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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시간에 종속된 존재인 주제에 인간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미래의 일을 조금이라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요. 로또를 사도 되고, 선물 시장에서 큰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교통 사고나 범죄를 미리 막아 소중한 생명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몇 개 늘어놓고 보니 돈과 생명에 관계된 것들이네요.
미래를 예측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제로 많이 있었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력이었고, 또 재산과 인명에 직접 영향이 있고, 지금도 국가적으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붓지만, 그다지 신통치 못한 예측을 내는 예언이 있습니다. 바로 일기 예보입니다.
중국이나 이집트나 고대의 달력 제작자들은 천문을 보고 계절의 변화 패턴을 꽤 정확히 측정해서 달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따른 천체의 운동은 사실 범우주적인 질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계절 변화는 고대에도 상당히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측정하려는 주된 목적은 농업 생산의 극대화였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계절 변화가 나일강의 범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으니까 더욱 중요했겠지요.
(천문학에는 동서양도 따로 없고, 종교도 상관없이 모두들 열심히였습니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에 비해 날씨의 변화는 농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했고, (내일 폭풍이 분다고 해서 농사짓던 작물을 뽑아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고고한 별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불안정한 대기 현상이 만들어 내는 이런저런 징후를 보고 맞춰야 했으니까요. 따라서 달력 만드는 분들은 고대부터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날씨는 주로 나이가 든 목동이나 어부 혹은 신경통이 있는 노인들이 경험으로 맞추어야 했습니다.
일기 예보가 농부들에게는 그저 그런 중요성만을 지녔다면, 어부나 선원들에게는 정말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바다에서, 더군다나 거친 바다에서 인간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거든요. 정확한 일기 예보가 가능하다면, 폭풍이 예상될 때 출어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많은 어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이미 대양을 항해 중인 상선의 경우 폭풍이 예상되는 해역을 피해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자기가 직접 저 배 위에 올라탔을 경우에는 그렇게 멋있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생사 및 많은 돈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일기 예보를 위한 과학적인 노력은 컴퓨터나 인공 위성 발명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다름 아닌 압력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인가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것 중에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가 있습니다. 이 수은 기압계는 토리첼리가 17세기 중반에 기압 연구가 아니라 원래 '진공 상태'의 생성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실험 도중에 토리첼리는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기압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기압계로 사용되게 된 것이지요.
기압과 날씨와의 상관 관계에 대해 누가 정립을 했는 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은 고기압이면 날씨가 좋아지고, 저기압이면 날씨가 나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기 예보와 라디오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작은 기압계를 가지고 날씨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널리 보급...이라기보다는 독일 전역에 널리 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괴테였습니다. 괴테는 문학, 미술, 과학, 철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천재였습니다만, 1820년대 초에는 기압 연구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래 그림과 같은 작고 예쁜 유리 기압계가 '괴테 기압계' 또는 '괴테 장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장치를 만든 사람은 괴테가 아닌 무명의 인물이라고 하네요.
이 기압계의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이렇게 색깔이 든 물을 집어넣은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에서 외부와 통하는 구멍은 좁은 주전자 부리 끝뿐입니다. 주전자 몸체에 해당하는 큰 유리방의 위는 공기가 아니라 진공 상태입니다. 외부 기압이 높아지면 주전자 부리에 든 물이 압력을 받아 그 수위가 내려가고, 반대면 올라갑니다.
이 기압계에는 보시다시피 눈금도 없고, 일정한 규격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1기압 위인 지 밑인 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날씨 예측에는 어느 순간의 기압 절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압이 높아지고 있는 지 낮아지고 있는 지, 그 변화량이 중요했거든요. 특히 그 변화 속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약 주전자 부리 속의 수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면 기압이 신속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비나 폭풍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군함의 함장실에서도 이런 형태의 기압계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함장이야말로 그런 날씨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요즘도 이런 액체를 이용한 가정용 기압계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는 당연히 아니구요. (수은의 위험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아마존 같은 곳에서 weather glass를 검색하면 파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괴테 기압계 또는 weather glass라고 불리는 물건은 실내 장식용으로도 꽤 괜찮습니다.
(이것이 현재 아마존에서 팔고 있는 weather glass입니다. 52.5달러에 팔고 있군요.)
하지만 이런 물이 든 유리 기압계는 건물 안이나 선박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야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휴대하기에는 너무 불편했습니다. 가령 야전에서 작전 중인 장교나 양떼를 모는 양치기에게는, 깨지기 쉽고 물이 새어 나가기 쉬운 이런 기압계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의 아네로이드 기압계입니다. Aneroid라는 단어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군요.)
그러다가 1843년, 루시앙 비디(Lucien Vidie)라는 프랑스 발명가가 내부가 진공 상태인 금속판의 변화와 스프링의 힘을 이용해서 기압을 눈금으로 나타내는 장치, 즉 아네로이드 기압계(aneroid barometer)를 발명했습니다. 이 아네로이드라는 말의 뜻은 '액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장치의 묘미는 그 눈금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뻑뻑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느 순간의 절대 기압 수치보다는 그 변화량이 날씨 변화에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매시간마다 이 기압계를 꺼내서 읽고 그 수치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압계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좀 뻑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늘이 당장은 움직이지 않다가 기압계를 꺼내 들고 탁탁 한 번 치면 비로소 바늘이 움직여서, 그 바늘이 올라가는 지 내려가는 지 쉽게 볼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집마다 온도계는 혹시 있을 지 몰라도, 기압계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만 하더라도 이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미니 기상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쥘 베른의 소설 '카르파티아 성', 내용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다는...)
카르파티아 성(Le Château des Carpathes, 쥘 베른 작, 배경: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ㅡㅡㅡ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산골에서 양치기 노인과 유대인 행상이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거 말입니까?" 유대인은 두 손으로 온도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이건 날씨가 더운 지 추운 지 가르쳐 주는 기계랍니다."
"흐음, 그거라면 나는 잘 알고 있지. 내가 홑옷만 입고도 땀을 흘리는 지, 외투를 입어도 추운 지를 보면 돼."
과학 문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양치기에게는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럼 바늘이 달린 이 시계는?" 그는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가리켰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내일 비가 올 지, 날씨가 갤 지를 가르쳐 주는 도구랍니다."
"정말?"
"그럼요."
"그래? 하지만 그 값이 1크로이처밖에 안된다 해도 나는 필요없어." 프리크가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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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노인 프리크는 당연히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필요없었습니다. 양치기로 잔뼈가 굵은 노인은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의 모습과 변화만 봐도 날씨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 유대인 행상은 사람을 잘못 만난 것이지요. 하지만 쥘 베른의 소설에서 나오듯이, 당시로서는 유럽의 가난한 시골이었던 트란실바니아 촌구석까지 행상들이 시계, 온도계와 함께 기압계를 팔고 다닐 정도로 당시에는 꽤 인기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 예보와 관련해서는 주로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 프랑스인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일기 예보 비스무리한 것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수로학자인 프랜시스 보퍼트 경(Sir Francis Beaufort)은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그 선조는 원래 프랑스에서 위그노 박해가 일어나자 아일랜드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14살 때 동인도 회사의 상선에서 뱃일을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미드쉽맨(Midshipman, 해군의 장교 후보생) 생활을 거쳐 22살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영광의 6월 1일 해전'에 참전하기도 하고, 적 항구에 침투조를 이끌고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해 들어가 적 군함을 탈취해 오다가 큰 부상을 입는 등 실전 경험도 많았습니다.
(이 온화해 보이는 신사가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과 혈투를 벌였던 프랜시스 보퍼트 경입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에 정진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해군 생활에서 가장 큰 업적은 남미 및 터키 등 여러 지역의 수로도 및 해도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왕립 학회, 왕립 천문학회, 왕립 지리학회의 위원직을 맡아 여러 과학자들의 후견인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노년에는 제독의 지위에도 오르고,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함장직에 오른 사람은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무조건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배쓰(Bath) 기사 작위도 받는 영예를 누립니다.
하지만 보퍼트 경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중 하나는 보퍼트 경이 바람의 세기를 표시하는 방법을 최초로 고안해서 널리 쓰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보퍼트 풍력 계급(Beaufort Wind Force Scale)입니다.
(이 음표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퍼트 경의 이름을 역사에 남게 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라는 후배를 양성해 낸 것입니다. 피츠로이 또한 영국 해군 장교였고(보퍼트와는 달리 태생이 귀족이었습니다), 찰스 다윈을 태우고 갈라파고스 제도로 항해했던 HMS Beagle의 함장이었습니다. 불행히도 피츠로이 함장은 자기가 초청해서 함께 항해한 과학자인 찰스 다윈이 그런 '신성 모독적인' 이론을 발표한 것에 대해 크게 침통해했다고 합니다.
(로버트 피츠로이입니다. 다윈은 이 사람이 가끔씩 불처럼 화를 내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좀 더러운 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람 크기 보면 짐작하시겠지만, 사실 유명세에 비해 Beagle은 매우 작은 측량선에 불과했습니다.)
피츠로이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비글의 함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사람이 일기 예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퍼트의 후원을 받아 1854년 통상 위원회의 기상 통계관(Meteorological Statist to the Board of Trade)이라는 새로운 부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현대 영국의 기상청이 되었습니다. 특히 피츠로이는 비글 호의 항해 도중에 폭풍 기압계(storm glass)라는 독특한 기압계를 고안했습니다. 이 기압계는 당시 영국의 여러 항구에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폭풍이 예상될 때는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여 많은 어부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피츠로이의 스톰 글래스입니다만, 그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좀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기압계라는 물건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럽네요.)
1859년 영국에 몰아닥친 끔찍한 폭풍의 피해를 겪은 후,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것을 피츠로이는 "forecasting the weather"라고 불렀고, 이것이 일기 예보(weather forecas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는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전보를 통해, 영국 곳곳에 설치된 육상 관측소로부터 수집된 기상 정보를 받아 날씨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결과 1860년 타임즈(The Times)에 최초로 일기 예보가 발행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일기 예보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복잡한 수학적 모델링 계산을 거쳐 발표됩니다. 이런 수학적 모델에 의한 일기 예보는 1922년 루이스 리차드슨(Lewis Fry Richardson)이라는 영국 수학자가 최초로 고안했으나,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관계로 실현되지 못했고, 1955년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출처: Nasica님 블로그
첫댓글 오 완전 흥미돋.. 좋은글잘봤어!
오 완전 흥미롭다ㅋㅋㅋ이런글 개좋아 존잼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