를 쉽게 옮길 위험이 있는 것들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음식규례를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먹지 말라고 하신 것들은 고지혈증이나 고혈압을 유발하는 생물들이기 때문에 위생과 건강 상 먹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주장도 일부분은 타당하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는 선모충이라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반드시 삶거나 구워먹어야 합니다. 육회로 먹으면 안 됩니다. 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날것으로 먹으면 좋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자연산 굴이라 할지라도 독이 생성되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일부분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부정한 식물과 접촉한 그릇이 저녁을 지나면 다시 정한 그릇이 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정치적인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여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하도록 음식규례를 주셨다는 견해입니다.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아침에 돼지고기, 점심에 오징어, 저녁에 굴을 요리해서 준다면 어떻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역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이라도 부정한 식물로 요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하시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셨다면 이것 역시 불합리하다고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답변이 궁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는 ‘상징적인 교육의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공격적이거나 더럽거나 영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것들을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부정한 식물과 같은 종류의 삶을 살지 않게 하시려는 상징적 교육에 의의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뱀 먹는 것을 금하심은 뱀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오징어를 먹지 말라시는 것은 지조 없는 인물이 되지 말라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 타당성이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풍유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가미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설명들이 모두 완전하지는 않지만 통합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조금씩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음식규례를 주셨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첫째로 종교적으로 간음이 죄가 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성병과 같은 질병이 오기 때문이며, 셋째로 간음이 영적으로 우상숭배를 상징하기 때문이며, 또한 간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사회가 더럽고 지저분해 지기 때문에 간음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규례를 설명하는 이 네 가지 목적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음식규례는 신약시대에도 유효한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음식규례가 그대로 적용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식교 계통의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음식규례를 폐지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음식규례를 철폐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가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항존법’(Standing Law)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음식규례를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식당을 가든지 돼지고기가 단 한 번도 닿지 않은 접시나 그릇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우나 오징어를 손질해 본 적이 없는 칼을 발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규례를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은 헛된 주장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모두 지키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안식교 계통의 학자들은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은 의식법에 속한 부분이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도덕법에 속하는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11장 어디에서도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해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주장들은 모두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자의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안식교 학자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 이미 정한 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구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노아 시대에도 존재했던 타당한 도덕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아 시대에 있었던 제사장, 제사법 등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음식규례를 유대인이 지킬 필요가 없고, 이방인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음식규례에 대한 명확한 진리입니다. 유대인들도 더 이상 음식규례에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음식규례라는 멍에를 쓰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음식규례는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면 돼지고기를 먹어도 될까요? 됩니다. 새우나 오징어를 먹어도 될까요? 됩니다. 유대인에게도 이제 더 이상 음식규례의 구속력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이상 유대인들이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신앙적 단일성을 지킬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것들이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따로 구별하기 위한 규례는 소용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명백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어떤 음식도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4장 20절에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음식이 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26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27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요리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음식이 정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에게 음식을 바친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골로새서 2장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가지고 논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켰지만 지금은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폄논하지 못하게 하라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바꾸신 것을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1절에도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들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이런 것들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음식 문제를 가지고 구원과 연관 지어 신앙의 규율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입니다.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2~5절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고 거짓 선지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결혼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거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양육해봐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산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음식규례나 할례나 독신제도와 같은 것들은 모두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부정한 식물을 폐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 맞아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물론 영양학이나 위생, 그리고 건강상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영양학자의 판단으로 “당신에게 이런 음식은 좋지 않으니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나 신앙,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레위기 11장에 음식규례를 기록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한 백성이요, 이방인들은 부정한 백성이라는 예표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이 정한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은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부정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를 주신 예표적인 목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이방 불신자들처럼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표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정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淨)한 물고기
레 11:9-12 / 박기완 목사
우리 한국 사람이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중에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음식을 그곳 호텔에서 먹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들은 매우 독특한 그들만의 음식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호텔들이 '정결 음식 법'을 준수한다고 합니다.
다만 호텔에 따라서 엄격히 지키는 곳이 있고, 손님들의 편의를 보아서 눈감아 주는 데가 있는데... 심지어 랍비들 중에는 호텔이나 식당들이 규정대로 이 정결 음식법을 잘 준수하는가를 조사하러 다니는... 그런 직업을 가진 랍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정결 음식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절대로 그 호텔이나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결 음식법은 신명기 14:3∼21절, 그리고 레위기 11장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짐승의 경우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하는 것만 먹을 수 있고, 물고기의 경우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날짐승의 경우에는 먹지 못하는 새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는데,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어서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음식법의 준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면 그가 무엇을 먹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정결 음식법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거룩'에 이르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정결 음식법을 준수했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온갖 핍박과 고난의 세월을 지냈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정결 음식법을 통하여 그들은 다른 이방 사람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었고 이교도들의 종교나 문화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성서에 기록된 정결 음식법은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일상적인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일주일에 한 번 지키는 주간 행사이고, 절기들은 연간 행사인 반면에, 정결 음식법은 매일 매일 지켜야 하는 계명이었습니다.
사람은 보통 하루에 세 번의 식사를 하는데, 어떤 음식을 만들기 전에 먼저 그들은 정결 음식법을 먼저 생각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먹어도 되는 것인가?... 먹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늘 확인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매일마다... 그리고 매끼마다 유대인들은 식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식탁에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게 되므로... 모든 일상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결 음식법을 준수하는 문제는 유대인들의 경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서에서도 음식법과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기 전까지 이러한 유대인들의 고유한 음식법을 그대로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정한 것은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서 부정한 짐승들이 하늘에서 보자기에 싸여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 는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규례를 말하며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천사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고 했고,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서 깨어났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정하지만 이방인들은 부정(common)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정하게 여기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부터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행10:15).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의 상태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5:18-20절 말씀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와서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구약에 나타난 모든 정결 음식법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형식과 제도는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정신과 원리는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땅에서 사는 짐승들 가운데 새김질을 하면서 동시에 굽이 갈라진 것은 정한 짐승이므로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레11:2-4, 7).
예를 들면,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꽃사슴, 들염소, 산염소, 들양, 산양 등(신 14:5)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등과 같이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어서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레 11:4).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는데, 첫째는 새김질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김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을 따라 준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굽이 갈라진 것 동물이 정결한 동물인데, 이는 구별된 삶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사람과 달리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의 백성답고, 주의 사명을 받은 자 다와서.... 세상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되고, 부정함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권속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정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에 관한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정한 물고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먹을 수 있는 정한 물고기와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물고기로 구별하셨습니다.
즉,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정한 물고기로 먹어도 되지만....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부정한 물고기여서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로 구별해 놓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깊이 묵상.... 즉 많이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먼저 정한 물고기인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에 대하여 살펴본다면.... 이런 물고기들의 특징은 깨끗한 곳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정한 물고기는 잉어, 붕어, 피라미 등과 같은 물고기입니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이동생활을 하는 것이 또한 특징입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먹이를 찾아 이동하고.... 홍수가 발생했을 때에도 이들은 깨끗한 물을 찾아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이들의 몸을 잘 관찰해 보면, 온 몸이 비늘로 덮혀 있고 지느러미가 많고, 특별히 꼬리 지느러미는 가장 힘이 센 두 갈래의 지느러미가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이 정한 물고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물고기의 몸을 보면 유선형으로 생겨 있어서 거센 물결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매우 적합한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정한 물고기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3:47-5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니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어리니 그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는 의인으로 비유하셨고 못된 물고기는 악인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느러미와 비늘있는 물고기는 좋은 물고기로서 의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복음을 받아들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좋은 물고기의 생활 습성과 의인들의 신앙 생활이 같으므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으라고.... 이렇게 정한 물고기들만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더욱 자세하게 정한 물고기들의 생활이 어떻게 의인들의 생활과 같은지를 알아봅니다.
먼저, 정한 물고기가 입고 있는 비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고기의 비늘은 외부의 세균이나 적으로부터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적의 침입, 사탄의 공격을 막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에베소서 6:10-17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고 했습니다.
즉, 물고기에 있어서 외부의 침입을 막는 '비늘'은 군사들이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입는 갑옷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귀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입어야 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의의 갑옷' 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늘들은 바로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한 복음의 신발,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인데.... 이것들로서 악한 자의 모든 화전... 곧 마귀의 화살들의 공격을 막아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고기의 비늘은 방어용 무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느러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비늘이 방어용이라면 지느러미는 공격용입니다.
물고기는 앞으로 나아갈 때, 꼬리 지느러미의 추진력으로 앞으로 전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하고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으로 앞으로 전진하여 마귀를 공격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계속하여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0:38절에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느러미와 비늘을 관찰 해 봄으로서 이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귀의 군대들과 싸울 때 준비해야 될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정한 물고기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생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그곳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다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나그네와 같은 삶을 인식하고 이 세상을 여행하듯이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한 물고기는 물이 더러워지면 더욱더 깨끗한 물을 찾아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깨끗하고 순수한 말씀을 찾아 그러한 말씀을 먹으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정한 물고기가 되어 천국의 소망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힘입어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정한 물고기
그러면 부정한 물고기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들을 부정한 물고기로 간주하시고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 11:10-12절 말씀에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했습니다.
부정한 물고기는 정한 물고기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비늘을 입지 않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비늘이 없는 물고기들의 종류를 살펴보면 뱀장어나 미꾸라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물고기들은 아무리 그물을 쳐 놓아도 가늘고 미끈하기 때문에 요리조리 잘 빠져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 가운데는 간혹... 구원의 확신도 없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일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성경공부나 모임에도 요리 조리 핑계를 대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장어나 미꾸라지와 같은 물고기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더러운 흙탕물이나 뻘 구덩이 속에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바로 이런 성도는 마귀가 공격해 오면 전혀 무방비 상태라서 곧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과 믿음은 식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너덜 너덜하게 다 떨어져 나갔고, 믿음도 없고, 구원의 투구도 벗겨진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꼬리 밖에 없는 물고기들은 평소에 강바닥이나 뻘구덩이 속에서 정착하면서 이동 생활을 하지 않고 살았으므로.... 홍수가 발생하게 되면 뒷부분의 추진력이 약하여 강한 물살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가지 못하고 하류로 하류로.... 떠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3. 홍수 물과 물고기
홍수가 발생하게 되면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정한 물고기들은 뒷지느러미의 강한 추진력을 사용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는 부정한 물고기들은 뒤로 후퇴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입니다.
창세기 7:11-12절에 보면,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많아지므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17절), 더욱 많아지니 물 위에 떠 다녔으며, 천하에 높은 산들이 다 덮였다고 했습니다(18-19절).
그리고 땅 위의 호흡있는 모든 생물들은 다 죽고,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의 여덞 식구만 살아 남았습니다(23절).
홍수가 나서 집이 물에 잠기고 산들이 물에 잠기니까... 그제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노아의 말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방주를 아무리 두드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열어 줄려고 해도 굳게 닫힌 방주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었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이나 짐승들은 모두 다 살아났습니다.
세상에 물이 창일하고 살아있는 생물들이 다 죽었지만.... 노아의 여덞 식구들은 전혀 홍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물을 이용하여 두둥실 떠 다녔습니다.
천하에 높은 산들도 홍수 물에 다 잠겼습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생물들은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다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천하에 교회가 많고, 십자가 탑이 높게 달려 있다 할지라도.... 진리되신 주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다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노아처럼 방주에 올라탔느냐 못 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가 임하면 그 홍수와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름철에 폭우가 쏟아져 내려오면 우리는 이상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산골짜기마다 많은 물들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은 급한 물결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시냇물들이 모여서 강물을 이루고....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물결이 센지 말이죠.... 언젠가 교회에서 여름수련회를 갔다가 밤중에 비가 알마나 많이 왔는지... 부식들이 물에 다 잠기고 천막은 물에 떠내려가므로 교사들이나 학생들이 잠도 못 자고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거센 물결에 커다란 통나무도 떠내려오고, 나뭇잎과 작은 돌들이 떠밀려 내려갑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물고기들은 떠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갑니다. 통나무가 떠내려와도... 돌이 밀려 내려가도..... 아무리 급한 물살이라 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고기들은 유유히 헤엄쳐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센 물줄기를 가르고... 심지어 폭포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떻게 저렇게 자그맣고 약한 물고기들이 거센 물살을 가르면서 올라갈까?.... 참,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고기들은 비가 많이 오면 제 세상을 만난 냥.... 마냥 즐거워합니다.
생명이 없는 커다란 통나무는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만. 비록 작아도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세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거센 물살을 유유히 가르며 위로위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세속의 흐름이 걱정되지 않습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갈려면.... 핍박을 만나고 거센 시험의 물결을 만나야 합니다. 물결을 따라 아래로 떠내려가면 아무 것도 부딪치는 것이 없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거센 물결이 부딪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순종하는 생활에 마찰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바로 섰다는 증거요.... 아무런 마찰이 없으면 바르게 서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신앙, 죽은 성도는 그 물결을 가르지 못하고 그 아래로 휩쓸려 갈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부정한 물고기가 되지 말고 정한 물고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힘입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지고.... 험하고 거센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므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레 10:1-11 / 한용근 목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는 중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슬프게 울던지 노인 부부가 실신해서 응급실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성한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이유를 물었더니 아들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였는데 높은 곳에서 일하다 그만 실족해서 떨어져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는 자식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이지만 떠난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유언도 듣지 못하고 죽은 그 아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처럼 충격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나간 아이가 저녁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 온다면 그처럼 큰 충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침에 “여보 사랑해 !”하고 사랑의 입맞춤으로 떠난 남편이나 아내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충격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갑자기 죽임을 당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나답이고 한 사람은 아비후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론의 두 아들로서 거룩한 제사의 직분을 맡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성막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갑자가 죽은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도대체 예배를 어떻게 드렸기에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예배를 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1절 말씀에서 보듯이 그 두 사람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내 방법대로 예배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은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물의 종류를 정해 주셨습니다. 제단에 사용하는 불도 아무 불이나 쓰지 말고 하나님이 최초의 예배 때 하늘에서 내려주신 거룩한 불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모든 것이 어떤 형식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그 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물로 가져온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일지라도 어느 부분은 드려도 되고, 어떤 부분은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든 예배의 핵심은 예배를 드릴 때는 내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계명대로 그 규칙과 법도에 맞춰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으로 제사를 인도하는 나답과 아비후가 예배를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드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정한 거룩한 불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도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분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제사장은 어떤 불을 사용해야 안전한 것입니까? 레위기 16:11-13절을 보겠습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향로에 담는 불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제사장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속죄의 제사에 사용된 그 불을 향로에 담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서 분향단에서 그 불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예배의 가장 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죄 제사를 드린 그 불이 아니면 향로에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조건입니다. 결국,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제사장은 무조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작은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에 있습니다.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스윈돌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어느 주일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운전하시다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신호를 위반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아차라고 했지만 그것을 깨달은 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목사님의 눈과 그 교회에서 따지기를 좋아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인 한분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목사님 댁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튿날 점심때에 그분께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식당에 가보니 예상대로 그 교인과 다른 교인 몇 분이 먼저 도착해서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들어오는 스윈돌 목사님의 목에는 커다란 부착물을 가슴에 달고 나타나셨습니다. 그 부착물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부착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본 교인들은 크게 웃었습니다. 교인들이 웃는 것을 본 목사님은 다시 뒤로 한 바퀴 돌아앉았는데 그 등 뒤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쳐라"고 씌어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7절 이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깨끗게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드려지는 참된 예배는 죄를 회개하는 예배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죽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처럼 거짓된 불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가인처럼 거짓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23-24절에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예배는 죄가 성령의 불로 태워지며, 보혈의 권세로 씻어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의 영적 예배의 향기를 흠향하시는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두 사람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성소에 들어 올 때에 제사장은 오직 한명만이 들어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두 명이 동시에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소에 그것도 다른 불을 가지고 들어 간 것이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앞과 뒤 또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예배를 지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각자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만난 것도 아닙니다. 각자가 회개할 것이 다른 것처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할 준비된 자신만의 향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1:1로 만나야 합니다.
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들만이 가지고 있는 향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250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너희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냐? 우리들도 섬기는 제사장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의 말에 순종하여 따를 필요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거센 저항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찬 그는 대적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너희는 제각기 향로를 들고 그 위에 향을 얹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오십 개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민16:17). 그들은 각자의 향로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향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썩은 내가 나는 향로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흠향하시겠습니까? 죄악의 가증한 향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결국, 250개의 향로를 들고 있었던 고라와 그 대적 자들은 영원히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각자는 향로를 들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가인은 가인의 제물이 있었고, 아벨은 아벨의 제물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준비한 향로가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들 각자가 준비한 향로가 있습니다. 결코 이 성소에는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시간은 우리 각자는 자신들이 준비한 향로를 들고 이제 성소에 들어가고 있는 제사장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9:19 -22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가 되어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의 패턴을 따르면 안 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멸망의 길을 간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세상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회막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1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한 후에 12:2절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NIV 성경에는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했습니다. Pattern 이라는 말은 형식이나 틀 혹은 거푸집과 같은 세상의 방식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할 방식이 있습니다. 패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었지만 세상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패턴에 따라 우상 숭배자들이 귀신에게 예배드릴 때처럼 술을 나누고 마신 후에 성소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직도 옛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바른 예배 자가 아닙니다.
NIV 성경을 조금 더 참조해 보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는 말을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여 그 존재의 구조나 혹은 존재의 형태(form)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취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벗하여 예배드리려고 했던 나답과 아비후는 예배 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성도가 찾아와서 목사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는 주님 앞에 충성스런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해서 고민입니다. 이렇게 믿다가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절망과 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저희 집에 있는 개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집안을 더럽히는 일도 없고, 집안에서 오줌 싸는 일도 없습니다. 이 개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내 말을 잘 듣습니다. 나는 이 개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저기 저쪽에 아기가 있지요? 제 아들입니다. 집안을 어질러놓고, 더럽혀 놓는 데는 선수입니다. 어떤 때는 먹던 음식을 던져 버립니다. 새 옷을 입혀주면 금방 더럽힐 때도 있습니다. 참 말썽꾸러기지요. 자, 그런데, 누가 제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을까요? 귀엽기만 한 저 개입니까? 아니지요. 비록 말썽꾸러기지만 제 아들이 상속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을 자입니다. 당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여러분은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자주 실패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패턴을 이기지 못하고 자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pattern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형태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transformed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고, 복 받는 인생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불
레 10:1-11 / 이영은 목사
제사장 아론은 회중의 예배 인도를 맡아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씩 하나씩 그대로 다 지켜서 말씀대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말씀대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레 9:4).
예배 드리는 장소에 여호와는 불로 오셨습니다. 불로 나타나신 영광이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크고 강해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땅에 엎드렸습니다.
여호와의 불의 임재 앞에서 감격과 충만함이 감당 할 수 없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불이 회중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레 9:24).
아론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 후 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도 맡은 임직대로 회막 안에 들어가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그들을 삼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멸의 불입니다(히 12:29). 아론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예배를 받으신 영광의 불이 갑자기 소멸의 불이 되어 사람이 죽다니...(레 9:24, 10:2).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에 담은 불은 여호와가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 이었습니다(출 30:9). 나답과 아비후는 불이면 다 같은 불인 줄 알고 자기 맘대로 자기 편한 대로 향로에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죽을 만한 죄인가요?
여호와는 이 사건을 모세에게 설명하시고 아론은 그것을 듣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론은 여호와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레 10:3) 그분 앞에서 어떻게 존재 하느냐에 따라서 영광의 불이 소멸의 불이 되었습니다.
거룩함과 영광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구별된 영역입니다. 거룩에 하나님의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섞일 수 도 없고 타협할 수 도 없습니다.
거룩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안전하고 그 밖으로 나가면 버려집니다. 거룩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거룩에 부딪치는 순간 소멸해 버립니다(레 10:1~2).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축복이며 그밖에 버려진 것은 저주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와서 그 거룩에 흡수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집니다.
지금 까지 우리의 인생을 잘 살펴보면 주님 안에 있었던 것으로 세워진 것들입니다. 주님 밖에 버려진 것들은 다 소멸되었고 또 소멸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소멸되는 그것 붙들려다 고통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주님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영광이 되어 축복입니다. 인간관계, 사역, 헌신, 돈도... 주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 밖에 버려지면 저주입니다. 환란도 주님 안에 들어오면 축복이 됩니다.
결국 죄는 주님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들입니다. 불순종입니다. 사람은 감당 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영광과 심판이 가려집니다.
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여 예배하는 사람은 그 거룩하심에 흡수되어 영광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을 멸시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거룩하심에 부딛혀 자신 스스로가 멸시 당합니다(삼상 2:30).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만큼 으로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을 너무 쉽고 임직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불에 소멸 된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