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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이 지킬 규례 / 제사장의 보수
레 10:12-20
12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13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14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15 그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
16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17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 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19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20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레 10:12-20 / [제물 중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 모세는 아론과 아론의 남은 두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 드린 곡식제물 가운데에서 불살라 바치고 남은 것은 매우 거룩한 것이오. 그러니 그것을 거두어다가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어야 하오. 13) 여호와께 드린 곡식제물 가운데에서 불살라 바치고 남은 것은 형님과 조카들의 몫이오. 그러니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하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소. 14) 그렇지만 여호와께 특별히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친 제물의 가슴 부위와 뒷다리는 의식상 깨끗한 곳에서라면 식구들이 모두 함께 먹어도 상관이 없소.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친 화목제물 가운데에서 형님과 형님의 식구들이 차지할 몫으로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이오. 15) 기름 덩어리를 모조리 불살라 바칠 때 가슴 부위와 뒷다리도 함께 가져와 여호와께 특별히 드린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치시오. 이 부위는 형과 형의 식구들이 차지할 몫이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지시하셨소.' 16) [속죄제물 규정] 모세는 속죄제물로 바쳤던 숫염소가 어찌되었는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미 그것을 불살라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모세는 아론의 남은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17) `어째서 속죄제물의 살코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않았느냐? 그 제물은 더없이 거룩한 것으로 공동체 식구들의 허물을 가리우기 위하여 여호와 앞에 바치라고 너희에게 준 것이었다. 18) 그 제물의 피는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그 살코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19) 그러자 아론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것 보오. 저 아이들이 오늘 나와 함께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드렸소. 그런데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쳤는데 하물며 이 제물을 먹었다면 여호와께서 좋게 생각하셨겠소?' 20) 모세가 이 말을 듣고는 그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 즉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물들의 일부를 제사장의 몫으로 주시고 거룩한 장소에서 먹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점검하는 모세(12-15) 이스라엘의 제사는 제물 가운데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제사장들이 먹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소제의 남은 것은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12). 번제를 제외한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제물의 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를(7:33) 제사장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가족의 영원한 소득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임을 다시 밝히고(15), 나답과 아비후처럼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제사 전반을 살피고 점검하고 있습니다.(참고 요 12:50; 딤전 6:14; 벧후 2:21)
속죄제의 제물을 불태운 제사장(16-18) 속죄제물의 처리는 달랐습니다. 6장 25절을 보면, 속죄제물은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하고,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물은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6:30). 아론은 9장에서 두 번의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자신을 위하여서는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왔고, 백성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의 제물은 제사장이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아들들은 이를 불살라 버렸습니다.(참고 사 53:11; 벧전 2:24)
아론의 신학적 숙고(19-20)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의 고기를 먹지 않고 불살라 버린 잘못을 지적하자, 아론은 아들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특권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19절의 새 번역 성경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론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오늘 내 아들들이 속죄를 받으려고 주님 앞에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한 일이 오늘 나에게 닥쳤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염치로 오늘 그들이 바친 속죄제물을 먹는단 말이오? 내가 그들이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으면 주님께서 정말 좋게 보아 주시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론은 단순히 율법을 글자로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슬픔과 고난이 그를 신학자로 만들었습니다.(참고 요 4:24; 마 12:7)
적용: 아론은 자녀의 잘못에 대해, 가장으로 대제사장으로 깊은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에게도 아론과 같은 진실한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온유하고 겸손한 곳에서 덕이 쌓이고, 자아를 역설하는 곳에 죄악이 쌓입니다.
주님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거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고, 영원과 시간 사이를 잇는 유일무이한 '중재자'(mediator)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는 데 아무 제한이 없으시다면, 하물며 흩어진 사랑을 다시 모아 서로 하나 되게 하는데 무슨 걸림이 있으실지요. 예수는 어떤 종류의 사이라도 중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 사이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좋게 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interface) 역할을 하십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좋게 여기는 신자
레 10:16-20 /
율법을 스스로 어기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바로 세워야 합니다. 아론은 그래서 레위기 1-8장에 계시된 제사법대로 첫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기쁘게 열납하셨으며 아론은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의 불로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선 아론의 삼남과 사남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다시 제사법을 어겨서 모세가 노를 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는커녕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마저 죽이면 아론의 집안은 물론 대제사장직을 이을 후손이 없어지기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눈을 감아준 것입니까? 그럼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율법의 규정대로 아론의 조카들더러 그 직무를 감당하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법을 어긴 것 아닙니까? 제사법을 제정한 의미가 없어지고 먼저 심판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만 억울한 것 아닙니까? 아론의 변명을 들은 모세도 없었던 일로 칠 뿐 아니라 좋게 여기기까지 했습니다.(20절)
그렇다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신자들이 인간적 이성으로 판단하여 그 적용에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는 것입니까?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율법의 제사 규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네 종류의 속죄제
레위기 4장에 따르면 속죄제를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 따라 네 종류로 구분해서 희생제물의 종류와 제사 드리는 방식을 각기 다르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네 신분은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입니다.
둘째 신분인 회중을 레4:13에서 ‘온 회중’의 죄라고 말하지만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지은 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 ‘모든’, ‘전부’ 같은 수식어는 히브리어 표현법상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일 뿐입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지은 죄입니다. 함께 고의로 작당 모의한 죄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는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의 제사(레16장)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보다 주목할 내용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백성들에게 허물을 입힌다는 말씀입니다.(레4:3) 제사장 개인의 죄를 회중의 죄와 동격화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에게 들고나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첫째 직무입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그럼 그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또 백성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기에 그 죄는 백성들의 허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제사장과 둘째 회중의 속죄제는 그 절차가 동일하고 가장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물은 수송아지를 바쳐야 합니다. 이 단어의 원문은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young)는 뜻이므로 사실상 가장 힘센 황소를 의미합니다. 소는 당시에 제일 가치가 나가는 제물입니다. 그만큼 제사장과 회중의 죄는 중차대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제물을 죽인 후에 피를 성소에 갖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일곱 번을, 그 숫자의 완전하다는 의미대로, 뿌리고 분향 단 뿔에 발라야 합니다. 나머지 피 전부는 번제단 밑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모든 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죽음으로 그 죄 값을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 제물의 기름과 또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콩팥은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나머지 고기도 전부 번제단의 재와 찌꺼기를 버리는 진 밖의 지정된 장소로 갖고 가서 완전히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실제로 죄인의 죽음을 상징하며 죄의 흔적, 오염, 폐해, 부작용을 철저히 씻고 고쳐서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셋째와 넷째,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는 한 개인이 지은 죄를 위한 것입니다. 족장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에 조금 더 비싼 숫염소를, 평민은 그보다 조금 격이 낮은 암염소나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피는 성소에 갖고 들어갈 필요 없고 전부를 번제단 밑에 쏟아 부으면 됩니다. 기름과 콩팥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제물의 나머지 고기들은 따로 지정된 즉,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당사자와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의 기쁨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백성들의 모든 생사고락의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이 살면 함께 살고 그들이 죽으면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이 이스라엘의 진중에 항상 함께 있으며 떠난 적이 없듯이 말입니다.
제사절차를 혼동했는가?
다시 본문을 봅시다. 우선 16절에서 모세가 염소를 찾았으나 이미 불에 살랐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일단 개인이 드린 속죄제로 나머지 고기를 먹으려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15절에서 요제로 하나님 앞에 흔들며 제사 드린 고기 중에 가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의 몫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고기를 먹으려고 가져 오라고 했는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이미 다 태워 없앤 것입니다.
혹시 17절에 그 고기가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둘째 백성들이 단체로 지은 죄를 위한 제사였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회중은 영어 man이 대표단수 용법으로 인간전체도 말하지만 한 사람을 가리키듯이 한 개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17절 후반부에 너희에게 준 고기라고 했고 또 18절에서 피를 성소에 갖고 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제사는 분명히 셋째와 넷째의 개인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결국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정에서 셋째 넷째 제사 절차의 일부를 첫째 둘째 제사처럼 드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나답과 아비후가 율법대로 제사지내지 않아 심판 받아 죽은 것을 바로 얼마 전에 보고도 또 어기느냐고 당연히 야단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간단한 제사 절차를 혼동했을 리는 없습니다. 제물이 소가 아닌 염소인 것만 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이 19절에서 모세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라고 합니다. 마지막 제물 먹는 일만 빼고는 율법대로 온전하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장남과 차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이전 사건을 말합니다. 마치 오늘에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어법은 가까운 과거나 미래를 구체적인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론은 장남과 차남이 한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속죄 제물을 차마 먹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그럴 기분이나 마음의 태세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대제사장이자 아비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비라는 개인적 입장으로도 그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 화목잔치에 함께 참여해 고기를 나눠먹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은 아직 아론과 그 동생들이 더 회개 자숙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영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감정으로도 아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또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도 됩니다. 아론은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즉, 하나님도 선하게 여긴다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모세의 그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율법의 문자적 규정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에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를 안 드리면 더 좋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술을 마셨고 번제단의 불을 꺼트렸습니다. 스스로도 명백히 죄를 범했습니다. 본문에선 일부 제사의 절차만 어겼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직접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고 하나님과 회중들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제사 절차를 어기긴 했지만 더 큰 헌신과 열심을 드러낸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의 절차를 일부 어겼어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적용하면 이들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면 꼭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다른 제사들이 아니라 속죄제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속죄제는 이미 범한 잘못과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 받아 그분과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지은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긍정적 의미이지만 쉽게 비유를 하자면 십일조는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좋습니다. 헌금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이미 받은 축복과 은혜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럼 십일조를 많이 바치면 그만큼 받은 것이 많다는 뜻이므로 십일조는 많이 바칠수록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생생한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과 그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삼상15장) 사울은 그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와 보물 등 귀하고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가 없는 것들만 다 없앴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야단치자 사울은 자신의 욕심은 감추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겨 놓았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순종이 번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우상에 절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15:22,23) 사울이 우상에 직접 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분 외의 어떤 다른 힘이나 영향력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우상숭배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말라고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은 개인적 탐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어겼습니다. 또 자기 탐욕을 따랐으므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까지 어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 3:5에 탐심은,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런 마음만 먹었는데도,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하지 말고 완성하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해서 율법을 깡그리 무시하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바칠수록 좋은 십일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박하, 회향, 채소까지 십일조를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은 버리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마23:23)
오늘 본문에 드러난 율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속죄 제사는 필수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죄를 짓지 않고 그분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특별히 제사장, 지금으로 치면 목회자들은 자기가 맡은 회중들을 위해 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더욱 철저히 자기를 겸손하게 낮춰야 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울을 야단 친 사무엘은 백성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고 대신에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삼상 12:23) 목사는 자기가 맡은 양떼인 회중들의 죄와 허물은 물론 고난과 문제를 품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삼아서 기도하되 교인들보다 더 안타깝게, 더 간절하게,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몰론 그 고난과 문제를 겪고 있는 신자와 정서적으로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전임(full time) 사역자입니다. 회중은 일상적인 생업에 바쁩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교인들이 생계를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그래서 기업을 받지 않아도 백성들의 십일조로 먹고 살게 해준 것입니다.
본문의 아론도 그렇게 받아먹을 수 있는 고기인데도 도무지 자격이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목회자는 회중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생업입니다. 밥을 먹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오직 제사장으로써의 맡은 직무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아서 각각 부르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른다고 했습니다.(요 10:3,4) 신앙공동체는 그 구성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 혼자 예배나 성경공부를 주관하는 경연장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져서 목사가 부득이하게 교인들을 이름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구역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서 평신도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소그룹 사역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신자의 문제를 그 신자가 한 번 기도해도 열 번은 기도해주어야 하고, 구역장도 구역원의 문제를 구역원이 한 번 기도하면 네다섯 번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지촌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제가 목회 초기에 어떤 분을 심방 갔다가 크게 쇼크 먹은 적이 있습니다. 국제 결혼한 여자성도였습니다. 오래 전이라 죄송하지만 기지촌의 소위 말하는 양공주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일반 가정을 한번 심방가면 자기들은 동일하게 한번만 심방 오면 차별로 간주하고 두 번 이상 와주어야만 그나마 동등하게 대해준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았고 고뇌와 슬픔이 깊었으며 지금도 그 아픔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주로 세리와 죄인과 불치병자들 같은 소외된 자들을 만났습니다. 또 누구를 만났습니까? 창녀들도 만나주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지촌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많이 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별로 없었으며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만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으며 세상이 먼저 그들을 버렸습니다. 도움과 위로를 받을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 사회에선 이미 하나님에게 저주 받아 구원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마저 그들을 외면하면 죽음밖에 남지 않은 자들로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이었습니다.
아론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어겼지만 사실은 더 헌신했습니다. 한 번 심방할 것을 두 번 심방을 간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좋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율법 규정대로 했더라도 제사장의 직분을 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연히 기뻐합니다. 그가 더 철저히 낮아졌기에 하나님의 더 좋게 여긴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이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당연히 너무나 기뻐하시지만 목사는 더 철저히 낮아지고 섬겨서 하나님의 기쁨을 몇 배로 배가 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목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 앞에 제사장으로 목사로 서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기도하며 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긴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하고 아직도 탐심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며 주중에는 매 번 넘어지며 주일에 겨우 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 정도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구원하신 뜻은 당신을 따르며 자기 십자가를 지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자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섬기는 것의 몇 배로 교회 밖의 미혹된 영혼, 예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며 섬겨야 합니다.
신자가 평생 져야 할 멍에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일 성수하고 기도하고 성경에 능통한 것들 다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만 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주님은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을 실현하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기에 그것을 바로 잡고 여유를 찾으면 내가 쓰고 남는 것으로 힘든 사람도 돕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내 코가 비록 석 자나 빠져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내보다 더 딱한 사람들이 많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쓰기에도 부족하지만 그마저도 쪼개서 주위에 나눠주겠다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불신 이웃의 코가 내 코보다 덜 빠졌어도, 그들이 겪는 고난과 문제의 세기가 훨씬 약해도 여전히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져야 하고 그들을 내가 가진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능한데다 영적으로 어리석고 죄에 찌들어 자기 의지와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에 매번 실패하고 삶이 갈급하고 허망합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빌어야 할지 몰라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연발합니다.
신자로선 그들의 현실적 고난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것이 더더욱 불쌍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보다 그들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찾아가서 주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더라도 그들의 문제에 대해 기도해주고 고민을 들어주거나 같이 있어주기라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가장 큰 은혜, 축복, 권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모르는 자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입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예수를 믿고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신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신자의 숙명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다면 그들을 만나고 돌아와 잠시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주게 됩니다. 가슴이 먹먹한 것은 신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간구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신자부터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은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주일에 지난주에 지은 죄만 용서받는 심정으로 나오는 것은 속죄제를 드린 것뿐입니다.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닮아가는 삶이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분은 이 땅에 와서 인간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최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분을 따라 사는 것만이 신자의 참된 축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어서 분명히 힘들고 고달픈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함께 나눠지면 그 어려움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불신자들도 잘 알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자에겐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그것도 훨씬 더 큰 고난을 버려두고 이웃 성도는 물론 불신자의 훨씬 적은 고난을 덜어주고 나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주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신자에게 비로소 참 안식과 평강이 넘치도록 임합니다. 또 그럼으로써만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나태하거나 내 자신의 문제만 돌아보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꾸만 뒤틀림이, 속죄제를 드릴 일만 생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레위기 10:12-20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제물
지난 밤에는 규슈전역을 거쳐서 더 강력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진 가운데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본 규슈땅을 긍휼이 여겨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눈에 일어나는 현상 안에서도 하나님의 멧세지는 분명히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살피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이후에 있는 진심을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진노와 진심
아론의 두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본 이후 모세는 마무리 절차를 진행합니다. 이것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이것이 제사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절차는 제단에 태우고 남은 제물들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남은 두 아들에게 하나님은 성소의 규례를 따라 음식을 먹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직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의 직분과 직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시지만 이렇게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항상 열어두십니다.
2)불응과 동기
제물로 드릴 염소를 찾았지만 제사장들이 먹어야할 제물을 먼저 불살라버렸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제 고기를 먹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사장들이 죄를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백성들의 죄는 죄의 고백이 수반된 안수를 통해 그 짐승에게로 전가되어 속죄제 고기는 더렵혀집니다. 만일 그 죄가 심각하면 고기의 오염이 심해서 밖에서 태워서 그 죄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가벼운 죄라면, 먹을 만해서 제사장 몫으로 돌리고 제사작이 먹음으로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규정을 어겼기에 모세가 분노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날 이미 두 제사장이 규정을 위반해서 죽었는데 또 규정 위반이 또 생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실수를 한 것인지, 고의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론은 그 날 두 아들이 죽은 비극을 경험한 뒤에 어떻게 그 고기를 기쁘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이 해명을 들은 뒤에 모세는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 고기를 먹지 않고 태웠다 해도 고기에 묻은 죄가 말살되는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고기의 변형된 처리 방식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율법은 문자적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지만 허용가능한 범위 내에서 법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융통성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3)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규정은 어겼지만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속죄제의 짐승을 제사장이 먹는 것은 죄를 제거하기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수고비를 대신하여 먹도록 주어진 것이었는데 수고의 기쁨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은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 모두 불순종과 관련이 되어 있지만 의도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기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진심있는 행동이 필요로 합니다. 율법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라
레 10:12-20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양을 차던 모세를 찾아가서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산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시고 율법과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 제도를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출애굽 하신 후에는 이스라엘 중에서 레위 지파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지파로 선택합니다.
성막을 짓고 난 후에는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가문을 선택하여서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맡은 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서 성막에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백성의 대표로 하여서 상대를 하십니다.
제사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의 운명이 결정이 됩니다.
제사장은 온 백성들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온 회중들을 성막으로 부르고 7일 동안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합니다.
모세는 7일 동안 시내 산에서 받아온 명령대로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제사장 가문으로 선택을 입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8일째부터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대 제사장으로서 모세가 가르쳐 준대로 온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 제사를 드립니다.
아론이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불이 제단에 내려서 아론의 드린 제물을 태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열남하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온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를 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온 백성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맏아들인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가 술에 취하여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께서 내린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일순간에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으로 아론은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이에 모세는 이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번지지 않도록 재빨리 수습을 합니다.
모세는 얼른 아론의 사촌 동생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서 조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막에서 끌어내서 진 밖으로 내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의 셋째와 넷째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너희들은 형들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고나 애통해 하는 기색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혹여라도 슬픔의 표시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면서 애통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은 자의 죽음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와 연합한 자가 되어서 나답과 아비후의 저주가 너희들에게도 임하게 되고 그것이 더 나아가서 온 백성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므로 너희는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시기를 제사장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야 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치 못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백성들을 가르칠 수가 있겠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을 어기면 저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과 속을 구분하지 못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이처럼 화가 임한다는 것을 나답과 아비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사는 인간의 방식으로 드리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기 이전이 이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애굽식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알려준 방식으로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 책무를 다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타락하면 백성들의 타락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 위임식을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칠일 동안 성대하게 치르게 하셨지만 반대로 제사장이 타락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것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영광이 크면 책무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의 엄중함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을 무시하고 술에 취하여서 다른 불로 분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애굽식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를 샘플로 죽인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경계를 삼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온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의 책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이고 제사장의 위치가 얼마나 엄중한 자리인지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을 수습하고 난 후 모세가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백성들을 위하여 드린 속죄제를 지내고 난 후 남은 염소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제물의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 고기를 이미 불에 태워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대노합니다.
16-18절.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17.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 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 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왜 너희가 먹어야 할 고기를 불에 태웠느냐고 합니다.
모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낸 것은 단순하게 고기를 먹지 못하여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온 백성들의 죄를 위한 제사이고,
속죄제는 개인이 잘못한 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몽땅 불에 태워서 제사장이 먹을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죄 제사의 고기는 일부는 태우고 일부는 제사장이 먹도록 하였습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제사장이 먹도록 하신 것은 단순하게 분깃으로 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사를 지낸 고기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는 것은 제사장과 제물을 연합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사장이 드린 제사는 제사를 지낸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되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17절.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모세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제사의 고기를 먹게 하신 것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회중의 죄를 담당케 하여서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죄를 속함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제사장은 단순하게 제사를 지내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제물과 제사장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죄인은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보아야 하고,
제사장은 죄인들이 드린 제사의 고기를 먹음으로서 연합이 되어서 죄인의 죄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몸에 새기는 의미로 제사로 드려지고 난 고기를 반드시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제물을 드림으로 제물과 연합이 이루어지고,
제사장은 고기를 먹음으로 제물과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의 고기는 죄인을 대신 하는 것이므로 제사장이 제사의 고기를 먹는 것은 제사장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내 살이고 내 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물의 고기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먹혀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만찬으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념이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합이 된 자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이를 그들의 몸에 새기기 위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죄를 대신 하여 죽는 제물이 되고,
제자들은 제물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용서 받은 자가 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요 20:19-23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서 제자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였듯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서 제사장 직무를 담당케 하신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담당하는 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 언약 속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너희들이 뉘 죄이든지 사하면 사해 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된다 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피 맺은 새 언약 안의 복음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게 되지만 복음을 믿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단순하게 제사를 돕는 자가 아닙니다.
죄인과 제물과 하나로 연합하여서 제사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죄인과도 연합하고 제물과도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제물이면서도 죄인과 연합하신 분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을 주님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념이란? 일어난 사건을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하면서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날로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만찬을 하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살아서 함께 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성만찬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제사의 고기를 먹는 것이 됩니다.
곧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란? 죄인이 제물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고기를 먹음으로서 제사에 동참함이 되고 죄인과 제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제사를 지내고 난 후 고기를 성막 안에서 반드시 먹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음으로서 제사가 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고기를 먹지 않고 불에 태움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타자로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 제사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죄가 그대로 있게 됩니다.
이는 백성들의 죄를 제사장이 담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제사의 고기를 먹는 것도 제사의 행위인 것입니다.
죄인의 죄는 제물에게 전이가 되었지만 그 제물을 제사장이 먹음으로서 제사장이 제물과 하나가 되어서 죄인의 죄가 제사장에게 전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장차 참 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을 시키셨습니다.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예수님이 대신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고지를 제사장이 먹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기를 위한 자가 아니고 백성을 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백성들이 드린 제사의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제사의 고기를 먹음으로 백성들의 죄를 자기 몸에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고 피를 먹음으로서 속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예수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살게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죄사함이 주어졌다는 것을 잊게 합니다.
우리 의로 살도록 미혹합니다.
자기 의가 많을수록 예수를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의를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케 하시려고 성만찬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자를 의롭다 여겨 주십니다.
의란? 예수님과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란?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입니다.
타락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의이고,
예수 안 믿는 것이 불의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거룩이고,
예수 안 믿는 것이 타락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언약의 후손이지만 그들 속에는 애굽에 속성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애굽의 속성은 자기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의 방식을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의 제사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죄는 자기 방식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제물이 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주십니다.
이 사실을 몸에 새기게 하려고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먹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는 멋지게 폼 나게 드리는 것이 아고 하나님이 정한 방식으로만 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섞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한 법대로 하여야 합니다.
이를 순종이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순종한 제사장들을 엄히 책망함으로서 백성들을 경계케 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타락은 교회 안에 인간의 의가 자리 잡으면서 시작이 됩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죄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인권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은 사랑은 가짜이고 사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권을 외치면 예수그리스도가 죽고,
죄를 고발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게 됩니다.
성도에게는 인간의 의가 나오면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나와야 합니다.
용서 받고 살아가는 은혜와 긍휼이 나와야 합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막은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제물이 죽임당하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평가를 의식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교회의 거룩은 세상의 가치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코람데오!
레위기 10:19-20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직후 이어진 속죄제물의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제사장이 먹도록 규정된 제물을 먹지않고 불살랐기 때문이다. 피가 성소 안에 들여진 제물은 불살라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제물은 먹어야 했다. 먹는다는 것은 단지 제사장의 몫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에 속죄절차상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제사를 불완전하게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모세는 그런 맥락에서 속죄염소를 불사른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질책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상황이지만 규정은 제대로 지켜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 때 아론이 제물을 먹는 규례를 먹는 규정을 모른 것은 아니나 공동책임의식과 애도의 뜻에서 제물을 먹기에는 마음이 무거웠기에 일어난 일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도 헤아리셨을거라는 추측을 전한다.
규례가 어겨졌지만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다. 규례를 어긴 탓에 그에 응당하는 책임을 져야 했지만 애도의 상황에서 통감하는 마음으로 행한 일이었음을 감안한 것이다. ‘아.. 이 사안은 하나님께서도 포용하시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규례의 준수가 원칙이지만 동기가 불경하지 않다면 사랑과 긍휼로 품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이 드러난 것이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야단을 쳐야 하는 것도 있지만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변을 보면서 정죄하는 마음으로 판단했던 적은 없는지를 살핀다. 동기가 악하지 않다면 규정보다 긍휼이, 정의보다 사랑이 우위에 있음을 상기한다.
제사 음식과 주의 만찬
레 10:12-20
개인적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번도 한국 전통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른 집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대하거나 혹은 드라마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그 차려진 제삿상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담대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고, 이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서 (고전 10:20) 이런 말이 나온 것이라 생각되는데, 제사는 교제이며, 참된 교제는 함께 먹음으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도 계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는데, 문제가 많고 교만했지만 그래도 그 정체성은 주님의 몸된 교회였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그들이 물질적 혹은 영적으로 많은 것들을 소유함으로 종교 행위나 행사들은 빈번히 행했지만, 정작 주님과의 교제는 등한시 했는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고, 따라서 주님과 함께 먹을 수 없었다.
과거 아론과 그 자손들은 제사 후에 번제를 제외하고는 바쳐진 제물 중 얼마는 그들의 몫이 되어 먹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그들에게 먹고 사는 현실적인 도움도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더욱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제물을 거룩하게 먹어야 했는데, 오늘 말씀 처럼 오히려 먹어야 할 제물을 먹지 않고 모두 태우면 (17절) 그 또한 규례를 어기는 것이 된다. 하지만 모세의 질책에 대해 아론은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라고 답하는데, 이 대답은 오늘의 성찬에 대해 우리에게 귀한 조언을 해준다.
예수님께서 주의 만찬을 처음 행하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5-26)'고 말씀하셨는데, 과거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었지만 그러한 제사는 사실상 죄를 없이 하지 못했고, 따라서 유효하지 못했다 (히 10:4).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 자신을 드려 단번에 죄를 없이 하셨는데, 그리스도는 그 피와 살이 우리가 먹고 마시며 누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물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제물 즉 제사음식을 먹을 때 주의해야 한다. 그 제물 즉 떡과 잔을 받음으로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우리는 주님과 교제함으로 그분처럼 변화하기 때문이다. 고전 11:27-29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기록한다. 아론은 이 원리를 깨달았기에 남은 두 아들이 제물을 먹지 않았던 이유를 간파했고, 그 거룩하신 제물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으며, 그에 따라 모세에게 답했고, 모세는 이러한 대답을 좋게 여겼다. 주의 만찬은 우리에게 참으로 누림이 되지만 동시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영광이다.
주님, 참된 교제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죄에서 온전히 떠나고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눌 공동체가 곳곳에 서게 하소서. 우리에게 허락되고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음식과 참된 음료는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