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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恨中錄]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기록하다.”
*역사적 사실에 의한 픽션입니다.*
#.87 출궁령
세자가 눈을 뜨지 않은지가 삼일째. 지켜보는 이들의 지쳐가는 마음을 몰라주는 것인지, 그는 역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지쳐간다 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한 사람, 오직 빈궁만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리란 모습으로 오늘도 지아비의 입술을 열어 미음을 흘려보낸다. 한 번, 두 번, 이것이 정성으로 쌓이고 쌓여 다시 눈뜨셨을 때 아팠던 이 답지 않은 모습으로 일어나실 수 있도록.
궐 밖에서는 뜻있는 유생들과 꽤 많은 숫자의 시민들이 모여 궐을 향해 엎드린 채로 통곡을 한다고 하였다. 숨긴다 하여 숨겨질리 없는 작은 소문은 눈과 귀와 입을 타고 도성 안팎으로 물 흐르듯 번져나갔다. 제 병증을 숨기고 아버지의 뜻을 받든 이 나라의 국본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효심깊은 세자저하에게 내리신 폐위 전교를 거두셔야 하옵니다-
이 안타깝고도 감동적인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었으니, 교태전이라 하는 휘황찬란한 전각에 사는 주인이라. 오늘도 제 아들을 곁에 끼고 앉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중록 恨中錄//
“......머니, 어머니..!”
청근이 제 어미의 눈 앞에 대고 작은 손바닥을 펼쳐 흔들어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데 양제는 그냥 뜻없이 웃어줄 뿐이다. 오늘은 또 유모상궁에게서 새로이 지어온 치마를 꼭 보여주어야겠다며 늦은 시각임에도 그걸 입고 이리 찾아온 것이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지 헤죽헤죽 치마만 보면 눈웃음이다.
“잘 어울리는구나. 우리 청근이에게.”
“정말이세요?”
“정말이구말구.”
“허면 아바마마께도 꼭 보여드리고 자야하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오늘도 아니 오실까요?”
대답을 미루고 제 딸을 향해 또 그저 웃어준다. 손짓으로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기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폴싹 주저앉는다. 역시 어린 아이에게 제 어미만한 둥지가 없다고, 양제에게 한껏 몸을 기댄 청근의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기 그지없다. 혹여 잘못 앉아 치마에 주름이 잡힐까 그새 정돈을 하느라고 바쁜 작은 손-
“청근이는 궐 밖을 나가 본 일이 없지?”
“네, 없지요. 어마마마께서는 궐 밖에 가 보셨어요?”
“그럼- 어미는 어렸을 적에는 궐 밖에서 살았단다.”
“정말요?”
“할아버님, 할머님과 함께 좋은 집에서 살았었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겐 버거운 일이다. 청근은 놀란 표정을 짓지만, 제 머릿속에 쉬이 그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금세 흥미를 잃은 듯하다. 아직은 제가 입고 있는 치마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가 더 걱정이다. 양제는 그런 제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지런히 땋아내린 머리에 손을 댄다. 그 안에서 제 그리움이 살아난다.
“청근아.”
“네, 어머니.”
“청근이는 궐 밖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느냐?”
“궐 밖에서요?”
“그래, 할아버님 할머님도 계시고 동무들도 많이 있는 곳- 어미랑 그런 곳에 가서 살까?”
“네, 저도 어머니랑 그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
“아바마마랑, 오라버니들도 함께 가는거지요?”
여전히 치마를 매만지며 청근이 무심결에,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온다. 오늘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하는 얄미운 딸이다.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 지났기에 하품을 하면서도 졸음을 참고 있는 어린 청근. 양제는 상궁을 불러 옹주를 데려가라 명한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가는 청근의 얼굴에는 제 아비에게 치마를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못내 묻어있다. 후우- 이젠 익숙해져버린 한숨을 내쉬며 탁상위로 팔을 괴고 이마를 짚는다.
...
“앉거라.”
며칠 전까지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다신 세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처럼 원망감에 치를 떠시던 분이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앉아계시니 놀라웠다. 내게는 궐 안 그 어떤 웃어른보다 무서운 분. ‘어마마마’라는 말은 고사하고 ‘영빈마마’라 칭하는 것조차 가슴 떨리는 분께서 친히 나를 찾으셨다. 저하의 폐위가 결정되고 난 다음날, 그 분께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시는 중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누구도 감히 예측하지 못했던 저하의 병증에 대한 진실까지 밝혀져 모두가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 바로 그 날이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영빈마마께서 그리 앉아계실 수 있었던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의 분노가 이루어낸 결과이리라.
“찾아계시옵니까, 마마.”
“..청근이는, 잘 지내고 있느냐.”
“예, 무탈하옵니다.”
분명 이런 안부를 물으시려 이른 아침 나를 찾으신 것은 아니라 짐작하였다. 게다가 여느 때와 달리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보신다거나 신경질 적인 어투를 사용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입궁한지 얼마나 되었느냐.”
“십 년이 채 못 되었사옵니다.”
“십년이라- 길진 않으나 강산이 한번 변할 만큼은 되었으니 짧다고도 할 수 없겠구나.”
“..망극하옵니다.”
“이른 시각부터 불러놓고 서두가 길었구나. 내 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려하는데, 들어주겠느냐.”
“하교하소서.”
...
“궐을 나가거라.”
그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영빈마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놀란 표정을 보시는 그 분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있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같은 높이에 있어도 내려다보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시는 저 눈동자. 나는 그 기(氣)에 눌려 왜냐고도 묻지 못했다.
“세자의 병증에 관한 이야기를, 너도 물론 들었겠지.”
“...예.. 마마..”
“차마 입으로 내어놓기 어렵다마는.. 세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이 내가 이리 부탁하는 연유이다. 그 아이에게, 그리고 그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갈 빈궁에게
더 이상 근심을 주는 것들이 없었으면 하는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이 부탁, 들어주겠느냐.”
그것은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된 ‘명령’이었고, 애초부터 내게는 선택권을 주지 않으셨을 그런 ‘부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를 궐에서 내보내려 하신다는 의도보다는, ‘근심을 주는 것들’이라는 표현을 쓰신데 대한 적잖은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나는 왕세자의 후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히 이 궐에 입궁하였고 이제는 그 분의 마지막 남은 후궁이며 지금까지 오랜 벗처럼 그 분의 외로움을 곁에서 지켜드렸다. 그런 내게 이제 나가라 하신다. 나의 존재가 그 분과 빈궁마마께 근심이 된다 하신다.
“수용하겠다면, 중전마마께 네 의중(意中, 뜻)이라 밝히고 첩지를 내어드린 뒤 떠나거라.”
“마마, 하오나... 저는 그 분의 생각을-”
“네가 세자의 성정을 몰라 그리 말하는 것이더냐.”
“.......”
“네가 나가겠다 한다면, 그간의 정을 보아서라도 그리 말라 할 것임은 자명하지 않느냐.
오히려 세자보다는 너와 사적인 연(緣, 인연)을 지닌 빈궁이 되려 나서서 말리려 할 것이다.”
이 분께서 공연히 저하의 어머니가 되신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습게도, 영빈마마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다 근거 있고 이유 있고 이치에 맞는 말씀뿐이어서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저하라면, 내가 아는 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
“쉽지 않은 부탁임을 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마음을 굳혔으면 좋겠구나.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부디 세자가 덜 근심할 수 있도록 눈을 뜨기전에 궐을 나가다오.”
...
되도록 하루라도 빨리, 가능하다면 세자에게 의식이 없는 지금, 조금이라도 서둘러 이 곳을 등지라던 영빈의 말을 되새겨본다. 적어도 마지막 인사를 나눌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는 그 야속함에 쓴 웃음이 난다. 그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라며 생글생글 웃던 청근이의 얼굴도 불현듯 떠오른다.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가 꿈에나 그려보았었던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니 덧없는 한숨만 나올 뿐. 그것은 꿈으로 그쳐야만 할,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낮은 한숨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후- 하고 초를 불어 방을 어둡게 만든다. 그 안에서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한중록 恨中錄//
“어머니-”
...
“아니, 밤이 이리도 깊었는데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야지-”
“아버지는 아직도..”
하루 중 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 방에 있기를 싫어할 정도로 활동적인 아이가 오늘은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던 정상궁이었으나, 이제 청연의 얼굴을 보고나니 알 것 같다. 방 안에서 얼마나 깊은 울음을 울었으면 저리 눈이 부었을지. 온 감정을 눈으로 쏟아내는 일 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는데, 쓰러져 잠이라도 자고 싶을 것인데- 그래도 못내 아버지가 걱정되어 찾아온 딸이 안쓰럽고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네가 이리 와 준 것을 아신다면 아주 좋아하셨을게야.”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머니도 좀 쉬셔야죠.”
“무에 한 것이 있다고 피곤하겠느냐.”
“곁방에 제가 이부자리를 봐 두었으니 가서 좀 주무세요.”
“.......”
“..오늘은 제가, 아버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서요.”
그럴 필요없다고, 만류하려다 빈궁은 그저 딸의 어깨를 가만히 쓸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리라. 멋쩍게 듣는 앞에서 그동안 잘못했다고 말 할 용기가 나질 않을테니, 지금부터 조금씩 저의 불효를 메워나가려고 하는 것이리라. 청연이를 믿고, 제 지아비 곁에서 잠시 물러나 있기로 결정한다. 긴장이 풀리며 벌써부터 노곤해지는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온다. 청연이 제 어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가 눈을 뜨고 있는 것같은 환영(幻影)을 본다.
#.88 한밤중에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이 사람 누구예요..”
은밀하게, 되도록 목소리를 낮춰,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그렇게 소리죽여 밀담을 나누던 은언군과 어의는 제자리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쾅- 하고 번개치듯이 문을 열어젖힌 주인공은 청연이었다.
“묻잖아요.. 이 사람 누구예요.. 악화된다니, 누가..?”
“청연아, 우선- 우선 좀 앉거라, 앉아서-”
“병증..요? 누가 그렇게 아픈데요..? 어디가요..!... 왜요...!!”
여지껏 본 적 없던 태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은언군의 눈짓에 어의가 눈치를 보며 재빠른 몸짓으로 방을 빠져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청연에게 다가가는 은언군. 들어와 앉으라고 팔을 잡아끌어도 요지부동. 분노서린 눈빛을 제 오라비에게 보낼 뿐이다.
“다들 속이는 사람뿐이야. 아무도 못 믿겠다구요.”
...
그 때 청연이의 그 원망스러웠던 눈빛을 기억한다. 괜스레 섣부른 짓을 했구나 싶었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자코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이미 이렇게 모두에게 다 알려져버린 마당에,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원망할까. 그 아이에게 너무 못된 짓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것이 둘 뿐인 오라비 중에 산이가 아니라 자신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철없을 적부터 저를 곧잘 따르던 여동생. 여동생으로는 하나뿐이라 더 귀애하는 마음이 컸다. 물론 산이는 하나뿐인 남동생이고, 저와 이모저모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응당 중하게 여기는 아우임에 틀림없지만. 산이는 어렸을 때에도 유난히 성격이 점잖은 부분이 있고 어른스러웠기 때문에 청연이가 철없이 구는 때마다 그것을 그냥 넘겨버린 적이 없을 정도로 엄한 오라비였다. 그것을 위로해주고 하소연을 들어주는 쪽은 주로 나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두 동생의 아웅다웅하던 것이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 둘에게 더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 외로움을 많이 타셨던 어머니 밑에서 친형제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라야 했던 나는-
“은언군 마마, 소인이옵니다.”
“들라.”
...
“다녀왔사옵니다.”
“어찌하고 있다든가.”
“수라는 조금 드셨을 뿐이옵고- 하루종일 방에만 계시다하옵니다.”
청연이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일렀었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한다. 나가는 길에 발발이가 전하는 안부인사까지 한 몫에 짊어지고서. 그 아이가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람을 탄 것처럼 걸음이 금세 제 동생을 향해 가까워진다.
“청연이- 안에 있는가.”
“예, 고하겠사옵니다.”
“아니, 되었네.”
방 안을 향해 고함을 놓으려는 상궁을 저지한다. 마치 뭔가 큰 일을 앞둔 사람처럼 큰 숨을 몰아쉬고는 목청을 가다듬는다.
“청연아, 안에 있느냐.”
“.......”
“오라비가 왔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
“들어오세요.”
허락의 대답에 마치 제 행동의 반은 벌써 용서받은 듯이 마음이 가벼워진다. 잔뜩 풀이 죽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올까봐 걱정했던 것도 다 사라지고 없다. 열리는 문 사이로 발을 들여놓자, 머리를 반만큼만 내어놓고 이불을 덮어쓴 채 등을 돌려 누운 청연이 보인다. 그래, 저런 모습을 보니 또 얼마만큼 안심이다. 저것이 청연이 다운 행동일테니.
“몸이 아픈 것이냐.”
“죄송하지만 지금은 일어날 수가 없어요.”
“괘념치 말거라. 이대로 대화하는 것이 내게도 편하구나.”
“어쩐일이세요.”
왜 왔냐고 묻는데 뭐라 답할 말이 없다. 네가 걱정이 되어서 왔다- 는 말은 너무 뻔한 것 같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가벼운 농을 건넬 분위기도 아니다. 계집애가 아닌 이상, 어떻게든 주제하나를 건져낸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하루종일 방에만 있었다구.”
“네, 그랬어요.”
“어째서.”
“속상해서요. 밥도 안 넘어가고. 그래서 좀 울었어요.”
...
“얼마만큼은 이 오라비 탓도 있을테지. 미안하구나.”
“네, 미안하셔야 돼요.”
“.......”
“근데, 안 미안하셔도 돼요.”
“.......”
“그걸 알고.. 오라버니도 많이 근심하셨을테니까. 산 오라버니라도 그랬을테니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왜 숨겼냐고. 어째서 진즉에 모두에게 알려서 좀 더 시간을 벌지 못했냐고- 그렇게 화를 내고 원망을 한다면 모든 걸 사실대로 다 말해줄 작정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그 맘을 다 알았는지는 모르나, 이해한다고 말해주는 동생이 또 기특하다.
“얼마나 울었느냐.”
“좀.. 많이요. 실은 눈이 많이 부어서, 그래서 못 일어나는거예요. 되게 밉상이거든요, 지금.”
“안 그래도 밉다하는데, 나 때문에 얼굴이 그리 되었다면 산이가 내 탓을 하겠구나.”
“아버지께는.. 가보셨어요..?”
“얼굴을 뵐 용기가, 아직은 없구나.”
“전 오늘 아버지 곁에서 잘거예요.”
“그 얼굴을 하고.”
“괜찮아요, 아버진 항상 예쁘다 하셨으니까.”
은언군이 억지로 참던 웃음을 풉- 하고 작게 터뜨린다. 큭- 하는 소리와 함께 청연이 뒤집어쓴 이불도 조금 들썩인다.
//한중록 恨中錄//
눈을 뜬다. 그 어느때 보다 눈 뜨기가 힘이 든다. 제 아무리 천하장사도 눈꺼풀 무게는 못 이긴다더니 방 안의 모습을 눈에 다 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동궁전. 내 방이다. 한 밤중이라 알려주는 듯 밤부엉이가 울음을 운다.
옆구리가 묵직하다. 몸이 아파 둔감하게 느껴지는가 했더니 누군가의 숨소리가 난다. 뻣뻣해진 고개를 조금 들어보니 내 배를 베고 있다. 막내 딸 청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곁에서 밤을 샌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뉘이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또 누군가의 옷감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 다시금 고개를 조금 들어보니 발치에 누군가 쪼그린 자세로 벽에 기대어 불편한 잠을 자고 있다. 내 아들 산이, 역시 불편한 옷차림으로 그렇게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천근만근 무거운 머리를 뉘이고 천장을 본다. 온 몸의 열이 눈으로 모이는 것처럼 눈시울이 뜨겁다.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앉을 수 있을것만 같다. 이렇게 누운채로 또 며칠을 낭비하였을까. 의식적으로 직감한다. 모든 사실이 궐 안에 다 알려졌으리라고. 청연이의 잔뜩 부은 눈이 그것을 말해준다. 배를 베고서 깊이 잠든 딸이 깨어날까,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럽다. 다들 편히 잠도 못자고 이리 지냈구나. 가능한 한도내에서 눈동자를 굴려보지만 빈궁의 모습은 없다. 눈길이 닿지 않는 이 방안에도 없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그리는 연꽃의 향내가 없다.
기억을 조금 더듬어본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것들을. 나는 폐위 되었고. 산이가 효장 형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점. 울먹이던 빈궁의 얼굴. 부둥켜안고서 서로를 달래주었던 그 밤- 더 이상 생각을 하면 지금의 평온함이 사라질까 얼른 눈을 감는다. 떠들썩한 저잣거리 한가운데를 빠져나온 것처럼 갑자기 온 세상이 조용해진 듯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온통 새까만 가운데 나 혼자 깨어있다. 누군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도로록- 문 열리는 소리와 사박사박- 조심스레 들어오는 버선 밟히는 소리. 빈궁이 왔다.
문을 닫고서도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내 쪽을 내려다본다. 아무말없이 나도 한참을 보고있다. 방이 너무 어두워서인지 내 눈을 보지 못한다. 나도 그저 빈궁이 이 쪽을 보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손에 얇은 이불을 들고 왔다. 청연이에게 덮어주고, 산이에게 덮어준다. 그리고는 어중간하게 떨어져 앉아 가만히, 가만히- 이 쪽을 응시한다.
“저하-”
잠꼬대처럼 나즈막히 한번을 부른다. 그리고는 들키면 안 될 일을 한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쉽다. 문고리에 손을 대는 것이 마음을 쓰리게 한다.
“빈궁-”
“.......!”
...
“어째서.. 그냥 가시는게요.”
그제야 서로가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깨끗이 걷혀 없어진 것처럼. 빈궁이 다시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아까보다 한껏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가리고 아무말도 잇지 못한다. 이불속에서 손을 꺼내 내밀자마자 빈궁의 손이 감싼다.
“저하..”
“조금.. 늦잠을 잤소.”
...
“아버지...”
부스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청연이가 깨어난다. 합창을 하듯 아버지- 하는 목소리가 나더니 이내 산이도 깨어난다. 그 사이 다들 야행성이 되었나보다. 한밤중에 한 가족이 죄다 깨어났다.
“이제 다 잤느냐.”
누운채로 팔을 벌리자 청연이가 한 품에 쏙 들어온다. 손짓을 하기 무섭게 산이까지 안고보니 두 팔 가득이다. 그 위로 빈궁의 볼이 내 볼에 닿는다. 마음으로 안아준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웃고 있는데, 청연이도 산이도 빈궁도- 다들 울고 있었다.
첫댓글 와, 저 오랜만에 일빠에요+_+! 너무 좋아요^^* 영빈이 아주 큰 결단을 내렸네요. 세자에게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만약, 하늘로 간다면] 어쩌면 천생배필이였던 빈궁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 듯 싶어요. 그러니, 양제는 잠시 장외로 퇴장하셔야죠.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양제도 참 안됐네요ㅠㅜ 세자가 빈궁에게 아픔을 떠넘기고 싶지 않아 양제를 이용한 걸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양제가 세자를 진심으로 은애하였다면 세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맞는거겠죠? 드디어, 세자가 깨어나서 제가 다 기쁩니다! 본문에서의 말대로 정말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는 한결 가볍고, 정결해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그 남은 시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보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작가님, 완결까지 화이팅하세요^^♡
세자가 빈궁에게 아픔을 떠넘기고 싶지 않아 양제를 이용했다면 왜 후궁으로 굳이 들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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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무슨 말을 했던거 같은데..기억이 잘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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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자는요..외아들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그러니까..빈궁 말구도..다른 여인들한테 넘어간거 같아요..다정했던이향이나양제나(양제는잘모르겠구)그 때 작가님이 외아들이라서 세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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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가 그러니까..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고 한거 같은데..그래서 이향을 후궁으로 들였구요..그게 지금도 제일로 마음에 걸리지만요..이런저런이상한내용이나와버렸네요..
D-4 / 웃으며살자aA 님★ 일빠 축하드려요^^ㅎㅎ 이번 내용은 쓰면서도 이게 아닌가- 싶어서 많이 고민했었어요, 양제를 궐 밖으로 나가게 한다는게 그닥 내키지 않아서^^;;;;; 말씀하신것처럼 세자가 양제를 이용했다는 의미로 보여지는게 맘에 걸렸던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세자와 빈궁에게로 기우는 마음은 어쩔수가 없더라구요;;;;ㅎㅎ 이제 두 사람, 남은시간동안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음화에서도 일빠!!>_<꼭 하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영빈마마최고~ㅎㅎ그 동안 세자가 너무 양제한테만 잘해줬으니..이제는 양제는 궁궐에서 나가고 빈궁이랑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해줘야지..근데 세자는 누굴 과연 마음에 두고 있는지..??빈궁이라고 생각이 들지만..아닐거 같기도 하구..정말로 병 때문에 그렇게 대한건지..아님 병 때문에 아니라 그런건지..근데 왠지 이제와서 빈궁에게 잘해주는것도 이상할거 같아요..항상 두 후궁한테만 잘해줬으니..욕이라도실컷해주고싶지만..두 후궁들한테도..하~그냥 넘어가야죠..근데 마지막까지 후궁이었던 두 여인이 자꾸만 마음에 안 들어서 어떻게 해야할지~ㅠㅠ정말로 세자한테는 그런 점에서 실망스러웠는데..지금도 이렇게 담아두고 원망 하니..
ㅠㅠ전 세자가 그런 점에서 빼구요..나머지는 다 좋은데..아~양제한테 잘해준것도 싫었구요~그래도 잘 됐으면 하네요
D-4 / 하늘소녀ㅎ 님★ 세자, 알고보면 그렇게 질나쁜 캐릭터는 아니랍니다>_<;;;; 보셔서 아시겠지만, 한중록은 시점이 정해져있지 않고 인물인물로 자주 옮겨다녀요- 항상 그때그때 주어진 시각에 맞게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한쪽으로 기울게 될 때도 있더라구요- 어느 시점에서 세자에게 그렇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모르겠지만, 완결도 다가왔으니 이제 좀 예뻐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빵빵 터트리셨네요.!!! 점점 완결이 다가올 수록 불안해집니다. 세자가 폐위되지 않고 궁안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라고 ... 혹시나 뉴.뉴 세드엔딩이 되는 건 아니겠죠!!! 해피엔딩으로 +.+ 고고하는 겁니다. 영빈은 정말 저랑 같은 마음인 것 같아요. 양제더러 궁 밖으로 나가라고 하다니, 마지막 순간을 빈궁과 함께 지내게 하려고 +0+!!! 양제와 청근옹주는 퇴장하는 건지.....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동궁에 평화가 왔네요. 세자 빈궁 산이 청연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다음편도 빵빵 터트려주세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뿅♥
D-4 / Soul M 님★ 진작에 빵빵 터트려드릴걸>_< Soul M님께서 이렇게 반겨주시는데ㅎㅎㅎ 완결이다 마무리다 자꾸자꾸 언급하고 보니까 마음만 들떠서 저질러 버렸는데 그러길 잘한것 같네요^^ / 영빈입장에서도 양제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며느리이고, 잠시였지만 세자에게 힘이 되준 사람이니까요- 누군가 행복해지만 누군가는 좀 덜 행복해야한다는 점에서 양제에게 미안하기도 하네요;;;; 다음화에서 뵐꼐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와~세자가 깨어났다~!ㅎㅎ세자 죽이진 마세요오~ㅠㅠㅠ(작가님 저도 환절기 때마다 코감기랍니다ㅠㅠ)
D-4 / 떵묻은강아지● 님★ 세자가 깨어나고 다들 반겨해주시는 분위기라 저도 막 기뻐요^^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시니 제가 살인자가 된 기분...(<-이러고;;;) 하핫, 농담이구요^^ 앗, 벌써 코감기 걸리신겁니까>_< 꼭 약 챙겨드세요- 주사한방 맞으면 직빵이고요- 다음화에서 뵐께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늘 엄청 재밌었어요.^^늘 재밌지만 오늘은 하나하나 훨씬 더 기대하면서 스크로를 내렸답니다~ 너무 다행이에요.! 항상 Irene님은 마지막 문장이 심오하고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세자가 일어난 것도 좋은 데 양제가 떠나게 되네요. 그동안 밉상이긴 하여도 그세 정이 들었는지 또 나간다고 하니까 뭔가 찡하네요. 다음편 기다릴게요.~
D-4 / 사랑한단그말 님★ 꺄악- 글쟁이에게 가장 행복한 칭찬가운데 한말씀을 해주고 가셨네요^^ 감사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제입에 안맞으면 그만이라잖아요- 못난 글이지만 이렇게 좋게 봐주시는 독자님 뵙게되서 행운이예요^^ 완결까지도 잘부탁드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어와서 다봤어여~~ 오늘은 특히나 더 재미있고 영빈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네요~~!
D-4 / ,llskljoijhrs 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이번편 괜찮았나요^^ 영빈이 너무 쌀쌀맞아 보일까봐 걱정했는데 카리스마라고 표현해주시니 되게 기쁜걸요~ㅎㅎ 다음화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날씨 너무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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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 푼수쟁이 님★ 이제 그만 슬퍼하셔도 돼요>_<ㅎㅎ 세자가 깨어났잖아요~ 그동안을 계기로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으니 이제 예전처럼 암울한 시간은 당분간 없겠죠^^ 이렇게 영원히 해피모드였으면 좋겠어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양제... 궁 밖에서는 어떻게 살려고 ㅠ_ㅠ.. 차라리 처음부터 후궁으로 들어오지 않는게 나았을텐데. 뭐, 후궁이란게 항상 정실 다음으로 여겨지는 것이긴 했지만. 여튼 우리 세자마마가 드디어 눈을 떴네요 ㅠ_ㅠ!! 다행이다 진짜 ㅜㅜ 청연이랑 은언군이 얘기할 적에도 왠지 남매간의 정같은게 느겨져서 너무 좋았었고요 (..)... 다들 행복해질 수 있게 해주세요 ㅜ_ㅜ_ㅜ_ㅜ_ㅜ_ㅜ_ㅜ!!!! 마음고생 제일 많이 한 세자마마랑 빈궁이랑은 꼭 행복해져야 하는데..!!
D-4 / 잠자는겨울곰 님★ 네, 저도 욕심같아선 미움 많이받은 우리 양제도- 또 그 이전에 미운털 박혔었던 다른 캐릭터들도 상관없이 모두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각자 자신만의 기준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구요- 세자가 이제 눈을 떳지만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음화에서 뵐께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아 양제 결국나가나요 ㅜ_ㅜ얄미웠지만 그래도 정들었었는데 으헝헝 정말 오랜만에 동궁가족들이 모이는것일까요 잉잉 정말 세자가 아픈것만 아니면 정말 좋았을텐데 ㅜ_ㅜ 이히 얼른 건필하셔여!!힘내시고요!!
D-4 / ㄴㅏ는찡ㅋㅋ 님★ 미운정도 정이라서 막상 양제를 내보내려니 저도 마음이 짠- 하던걸요;;;;; 아팠던 세자가 깨어나고 이제 양제마저 궁을 나가고 나면 정말 동궁 가족들만 남는데- 이젠 그동안 못누렸던 만큼의 행복까지 다 누렸으면 좋겠네요- 비가와서 그런지 날씨가 더 추워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