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때에 있어 그 자신이 꾼 꿈을 바로 그 자신이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땅의 모든 박수와 술객 등 꿈 해몽과 관계된 자들이 난데없이 다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 연계 선상에서 그 땅에 포로로 잡혀 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까지도 죽임 당할 위기에서 기도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합심 기도로 인해 극적으로 해결이 되었고 완전히 역전까지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기도를 통해 이성적, 상식적으로는 많이 기이하고 쉽게 믿기 힘들며, 어떤 면에서는 참 만화와 같고 황당할 수도 있어 보이는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실제로 그 왕이 꾼 꿈을 환상이라는 하나님의 방법과 함께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어 해결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다 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래 본문 이후를 보면 그러한 과정과 함께 다니엘이 그 땅의 온 지방을 다스리는 직위를 얻게 되었고 모든 지혜자들의 어른이 되기까지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으로 인한 은혜되고 특별하며 여러 모양의 다양한 역사들에 있어 기도 및 합심 기도에 초점을 두고 강조하기 쉬운데 물론 그러한 면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심히 당연한 부분 또한 아닐 수야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에서만 그친다면 아래 본문 및 그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통찰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기도를 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합심 기도나 금식 및 철야 기도 등과 같은 특별 작정 기도들도 할 수야 있는 것이며, 사실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기도의 제목인 것으로 최대한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두가 다 무조건적으로 응답에 합당하다든지, 더 나아가 믿기 힘든 일들, 이적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인 것은 아닌 것이며, 더 나아가 한편으로는 그러한 기도 자체에만 모든 중심을 둔다면 세속적이고 맹목적이며 정욕적이고 기복적인 간구, 참으로 이단, 사이비들도 그런 제목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할 수 있고, 게다가 악용, 오용하기도 하는 기도 아닌 기도 또한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역사들, 응답과 예비들, 역전과 이적들 등에 있어 기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알맹이라거나 근본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그를 위한 통로이자 과정이며 형식적, 도구적인 측면인 것으로 그러한 환상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응답들은 조금만 통찰해 봐도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역사들 중 일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일반 은총이든지 특별 은총이든지 간에 어쨌든 모든 하늘의 힘과 역사들마다, 특히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들마다 단 하나,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과,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두 다 이루신 구원에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모든 기도들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는 그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하나하나 모두 다, 특히 어떤 모양의 응답이든지 간에 생생히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근원적으로는 그러한 환상과 같은 기도의 응답을 위시한 하나님으로 인한 크고 작은 역사들은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말씀이시며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대단한 이적들 뿐 아니라 가장 작아 보이는 기도의 응답 한 번에 있어서까지도 사실상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직결되며 시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생각 이상의 근본적이면서 실질적인 기준과 관건, 방법과 통로가 아닐 수 없는 것이고, 실상 그러한 말씀과 관계없거나 동떨어진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이자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사실은 그와 같은 기도는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기도가 아닌 것이고 하나님과 결코 관계있는 기도가 될 수 없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심지어는 특별하게 작정하면서까지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래 본문에서의 다니엘과 세 친구들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이하고 놀라우며 상상도 못할 응답과 역사 이전에 그들은 그 바벨론의 왕이 꾼 꿈을 그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적, 세상적, 상식적, 과학적으로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어 보이는 상황과 현실에서도, 심지어는 그로 인해 자신들의 목숨까지 절체절명의 위기의 처한 실상과 형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진정 무에서 유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필요하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등과 같이 말씀에 증거된 대로 역사해 오신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말씀 그대로 하실 수 있다고 믿었을 정도의 말씀의 신앙이었던 것이고..
뿐만 아니라 아래 본문 이전인 다니엘 1장 8~9절에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한 두 구절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으로 붙잡으면서 목숨까지 걸 정도의 말씀의 열정이었던 것이며, 바로 그러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합심 기도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환상을 통해 해결되는 체험을 생생히 하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역사하신 것이고, 더군다나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도,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도 아주 합당했던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있어 그 정도로까지 기뻐 역사하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다니엘2:17~19)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5월 10일(금)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