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단지 이것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만일 운명이 실제 존재한다면 그 어떤 운명이든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일까? 그 답은 각자의 몫이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나요? 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단연코 네! 이다.
그리고 지금 저의 운명을 더 나은 운명으로 바꿀 수 있다면 바꾸면서까지 사랑할 겁니다.
흔히 운명이라고 하면 불가해한 것,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 자신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그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까뮈의 시지프 신화처럼 예기치 않게 ‘나’를 옥죄어오는 그것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남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등이 휠 것 같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티는 바로 그 행위가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 여기고 계속해서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린다.
만일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말이다!
비록 끈질기게 버티는 바로 그 행위가 운명이라면 오히려 그 행위는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보다 소중한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는 “‘왜 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했다.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책임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운명을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속에 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은 왜, 무미건조한 에슐리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을까?
전쟁과 평화 속의 피에르는 왜, 나탸샤가 자기 사랑인 것을 몰랐을까?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의 인생을 왜, 꼬이기만 했을까?
폭풍의 언덕 속 히스클리프를 사랑한 캐서린은 어찌 유혹에 흔들릴까?
운명은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자기 운명을 자기 팔자라고 했다.
정말, 인생은 부질없는 한때 빛났던 초원의 빛이 꽃의 영광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성서에는 인생을 두고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기록하기 도 했다만 과연 인생은 헛된 것일까?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우리 생은 죽음으로 잠을 깨는 긴 꿈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꿈같은 인생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생과 운명에 대해 이것이다!
라고 정답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꿈같이 지나간 나의 인생의 경험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등을 토닥여주며 웃어주었다.
마침내 ‘아모르파티’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 잘 살아준 나의 인생이 너무 고마워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