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동기동창 이용웅교수(호서대)의 소개로 세곡동 난원(蘭園)을 찾은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세곡동 난원의 주인장 닥터 이용우교수(전 단국대 총장) 역시
동기동창으로 ‘수서 6번 출구에서 12시 정오’의 약속을 위해 소나타 최신형을 대기시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니 식사부터 합시다.”
정선영, 이용웅, 이용우, 임수자 4인이 동기동창의 자격으로 식탁에 자리를 함께 하고
보니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없었다. ‘우연은 그냥 우연이 아니고 깊은 인연에서’라는
평소의 신념이고 보면 이번 만남은 그런대로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세곡동 식당 ‘토지’에는 이용우교수의 부인 고주자님이 미리 예약을 해 놓은 듯 식단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한식과 양식을 겸한 12가지 dish가 나와서 모양과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양하고 소박한 대화가 고교 졸업 후 50년의 단절을 터놓았다.
아, 이제는 난 구경을 해도 어색하지 않겠다.
방문객을 위해 이토록 세심한 배려하는 부인은 어떤 모습일까.
산자락 밑 아담한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누추한 곳까지 와 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담하고 깨끗한 부인이 난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고무장화를 신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총장부인’ 보다는 ‘귀여운 부인’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였다.
난원은 50 여평의 넓은 공간에 있었다. 난원은 냉 온방시설과 환기 일조 배수 등 최신
시설을 갖추어 난이 살기에 최적지였다. 이 집을 구할 때 산 밑 집이어서 배수에 문제가
있는 집이었다고 하는데 토목과 출신인 이용우교수의 눈에는 허점이 이점으로 보여
수맥을 짚어 이용 하여 명당자리로 만든 것이다.
활엽수들이 빽빽이 보호수처럼 들어 찬 산 밑자락에 자리 잡은 난실에는 1천분의 난이
살고 있었다. 난실에 들어서는데 가슴이 벅차 올랐다. 희귀한 난을 보러 불사천리한 적도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난을, 이렇게 대량으로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는 바위에 엇대어 난실을 만들고, 나라 각지의 장인들이 만든 신비한 빛의 분을 수집하여 난을 전시 하듯 해놓았다. 우리 며느리 친정인 제주도 사돈댁에는 제주 한난 만 3 백 여분 있다. 나는 평소에 이 두 곳의 난과의 인연에 감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곳 세곡동의 난들은 잘난체도 하지 않고 겸손하게 오크(Oak tree)로 만든
검은 분으로 민족하고 오손 도손 지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 따라 난향이 지나갔다.
“이 난은 햇볕을 쬐면 녹색이 됩니다. 햇볕을 가려주면 흰색이 되지요.이 난은 잎이
학처럼 생겼지요. 비상하려는 듯한 모습이 신선 같지요. 이 난은….”
정선영은 수첩을 꺼내어 적어가며 강의를 노트하고 있었다.
“이 돌은 일본에서 수입한 것입니다. 화산 돌이지요. “
아침 저녁으로 난실에 들어 난들이 어디가 아픈지, 싹을 내었는지, 꽃대가 올라왔는지,
꽃 망울이 터졌는지를 살핀다. 지나가면서 눈길만 주어도 난들은 웃으며 혹은 아픈 곳을
호소하며 마주한다. 천의 난과 함께 난향 속에서 부부가 난을 돌보고 있는 것이다.
“난 돌보기가 아기 보는 것만큼 힘들겠네요.”
나는 요새 손녀 별하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내가 한 일 중에서 제일 힘든 일이 손녀 보는
일인듯싶었기에 한 말이었다.
“처음에 이 난을 만났을 때는 우리가 난을 돌보았지요. 그런데 요새는 이 난들이 우리를
돌본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이 난들이 우리를 오라고 불러내고, 분 갈이를 해 달라고 요구를 하고, 물을 달라고 재촉을
합니다.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움직이게 하고, 산책하게 하고, 일하게 하고, 향을 맡게
합니다. 끈임 없이 말을 부치고 우리 부부를 단련시킨답니다. 이제 학교에서 은퇴하였는데
계속 난들이 일을 시키며 일거리를 주고 있지요.”
부부가 마주 보도록 만든 작업대에는 분 갈이를 기다리는 난들이 줄지어있었다.
난을 돌보다 보니 어느덧 난이 나를 돌본다? 난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이것은 金鶴입니다.”
큰 분의 난을 작업대에 쏟아 내어 뿌리와 줄기를 두 개로 나누었다.
부인의 조그맣고 하얀 손으로 엉켜있는 뿌리를 나누는데 잘리거나 부러뜨리지 않았다.
손길이 부드러우면서 확고했다. 자그만 분에다가 젖은 이끼를 넣고 금학 뿌리를
펴서 밑으로 내리고 금학 줄기를 고추 세웠다. 두 손으로 꼭꼭 눌러 금학을
안정시켰다. 훌륭한 금학 분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정선영님께, 이것은 임수자님께.”
선영와 나는 한 나무, 한 뿌리의 금학 난을 나누어 가졌으니 우리는 재매가 된 기분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서 차 한잔 하시지요.”
집안은 난실 만큼 아기자기하였다. 90의 노부인이 그림처럼 앉아 계셨다.
이 노부인이 지금의 <단국대학>설립자이시다. 일정 때 일본에서 명치대를 다니셨고
귀국해서 자신에게 속한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하신 뜻이 큰 분이시다.
난처럼 단아하고 난처럼 조용하고 난처럼 아름다우시다.
그런 분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다.
난을 돌보듯 노모를 돌보는 아들 며느리가 있어 이 노부인은 행복하시다.
“고사떡을 좀 했어요.”
호박,무를 넣은 팥 시루떡이었다. 이 맛도 오랜만이다. 토기 잔에 커피 향이 잘 어울렸다.
이용우교수의 초대를 받고, 남자동창을, 그것도 고교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꽃을 사갈까? 노모가 계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케익을 사갈까?
그러다가 내 졸저 ‘바람 지나가다’를 들고 갔다.
“작가이신줄 몰랐습니다. 그런 줄 알았더면 초대를 안 하는 건데. 하 하 하.”
“별 말씀을.”
난원 앞에는 국화가 소담스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매화가 두 그루 있었다. 세곡동 이교수의 정원에는 梅蘭菊竹이, 서재에는 文房四友가 조우하고 있었다.
첫댓글 아침의 난(蘭) 이야기,,그리고 임 작가님의 세곡난원 방문기는 울 카페를 더욱 향기롭게 합니다.
군자 용재(庸齋)학형과 즘심 마치고, 댁에 자당(雅庭)어른 뵙고, 부인의 작업 손까지, 천여 분의 난을 만나셨으니
비록 남녀 고교 동기로 지내왔지만,,,좋은 날,,일견여구(一見如舊)의 시간이었음을 미루어 알겠습니다.
一見如舊, 참 좋은 말이네요. 솔개님과 우리 동기 모두에게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해 주셨습니다.
세곡동 蘭園에 이몸도 함께 나섰던 듯하네요.
용재님은 저의 부친과 인연이 깊으시지요.
그러기에 뵌 적은 없어도.. 사진에서도 친근감이 들고...
학창 시절 단국대를 드나 들던 시절도 떠오르네요.
이 글을 읽는 동안 은은한 난향뿐 아니라..
내외분의 인품의 향 또한 맡아지는 향기로운 경험..
과연 임작가 이십니다.
고등학교 깍아머리 시절에 장형 선생님의 막내아드님과 함께
성동구의 댁에 세배하러 갔을 때에 김운경 동문께서 문을 열어 주셨지요.
아버님이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효자로 소문 난 명문가문의 조신한
단발머리의 규수로 기억합니다.
김운경, 용재님과의 인연이 꽤 오래군요.
'..김운경 동문께서 문을 열어 주셨지요.'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듯..
세곡동 비닐하우스에 대한 글이 있다고 최원명 학형께서 귀띔해 주어 이곳에 늦으나마 들렸습니다.
과찬의 말씀에 쥐구멍이라도 찾아야겠지만, 이 큰 덩치를 받아줄 구멍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만 잠시 있었던 일들을 짧은 시간에 단편 소설의 초고정도로 표현하신데 대하여 경탄하고 있습니다.
용재님과 부인의 난 작품에 비하면 제 글은 초라하지요.
부인의 무슨 상 수상작품 앞에 섰을때
그것을 위해 밤 낮으로, 여러해 정성을 기울인
'각고의 노력'을 보았습니다.
그대들의 행보가 아름답군요. 용우님 내외께도 안부를 드립니다.언제 였던지, 한 10 년은 됨직한데, 우리 부부의 서울 방문 때, 내외분의 환대를 기억하며, 감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