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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주교회의는 지난 28일 새 로마 미사 경본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2021년 4월 부활 첫째 주부터 적용될 새 미사 경본을 펴내며 “이탈리아어와 공동체의 사목 상황에 알맞은” 여러 수정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이번 새 미사 경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미사 중 감사 기도 때 성작을 들어올리며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대목이 이전처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로 변경된 점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기는 자국어 미사 경본이 보급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한데, 라틴어 미사 경본이 번역되면서 감사 기도 때 사제가 말하는 ‘pro multis’가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for all”, 프랑스어로는 “pour tous”, 이탈리아어는 “per tutti” 등 대부분 예수의 수난이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많은’이 아닌 ‘모든’으로 번역되었다.
‘pro multis’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의미다. 하지만 1970년대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이렇게 해석할 경우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배제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할 여지가 크고, 문맥상 ‘모든 이를 위하여’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성서주석학자들에 따르면 라틴어로 ‘pro multis’라고 해석된 아람어 단어는 ‘모두를 위하여’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이유인 다수의 사람은 한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말한다.”(교황청 경신사성 공보 「Notitiae」. 1970/01. p.38-40)
“오늘날 사고방식에서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셈족의 사고방식에서는 신학적 문맥상 당연히 함의되어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배제시킨다. 그러나 야훼의 종이라는 신학에 대한 암시는 오로지 전문가들에게만 자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일부에서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암시하는 단점이 있을지언정, 이러한 오해의 위험성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교황청 경신사성 공보 「Notitiae」. 1970/04. p.140)
이렇게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감사 기도의 문구가 “너희와 모든 이를”에서 “너희와 많은 이를”로 바뀐 것은 2017년이다. 2006년 베네딕토 16세 임기 때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는 ‘pro multis’가 가진 의미가 ‘모든 이를 위하여’임을 인정하면서도 로마 미사 경본에 대한 충실한 번역을 강조하며 원전이 제시하는 ‘pro multis’라는 표현을 “모든 이를 위하여”가 아닌 “많은 이를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안을 담은 서한을 각국 주교회의에 전달했다.
앞서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한 근거와는 반대로,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라틴어에 ‘모든 이를 위하여’를 뜻하는 ‘pro omnibus’라는 표현이 존재함에도 여러 기도문이나 성서 구절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감사 기도의 라틴어 표현을 ‘많은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한국, 스페인, 독일, 영국 등 세계 주요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들이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번역을 채택하였다.
한편,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라틴어 미사 경본 해석에 있어 그 적합성이나 일관성을 판단하는 일을 각국 주교회의 소관으로 하여, 라틴어 원본에 대한 충실성을 전제로 해당 언어로의 번역 작업에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한 국가의 미사 경본 해석이 다른 국가의 해석을 긍정하거나 부정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판단은 각국 주교회의에 달려있다.
[필진정보]
끌로셰 : 언어문제로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글이나 그러한 글들이 전달하려는 문제의식을 발굴하고자 한다. “다른 언어는 다른 사고의 틀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사회 현상이나 문제는 주조에 쓰이는 재료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의식은 같은 분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그 논점과 관점이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해외 기사, 사설들을 통해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정보 속에 담긴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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