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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노래를 만나다
태초에 노래가 있었으니, 노래가 시이고 시가 노래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라고 칭하던 무렵부터 시가 노래를 떠나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 글은 대중가요가 된 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연 어떤 시인의 시가 대중가요로 사용되었을까? 사실 광복 이전까지의 대중가요 가사는 ‘가요시’라 부를 정도로 애초부터 어느 면에서는 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대중가요를 담당했던 작사자들 중에는 문인 출신이 많았다. 조명암, 박영호, 유도순, 김억, 이하윤 등이 모두 시인이나 극작가이면서 대중가요 가사도 썼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가사를 시보다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했던 당대의 시각도 그 시절 자료 여기저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거나 광복 이전에는 노래가 된 시라고 해서 딱히 구별해서 볼 만한 작품이 없기도 하다. 그때가 시와 노래가 결별해서 각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태동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광복 이전에 나왔던 시들은 1960, 70년대에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되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이현섭 작곡, 박인희 노래, 1976년)
박인희 고운노래모음 제3집 앨범 앞면
보통 박인희의 노래로 익숙한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여서 1956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이진섭과 이봉구의 회고에 따르면, 명동에 있는 ‘동방살롱’ 맞은편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즉석으로 곡을 붙여, 그 자리에 있던 임만섭이 처음 부른 것이 <세월이 가면>이라 한다. 음반으로는 1956년에 나애심의 목소리로 신신레코드에서 처음 나왔다.
이후, 1959년에 현인, 1968년에 현미, 1972년 조용필의 노래로 발매되었고, 1976년에 박인희가 히트시키면서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가을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노래이다. 이 시를 쓴 해에 시인 박인환은 운명을 달리했다.
<부모> (김소월 시, 서영은 작곡, 유주용 노래, 1969년)
부모 / 결혼지각생 / 오늘같은 날은 앨범 앞면
김소월의 시는 대중가요로 가장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유주용의 <부모>는 김소월의 시로 만들어진 대표 인기곡 중 하나이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종종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주용이 부른 <부모>는 대표적인 노래이다. 이 음반에는 유주용의 <부모>를 비롯해서 총 12곡 중 4곡이 모두 김소월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유주용의 <님과 벗>, 최정자의 <님에게>, 최정자의 <진달래꽃>이 그것이다. 네 노래 모두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인 서영은이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2003년에 마야의 노래로 큰 인기를 얻었던 <진달래꽃>은 1968년 「가요로 듣는 소월시집」 민요 가수 최정자가 가장 먼저 불렀다. <부모>는 유주용이 부른 이래로 양희은, 홍민, 김세환, 이미자, 은방울자매, 나훈아, 문주란, 조미미, 이수미, 남궁옥분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세노야> (고은 시, 김광희 작곡, 양희은 노래, 1971년)
내님의 목소리 / 세노야 세노야 앨범 앞면
고은의 시는 노래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얼어붙은 달그림자”로 시작하는 <등대지기>는 영국 민요에 고은의 시를 얹어 포크 가수 은희가 불렀다. 조동진의 <작은배>도 고은의 시를 차용하여 만든 노래이다. 지금까지 애창되는 노래 중 하나인 <세노야>도 고은 시에 김광희가 곡을 얹어서 만든 노래이다. 1970년에 서울대 작곡과 학생이었던 김광희는 CBS 라디오를 통해 이 노래를 처음으로 알렸다. 하지만 학교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가수로서도 작곡가로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음반에 가장 먼저 실린 것은 김민기가 솔로 활동 이전에 결성했던 ‘도깨비 두 마리’란 뜻의 도비두의 노래가 가장 앞선다. 경기고 동창생이었던 김영세와 김민기가 함께 결성했던 도비두의 <세노야>는 작곡가 김인배의 캐럴 음반인 「Merry Christmas」에 처음 실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음반에서 <세노야> 작곡자를 신세희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재즈 가수로 알려져 있는 윤희정은 1971년에 KBS TV 「전국 노래자랑」에서 이 노래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1972년에 이 노래가 실린 음반을 냈다. 대중적으로는 1971년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에 <세노야>가 실리면서 양희은의 노래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비슷한 시기에 최양숙도 이 노래를 불렀다.
<개여울> (김소월 시, 이희목 작곡, 김정희 노래, 1967년)
친정어머니 / 으스름 달밤 앨범 앞면
1922년에 발표한 김소월의 시 <개여울>은 이별의 슬픔과 재회에 대한 기대를 그린 작품이다. 이 노래는 정미조의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은 그녀보다 6년 앞서 노래를 발표한 오리지널 가수 김정희가 따로 존재한다. <개여울>의 최초 버전이 담긴 음반에는 정미조의 또 다른 히트 곡 <파도>의 최초 버전까지 실려 있다.
1966년 <개여울>의 작곡가 이희목은 KBS 전속 신인 가수 김정희의 담백한 노래가 애청자들의 큰 반응이 이끌어내자 그 해에 열린 아마추어 작곡가 콘테스트에 출품해 1등상을 수상했다. 그 인연으로 1967년 킹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음반 수록곡은 방송용으로 녹음한 음원이다. 비정상적으로 세상에 던져진 이 음반은 설상가상 가수 본인의 짧은 활동으로 사장되었다. 노래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작곡가 이희목은 5년 후인 1972년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대형가수 정미조에게 <개여울>을 리메이크시키며 비로소 큰 인기를 얻었다.
<개여울> (김소월 시, 이희목 작곡, 정미조 노래,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