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받은 세례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인받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축성 받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신원을 드러낸 또 다른 공현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언적 선포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분의 공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려주며, 우리 세례를 계시해 주는 성령의 장엄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새로운 세례의 신비를 드러내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감사송)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의 세례 축성의 의미도 생각해봐야겠지요.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남의 표지이며 주님의 영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해 줍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행복의 통로인 셈입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구원을 위한 충분조건이나 행복의 보증수표일 수는 없습니다. 세례 받은 자는 빛 자체이신 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1테살 5,5)로서 ‘세상의 빛’(마태 5,5)이 되어 “모든 의로움‘(마태 3,15)을 이루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세례의 약속을 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요?
‘빛의 자녀’가 되려면 고난 받는 주님의 종처럼 살아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이지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나가는 것”(이사 42,3)이지요. 어디서나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모든 의로움’을 실현해나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야”(42,7) 할 것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의 소명은 해방의 도구가 되고, 생명의 기쁨을 전하여 가난 가운데 하느님의 풍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자유의 복음이 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을 혼으로 지니고 살아내야 합니다. 모두를 품기 위한 ‘비움’, 모두와 사랑과 생명을 주고받기 위한 ‘낮춤’을 사는 것이 세례 받은 이들의 몫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렇게 비움과 낮춤의 자세로 거룩한 순례를 이어갑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점점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 자비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연민과 온정을 ‘모든 사람들’과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주님의 얼굴을 드러내야겠지요.
우리 모두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삶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녹여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거룩한 세상이 되도록 힘쓰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면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빛으로 오신 그분께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