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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임오군란 직후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을 넘보는 러시아·일본을 견제하라”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무슨 까닭인지 조선의 외교와 해관 업무를 장악한 묄렌도르프는 리훙장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과 결탁해 그들의 이권 보장에 앞장섰다. 일본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협상 때마다 일본의 이익을 챙겨주는 묄렌도르프에 만족해 “그는 지극히 공평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86쪽)
점점 옥죄어 오는 청의 내정 간섭과 일본의 상권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의지할 곳이 사라진 고종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 와중에 미국이란 존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까지 조선과 수교한 나라 중에서 조약 내용을 존중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를 이행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나라는 미국뿐이었기 때문이다. (96쪽)
고종은 미국에 의존해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조의 자존을 지키려 했다. 미국을 새로운 상국으로 섬기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주한 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을 지극정성으로 예우했다. 반면에 미국은 조선에 대한 무관심 전략에 이어, 관심 퇴거 전략으로 전환했다. 미국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종은 묄렌도르프의 계략에 넘어가 러시아와 손을 잡는다. (123쪽)
조선을 점령하고 있던 청군 병력 절반이 철수하자 개화당은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최초 계획에 의하면 개화당 거사는 육군도야마학교 유학생이 귀국해 개화당 군대를 양성하는 시간을 감안해 1888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옥균이 차관 도입에 실패해 계획이 틀어진 데다가 수구파의 반격이 거세지자 그들은 일정을 앞당겨 승부수를 띄웠다. (148쪽)
거사를 앞둔 11월 29일. 김옥균은 고종을 알현해 청-프랑스 전쟁의 진행 상황, 러시아의 남하 등 긴박한 국제 정세를 보고했다. 대화 도중 김옥균은 고종에게 “조만간 모종의 거사가 있을 예정”임을 암시했다. 김옥균의 설명을 들은 고종은 “경이 품고 있는 마음을 내가 알겠다. 무릇 국가의 대계에 관계되는 일은 위급할 때 경의 대책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다시 의심하지 말라”라면서 옥새가 찍힌 신임장을 김옥균에게 내렸다. (164쪽)
김옥균이 불안한 기색으로 여러 차례 들락거리자 눈치 빠른 민영익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옥균을 예의주시했다. 만찬의 마지막 코스로 디저트가 제공될 때 갑자기 바깥에서 “불이야! 불이야!”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김옥균이 벌떡 일어나 북쪽 창문을 열자 우정국 가까운 곳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171쪽)
고종이 한 시절 김옥균의 개화당과 손잡았던 이유는 ‘왕권 강화’였다. 쿠데타가 발생해 경우궁으로 옮긴 순간부터 고종은 좌불안석이었다. 급기야 혁명 정부 인사에서 자신이 완전히 소외되자 개화당에 기울었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알고 보니 이자들은 ‘왕권 강화’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아니 왕을 능멸하고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역도들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고종은 현란한 줄타기 곡예에 나섰다. (181쪽)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지체 높은 양반 가문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거나 왕실과 혼맥으로 얽힌 전도유망한 양반 청년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굳이 쿠데타라는 모험을 하지 않았어도 출세가 보장된 조선의 ‘금수저’였으나 기득권을 내던지고 모험을 택했다가 하루아침에 난신역적이 되어 망명객 신세로 전락했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과 인생을 걸었던 것일까? (222쪽)
묄렌도르프는 독일 정부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던 비밀 공작원으로, 독일 외무성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라는 극비 지령을 받았다. 이때부터 묄렌도르프는 고종과 민 왕후를 감언이설로 유혹해 러시아와의 수교 작전을 전개해 성공시켰고, 이어 조-러 밀약까지 성공했다. (261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리훙장은 조선의 정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보다 강력한 개입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결과 1886년부터 1894년까지 8년여 동안 고종과 민씨 척족들은 위안스카이 앞에 바짝 엎드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황이 계속됐다. 1894년 농민 봉기 여파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때까지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상왕, 총독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299쪽)
https://www.youtube.com/watch?v=fgWnDGevrcY
조선이 독일계 상사로부터 차관을 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위안스카이는 세창양행의 차관 조건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세창양행은 이율을 연리 10퍼센트로 낮추고 우피와 사금 담보는 취소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재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독일 회사의 이권 독점으로 청국 상인들이 손해 볼 것을 우려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323쪽)
개화당은 자신들이 의지하려 했던 외세의 본질이 약자들을 돌봐주는 ‘천사’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파우스트 정신의 발현자’라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주일 영국 공사 파크스에 대한 인물평이 “불명예스런 폭력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배고픈 늑대”로 비유되었겠는가.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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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갑신정변은 청군에 의해 진압됐다. 청군은 자연스럽게 점령군이 됐고,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다. 이는 청군에서 주요 역할을 한 위안스카이의 퍼스낼리티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열강에 침탈당하고 있던 청나라의 사정상 마지막 남은 ‘속국’ 조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이는 한-중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을 사대의 대상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택했다. 그러나 내정 간섭은 받지 않았다. 물론 조선의 내부 사정 때문에 왕위 계승이나 세자 책봉 등을 승인받는 과정에서 애를 먹은 경우도 있지만, 크게 보면 자주권이 보장됐다. 조선 중기 종주국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지만 그런 대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청은 명을 대신해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험악한 꼴을 보였지만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을 심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 말기이자 조선 말기, 동아시아 전체가 서양 세력의 침탈을 받게 되면서 청이 조선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류큐와 타이완, 베트남 등 전통적으로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이 모두 제국주의 열강의 손에 넘어가면서 유일하게 조선만 남은 것이다. 청은 이제 조선을 과거의 느슨한 조공국 체제가 아니라 조금 더 고삐를 죄는 방식을 모색했다. 서양 열강의 식민지 편입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말이다.
그 첫 번째 계기가 임오군란이었다. 대원군에게 권력을 빼앗긴 고종과 민 왕후는 청군에 의지해 권력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고, 청군은 점령군이 되었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잡혀갔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민 왕후는 개방의 대세와 청의 압박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재정 상태도 엉망이어서 매관매직과 당오전 발행 등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돈을 꾼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그것이 김옥균과 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접근하는 계기가 됐다.
김옥균 등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차관 도입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그것은 결국 실패했다), 무력을 동원한 쿠데타를 준비했다. 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군사 유학을 떠나고,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과 박영효는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비밀리에 양성했다.
차관 도입 등으로 일본을 드나들던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결국 일본 세력을 등에 업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사상 전파에 그치지 않고 인력까지 대주며 김옥균 세력의 움직임을 밀어주었다. 조선에 주재하는 다케조에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도 기다리지 않고 김옥균 등의 쿠데타 계획을 지원했다.
결국 김옥균 일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을 붙잡아 두고 ‘혁명정부’를 구성했으나, 의욕만 앞서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고종을 허수아비 취급해 적으로 만들었고, 고종은 청의 주둔군과 연락을 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병력 1,500명은 일본군의 10배였으니 아무리 고종을 붙잡고 있다 해도 버티기 어려웠다.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정변 실패의 여파로 일본이 일시 물러나자 조선은 청나라 세상이 됐다. 리훙장은 조선을 쥐고 흔들기 위해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대리인으로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엉뚱하게도 러시아를 조선으로 끌어들이는 데 다리를 놓았다. 러시아의 관심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 쪽으로 돌리려는 모국 독일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 전개는 또 다른 열강 영국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러시아와 ‘그레이트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매개로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생기자 차단에 나섰다. 그것이 거문도 점령이다. 한반도는 이제 여러 외세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과거와 달리 실제적인 이득을 챙겨가려 했고, 고종은 열강의 외교전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지켜줄 ‘후견 국가’ 찾기에만 골몰했다. 그러는 가운데 외세의 침탈은 본격화하고 민씨 척족 등 내부의 부패가 더해져 민생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또 하나의 파국이 잉태되고 있던 시기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