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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것과 부정한 짐승 1 육지와 물에 사는 것
레 11:1-12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레 11:1-12 / 1-3)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리셨다 `강 위에 살고 있는 짐승 가운데에서 너희가 먹어도 되는 짐승은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이다. 4) 하지만 새김질만 하고 굽이 두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짐승이나, 굽은 두쪽으로 갈라졌으되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은 먹을 수 없다. 낙타는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두쪽으로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하다. 5) 사반도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짐승인 까닭에 부정하다. 6) 토끼도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까닭에 부정하다. 7) 돼지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짐승인 까닭에 부정하다. 8) 이러한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며 또한 이러한 짐승의 사체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 이 짐승들은 모두 부정하기 때문이다. 9) 물속에 사는 것 가운데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바다에 살든 시내에 살든, 먹을 수 있다. 10) 하지만 바다나 시내에 살더라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부정하다. 11) 이러한 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므로 먹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 사체도 너희에게 부정하다. 12) 물에서 사는 것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다.
본문은 제 11장에서부터 15장까지는 정결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음식으로 섭취할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그리고 정결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1-8)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에 대하여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먹을 만한 짐승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발굽이 갈라져야 하고, 다른 하나는 새김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김질해도 발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발굽이 갈라졌어도 새김질하지 않는 동물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셨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위생적인 이유로 건강상 좋지 않다는 것이며, 둘째는 정치적인 이유로 우상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고자 함이며, 셋째는 종교적인 이유로 부정한 짐승이 이방인의 우상과 제의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며, 넷째는 교육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은 음식을 구별되게 섭취하므로 생활 자체까지 구별되게 살도록 교육하기 위함입니다.
먹을 수 있는 물고기와 먹을 수 없는 물고기(9-12) 하나님은 물 속에 있는 물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왜 이와 같이 구분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물고기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애굽에서 자유롭게 먹었던 물고기를 구분하여 섭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식생활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짐승을 언급할 때 위에서 '부정하다'라는 표현이 물고기에서는 '가증하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더 강력한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적용: 본문의 음식 규례는 은혜 시대를 맞아 오늘날 폐해진(고전 10:25-26) 법이라서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충족하고 있는지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참고 눅 1:75; 약 4:8)
어떤 짐승을 부정하다 했을 때, 그것은 그 짐승이 본질적으로 더럽거나 부적절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피조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돼지도 낙타도 독수리도 그 자체로는 선한 피조물이며 결코 더럽지 않습니다. 심지어 뱀마저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에 다양한 상징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상징의 세계에서는 어떤 사물이나 동물이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상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먹는 문제와 관련해서 이러한 짐승들에 부정하다는 상징성이 부여될 뿐입니다.
< 설 교 >
음식 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위기 11:1-8 / 피영민 목사
서론
레위기 11장은 음식규례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숫자 11이 젓가락처럼 생겨서 외우기도 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음식규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음식규례는 신명기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음식규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늘 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케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여기 기록된 음식규례를 지키고 있고, 안식교도들도 음식규례를 지키고 있습니다. 식당 가운데도 음식규례를 지킨다고 홍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야채만 먹겠다는 채식주의자로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음식규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Ⅰ. 음식규례의 세부내용
레위기 11장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1~23절까지는 ‘정한 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구별하는 기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한 식물’은 영어로 ‘Kosher’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카셰르’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적합한’(Right, Fit)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부정한 식물’은 반대로 ‘Unkosher’라고 합니다. 먹을 수 없는, 부적합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Kosher Meat’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정한 음식으로 분류된 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한 음식만을 파는 식당을 ‘Kosher Restaurant’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3절에 기록된 생물은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지생물과 바다생물, 하늘을 나는 생물과 곤충입니다.
육지생물에게 정한 식물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3절에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두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된 생물이라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동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는 것은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대, 사반, 토끼, 돼지와 같은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면 부정한 식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다생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돔 종류같은 것들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없거나 둘 다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조개, 게, 굴, 새우, 바다가재, 뱀장어, 문어, 낙지, 오징어 등은 먹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부정한 식물입니다.
하늘을 나는 생물 중에는 20여종이 부정한 생물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 매, 까마귀와 같이 육식을 하는 새들을 ‘Predators’라고 하고, 썩은 고기를 찾아가서 먹는 새들은 ‘Scavengers’라고 합니다. 또 당아새, 뻐꾸기, 부엉이, 소쩍새와 같은 조류도 부정합니다.
곤충은 거의 모두 부정한 식물이지만,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메뚜기와 같은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24~43절까지는 부정한 생물의 주검과 접촉해서 오염된 옷이나 그릇, 사람을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녁때까지 부정합니다. 저녁이 지나면 다시 정해지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까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돼지고기나 오징어를 먹었거나 그 주검을 만진 사람은 모두 부정합니다. 그릇이 좋은 그릇인 경우에는 설거지를 해서 저녁이 지나면 다시 사용하고, 값싼 그릇은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옷은 버릴 수 없으니 깨끗이 세탁해서 저녁이 지난 이후에 입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녁이라는 시간의 제한을 두고 정함과 부정함을 정하셨습니다.
셋째, 44~47절에는 음식규례를 주신 일반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될 것과 이방인들과 구별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규례를 주신 목적입니다.
Ⅱ. 음식규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들
음식규례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맛있는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낙지와 같은 것을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런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먹지 말아야 한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음식규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규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규례를 주신 이유에 대해 네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목적’입니다. 레위기 11장에 기록된 부정한 식물들은 주로 이방인들이 이방신들을 섬기고 제사할 때 사용하던 생물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불신자들이 제사지낼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물이 돼지입니다. 돼지 머리를 제사상에 두고 제사합니다. 중동지방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65장 4절에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신들을 제사하는데 돼지고기가 많이 사용되었으니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라는 견해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일부분 타당하나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위생과 건강을 위한 목적’입니다. 부정한 생물들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를 쉽게 옮길 위험이 있는 것들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음식규례를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먹지 말라고 하신 것들은 고지혈증이나 고혈압을 유발하는 생물들이기 때문에 위생과 건강 상 먹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주장도 일부분은 타당하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는 선모충이라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반드시 삶거나 구워먹어야 합니다. 육회로 먹으면 안 됩니다. 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날것으로 먹으면 좋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자연산 굴이라 할지라도 독이 생성되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일부분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부정한 식물과 접촉한 그릇이 저녁을 지나면 다시 정한 그릇이 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정치적인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여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하도록 음식규례를 주셨다는 견해입니다.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아침에 돼지고기, 점심에 오징어, 저녁에 굴을 요리해서 준다면 어떻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역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이라도 부정한 식물로 요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하시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셨다면 이것 역시 불합리하다고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답변이 궁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는 ‘상징적인 교육의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공격적이거나 더럽거나 영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것들을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부정한 식물과 같은 종류의 삶을 살지 않게 하시려는 상징적 교육에 의의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뱀 먹는 것을 금하심은 뱀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오징어를 먹지 말라시는 것은 지조 없는 인물이 되지 말라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 타당성이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풍유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가미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설명들이 모두 완전하지는 않지만 통합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조금씩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음식규례를 주셨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첫째로 종교적으로 간음이 죄가 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성병과 같은 질병이 오기 때문이며, 셋째로 간음이 영적으로 우상숭배를 상징하기 때문이며, 또한 간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사회가 더럽고 지저분해 지기 때문에 간음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규례를 설명하는 이 네 가지 목적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음식규례는 신약시대에도 유효한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음식규례가 그대로 적용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식교 계통의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음식규례를 폐지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음식규례를 철폐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가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항존법’(Standing Law)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음식규례를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식당을 가든지 돼지고기가 단 한 번도 닿지 않은 접시나 그릇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우나 오징어를 손질해 본 적이 없는 칼을 발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규례를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은 헛된 주장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모두 지키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안식교 계통의 학자들은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은 의식법에 속한 부분이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도덕법에 속하는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11장 어디에서도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해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주장들은 모두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자의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안식교 학자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 이미 정한 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구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노아 시대에도 존재했던 타당한 도덕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아 시대에 있었던 제사장, 제사법 등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음식규례를 유대인이 지킬 필요가 없고, 이방인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음식규례에 대한 명확한 진리입니다. 유대인들도 더 이상 음식규례에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음식규례라는 멍에를 쓰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음식규례는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면 돼지고기를 먹어도 될까요? 됩니다. 새우나 오징어를 먹어도 될까요? 됩니다. 유대인에게도 이제 더 이상 음식규례의 구속력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이상 유대인들이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신앙적 단일성을 지킬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것들이 철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따로 구별하기 위한 규례는 소용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명백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어떤 음식도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4장 20절에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음식이 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26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27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요리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음식이 정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에게 음식을 바친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골로새서 2장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가지고 논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켰지만 지금은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폄논하지 못하게 하라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바꾸신 것을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1절에도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들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이런 것들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음식 문제를 가지고 구원과 연관 지어 신앙의 규율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입니다.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2~5절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고 거짓 선지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결혼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거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양육해봐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산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음식규례나 할례나 독신제도와 같은 것들은 모두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부정한 식물을 폐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 맞아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물론 영양학이나 위생, 그리고 건강상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영양학자의 판단으로 “당신에게 이런 음식은 좋지 않으니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나 신앙,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레위기 11장에 음식규례를 기록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한 백성이요, 이방인들은 부정한 백성이라는 예표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이 정한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은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부정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음식규례를 주신 예표적인 목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이방 불신자들처럼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표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정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결한 음식의 의미
레 11:1-19 / 박기완 목사
레위기 11장은 '성민의 식생활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는 것도 삼가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해 주신 것은 음식 이상의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행동양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집니다.
채식을 위주로 하는 동물은 온순한데 육식을 하는 동물들을 보면 난폭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도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결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물론 신약시대 이후에는 모든 것을 허용하셨지만 말씀 속에 담겨진 영적인 깊은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잘 새기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있으며... 취할 것과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며... 가까이 할 것과 가까이 해서는 안될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짐승 중에서(3∼8절)
먼저 3∼8절 말씀에 보면, 짐승 중에서 정결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6절 말씀을 보면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방법으로서 굽이 있는 짐승과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결하므로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굽이 없거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은 부정하니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대나 사반(너구리) 토끼와 같은 짐승은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돼지와 같은 짐승은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아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새김질하는 짐승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대개 새김질하는 짐승은 초식동물로서 다른 짐승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물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도는 정결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뿐만 아니라 화평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나 양, 염소 등과 같은 짐승들은 초식동물이므로 먹이를 먹을 때에 꿀꺽 삼킬 수가 없어서 여러번 씹어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한 번 먹은 것을 자꾸만 새김질하는 동물입니다.
이렇게 새김질 하는 짐승이 정결한 동물이므로 이런 새김질하는 짐승들만 먹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여러번 묵상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17장 11절 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밖에도 말씀을 묵상하라는 부분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Q.T시간,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바로 말씀의 새김질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소, 양, 염소와 같이 새김질하는 짐승들의 먹이를 소화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 낮에는 들에서 좋은 꼴을 많이 먹어 두었다가 저녁에 우리에 누워서 뱃속에 든 먹이를 다시 끄집어내어 입을 우물우물 거리면서 열심히 새김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루 종일 먹는 것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좋은 말씀을 만나면 일단 들어두거나 기록해 놓았다가 차후에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여러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번 생각해 볼 때 깨달음이 오게 되고 확신이 오게 되어 비로소 그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너무 말씀의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바쁜 생활에 쫓기다 보니 도무지 새김질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었던 말씀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하나도 말씀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율법의 형식과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그 정신과 원리는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제정하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고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은 먹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되살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묵상하고 되새기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정결한 짐승은 굽이 갈라져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굽이 갈라진 것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 곧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레위기서에서 수없이 언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레11:44∼45, 19:2).
그러면 어떻게 하여 굽이 갈라진 것이 거룩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부정한 짐승들의 발을 관찰해 봄으로서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부정한 짐승 중에서 토끼, 개, 사자 등의 발가락을 보면 이것들은 굽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발가락이 거의 똑깥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오른쪽인지... 어느 것이 왼쪽인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를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소나 양같이 굽으로 된 발은 두쪽으로 분명히 갈라져 있기 때문에 이쪽 저쪽이 분명하고 오른쪽 왼쪽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새김질하여 깨달음을 얻고 확신을 얻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 곧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이 없으므로 더더욱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기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있고 물질과 돈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서 있어야 될지 왼쪽에 서 있어야 될지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개혁시키고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때 이것이 굽이 갈라진 삶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인들은 나름대로의 고센 땅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주할 때 그들은 그들만의 거주지인 고센 땅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그들의 신앙을 지켰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릴 때 고센땅에는 우박이 없었습니다(출9:26).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우박이 떨어질 때 피할 땅인 거룩히 구별된 땅 고센 땅에 성도들이 거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지리적인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거룩히 구별된 삶이 바로 고센 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지 않는 교인들은 바로 개와 돼지에 해당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개는 새김질도 하지 않고 굽도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개의 습성은 꿀꺽 삼키기만 하고 도무지 새김질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 들은 말씀은 여러번 새김질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욕심만 많아서 집어삼키지만 했지 시간을 내서 말씀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진보가 없고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삶도 없고 아무렇게나 생활합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것 같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속에 물든 사람들과 어울려 구분이 가지 않고 크리스챤의 향기는 하나 없는 그런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김질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주의 뜻을 따라 준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별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고, 주의 백성답고, 주의 사명을 받는 자 다와서.... 세상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되고, 부정함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므로... 주 안에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어류 중에서(9∼12절)
두 번째로 9∼12절 말씀에 보면, 고기의 종류 가운데서 지느러미가 있는 것과 비늘이 있는 것은 정결하니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늘... 이 두 개가 다 있어야만 정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지느러미가 있어야만 정결하다고 했습니다.
지느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등에 있고, 꼬리에 있고, 그리고 몸통 옆에 붙어 있습니다.
지느러미는 몸에 균형을 잡을 때, 방향을 잡는데 그리고 앞으로 전진할 때 사용합니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활의 균형을 잡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생활의 균형을 잡지 않고, 방향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 나가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절대로 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21절 말씀에 "물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기 위해서는 먼저는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방향을 하나님께 전환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 쪽으로 향한다면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연어라는 물고기를 보세요... 알을 낳기 위해 물을 거슬러 거슬러 상류로 올라갑니다. 만일 그 연어가 죽었다면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대로 물에 떠내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고 죽은 것은 물에 떠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17∼19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악한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땅의 일... 곧 세상 일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만 생각한다면... 그는 십자가와 원수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20∼21절 말씀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랬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육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을 소망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정한 물고기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늘이 있어야 정하다고 하셨습니다.
비늘은 자기를 보호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만약에 물고기를 잡아서 비늘을 떼고 물 속에 놓아 보세요. 그러면 물고기가 살수 있겠습니까? 물고기는 비늘이 없으면 바로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비늘은 그 물고기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비늘은 악한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능력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악한 영과의 싸움을 피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했습니다(엡6:10∼17).
전신갑주는 갑옷을 말합니다. 갑옷은 물고기의 비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늘 모양의쇠 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 갑옷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갑옷을 만들 때 물고기의 비늘 형태를 사용했다는 것은 우리가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4절 이하에 보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장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랬습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비늘 없는 물고기와 같이 부정한 사람이요 곧 죽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조류 중에서(13∼19절)
세 번째로, 13∼19절 말씀에 보면 조류 중에서 정결한 것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나옵니다. 독수리, 솔개, 어응, 매, 까마귀, 타조, 다호마스, 갈매기 등등입니다.
이런 새들은 그 특징으로서 네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밤에만 활동하는 새입니다.
올빼미, 부엉이, 박쥐,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밤은 어둠을 말하는데 달리 표현한다면 비 진리를 말합니다. 비 진리 가운데서만 활동하는 사람은 부정한 존재입니다. 비 진리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윤리나 도덕, 신학, 철학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밤에만 활동하는 새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죽은 짐승의 사체만 먹는 새는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새로는 까마귀와 독수리가 있습니다. 짐승의 사체는 썩은 것을 말하는데 이 세상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것으로만 살아가는 사람, 세상 것으로 배불리려는 사람, 세상 것으로 행복해 지려는 사람은 썩은 사체를 먹는 새처럼 더러운 존재입니다.
셋째로 육식하는 새가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로는 잡식하는 새가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고기만 아니라 나무 열매도 먹습니다. 이렇게 고기도 먹고 나무 열매도 먹는 것이 잡식입니다. 그러니까 잡식한다는 것은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고 세상 것은 취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을 취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필요하다면 세상 것과 하나님 것을 구별하지 않고 다 사용합니다. 마치 애굽에서 나온 잡족처럼, 발 하나는 애굽에, 또 다른 하나는 광야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발을 세상으로 옮기기도 하고 광야로 발을 옮기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세상 것과 하나님 것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것이 잡식성 새와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밟고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광야입니까? 아니면 양쪽을 다 밟고 있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랬습니다(마6:24).
오늘은 정결한 음식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짐승 중에서는 굽이 있고 새김질을 해야만 정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굽이 있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새김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을 말하는데... 세상과 구별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여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류 중에서는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어야 정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느러미는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비늘은 영적인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조류 중에서는 밤에만 활동하는 새, 죽은 사체를 먹는 새, 육식하는 새는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결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결한 음식을 통하여 주신 영적 의미를 깊이 깨닫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결한 짐승
레 11:1-8 / 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나 믿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이 하나님의 약속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 약속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약속을 함부로 여기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들도 이런 유혹에 마음이 이끌려서, "나도 내 마음대로 한 번 살아보자" 라는 그러한 마음이 불쑥 불쑥 생겨 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주인공을 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마음껏 가슴을 펴고 이 세상을 한 번 살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그렇게 못할 뿐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강한 것 같지만 들어오는 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란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주면서 유혹하고, 자식을 목 말라하는 사람에게는 아들을 주면서 유혹을 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주면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참으로 우리가 막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것들을 가지고서 접근을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막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약속만은 그대로 유지하는 분임을 믿고, 우리도 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끝까지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라디오를 듣는데, 퀴즈시간이 되었습니다. 전화를 해서 맞추면 상품을 주는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운 나라로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한 분이 전화를 해서 답을 말하기를, "영국" 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나이가 드신 분들은 영국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시겠지만, 영국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유럽에 있는 나라인데, 지도를 몰라도 흑인, 백인만 생각을 해도 그런 대답이 안 나올텐데,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아는 나라가 영국밖에 없었는지, 영국이라고 용감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물론 영국에는 흑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른데서 전화가 와서 "에디오피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라서 상품은 그 사람이 가지고 가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망신만 당한 것입니다.
저는 이 라디오 프로를 들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무엇을 하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약속을 정해서,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살아간다면, 그런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방금 예로 든, 한 아주머니가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라고 말해서 틀린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를 기울이고, "혹시 저 사람들이 맞는 지도 몰라" 하면서 기웃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다는 아주머니의 말은 엉터리인 줄로 알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틀렸다고는 한마디 말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분명히 아프리카에 없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망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서 살자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약속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없을 줄 압니다만, 요즘처럼 관광 다니기 좋은 5월에, 주일이 되어서 성경책 들고 교회에 오려고 신호등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휙 하고 관광버스가 지나가는데 보니까, 춤도 추고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나도 놀러 한 번쯤 가 보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는 안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몸은 아 교회당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거제도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이 아닌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맞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관광 버스를 타고 놀러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주일에는 예배드리는 모습이 맞다는 것입니다. 놀 때는 놀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까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예배에 관심이 없어도 우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엉터리라고 외칠 수가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 정작 그것은 몰라도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면 망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세상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죽느냐, 사느냐" 라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갈 곳은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고서, 그 약속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들었다하면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연속극은 머리 속에 너무나 생생한데, 이야기하라면 줄줄 나오는데, 그런데 설교내용은 그 제목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주 설교내용이 기억이 나십니까? 아니 제목만이라도 기억이 나십니까?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부탁을 하기를, "목사님, 밤에 잠이 잘 안 옵니다.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 그래서 저는 "잠이 안 오면 말씀을 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잘 안 오는 시간을 뒤척이지 말고 성경을 묵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목사님, 기가 막힙니다. 성경을 보니 5분도 안 되어서 잠이 왔습니다.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한 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잊어서 안 될 이 약속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을 너무 잘 잊어버리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성경책은 주일날에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살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지, 들고 다니라고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잊어버리고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는고 하니, 미리 하나님께서 동물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정하셔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도록 만든 장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 식사시간마다(우리는 세 번이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 두 번 식사를 했습니다), 부정한 것은 피하고 깨끗한 것만을 골라먹도록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떤 음식을 더럽다고 합니까? 그것은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은 음식을 더럽다고 합니다. 혹은 만든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부패한 음식을 더럽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먹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는 음식과 더럽다고 하는 음식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짐승을 그렇게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 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레 11: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짐승 중에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낙타, 사반(오소리의 일종), 토끼, 돼지 등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승들이 특별히 사람의 몸에 해롭다든지, 동물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부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짐승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구별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아무리 돼지고기를 좋아해도 먹지 않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양고기는 노린 냄새가 나서 싫어해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9절서부터 보면, 물고기, 새, 그 밖의 다른 여러 종류의 짐승들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먹어도 좋은 것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날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먹는 것, 이것은 못 먹는 것"으로 구별을 함으로서 말씀을 기억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 상구 박사라는 안식교 교인이 나와서 하는 말이, 물론 이단입니다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는 것과 먹지 말라는 것을 구별하여 놓으셨는데, 연구해보니까 과학적으로도 성경대로 그것을 구별해서 먹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엔돌핀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T.V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 끄덕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돼지를 키우는 농가에서 손해를 많이 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괜히 멀쩡한 돼지사육 농가만 피해를 본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런 음식들을 구별해서 먹어야만 합니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말씀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율법자체에서 해석을 하면 안되고, 신약 성경까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10절-15절입니다.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이제는 음식을 가지고 깨끗하고 더럽다고 구별하던 때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다고 까지 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조금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지금은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날마다 말씀가운데 거하시게 함으로 과거 구약시대처럼 음식을 가지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금 교인들 중에서, 오늘 본문말씀인 레위기 11장에 있는 것처럼 먹는 음식을 가려서 먹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 토끼고기, 비늘이 없는 생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음식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사람의 처음 음식은 식물성이었습니다. 동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모두 다 먹도록 하셨습니다(창 9:3). 하나님께서 모두 다 먹도록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보신탕, 삼계탕, 내장탕, 보양탕, 모두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시기를 바랍니다. 가금 사택에도 갖다주면 더 고맙고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구 박사의 말은 성경적인 말도, 가학적인 말도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식물보다 동물이 몸에 해롭다고 건강적인 측면에서 동물들을 구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차원입니다. 말씀과 더불어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데, 구약의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율법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음식에는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구별을 하셨습니까? 굽이 갈라진 것 그리고 되새김질하는 것만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날마다 잊어버리기를 잘합니다. 원래 우리는 말씀과는 상관없는 자들 아닙니까?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먹는 음식을 구별하심으로 그런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건강상의 문제로서 구별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구별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언제부터 구별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지금과 같이 이렇게 광야 생활을 할 때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바로 노아 홍수 때부터입니다. 노아 홍수 때부터 이미 구별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가 동물을 정결한 것들과 부정한 것들을 심사해서 넣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결한 것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때는 기준을 노아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몰랐는데, 이렇게 레위기 11장에 오니까 기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했습니까? 더러운 것을 왜 방주 속에 넣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방주가 복잡한데 말입니다. 모든 짐승들의 종족의 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요즘 말로서 하자면 환경 보호를 위해서입니까?
환경보호로 이야기를 하자면, 노아 홍수로 전 세계를 물바다로 만든 하나님만큼 환경파괴자가 어디 있습니까? 불이 탄 자리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만, 홍수가 지나가면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함께 태우도록 하셨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홍수가 끝나고 1년 뒤에 노아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장면을 보면 압니다.
창세기 8장 20절입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깨끗한 짐승을 잡아서 더러운 모든 것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짐승들이 살아난 것은 바로 깨끗한 짐승의 대신 제물이 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신 죽음'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정한 것들이 노아 방주를 탈수 있었고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식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서 깨끗하게 구별 된 것들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 말씀의 원리대로 살면서, 그 깨끗한 음식을 먹으면서 "아, 이놈이 대신 죽어서, 나도 이 고기를 한 점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성전에 가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하루에 두 번씩 식사를 할 때마다, 대신 죽는 희생의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제사를 드리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면, 깨끗한 짐승의 특징이, 첫째는, 굽이 갈라져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되새김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굽이 갈라진다는 것은 두 쪽으로 구별되어진다는 의미이고, 되새김질한다는 것도 들어갔다가 도로 나와서 구별되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음식에 대한 법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만 됩니까? 안식일 교회처럼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단의 모습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러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율법을 다시 지키겠다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서 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오직 그 모든 말씀을 100% 지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음식을 가지고서 아무런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합니다. 그 약속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항상 설교 마지막에 강조하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식생활은 성결하십니까?
레위기 11:1-23 / 황권철 목사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
레위기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은 5대 제사, 8-9장은 제사장 위임식, 10장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1장은 성민의 식생활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민의 식생활 문화를 규정해 주신 계시의 목적이 무엇인가?
식생활 문화는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① 천지창조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세기 2:16)라고 하심은 식물만 허용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노아 홍수 이후 시대부터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의 손에 붙이었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2-3)고 모든 생물을 식물로 허용하였습니다. ③ 모세 율법 시대에 와서는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위기 11:46-47)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④ 초대 교회 시대에는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사도행전 10:11-13)고 하심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생활은 인간 삶의 기초입니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 입의 구조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입이 형성된 구조에 따라 자연히 발음과 억양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역마다 기후와 토질이 달라 생산되는 특산물이 다르므로 먹는 식물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그 언어가 만든 문화와 생활양식이 다르므로 자연히 생각하는 의식구조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결한 삶을 살게하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회개를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족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
저가 초등 학교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 때입니다. 대부분의 집에 농사용으로 소를 키웁니다. 그 당시에 소는 여름철에는 풀을 베어서 주고, 아침과 오후에는 풀을 먹이려 소을 몰고 산과 들판으로 나갑니다. 온 산과 들판에는 소들이 풀을 떧어 먹습니다. 그 때에 저의 집에서 소먹이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두 가지 신령한 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소들이 길을 가다가 간혹 미끄러운 곳을 통과할 때는 몸 자세를 낮추고는 앞발을 세워서 파지(把指)를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다른 하나는 집으로 돌아와 외양간에 들어간 소는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은 풀을 다시 끄집어 올려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러다가 간혹 비닐 봉지나 나뭇가지나 쇠붙이 같은 것이 있으면 하나씩 걸러 냅니다.
이것은 실로 인생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복잡한 산업 전선에 나가서 일할 때 한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다 집어삼킵니다. 그러다가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에 행한 일을 하나씩 끄집어 되새김질을 해 보면 도무지 먹어서는 안될 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부 하나씩 걸러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가 건강해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사는데 회개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한복음 13:10)라고 했습니다.
둘째: 당신은 청결한 삶을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라”(9-10)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저가 어릴 때에 6. 25를 지난 60년대 시절에 살아가기 참으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 때에 쌀밥과 고기를 먹는 집이면 부잣집이었습니다. 쌀은 농사를 지어서 얻어야 하지만 고기는 주로 산에서 짐승이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때 간혹 소를 들판에 쳐(방목) 놓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고기들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대부분 깨끗한 물에서 헤엄치며 삽니다.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매기나 꼼장어는 물밑 흙속에 있습니다. 그때 어떤 고기를 잡느냐에 따라서 그날 하루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물밑 흙이나 갯벌속에 있는 것을 잡는 날이면 온 몸에 뻘 투성이가 됩니다.
고기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의 주 기능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기능도 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지느러미는 헤엄치는 역할을 하며, 비늘은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지느러미를 가진 고기는 탁류와 함께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청수를 향해 올라갑니다. 성도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갯벌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가치관을 뚫고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님을 모신 삭개오는 더 이상 여리고 갯벌에서 낙을 누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19:8)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9)고 했습니다.
셋째: 당신은 온유한 삶을 통해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13-19)
새중에서 이러한 것들을 금했습니다. 그 하나는 독수리와 같이 양육강식을 하는 육식하는 새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민이 사납고 흉폭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았습니다. 다음은 까마귀 같이 본성이 부패하고 썩은 것을 좋아하는 새입니다. 성도는 썩고 부패된 것을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지 그것을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올빼미와 같이 야행성 기질이 있는 새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야행성이란 아름다운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삶을 두고 하는 말이지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 행하는 주야가 교차된 삶과는 다른 말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본래 그렇게 지으시고 가증하다고 하셨는가? 이 모든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것이며 모든 자연은 성결한 백성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위탁받은 관리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중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중에 나는 새는 약자를 해하지도 않고, 부정한 속된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창조 질서를 거스려 밤에 행치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나무에 앉아 있는 새가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이 잘 되어 생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면서도 부지런히 나는 근면하고 성실한 새입니다.
넷째: 당신은 소망중에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0-21)
저가 어릴 때 많이 먹었던 곤충 중에 메뚜기가 있습니다. 가을 추수기가 되면 나락(벼)논에 메뚜기 떼들이 모여들니다. 그때 그것을 잡아서 뽁아 먹기도 하고 양계를 하시는 분들은 사료용으로도 씁니다. 곤충 중에서 금하신 것은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으나 성민의 삶을 두고 말할 때 기어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세기 3: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배로 기어다니는 것을 가정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곤충들 가운데서는 네다리가 있어서 기어가다가도 뛰고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들을 먹게 했습니다.
성민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는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땅에서 뛰는 다리를 주었습니다. 이 다리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뛰어야 하며, 날개에는 소망을 실고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19-20)고 했습니다. 땅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위를 소망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시를 깨닫을 수 있도록 인도하심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환란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얼마나 우리의 심성이 메말라 가는지 모릅니다. 환경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지상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