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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6월 21일 시티코프는 더 결정적인 전보를 보냈다. “김일성은 남조선 방송의 수신 및 정보원의 보고를 토대로 남측이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구체적으로 포착한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남측은 군대의 전투력을 높일 방책을 짜고 있다. 방어선을 강화하고 옹진반도 방향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김일성은 원래의 작전 계획을 변경해 분할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국에 간섭할 명분을 줄 수 있으니 상륙부대의 수송에 소련 해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전선에서 공격한다는 김일성의 안을 최종적으로 지지했다.
-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_ ‘인민군 각 사단의 배치’ 중
오후가 되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남쪽의 3개 사단을 급히 불러들여 반격 태세를 갖추는 구상을 짰다.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채 총장의 보고로 북한군의 전면 공격을 확인하고 정부가 대통령령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한국군은 서울의 북쪽에서 필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이날 밤 의정부 코앞까지 북한군이 밀어닥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밤 단독으로 정부를 대전으로 옮긴다는 결정을 내려 장관들과 무초 대사를 경악하게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 잔류를 설득했으나 이 대통령은 개인의 안전은 문제가 안 된다, 정부는 포로가 될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 된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26일 오후 1시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서울을 탈출했다. 남은 신성모가 총리를 대행하고 비상국무의회를 열어 정부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서울을 탈출한 이 대통령의 목적지는 대전이 아니라 국토 남단의 해군 기지 진해였다. 그러나 대구까지 왔을 때 너무 멀리 도망쳤다고 반성한 대통령은 대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 제3장 북한군의 공격 _ ‘한국군의 응전과 정보의 서울 포기’ 중
하지만 사회당의 입장은 일부 국민 사이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어 냈고 평화문제담화회의 의견은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요시다 정부조차 한국전쟁에 대한 “정신적 협력”만을 읊조리는 현실에서 실질적 협력은 비공개적으로 강요됐고 국민에게 지지를 구하지도 않았다. 일본 국민의 전쟁 경험에서 파생된 전쟁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은 그만큼 강렬했다. 한국전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어느 전쟁에도 협력하고 싶지 않다는 현실 반발적인 국민감정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평화주의 담론을 뒷받침했으며, 요시다 노선을 저변에서 떠받쳤다. 또 이러한 감정은 일본 국민이 한국전쟁 중에 경제 붐에 몰입하도록 부추겼다. 한국전쟁은 전쟁 기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일본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국토와 몸을 내맡기면서도 머리로는 휩쓸리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 제3장 북한군의 공격 _ ‘일본 외무성과 평화문제담화회’ 중
바로 이 타이밍에 미군은 다시 평양 대공습을 감행했다. 8월 29일, ‘모든 유엔 공군의 노력’이라고 이름을 붙인 작전이 시작됐다.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하여 4시간 간격으로 오후 1시 30분, 5시 30분 3차례에 걸쳐 함재기와 제5공군기가 총 1,403회 출격했다. 이것은 7월 11일의 공중 폭격을 웃도는 것이었다. 밤에는 가데나의 B-29 폭격기 11대가 출격해 폭격했다. 평양은 완전히 파괴됐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폭격을 받은 수도는 세계 역사상 없었다. 소련 공군도, 고사포부대도 완전히 무력했다. 공격하는 측과 수비하는 측의 힘 관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중 폭격을 받은 도쿄보다도 더 비참했다고 할 수 있다.
- 제6장 3년째의 전쟁 _ ‘스탈린,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하다’ 중
https://www.youtube.com/watch?v=qNXPUEduQyE
이승만이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한번 당찬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7월 1일 로버트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미국이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와 함께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해 준다면, 우리는 정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매우 가까워진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정전과 관련하여 당신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현재와 같은 정전 조건에 명확하게 반대하고 있는 한국 국민을 설득할 수단이 없다.”
이는 도를 넘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로버트슨은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사명은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 제7장 정전 _ ‘미국의 설득’ 중
베이징에서는 7월 29일 중산공원 음악당에서 4,500명 규모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조선 정전협정 조인 경축 대회가 열렸다.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주석 궈모뤄가 연설했다. 마오쩌둥은 9월 12일 중앙정부 인민위원회에서 펑더화이의 보고를 들은 뒤 강연에서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위대하며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라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38선까지 적을 밀어내고 이를 지켜 냄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도문강)에서 전선을 멀리 떨어트려 동북 지방의 불안을 해소한 것, 둘째, 군사적 경험을 한 것, 미국 군대와 33개월을 싸워 그 속사정을 충분히 알게 됐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셋째, 전국 인민의 정치적 각오를 높인 것, 넷째, 그 결과로 “제국주의의 새로운 중국 침략전쟁을 늦추고 제3차 세계대전을 늦췄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혁명 중국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국제사회에서 시민권을 확보한 것은 커다란 성공이었다.
- 제7장 정전 _ ‘정전협정 체결 후 각국의 반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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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개전부터 휴전까지, 사료에 근거하여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불법 점령에서 벗어났다. 그 기쁨도 잠시,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양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었고, 결국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서로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 국가라고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군사력을 갖추게 된 북한은 국내외 정세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기도했고,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이렇게 한반도 안의 특수한 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유엔군, 중공군까지 참전하며 국제전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소련의 스탈린은 크렘린궁에서 비밀리에 전쟁을 지휘했으며,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면서 미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다. 타이완은 한국전쟁에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받는 등의 이익을 누렸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인 동시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전쟁이기도 했던, 다양한 국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전쟁이었다.
와다 하루키는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전쟁의 발발 배경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빈틈없이 제시하고 있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집요하게 설득해 남침 승인을 받아내는 과정, 1949년 말까지 김일성의 남침 제안을 거절했던 스탈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게 된 배경,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준비하고 1950년 6월 25일 군사작전을 시작하는 구체적인 과정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 소련 공군이 중공군으로 위장해 참전했던 이유와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전진을 멈춘 이유, 정전협정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 소련의 갈등, 소련과 북한이 실패로 끝난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부에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그러면서도 이승만 발언, 미국 문서 등을 토대로 이승만 역시 무력으로라도 통일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북한과 별 차이가 없었음에 주목하여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미국과 충돌한 양상, 미국이 한때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물러나게 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 이승만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과정도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 관여한 각국 지도자들의 정책 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개인적 심리 상태와 스타일까지 엿볼 수 있다.
남북한은 무엇을 위해 전쟁했고, 각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에 개입했는지, 한국전쟁이 남북한 그리고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타이완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전쟁은 이후 세계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