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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형 이야기(충성편)
형 나는 개를 좋아해서 그런데 우리집 셰퍼드를 보면 항상 충성이 생각나.
개에게 충성이라는 말을 부여하기는 약간 어폐가 있긴 한데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충성이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에서는 충성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진실로, 표준번역에서는 신실로 번역했지.
영어로 믿음이 faith라면 충성은 faithfulness이지.
충성이란 믿음이 가득찬 것, 믿을만한 태도를 말해.
충성이란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신실하게 믿을 만하게 감당하는 자세를 말하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므로 충성을 착함, 선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설명하고 있어.
선이 사람들을 향할 때 자비가 되고 양선이 되지.
그러나 선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대할 때 충성이 되는거야.
충성되신 예수님을 닮아 신실하신 성령에 취한 사람에게서 풍겨나는 냄새 그것이 충성의 열매야.
노아와 모세, 요셉과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충성가 였지.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을 다함으로서 만인의 본을 보여주셨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가운데 변질과 배신으로 얼룩진 조변석개(朝變夕改)와 같은 불신앙적 태도를 제거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어.
필요성과 정쟁으로 소용돌이 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까지 누가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서로에게 미룬다면 그 현장에는 충성된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거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거야
위기에 닥치면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더욱 눈에 띄더라고…
주를 향한 당신의 충성은 위기 때에도 입증되어야 하지만 되풀이 되는 단조로운 삶 가운데서 더더욱 입증되어야 해.
되풀이 되는 지겨운 삶 속에서 주님을 망각하지 않고 꾸준히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지.
우리 교회에도 교회를 집처럼 거의 매일 나오시며 사역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시간이 남아서 아니면 할 일이 없어서 그리 충성하는게 아니야.
하나님께 하듯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거야.
그리고,충성은 이 땅 어느 임금이나 상관에게 바치는 충성이 아니야.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이 말씀 속에 충성의 출발점이 있어.
내 모든 소유에 주인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지.
"주인이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말하지. "하나님이 맡겼다" 즉,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시간, 건강, 재능, 재산과 지위와 명예, 그리고 자기 자녀들, 이런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것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요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하지. "이것은 네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었다."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거야.
주인은 자기의 소유를 종에게 맡겼던 것이지 종에게 준 것이 아니야.
우리가 고난을 겪어보면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건강할 때는 건강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 건강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
인간은 피조물이고 피조물은 주인이 아니야.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심판이 있어.
"내 모든 소유에 주인이 따로 있었다!" 때문에 내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그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주인이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겼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충성을 다하여 이문을 남겨왔을 때 주인이 크게 칭찬을 했지.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내용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 칭찬과 두 가지 보상으로 되어 있어.
우선 세 가지 칭찬은 잘하였다 , 착하다, 충성되다는 것이야.
두 가지 보상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는 것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것이지.
이렇게 분절해서 따로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드는데?
여기 달란트는 돈의 단위 중에서는 가장 높은 금화의 단위야.
가치로 본다 해도 요즘으로 말하면 5억, 2억 - 억 단위에 속하는 돈이지.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아야 될 신령한 은사나 예수님의 성품 그리고 우리가 받은 모든 자원은 모두 크고 귀한 거야.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씀하셨을까?
글쎄, 그렇게 물어보니 늘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떠오르지 않네?
여기 "적은 것"이란 말이 헬라어로는 "올리고스"라고 되어 있는데 숫자가 적은 것, 사이즈가 작은 것, 시간이 짧은 것 등을 말해.
때문에 이 말은-
첫째 하나님의 그 위대함과 크심에 비해 지금 내가 받은 것은 적은 것이라는 뜻이야.
둘째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충성을 보시고 정말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시고 싶어하신다는 뜻이지.
셋째 크고 작음의 개념뿐이 아니라 많고 적음의 개념으로 볼 때 우리가 한 가지 일에 충성하면 수많은 선물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야.
넷째 충성의 본질이 처음부터 작고 적은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충성의 성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거야..
마태복음 15:34절 어린아이가 바친 보리떡 몇 개 생선 몇 개할 때 여기 몇 개가 바로 "올리고스" 적은 거야.
이것을 바치니까 4천명이 먹고 5천명이 먹고 남지.
이것이 충성의 신비지.
와 이렇게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지는 미처 몰랐네.
소인은 크고 특별한 것에만 충성하고, 위인은 평범한 것에도 충성하고, 성자는 작은 것에 크게 충성한다는 말이 있어.
적은 일은 언제나 내 곁에 있고 내게 맡겨지는 일들이지.
그 일들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인물 됨을 알 수가 있지.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칭찬 받았다는데 있기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책망에 있어.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유명한 구절인데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여기 충성의 반대되는 말이 "반역"이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말씀하시지.
원래 "게으름"의 반대말은 "부지런함"이어야 하는데 "충성"이라고 말씀하셔.
바로 여기에 깊은 교훈이 있고 영적세계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관점이 있어.
"충성"의 대적 - 그 역적의 정체를 벗겨보니 "게으름"이었다는 거야.
충성된 삶은 착한 성품과 관련이 있고 악한 성품은 게으름과 관련이 있어.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붙어 나오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붙어 나오는거야.
처음부터 충성은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신나게 살라는 부름이지.
신령한 삶, 영적 승리를 위한 고단한 삶으로의 부름이야.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의 제자들의 삶이 쉬울 것이라고 편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
그 길은 처음부터 좁은 길이었지.
충성은 내게 대가, 절제, 희생을 요구하지.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것들을 지불하지 않아.
바로 그것이 불충이요 악이지.
형, 나는 약간 게으른 천재 스타일이라고 사람들한테 뻐기고 다녔는데 정말 멍청한 짓하고 다녔구나?
지금부터라도 알면 돼. 이 게으름이 대적해야 할 치명적인 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게으름에게 질 수밖에 없어.
게으르면 충성의 열매는 맺혀지지 않아.
김남준 목사님은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이란 책에서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들에게 이 땅의 삶이 유한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짧다.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충성이므로, 게으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성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충성이요, 맞서 싸워야 할 내 속의 악이다. 게으름은 충성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표적 악이다."라고 말하셨지.
게으름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결코 지나치지 않은 것이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게으름을 이긴 결정적 태도를 "바로 가서"라고 말하지.
머뭇거리지 않았고 갈등하지 않았어. 즉각적인 순종, 즉각적인 결단, 즉각적인 행동을 했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몸이 게으르다고 혀까지 게으르지는 않았다는거야.
게으른 자 일수록 그의 입은 더욱 분주해.
핑계하기에 바쁘며, 본문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비판하기에 바빴어.
감사엔 게으르고 불평하기에 바빴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에 바빴으며,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기에 바빴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제가 남겼나이다" 그것으로 끝이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무슨 말이 그렇게 많고 핑게가 그렇게 많은지, 혀가 분주하기 짝이 없어.
혀가 분주하다는 말 마음에 콕 박힐 정도로 충격인데?
엉뚱한 일에 바쁜 것 그것이 게으름이야.
「게으름」이란 책에서는 이것을 부지런함을 가장한 게으름이라고 했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바쁜 것은 충성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열매야.
자기 일에 바빠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것 이것이 게으름이야.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낮잠만 잤을까?
아마 뭔가 자기 일에 분주했을 것이고, 자기 인생목적을 상실하고 엉뚱한 세상일에만 바쁜 것이 게으름이야.
게으름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영적 거인이 될 수 없어.
다윗은 전쟁 중 게으름 때문에 넘어졌고, 게으름은 어떤 사람의 성향이 아니지.
모든 성도들이 맞서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이야.
게으름이 악이라는 이야기는 형이 전에 스캇 펙 박사 소개해주면서 했던 게 얼핏 기억이 나네.
지미 카터는 대통령 퇴임 후 전에 섬기던 교회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어.
그는 「직업과 소명」이란 책에서 주일학교 교사의 일은 대통령의 일보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어.
그를 4 년 동안 동행 취재하던 한 백악관 출입기자는 「지미 카터는 백악관이 목적이 아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고 말했지.
대통령직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어.
이것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의 모습이지.
충성된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겠네.
응, 성경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했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여름철 비지땀을 흘리고 목이 갈할 때 마시는 얼음냉수 같은 존재가 게으르지 않는 충성된 사람이라는 거야.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들이야.
작은 충성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맡은 사명, 맡은 직분 - 땅에 묻어 두지 말아야 해. 본전만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
직분 이름만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지.
어느 때까지 "주세요 주세요"만 반복하다가 일생을 마칠것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야.
우리가 게으름을 대적하며 승리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 앞에 충성의 열매가 풍성하길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더 주시고 싶기 때문이야..
아,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빼앗긴다는 말씀이구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며, 충성의 신비야.
충성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마지막 상황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되지.
·영적인 일에 부지런하면 영적 거인이 되고, ·기도에 게으르지 아니하면 기도의 거인이 되며, ·게으름을 이기고 하나님께 충성된 자엔 받을 것이 많게 돼.
역대상 11:19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어.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세 용사가 다윗 왕에게 보여준 충성을 통하여 영원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충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지.
만일 우리가 다윗의 세 용사가 보여준 충성으로 주께 충성한다면 주께서는 반드시 ‘감동 받으실 것’이야.
첫째는, 세 용사는 온 맘을 다해 주인의 기쁨이 되려고 했어.
다윗의 소원은 작은 푸념 같은 것이었어.
그런데 그 푸념이 충성된 용사의 귀로 들어가자 그들 마음에 강렬한 열정이 타올랐어.
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요청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강렬하여지는 것이 충성된 마음이야.
둘째는, 왕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고 있어.
그것은 생명마저 아끼지 않고 드리려는 마음이지.
그런데 생명을 바치는 이러한 충성된 행동을 보이기 전, 세 용사는 언제나 왕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셋째는, 세 용사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어.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왕의 영광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어.
오직 왕을 보호하고 왕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왕에게 인정받기를 바랄 뿐이었지.
넷째는, 일단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어떠한 불편과 난관도 개의치 않고 뚫고 나간다는 점이야.
충성된 마음에는 중간에 포기란 있을 수 없어.
생명까지 드릴 각오로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 뿐이지.
충성에 대해서 한 2% 부족한 것 같은데, 방향성이 잘 잡히지가 않아.
끝으로 충성은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삶의 자세를 뜻해.
디모데후서 2장 말씀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째는 군인의 비유이고,
둘째는 경기하는 자의 비유,
셋째는 농부의 비유야.
이 세 가지 비유는 어떤 사람이 충성스러운 일꾼인가를 교훈하고 있지.
군인의 비유에서는 군인들이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데 그 사명이 있다고 했어.
충성이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매어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지.
우리가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려면 먼저 분명한 목표를 알아야 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함이 곧 우리 신앙의 목표야.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 목표를 향해 나갈 때 진정으로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어.
오늘의 문제는 이 목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 데 있어.
교인들이 그냥 교회만을 위하여 충성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있지.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목표야.
교회를 위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같지 않아.
우리 신앙의 목표는 교회성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지.
둘째 비유에서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고 했어.
경기하는 자가 목표를 바로 알고 규칙을 지켜서 달리지 않으면 실격되고 마는 것처럼, 우리 크리스찬은 항상 분명한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달려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거야.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그 말씀에 충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시지.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성경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새롭게 바뀐 규칙을 모른 채 뛰다가 실격을 당한 선수처럼 낙오되기 쉽지.
우리가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깨우치시는 역사의 의미와 그 역사를 바르게 보게 하는 성경말씀을 올바로 깨우쳐야만 해.
한국 교회는 변화된 역사와 상황을 올바로 읽지 못한 채 옛 생각만 하고 있다가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많았어.
셋째 비유는 농부가 가을의 수확을 위해 봄부터 수고하는 것에 우리의 믿음을 비유하고 있어.
농사일은 충성스러운 농부가 아니고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어.
땅은 농부가 땀 흘린 만큼 그에게 보답을 해.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한 만큼, 우리가 봉사한 만큼, 우리가 희생한 만큼 믿음은 자라지.
땀 흘리는 농부처럼 정직하게 성실하게 주어진 사명과 과제를 감당할 때 우리는 충성된 종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어.
특히 우리가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하기 쉬운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을 할 때 마침내 큰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어.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고 하셨어.
어 형 , 톨스토이의 말 중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최선을 다하여 선을 베푸는 일이다"라는 게 생각나네.
지금 주어진 작은 일들에 신실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하게 일할 수 없음을 뜻해.
오늘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되지 못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
하루해를 아껴 농부가 부지런히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어진 시간들을 아껴서 봉사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인 '충성'이 맺히게 될 거야.
성령의 열매인 '충성'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한결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야.
즉,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속에서도 처음에 배운 겸손을 잃지 않음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땀 흘리며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임을 항상 기억해야 돼.
뭣도 모르고 충성을 셰퍼드에 비유했지.
아니, 양치기를 뜻하는 셰펴드로 보면 목자인 예수님 생각도 나고 예수님이 죽기까지 충성한 그 뜻이 떠올라서 셰퍼드로 비유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데 뭘.
그거 의도한 것 아니었나?
무안하게 만들기는… 잘났어 정말…
#다음 카페 위로부터의 성령의 열매, 스데반황 목사님의 설교, 창골산 봉서방 충성, 성경벌레들을 참조했습니다.
흐르는 음악: 새찬송가 333장 충성하라 죽도록 바흐 칸타타 67장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존 셰퍼드 (c.1515~1558)
찬가 '그리스도 다시 부활하셨네(Christ rising again)'
배경 그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질 당함- 윌리엄 부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