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전에...김하락 의병장의 참모인 조성학 장군(의병장)의 외증손자(손녀의 아들) 박창락 사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었다.조성학 의병참모의 고향이 의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영주 순흥이 나오는 자료를 보셨다고 하면서 전후사정을 물어보시는 것이었다.김하락 의병장이 남한산성에서 패퇴하고 영남으로 향하여 죽령을 넘어 영주 순흥으로 가서 이모집에 들러 종제인 조성학 선생을 참모로 기용하게 된 것이다.아마도 남한산성 수성전에서 패퇴직후 조성학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순흥으로 이거를 한 것 같다(추측).아니면 원래 순흥 사람인데 이모가가 있는 청로리로 왔는지도 모른다....족보가 확인되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그 후,8.18일날 전화를 다시 주셨었고,19일 아침에 대전에서 오셨다.그래서 의성향토사연구회 전회장이신 김홍배님과 사무국장이신 김정중님을 급하게 오라고 전갈하였다.그래서 예천에서 육회집으로 유명한 백수식당에서 만났다.불고기를 먼저 먹은 후 육회비빔밥을 먹었다.(윗사진은 저녁먹으며 찍은 사진이다.)왼쪽앞에 계신분이 조성학 참모의 외증손자이신 박창락 사장님이시다.
의성향토사 관련자들을 참가하라고 한 이유는 의성군에 의병기념관을 새로 짓는데 김하락 의병장과 조성학 참모의 자료가 꼭 들어가도록 무언의 압력을 넣을려고 한 것이다.
의성군 의병기념관은 김하락 의병장의 자료가 30%는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거기에 조성학 참모가 쓴 '정토일기'원본이 전시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인 것이다.
'김하락진중일기'를 읽어보면 조성학 참모의 어머니이며 김하락의 이모님께서는 대단한 어머니역할을 하였다.의성문화원에서는 자료를 더 추적하여 의병장 어머니의 스토리텔링 자료를 하나 만들어도 아주 훌륭한 역사자료가 될 것이다.
예천 백수식당의 육회비빔밥-육회가 국수처럼 얇다.
박창락님께서 국가보훈처 민원실에 서훈신청자료를 접수시켰더니...얼마뒤에 김하락 의병장과 조성학 참모가 이종사촌이란 것을 증명-족보등-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신다.김하락 장군과 조성학 참모가 이종간이란 사실은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사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증명하여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김하락 진중일기'에 나와 있는데,새삼스레 이종간이란 것을 증명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어제 독립기념관 심사담당자에게 위 내용을 따졌다.족보를 뒤졌지만 못찾았다고.
후손이 일본에 살았고,어찌하다 보니 족보를 펴낼때 넣지를 못한 것 같다.아니면 우리가 미숙하여 못찾앗던지...광복 70주년 기념식에 대통령이 직접 조성학 장군의 손녀에게 훈장을 서훈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었을까?그것을 멍청한 국가보훈처 심사위원(멍청한 역사학자들)들이 놓치게 만들었다.나와라...내가 할께....
하여간 우리는 제적등본을 떼어보고,족보도 찾아 보기로 했다.그런데 매우 고생스런 일이다.보훈처 심사위원들은 월급도 보너스도 타면서 왜 못하는가?공무원의 한계가 정말 무섭다.불이나서 소방서에 전화를 했는데 ,불난 집의 주인보고 물양동이를 갖고 나오라고 전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주인이 출타하고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점심후 우리는 의성군 금성면사무소로 갔고,조성학을 검색하니...없다고 하여 '조기락'이란 이름으로 다시 출력하였다.
조성학 의병대장은 1914년에 55세정도 되었을 때 사망하셨다고 전해진다.(그렇다면 1859년정도가 생년이다.)아들인 조기락 선생은 1959년 55세정도에 사망했다고 한다.조성학선생이 사망할 때 아들의 나이가 불과 9살 정도였다고 한다.
금성산과 금관(조문국금관인가?)
금성면 청로리 경로당으로 어르신들을 찾아 갔다.
청로리 마을회관을 방문하였다.
청로리 노인들은 조성학의병장의 전해오는 이야기와 김하락 의병장의 일화등을 잘 알고 계신 것 같다.
위 아래 자료는 청로리 노인이신 김정수 어르신이 35년전쯤(1975년쯤)에 일본에 있던 조광남(조성학 장군의 손자이며 생존해 있는 조일분 여사의 오빠)이 부산에 사는 조일분여사(박창락 사장님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하라는 내용이다.
조광남은 조기락의 아들이자 조성학 장군의 손자이다.박창락 사장님의 외숙되신다.
조광남씨가 죽기전에 부산에 사는 여동생과 연락을 하라고 전한 편지이다.
성학씨의 자녀는 1男9女이다....집안이 잘못되길레(요절등)...심사숙고 끝에 조성학 장군의 묘를 파서 화장을 하여 산골(散骨)을 했다고 한다.박창락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와 외조모(조성학 장군의 며느리)와 함께 '봉수산'에 와서 직접 했다고 한다.
돌축대 위가 조성학 장군이 서당을 열었던 터라고 증언한다.
조성학 장군이 서당을 열었던 축대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보면서 촬영을 해봤다.
건너편으로 마을을 끼고 중앙선 철로가 놓여져 있다.
김하락 의병장의 집터
김하락 의병장을 주민들은 '일길이장군'으로 부르고 있다.일길은 아마도 초명인 듯 하다.
김하락 의병장의 진중일기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사연구소(천안 독립기념관)가 공식적인 자료로 채택하고 있는데 ,김하락 장군의 집터가 인터넷에 자료가 하나도 없다.그동안 김하락 장군에 대해서 연구가 소흘했다.
전부 곤장을 치고 싶다....정말로...의성도 마찬가지다...자료를 준지 몇달이 되었건만...김하락장군을 거지 대접하고 있다.
김하락 의병장은 의성출신인데 ,서울에서 활동, 경기도 이천의병을 창의했고, 남한산성 공략작전을 지휘했고(그래서 광주의병장이라고도 불리운다) 한성 진공작전을 최초로 실천했던 분이다.실패하자 영남으로 진출을 기도했고,제천으로 가서 호좌의진의 대장인 의암 류인석 선생을 만났고, 다시 남행하여 죽령을 넘어 영주 순흥으로 가서 은거(남한산성전투 이후 조성학 선생은 모친을 모시고 순흥으로 이거한 것 같다)하던 조성학 이종제를 참모로 기용하였다.그 직후 안동과 예천을 방문하였다. 호좌의진 영남소토사인 경암 서상렬(예천회맹 맹주)이 초대하여서 예천으로 갔고, 예천의병장 박주상(나의 족조)을 만나서 연합작전을 도모했고...안동의 봉정사 회합에 참여했다가 다시 의성으로 와서 김상종의진 및 청송의진과 연합하여 연합작전과 전투를 몇번 치렀다.수정사 전투와 청송 안덕전투 등이 그것이다.그후 경주로 행군하여 경주의병(손최수 의병장)과 연합하여 경주읍성을 6일간 점령하여 전투를 치렀다.그후 영덕으로 옮겨가서 영덕 남천수 전투에 패전하고 총상을 입고 남천수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신 분이 김하락 의병장이다.그 김하락 의병진의 잔여 패잔병에 대한 자료는 벽산 김도현(1914년 도해순국)의병장의 일기에 등장한다.광주의진의 패잔병을 수습한 김도현 의병장은 청송으로 행군했는데,이때 김도현 의병진을 후하게 대접한 분이 송소고택 주인인 청송심부자댁의 '송소 심호택'인 것이다.이때 청송의진도 화전등 전투에서 패하고 해산의 수순을 밟는다.
김하락 조성학 두 의병장은 의성인으로서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서울과 경기도에서 활동,충청도와 경북에서의 활동을 보면 정말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의성의 의병일기인 '김상종의병일기'(병신일기)와 청송의병의 기록인 '적원일기'를 비롯해서 영양의 벽산 김도현의병ㅇ장의 일기, '김하락 진중일기'와 조성학 장군의 '정토일기'를 꼭같이 봐야 한다.그래야 전체 의성의병의 역사가 보이는 것이다.
의성이 의성만 관심있다고 하면....의성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 활동한 자료를 못본체 한다면 우물안개구리다.
김하락 진중일기를 안 읽어보면...조성학이 누군지 모른다.청로리에 의병기념비나 초석이라도 세워야 한다.청로리에 김하락과 조성학 의병의 기념비나 기념관이 들어 선다면...성남,광주,이천의 중고등학생들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다가 의성 청로리에 들러서 공훈을 기리는 헌화와 묵념을 하고 가야할 장소인 것이다.
구한말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서울에 있던 해운당 김하락은 조성학,구연영,신용희,김태원 등과 함께 밤을 세워 걸어서 다음날 아침 이천관아로 가서 포군을 일으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단발령이후 전국 최초의 의병을 일으키는데 의성 금성면 청로리 출신의 두 인물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그러한 조성학과 김하락 의병장의 생활터를 확인한 것이....감격이다...감격~!
김하락진중일기는 요기참고 http://cafe.daum.net/gaetuel/Ti9T/46
조성학 정토일기趙性學征討日記 원본자료는 아래에
http://cafe.daum.net/gaetuel/4XmS/245 박창락님이 까페에 올리주신 것(원본과 초록본 및 번역문)
http://cafe.daum.net/gaetuel/U2zd/22 필자가 대구에서 구한 자료,결국 같은 자료이다.(초록본 및 번역문)
옛날 일제시대에는 청로리의 마을도로는 좌측에 보이는 하수로 개울 옆 길 뿐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후 우측의 신작로가 새로 생겼다고 한다.
지적도를 보면 조성학 장군의 집터인 청로리 910번지는 삼거리의 도로(하트표시)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성학장군의 서당터와 집터,김하락 장군의 집터가 한마을에 있는 것이다.학계에 아직 보고안된 처음 공개된 자료이다.
위는 청로에서 우보(우보)방면을 보고 찍은 곳이다.정자는 청로리쉼터이다.
하트모양의 할머니의 집에가서 함안조씨 족보를 찾아봤는데....우리가 힘이 모자라서 그런지...10권을 찾아 봤지만...못찾았다.
같은 이름인 조성학趙性學으로 찾았지만 같은 이름이 10여명이 나온다....그중에...과연...아들과 딸이 9명이나 되는데...일치하는 분을 못찾았다.
주민들의 말로는 조성학 장군의 묘가 근처에 있다고해서...찾아 보았으나 ,잡풀이 우거져서 도저히 못찾겠다.그래서 잡풀이 없는 겨울에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