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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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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由게시마당 스크랩 인물전설
에메랄드 추천 0 조회 40 12.07.06 23: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물전설

 

 

삼태사의 위패를 지킨 안금이

임진왜란 때 태사묘 묘지기로 있었던 안금이라꼬 있었어요.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피난을 갔는데, 안금이는 삼태사 위패를 모시고, 요사이로 말하면 길안면 국란이라는 데에 숨어 들어갔어요. 국란이라는 데에 피난을 가서는 간등 밑에 위패를 모시고 삼 년 동안을 안금이가 봉심(奉審) 했어요. 아침 저녁으로 분향(焚香)하면서 정성껏 모셨지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 한몸 지키려고 정신이 없는데 안금이는 태사묘 어른들의 위패를 정성껏 모시면서 3년을 산속에서 살았는게라. 말하자면 어른들 위패도 피란을 했지, 그리고 임진왜란 3년 동안 아무도 제사를 모시지 못하는데 안금이가 제사를 드린것이. 그래 임진왜란이 평정이 되고 사람들이 다 자기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래보이 삼태사 어른들의 제사를 누가 모셨는지 그제서야 걱정이 되그던. 그래서 알아보니 안금이가 3년동안 정성껏 제사를 올린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지역사람들이 상소를 해가지고, 안금이의 공덕이 지대하다. 나라에 어떤 보상을 해 줘야 한다 이랬그던. 그이 나라에서도 공이 크니, 벼슬을 요구하던지, 하고싶은 대로 하여라. 그러니 아, 나는 벼슬을 요구할 수도, 벼슬할 자격도 못 되이께네, 이 어른들이 향사(享祀)친 뒤에, 퇴선을 내한데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 주만.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 퇴선하고 안금이 제사를 반드시 지내게 되었지, 지금도 안금이 축문이 따로 있어요.

안동시 옥정동 / 1981 / 권재영 , 남 , 66


자기 조상의 혈을 자른 이여송

이여송(李如松)이 중국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웃대에 대국 들어가서 살았던 조선사람이래. 따지고 보면 맹 조선사람이지. 그런데 임진왜란때 명을 받고 조선을 왔는데 조선의 산수를 보이 심상치 않거든. 이, 조선을 이래 놓아두면 안되겠다. 장군이 나기 시작하면 큰 장군이 나니,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겠다. 이래 마음을 먹고 명산의 혈맥을 짤렀어. 여기 저기 혈을 짤랐는데, 짜르다 보이 저 조상 혈도 짤라부렀어. 그래 돌아가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문데 가가 보니 장군이 날 것 같아서 혈을 짤라 버렸니더. 그러니까. 듣고 있던 문중사람이 탄식하면서 야야, 거기는 우리 우리 몇 대 할뱄다. 북후면 옹천동 / 1981 / 강대은 , 남 , 81


지렁이 장군 견훤을 물리친 삼태사

견훤은 껄개이(지렁이)가 화한 사람인데, 나라를 차지하려고 안동으로 들어왔어. 안동에는 삼태사(三太師), 삼장군이 있었는데, 지렁이하고 싸우게 되었어. 싸워 보이 지러이한테 삼장군이 안된단 말이래. 결국 이기기는 이겼는데 어애이겼노 하면, 인제 지러이는 물에만 들어갔다가 나오면 힘을 더 쓴단 말이래. 그러니 힘만 빠지만 물에 들어가서 힘을 내가 나오고, 또 힘만 빠졌다 하면 물에 들어갔다 나와 힘을 내고, 그런단 말이지. 싸우다가 그런걸 몇 번 겪어 보니 그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제 싸우다가, 또 물에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사람을 시켜서 간수(간장)와 소금을 몽땅 모아서 물에 쏟아 부었어. 견훤이 힘이 빠져서 물에가 보니 소금기가 있거든. 지렁이는 소금이 몸에 닿으면 몸이 녹는데, 견훤은 지렁이가 화한 사람이니 고마 힘이 사라졌다는구만, 그래서 이겼어. 그후에 나라에서 벼슬을 주었는데 벼슬 이름이 삼태사라 그래. 후면 옹천동 / 1981 / 강대은 , 남 , 81


여우동생을 물리친 겸암선생

서애 대감은 이름이 이룰 성(成), 용 룡(龍)자고, 그 형은 구름 운(雲), 용 용(雲龍)자 거든요. 근데 운용선생은 그 분은 숨은 선비고, 서애대감은 영의정도 하고 병조판서도 했으이께네, 출장입상(出將入相)한 사람이라. 서애대감하고 겸암선생하고는 한 형재간이고 우애도 깊었어요. 근데, 서애대감 어른이(아버지) 나이 칠십에 소가(小家-재혼)할라고 청해서 그래 소가를 했는데, 꽃 같은 젊은 부인을 데루 왔다는 게래. 그래 혼인을 하고 얼마 안있어 꽃 같은 동생을 하나 낳았어. 이레 보이 동생도 참 잘 났어요. 그래 아가 점점 장성하니 겸암선생하고 서애대감하고 수의를 했어요. 암만 시동생이지만 그래도 맹(역시) 아부지 혈육인데 우리가 그 동생을 장가 보내야 되니 선을 보러 가자.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가집으로 갔어요. 가니, 그 집에서는 서애대감 명성을 듣고 자꾸 딸을 줄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겸암 선생은. 동생, 거 안되네. 사람은 배필이래야 되지, 배필이 아니면 안되네. 하면서 반대를 하는게라. 그런데 서애 대감은 가문도 좋고, 여러 가지 다 좋은데 혼인을 성사시키지요 하면서 자꾸하자 졸라도 겸암선생은 안되네 안되네. 한단 말이래. 그이 서애대감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형이라도 괘씸하단 말이래.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형보다 못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사무(계속) 불평을 하면서 서애대감은 뒤에 오고 겸암선생은 앞서 가는데, 마침 어떤 촌에 오다가 소나기를 만나서 오두막집에 들어가게 되었어. 오두막에 들어가 보니 웬 노인하고 처자하고 앉아서, 노인은 신을 삼고 처자는 심부름을 하고 있거든. 그래서 겸암선생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더니마는 그 심부름하는 처자를 동생 배필로 삼자는 거라. 그래 고마 그집에서도 좋다고 하거든. 이 모습을 보니 서애대감이 성이 많이 났어. 신이나 삼고 있는 하잘 것 없는 노인하고 사돈을 맺을려고 하니 성이 안나겠어. 그래도 형이니까 말도 못하고 시름시름 내려왔어. 그 일이 있고부터는 형제간에 우애가 끊어지게 되었어. 서애선생은 화가나서 겸암선생 방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서로 소원하게 지냈다 말이래, 그랬다가 하루는 겸암선생이 서애 대감을 불렀어,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데. 동생 동생, 여기 들어와보래. 그래 서애선생이 마지못해 들어갔단 말이래. 그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오늘이 시동생 혼사날인데 여기 있으면 제수씨하고 올라그랬으니 있어보자. 그래서 방이 있게 되었는데 새벽녘에 쯤 되니, 뜰 담 아래서 쿵! 하는 소리가 나거든. 그래서 문을 턱 열어 보니, 꼬리가 아홉자난 예끼(여우)가, 말하자면 구미호(九尾狐)가 자빠져 있는게라. 조금 있다보니 저번에 보았던 그 심부름하던 처자가 들어오더니만 하는 말이 이만하면 되지요? 그런단 말이래. 갑자기 예끼가 나타나고 처자가 나타나니 서애대감이 놀라서, 뭐로? 하고는 왜 근노(그러노)? 하고 묻는다 말이래. 그러니 겸안선생이 말하기를, 동생 동생,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소가 들룰 때(재혼할 때) 색시로 들어온 것이 그 예끼래, 아버지가 홀려서 그른게래. 그런데 아부지가 들인 색시가 예끼라고 말릴 수는 없잖는가? 그래 있다보니 예끼 새끼가 났는데, 맹 구미호란 말이래. 그러니 그걸 남의 손을 빌려가주고 죽여야 되지. 아부지 혈육을 우리 손으로 죽일 수는 없잖는가? 안 그런가? 부모혈육을 말이래. 나는 그전에 신을 삼는 사람이 보통 사람 아닌 줄 알았다 말이래. 그런데 만약에 재상 집 처자를 색시로 들였으면 예끼동생인데 전부 죽을 꺼라 말이래 그러거든. 그 소리를 들은 서애 대감이 항복을 했다는 게래. 북후면 옹천동 / 1981 / 강대각 , 남 , 62


공민왕의 싸움터 오마대(五馬隊)

공민왕이 도저히 피란을 안 내려오고는 안되서 안동으로 내려왔어. 그래 내려와서 쓴 글씨가 안동군청 간판이래. 그게 공민왕 글씨 친필(親筆)이지. 그때 공민왕은 안동에 주재(駐在)했다가, 적이 내려와 싸움이 일어났어. 이래서 산성(山城) 쌓았는데, 예안 부포라는 데가 있어. 거기서부터 산능선을 쌓기 시작하여 산 능선을 타고 산성이라는 데까지 성을 쌓았어. 그래 그 길이 얼매나 큰지 말 다섯 필이 능선을 타고서 왔다 갔다 할 정도였어. 지금도 흔적이 있지 예안면 인계동 / 1981 / 이기영 , 남 , 58


산신령과 내기 바둑 두어 황금 얻은 퇴계선생

퇴계선생은 바둑도 국수급이래요. 바둑을 아주 잘 뜨는 분이라. 어느 날 금강산 유람을 들어갔는데, 한참을 가다가 보니 어느 젊은 사람이 마상(馬上)에 떡 앉아서 퇴계선생을 보고 말을 아주 반말 비슷하게 말을 걸드라 그해요. 저 당신 이황선생이지요. 아 그렇다.고 하니. 당신이 나이도 많고 유학자이지만 바둑도 잘 뚠다는데. 하고 반말 비슷하게 하이께네. 퇴계선생이 바둑 잘 뜨지는 못하고, 그냥 외유나 하고 논다.고 답을 했어. 그러니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럼 내하고 바둑 한 번 둡시다. 한단 말이래. 그래 퇴계선생이 마지못해서 그럼 뜨자고. 하니. 젊은 놈이 마상에서 내리더니만 바둑판을 펼치는게라. 퇴계선생이 가만이 보니, 바둑판과 바둑알이 전부 쇠고 금이래. 바둑판을 펼쳐서 바둑을 두려고 하니, 젊은 놈이 하는 말이 어 뭐라도 내기를 하자. 그러거든. 그래 퇴계선생이 어떤 내기를 하면 좋으냐.고 물으니 내가 지면 이 바둑판하고, 이 주먹만한 금덩어리 주께고, 만약에 퇴계선생이 지면 내 요구대로 해달라. 카는 게라. 그래 퇴계선생이 요구가 뭐냐? 고 물으니 당신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를 못하니, 당신이 이 세상에 없어져야 되겠다. 하는게라. 말하자면 죽일 챔이라. 그라고 젊은 놈이 계속 독촉을 하면서 자신이 있으면 뜨자. 그래 독촉을 하거든. 그래도 점잖은 사람이 안할려고 하니, 젊은 사람인데 물러서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바둑을 뜨게 되었어. 그런데 이 젊은 사람이 아주 바둑을 잘 둬서 마지막에 가니 고마 대마가 죽을 판이라, 한점만 잘못 두면 대마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두려워서 바둑알을 놓지도 못하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그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 단디 보시고 놓으시소. 내 저 소변보고 오지요. 하면서 일어서서 어디로 가는게라. 퇴계선생이 속이 타가 바둑판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더벅머리 총각이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손가락으로 바둑판 다음 놓은 자리를 짚어 주고는 누워버리는게라. 그래서 짚어준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희한한 곳이라. 그게 참 묘수이거든. 그래 가만히 있다가 젊은 사람이 소변을 보고 앉으니, 퇴계선생이 더벅머리 총각이 짚어준 그 자리에 딱 바둑알을 놨어. 그래 바둑을 두고 나니 젊은 사람이 성을 버럭내더니만 더벅머리 총각을 가르키면서 저놈 짓이제? 죽일 놈. 이러면서 바둑판하고 보따리하고 싸가지고 가 버렸어. 내기를 했으니 금덩어리는 내두고 가버리거든. 그 뒤에 더벅머리 총각이 일어나더디만 말 하는게라. 저 젊은 사람은 태백산 신령인데 젊은이로 가장 해서 퇴계선생을 잡으러 왔고, 나는 금강산 산신령인데 퇴계선생이 죽을까바 살릴라고 옆에 누워 있었다.그는 게라 청송군 진보면 부곡동 / 1985 / 정재곤 , 남 , 66


태몽치마와 서애대감

서애대감 엄마가 딸만 많이 낳았어. 하루는 친정에 와서 쉬는데 아들을 많이 놓은 형이 태몽꿈을 꿨다고 하면서 먹을 거는 없는데, 용 두마리가 마구 치마에 담기더라. 그래거든. 이말을 들은 서애대감 엄마가 그 치마를 날 벗어다고. 내 비단치마를 주께. 하고는 형하고 치마를 바꿔 입었어요. 그리고 꿈도 내 가지고 간다. 하고 말하고는 다 떨어진 치마를 입고 집으로 왔는거라. 그러고 치매를 바꿔 입은 그 형은 시댁에 가서 치마를 바꿔 입은 이야기 하니, 시어른이 성을 내면서 다시 친정을 쫓아 보내 버렸어. 이혼을 당한거지. 그리고 하회로 돌아온 서애대감 엄마는 그 후에 태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낳은 것이 서애대감이래. 풍천면 구담리 / 1998 / 김해수 , 여 , 86


봉사 점장이 덕에 개국공신 된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이는 조선시대때 공신(功臣)인데. 맹사성이 어릴때는 부모도 없고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서울 장안으로 돌아다닌게라. 그때 서울 장안에는 아주 점을 잘치는 봉사가 하나 있었어. 맹사성이 사방으로 댕기다 보니. 봉사집에도 댕기곤 했는데. 봉사가 눈으로 보지는 못 하지면 맹사성이 하는 말씨며, 하는 행동이 아주 이상하거든. 그래 하루는 봉사가 맹사성을 불러서,


"야, 사성아!

예.

니 야야, 올 때도 갈 때도 없는데, 니 고마 우리 집이 있거라.

예, 그래지요, 머.

그래 거기서 몇 해 봉사 심부름도 하고, 점치러 오는 사람 심부름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저녁때 앉아 있다니 봉사가 하는 말이 니, 저기 광화문 밖을 알지?

예, 아니더.

거 가면, 전부 설은 영장을 거 묻잖나?

예, 그렇지요.

니 오늘 저녁에 꼭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그래지요. "


그때는 역질(疫疾)이 많이 돌았는데, 그 역질에 걸려 죽으면 덕에(나뭇가지 사이 따위에 걸쳐 만든 시렁)올려 놔. 덕에 올려놓았다가 한 삼 일 지나면 공동묘지 갖다 묻는데. 어쩌다가 벼슬도 많이 한 집 처년데, 죽어버렸어. 죽으니 보기 싫다고 공동묘지에 묻어라. 이렇게 된게라. 그래서, 그 봉사가 맹사성보고 하는 말이 니 오늘 아문데 가면은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누가 장사를 지내고 있을 거다. 장사를 다 지내고 사람들이 간 뒤에, 그 묘를 파가지고 영장을 업고 온나. 이랬어. 예, 시키는 대로하지요.


그래 공동묘지에 가서 머리를 묘속에 숙이고 있으니, 밤이 이슥해진 후에 한 대여섯이서 묘지로 오더니만 상여에서 관을 들어내서 장사를 지내그던. 그래 그 뒤에 봉사가 시키는 대로 묘를 팠어. 파고 보니 비단에 뚤뚤 말아 싼 영장이 있단 말이래. 그래 그 영장을 들고 오니, 봉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 영장을 안아 품고서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거라.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어. 영장을 탁 안고서 아랫목에 가만있으니 봉사가 하는 말이 영장 가슴에 손을 넣어 봐라. 그래서 또 시키는 대로 손을 넣었다. 그러고 있으니 봉사가 하는 말이, 손을 넣어보니 감각이 어떻노? 하고 물어오는게래. 맹사성이 야, 좀 따스하이더. 그리, 봉사가 하는 말이 그만 하면 됐다. 손을 빼고 조금 더 드러누웠거라 그래 또 영장을 안고 드러누웠어, 얼마 안되어 봉사가 하는 말이 니, 손 한 번 여 봐라.


그래서 또 손을 여 보이께네, 그때는 맥이 뛰어. 그제서야 봉사가 밖에 나가서 물을 끓여가주고 갖다 먹여라.


그래서 맹사성이 물을 끓여서 영장 입에 떠 넣으니, 그제서야 처자가 일어났어, 일어나는 걸 보니. 처자가 나이 한 이십 정도에 용모가 옥골(玉骨)이래. 또 재상 집에서 역질에 걸려 죽었으니, 옷하고 패물을 전부 한테 넣어서 묻었다 말이래.


그래 인제 처녀가 살아 일어나 보니, 죽었는동 살았는동 이게 누구네 집인동 어덴동, 생전에 문밖에도 안 나가던 처자가 보니 이상하그던. 그래 가만 보니, 총각 하나가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물도 떠 주고 밥도 해 주고 한단 말이래. 그래 그 처자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총각이 일을 하는데, 자기는 가만히 앉아 얻어 먹을 수만 없그던. 그래 나가서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게 되었단 말이래.


그래 하니, 자연스럽게 맹사성하고 낯이 익게 되었어. 그렇게 생활하다가 보니 정이 들었어 그리고 생각해 보니, 총각 때문에 내가 이 집에 왔지 그렇지 않으면 죽었을 거란 말이래.


그래 하루는 보따리 짐을 풀어서 간직하고 있던 패물을 내놓고는 이걸로, 시장에 나가 팔아가지고 오소.

그래 맹사성이 시키는 대로 패물을 가지고 시장에 내다 파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에 어떤 처자가 하나 온단 말이래. 그래 패물을 보더니만 이리 들고 보고, 저리 들고 보고, 자꾸 들고 보거든. 그러다가 사지는 안하고 그냥 가는 게라.

그 처녀가 누구냐 하면 바로 대감님 비빈(婢)데. 장보러 나왔다가 자기가 모시던 아씨의 패물을 보게 된게라. 그래 집에 와서 상전한테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어.

쇤네(소인네)가 시장에 나갔다가, 오늘 이상한 것을 봤다.

이래그던. 그래 뭔 물건을 봤노? 물으니,

예전에 아씨가 가지고 있던 패물을 내가 봤니더.

그래, 그 니, 그 총각을 아나?

알아요. 

아직도 시장에 있나?

있어요. 


그래 아직도 패물을 못팔아가 가만 앉아 있는데, 웬 사람들이 오더니만 맹사성을 잡고서 마구 패는게라. 아 이놈, 누가 묘를 뒤집어 팠느냐? 아주 고얀 놈 같으니 남의 묘를 파서 물건을 팔아먹느냐? 하고 패니 어쩔수가 있는가.

그래, 니 이 패물을 어디가 구했노? 이실직고(以實直告) 안 하만 너를 죽일테니, 바른 대로 이야길 해라. 그래 인제 바른 대로 이야기했단 말이래.

그 말을 듣던 안부인이 생각해 보이께네, 그 총각이 아니면 자기 딸은 죽었그던. 그래 총각을 데려다 놓고 총각이 묘를 파서 아이를 살렸지만 몸을 다 베려 놨으니, 이 처자가 다른 데 시집을 갈 수 없다 그런단 말이래. 그리고는 맹사성을 사위로 삼았어. 그 재상에게는 아들 삼 형제가 있는데, 밑도 끝도 없는 맹사성을 매부로 섬기려니 성도나고 얼매나 밉겠노. 그래 생각하기를 이놈을 망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울 삼청동 가면 아주 커다란 집이 하나 있는데, 이 집에는 들어가면 모두 망해가 나오는게라. 그래 그 소문을 듣고 그 집을 몇 푼 주고 사서 맹사성이 보고 들어가 살게 했어. 근데 맹사성이 들어가서는 아무런 재앙도 없이 잘 살거든. 그래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당신도 이왕 내 알게 됐으니 글을 배우라.


그래서 처녀가 글을 가르쳐서 맹사성이가 개국공신 된 이야기래요

소산동 소산 / 1981 / 김시규 , 남 , 85


우남촌 일화

그래 우남촌이가, 그분이 나들에, 남의 집이 살로 갔그던. 이래가주, 올 임시에, 그르이 글때는 참 일꾼 머식에 그 멋한 집에 있는 참 머식에서는 요만한 아들도 나이 암만 많애도 일군에 예대하는 법이 없어. 고만 우남촌이마 우남촌이고, 아무 것이만 아무 것이랬지, 아문 도령이 도령이고 고마 이래부랬지, 도령 소리도 없었지, 이래 됐는데, 나올 임시에 가만 보이, 이늠의 아도 우남촌이, 어른도 우남촌있다. 그래 그 주인한데, 동리 한 번, 칠월 달로 인제 이래 머식해, 풋구라꼬 초연식에 말이지. 여러 머식이 크게 채래서 인제 나무 밑에 성대하게 머식이 갖다 놓고, 술을 인제 한 잔 이래 서로 노나다가 먹고 흥분이 한창 머식한데, 복판에 서가주고 그 분이 복판에 딱! 서서 "


"모도 내 이 얘기를 쫌 들어보소. 나을님요. 내 이예기 좀 들어보소.

글 멀 근냐꼬? 이 동리 이름이 먼가요?

사! 안재 들(사월동)에지금마, 그만 하면 됐습니다. 놔두라꼬. 옳지! 요놈의 동네 사들에 동네, 예절 절종을 했다메? "


아도 우남촌이, 어른도 우남촌이, 지한테 대고 만날 이러그던. 그르니 칠월 인제까지 농사 다 지이 놓으니, 초연식이 머식하이 인지는 살고 나갈 시기 며칠 안됐그던. 얼마 안 남았그던. 가실만 해조부만 인제, 이래가주 술을 한 잔 먹어 놓고, 옳지! 알았다. 요놈의 데, 예대(禮待) 절종했다.


"그 다음에는 지도 고 안에, 아문 나 많은 노인이 머식이래도 고만 하는대로,

어이! 고.

사람. "


이래 그 그래, 초년식에 인제 여러이 있는데, 공포를 그래 해부렀그던. 이르이 갈불 이도 없고, 또 타이를이 없어. 그래가주고, 그차 나와가주고, 사들이 사들이 고놈의 데, 법이 무섭다 그다 질들이기 원 쉽고 머식한 걸. 서후면 저전동 / 1981 / 조차기 , 남 , 63


용동이 일화

이, 아-들은 많지. 그르이 인제 구 또 할마시 되는 분은 그 가산은 넉넉치 못하이 잔소리할 건 사실이라. 이러고 앉아. 그래, 영감님으는 워째 머식해가주고서 아-들은 밥 달라꼬 저렇게 나대고, 저麝구 나대는데, 워엘라고 머식해가주고 당신은, 영감은 술만 자시고 그꾸 머식하느냐꼬? 허허! 이 사람 할마이 걱정 말게. 이 사람아, 걱정이 된고? 그릇 없다 그래, 숫가락 한 짐 여다 놔, 나무 없다 그래, 검불 때, 걱정이 머 있는고? 나무는 무슨 놈의? 허허! 삼검불(삼 찌꺼기)은 검불 아인가? 또 정지 소다 그래, 마당이 마구 정지래. 남의 석포에 이다 가작 달아 놨으이 말이래. 정지 소다 그래 마구 정지, 마당이 정지래. 저전동 모시밭 / 1981 / 조차기 , 남 , 63

 

 


유물 전설


비뚤게 쓰여진 도산서원 현판

이전에 선조가 그 당시의 명필 한석봉에게 명을 해서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하였는데. 이 때 선조가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한석봉이에게 가르쳐 주면, 놀래서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되께라. 싶어가 가르쳐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꿀로 한 자 한 자 불렀어요. 그래 한석봉이는 영문도 모르고 받어 쓰는게라. 맨처음에 원(院)자를 쓰고, 다음에 서(書)자, 다음에 산(山)자, 그리고 인제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했어. 한석봉이는 원, 서, 산자를 쓰고 나서 도자를 임금이 부르이께네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 구나. 딱 알아챘어요. 그래 고마 놀래가 붓이 떨려서 마지막 도(陶)자를 비뚤게 썼어요. 그래가 도산서원 현판에 글씨가 약간 삐뚤지. 내고향 전통 가꾸기 / 1984 / 안동군 , ,


종이학이 터잡아 준 봉정사(鳳停寺)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영주 부석사를 다 지은 다음, 종이 학을 만들어서 날렸는데, 그 학이 신기하게도 날아서 서후리에 있는 천둥산 뒤쪽 기슭에서 떨어졌어. 그래 의상조사가 이 곳에서 도를 닦겠다. 하고는 자리를 닦아서 절을 지은 것이 봉서사래. 봉서사를 다 지은 다음에 또 종이학을 날랬는데 이번에는 천둥산을 넘어서 떨어졌어. 그래 지은절이 봉정사래 한국구비문학대계(안동시) / 198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


학의 신기가 담긴 애일당(愛日堂) 현판

옛날에 농암선생이 도산면 분천동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명필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제자를 보냈거든. 중국까지 먼 길을 가게된 제자는 반 년 만에 고생고생해서 중국에 도착해서 명필을 찾아 한 달 넘도록 헤메고 다녔어요. 한참을 다니다가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발견하고는 조선국 농암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애일당 현판 현판 글씨를 청하였그던.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머나먼 길을 왔으니 내 대번에 글씨를 써 주도록 하지. 하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줄기로 먹을 듬뿍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주거든. 좋은 붓에 근사한 먹을 갈아서 정성스레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가 내심 마음에 차지 않거든. 이렇게 보니 그건 글씨가 아니라 장난으로 휘갈긴 글씨 같거던. 그래 제자가 다시 써줄 수 없느냐고 재차 청을 했거든. 그러자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만 쓴 종이를 두어번 흔드니 글자가 마구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리거든. 그제서야 제가는 자신의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어요. 제자가 며칠 동안 간절히 청했지만 끝내 써주지 않더니만 마지막에 가서 하는 말이 이 아래에 내려가면 나보다 더 낮게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 그래서 제자는 할 수 없어서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어요. 찾아가니 하는 말이 산중에 계신 분이 우리 스승님인데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 하거든.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소상히 이야기 하니 중국에서도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하여 써 준 것 같은데.하면서 하며 자기의 글씨는 스승 글씨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학 세 마리는 못되어도 한 마리 정도는 된다고 말하면서 붓을 들어 정중히 써 주드라 그래.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제자는 농암선생 볼 낮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 주다가 그가 세상을 뜬 후에 사실이 밝혀졌다고 그래. 그러던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정자를 쓸어 갔는데 현판도 같이 떠내려가서 영영 잃어버렸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고 강에 나갔더니만 무언가 금빛 찬란한 것이 떠내려 오드라그래. 그래 건져보니 그게 애일당 현판이었다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장 전통가꾸기 , ,


눈병 없엔 개목사(開目寺)

조선시대 때,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오게 되었어.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 보니 이상하게도 안동지방에 눈병 환자가 많은 게라. 맹사성은 풍수지리에 밝아서 안동지형을 가만히 살펴보니 안동의 지세가 눈병이 많은 지세거든. 그래서 당시 흥국사라는 절을 개목사(開目寺)라고 이름을 바꾸었어. 그 후부터는 차츰 눈병환자가 없어졌다고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장 전통가꾸기 , ,


서기가 비친 영호루 현판

영호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 그러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이곳에 머무를 때 친히 쓴 글씨인게라, 공민왕의 친필이니 만큼 현판 글씨의 필치는 참말로 잘 썼다고 사람들이 그래. 옛날부터 영호루가 수 차례 물 때문에 유실됐는데도 현판만은 지금까지 보존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현판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거든. 원래 영호루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있었는데, 당대 유명한 사람이 오면, 저마다 글을 지어가 붙여둬서 그렇게 현판이 많아지게 된게라. 그래도 그른 현판은 홍수만 나면 떠내려가고 보이지가 않아요. 언젠가 영호루 현판도 홍수에 떠내려 갔었는데 상주땅 어딘가에서 서기가 비치드래. 그래 가보니 그게 영호루 현판이라. 그래가 영호루 현판이 아직도 영호루에 꺼떡없이 걸레 있게 된게라 안동시 옥정동 태사묘 / / 권재영 , 남 , 66


저승 돈으로 지은 연미사(燕尾寺)

예전에 그 저 제비원이란데, 원이라는 처자가 하나 살았어요. 원이라는 처자는 제비원에서 음식영업을 했어요. 인제 그 음식을 팔고 이래도 돈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이 오게 된 경우에는 돈도 안 받고 그양 밥을 줬어요. 그이 인제 장사를 하여도 영리적으로 하는 게 아이고 원이라는 처자가 착해가지고 자선사업을 마이 했어요. 근데, 이송천이 삼송천(三松川) 김씨 성을 쓰는 큰 부자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고마 젊었을 때 비명에 가부렀어요.그래 인제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염라대왕 하는 말이 니는 아직 들어올 때도 안 됐는데, 왜 들어왔느냐? 근단 말이래. 내가 죽었다 카이 들어왔다. 하고 대답을 하니 그래 잘못 들어왔으니 그만 나가라! 하고 염라대왕이 근단 말이래. 근데 또 하는 말이 가긴 가는데 자선사업을 좀 하고 가라. 이랜단 말이래, 그래 이송천 부자 아들이 자선사업 할라하니, 빈손으로 왔는데, 자선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랬거든. 그럼 여기에 원이가 저장한 창고가 저기 어디 가먼 있다 말이래. 금, 은, 보화가 들은 창고가 있으이, 그 창고의 반만 내가주 사람을 도우고 가라고. 그리고 반을 꺼내가주고 줬어. 그리고는 갚을 때는 어예갚노 하면 니 살림을 원이한테 반만 주란 말이래. 그라고, 한 사날 있다가 깨났단 말이래. 그 집에서 얼마나 반가울로? 그래 살아나오니 거기서 들은 기억이 생생하게 나거든요. 그래 인제 자기 재산 반을 가주고 원이한테 찾아갔거든. 내가 저승에 가이, 니 창고가 있더란 말이래. 있는데, 니 재산을 내가 쓰고 왔이께네, 염라대왕이 내 살림을 반을 주라고 하더라. 그러니 내 반 주겠다 말이래. 반 받아라. 그래서 원이가 받았단 말이래. 지는 노력해가 번 것도 아이고, 반을 그양 얻었지 그래서 받아가 거기다 미륵불을 중심으로 해가주 법당을 하나 세웠다 말이래. 그게 연미사래 북후면 옹천동 / 1981 / 강대각 , 남 , 62


99일만에 지은 흥국사와 불 내려온 천등산

흥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아흔 아홉 칸이나 되는 큰 절이래, 이 절을 어떻게 지었는가 하면 구십 구 칸을 하루 한 칸씩 지었다 그래요. 그러니 구십 아홉 칸 짓는데, 구십 구일만에 다 짓다니더. 그렇게 날래(빠르게) 짓다니더. 흥국사가 있는 산도 대 명산이라. 요새 와서는 천등산이라 말하는데, 의상조사가 하늘에서 조명탄 같은 탄이 터저 불이 내려왔다고 해서, 천등산(天燈山)이라 한다디더. 북후면 옹천동 / 1981 / 강대각 , 남 , 62

 

 


                                                                자연물전설


농사 잘되라고 비는 고시레

고씨라꼬 아주 유명한 집안이여. 이 집안에 한 양반이 인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머리만 메고 다니는 거여. 그러니 시체를 짊어지고 다닌 것인데, 왜 그런고 하면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서 묻는다고 그렇게 다닌겨. 그래 다니다가 들어보니 사람들이 진개명개오야이뜰이라고 거기가 명당자리라고 그라거든 거기가 어디냐 하면, 저 전라도 최고평야야, 진개명개오야이뜰 하는데 바로 거기여,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 평야여. 그래 거기를 찾아가서 최고 좋은 명당자리라고 갖다 묻었는데. 묻고 저녁에 떡 잠을 자는데 그 아버지가 나타나서 뭐라 하라 하면은 요놈의 새끼야 그 터는 내 터가 아니라. 한다 이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저쪽 산에 갖다 묻으면, 그 자손은 없어도 이 세상이 망할 때까지는, 제사를 잘 얻어먹는다. 이렇게 말하거든, 그러면서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맞다. 그러는 거여. 그래서 다음날 꿈에 말한 그곳에 묘를 썼어. 그래 묘를 쓰고 난 후에 얼마 안 있어, 비가 안 오기 시작한 거여, 가물어서 곡식이 안돼는 거야. 비가 와야지 농사가 되는 건데, 죽을 판이라.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는 대사가 썩 지나가는데, 이 가뭄에는 원인이 있다. 고 하면서 저기가 고씨 묘인데 저걸 잘 위해야 풍년이 들고 욕을 안 먹는다. 이렇게 말하는 거여. 그러니, 당제사 지내듯이 동네사람들이 제사를 거기에 지내게 되었어. 그러다가 차츰 차츰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뭘 먹으면은, 곡식 잘되게 해 달라고 고씨네, 고씨네 하고 부르게 된거여, 그게 고시레야, 그러니까 그게 고씨여, 농사 잘 되게 해달라고 고시레 하는거지.

도산면 서부동 / 1988 / 보광사 주지스님 , 남 , 74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

그 한식이 뭐냐하면, 밥 먹는 날이 한식이래. 왜 한식이라 그러는가 하면. 옛날에 개자치란 사람이 있었는데, 난이 있어 임금을 업고 도피를 와 가주고, 임금이 '고기가 먹고 싶다' 그래서 주위를 찾아보니, 아무리 찾아도 고기가 없어. 그래서 자기 신넙지(허벅지)를 끊었다 이거라. 끊어 가주고 구어서 임금이 모르게 소고기라 속이고 먹였어, 그렇게 참 인군을 보호했다 이게라. 그이 충신이라. 나중에 나라를 수복해서 임금이 다시 자기 땅에 들어갔는데, 그때 개자치하고 같이 온 다섯 신하는 임금하고 돌아가가 조각(정부개편)에 들어갔고. 개자치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니 나는 내가 팔십 노모를 집에 두고 와서 사생연망을 모르니, 너들은 돌아가가주고 빨리 조각(造閣)을 속히(빨리) 하라. 나는 뒤에 연락을 해달라. 그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가보니 아직 팔십 노모가 살아 있어. 그래서 노모를 모시고 지내면서 하마나(언제) 조정에서 소식이 있으까 싶어서 기다려도 소식이 없단 말이야. 조종에 돌아간 임금하고 다섯 신하는 모두 그렇게 고생하다가 그 머 포시랍게(편하게) 되이까 잊어버렸지, 그랬다가 한 삼 년 후에 개자치가 생각나드란 말이지. 아하! 이거 개자치를 잊어부랬다. 그래서 나라 사자(使者)를 시켜서 개자치를 조정으로 모시고 오라. 하였는데, 그 때는 하마(벌써), 이미 늦었어. 개자치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안 와서. 에이고, 내가 머 이렇게 살면 머하노? 생각하고는, 팔십 노모를 업고 중국 부춘산으로 들어가 버렸어. 나라 사자가 개자치를 찾으로 개자치 고향에 가서 물으니, 아무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거든. 그래도 계속 수소문은 하다가 보니 어떤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소문을 듣고, 그 산을 뒤지니 그 험한 산천에 개자치가 어디 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예이!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산에 불을 나부랬다(놓았다). 그래 불이나니 개자치가 갈 데가 없어 솔떠거리 밑에 자기 팔십 노모를 업고 타 죽었어. 그렇게 불 타가주고 죽는 그 모양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그래서 나라에서 명령하기를, 개자치 죽는 날은 찬밥을 먹어라. 불을 떼지(지피지) 마라 이말이거든. 개자치가 타죽자 하니 얼매나 뜨거웠겠나 이게라. 그래서 불이 없으니 찬밥을 먹을 수밖에 없어 한식이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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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화상싸움

저전동에서 보면 학가산이 뾰족하게 보여 풍수적으로 화재가 자주난다 그래요. 그래 이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소나무나, 뽕나무 뿌리를 말려서 단단하게 두드린 후 실로 감아서 세 발 정도 되는 새끼줄을 이어서 만드는데, 새끼줄을 빙빙 돌리면서 싸우지요  / , ,


태워서 시작된 놋다리밟기

공민왕이 난을 피해 안동에 왔는데, 강을 건너게 됐거든. 그런데 강에 다리가 없는게라. 그래도 시기가 시기라서 급하니 그냥 강을 건넬라 그러는데. 참 귀한 공주가 맨발로 강을 건네게 할 수 없어서 안동에 있는 부녀자들이 물 속에 들어가 인교를 놓은게라. 허리를 구부리가(구부려서) 공민왕의 공주를 등으로 지나가게 해서 강을 건네 준게라. 그때부터 그것을 기념해서 놋다리밟기를 시작했다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향 전통가꾸기 , ,


가마싸움에 희생된 남선면 원림동 각시당

옛날에는 안동과 의성을 잇는 길은 이 갈라산이 길이 가장 가까웠다 그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는데, 어느날 의성에서 안동으로 시집오는 색시를 태운 가마와, 안동에서 의성으로 시집가는 색시를 태운 가마가 갈라산 중턱에서 마주치게 된게라. 한쪽은 험한 산이고 다른쪽은 높은 낭떠러지인 좁은 길이기 때문에 서로 비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단 말이래. 옛날에는 초행길 가마가 물러서면 재수가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맛꾼들이 서로 물러서지 않고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비켜갈 수가 없어서 양측의 가마꾼들이 힘으로 맞부딪치게 된게라. 인제 가마를 맨 채 가마꾼들은 밀고 당기는 가마싸움이 벌어졌는데. 힘이 약한 쪽의 가마가 차츰 밀리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그래 고마 가마 속에 타고 있던 색시도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 그래가 갈라산 중턱에 이날 죽은 각시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각시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된게라.

남선면 원림리 / 1992 / 최인연 , 남 , 38


견훤을 물리친 차전놀이

견훤이 안동에 진격하여 왔는데, 안동에는 당시 삼태사가 있었거든. 그래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삼태사가 인해전술로 견훤을 물리쳤다 그래. 그래서 차전놀이를 하게 되었다고 그래. 또 어떤 사람은 견훤은 지렁이가 화해서 장군이 됐거든. 병산에서 견훤하고 진을 치고 있는데 견훤이 마침 지렁이로 변하여 강가 모래벌에 뒹굴고 있드라 그래. 그래 삼태사가 생각하기를 견훤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지렁이를 몰아가 차전으로 눌러서 죽였다고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향 전통가꾸기 , ,


왜적을 물리치는 노래 쾌지나 칭칭 나네

안동의 하회마을에 서애대감의 형인 겸암선생이 있었는데 남보기에는 모자래는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미래를 내다보고 길흉을 점칠 줄 아는 도인이래, 기인이지. 그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왜적이 조선을 쳐들어오기 위하여 칼을 갈고 있었는데, 그래가 세상이 온통 어지러워졌어. 그래 한날은 겸암선생이 서애대감을 찾아와서는 사흘 후에 너를 죽이기 위해서 일본서 자객이 찾아올 것이니, 니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서 가등청청 나오네 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켜라. 그래거든.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평소에 겸암선생을 잘 아는 서애선생이 생각하기를 필시 뭔가 연유가 있어서 이러는 갑다. 이래 생각을 해서 마을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가등청정이 나오네'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어. 그리고 며칠 후에 참말로 가등청정이 보낸 자객이 하회마을에 왔는데,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가능청정이 나오네'라고 노래를 부르거든. 그래 그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섬찍한게 도저리 마을을 염탐할 용기가 안나는 게라.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오는 것을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저런 노래를 부르지?' 부쩍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첩자가 아이들인데 누가 가르쳐 준 노래냐고 물어보았어. 아이들이 대답하기를 서애대감이 가르쳐주었다고 말하니, 첩자가 서애대감이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이런 사람이 조선에 있어서는 일본인데 큰 방해가 될 것 같으니 내가 고만 없애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어.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또 겸암선생이 서애대감을 불러서는 내일 자객이 와서 니하고 바둑을 두자고 할 터이니. 니는 거울 앞에 앉고 자객을 거울 밑에 앉쳐라. 그리고 내가 뒷방에 바둑 놓을 자리를 거울에 비쳐 줄 테니 니는 그냥 거기에 두기만 하면 된다. 이래 말하거든. 조금 있다고 보니 참말로 자객이 와서 서애대감인데 내기 바둑을 두자고 청하거든. 그래서 서애대감이 좋다고 하면서 겸암선생이 시키는 대로 거울 앞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어. 한 반쯤 바둑을 두었는데 자객이 생각해보이 도저히 안 돼겠그던. 그래 고마 제가 졌습니다. 하고는 음식대접도 안 받고 부랴부랴 달아나 버렸다 그래. 이 일로 인해가 임진왜란 때 우리 안동 땅은 왜군들이 약탈하지 못하고 피해갔다고 그래. 그리고 그때 부른 '가등청정이 나오네'가 변해가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민요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그래. 안동시 이천동 / / 조석우 , 남 , 78


애틋한 사랑과 신령스러움이 담긴 하회탈

하회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별신당이 있어서, 음력 정월 초이틀날이면 마을제사를 지내거든. 그런데 어떤 해 마을제사를 지내고 동사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재미있는 놀이를 하나 만들자 이래 논의가 됐어요. 그래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얼마전에 보니 중하고 각시하고 놀아나더라. 하기도 하고 양반이나 선비도 별거 아이더라. 하는 말이 보태져서, 그 사람들 풍자를 하면서 해학스럽게 만들어보자고 논의가 되었어요. 그래서 각시, 양반, 선비, 초랭이, 중, 부네, 영감, 백정, 할매, 주지, 소로 결정을 해놓고 놀이를 했는데, 하다보니 이거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낮바새(얼굴이 드러나)서 못하겠거든. 그래서 또 궁리한 끝에 탈을 만들어 쓰자고 결정을 하거든. 인제 탈을 깎을 사람을 물색했는데, 마침 마을에 허도령이라는 사람이 손재주가 있었어요. 그래서 허도령인데 부탁을 하니 허도령이 자신도 없고 해서 극구 사양을 하더라그래. 그랬다가 어느날 허도령이 잠을 자는데 꿈에 신령이 현몽을 하면서 탈을 만들기를 종용하는게라. 그래 허도령이 깨서 생각해보니 하도 신기해서 생각하기를 내가 탈을 만들어야 되겠다. 결심을 하고서는 탈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잡인들이 들어오면 부정을 타니까. 금줄을 두루고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놓고, 마을사람들도 허도령이 작심한 줄 알고 부정이 안타도록 단디 단도리를 해서 허도령 작업실 인근에는 얼씬도 안하도록 약조를 했어요. 허도령이 매일 목욕재계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탈을 만드는데 열성을 쏟았어. 양반도 만들고, 할매도 만들고 해서 열 두 개의 탈을 거의 다 만들어 가고 있었어요. 석달이 다되가 인제 마지막 이매탈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웃에 허도령을 몹시도 사모하는 처자가 한 명 살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허도령을 볼려고 기다렸지만 석 달이 넘도록 허도령이 보이지 않거든. 그래서 상사병이 날 지경이 되었어요. 그래 허도령 얼굴을 먼데서라도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래. 그래 맨날 정화수를 떠놓고 허도령 작업이 빨리 끝나게 해 달라고 밤마다 빌고 있었는데, 석달이 지날 때쯤 되어서, 그날도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있는데 허도령 얼굴이 정화수에 떠 올라와서 깜짝 놀래가 생각하기를 인제서야 탈이 다 만들어 졌는갑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는 달밝은 밤에 허도령 집에 몰래 들어가가 구멍을 내고 허도령을 훔쳐보고 말았는데, 원래 탈은 신성한 거래가 부정을 타면 안돼거든. 그만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허도령이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게라, 처자도 같이 변을 당했지. 그때 허도령이 만들고 있던 탈이 이매탈이었는데, 그래서 이매탈은 턱이 없어. 안동군 / 1984 / 내고장 전통가꾸기 ,



                                            풍속전설


서애대감 구한 돌고지바위

서애 류성룡이 여섯 살 때 강가에 헤엄을 치다가 깊은 데 빠졌는데. 갑자기 돌개바람(회오리바람)이 불어가, 서애를 바위 위에 올려놓아 목숨을 건지게 되었그던. 그 후로 하회에서는 이 바우를 돌고지바우라 그래. 기 좋아해서 매구(풍물)를 자주 치지.예전에는 서낭대 싸움도 자주 있었는데 사천 서낭과 이웃의 묘곡 서낭이 주로 많이 싸웠어. 어느 해인가 싸움 도중에 묘곡 서낭대가 부러져 지금도 묘곡에는 서낭대가 없어.

도산면 단천리 / 1970 / 이원윤 , 남 , 66


도깨비가 끌어올린 건들바위

옛날에 청량산의 한 중이 절을 질라꼬 절터를 찾아 댕기다가 보니 절벽 우에 좋은 터가 있는 게 눈에 띄거든. 근데 가만히 보니, 큰 바우가 있어서 그 바우를 내리지 않으면 절을 지을 수 없게 되어 있어. 마침 이 중이 인근에서 알아주는 장사라서, 이 중이 힘을 써서 그 큰 바우를 수십 길 밑으로 굴려 버렸어요. 그리고 난 후 이튿날 절을 지으려고 가보니, 아! 어제 굴린 큰 바우가 맹 지자리에(또 제자리에) 놓여 있그던. 그래서 이 중이 하는 말이 내가 어제 분명히 힘을 써서 바우를 굴레 내렸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옆을 자세히 보니 절벽 밑에서부터 바우 있는 데까지 자국이 있는게라. 가만히 보니 그 큰돌을 가마니에 깔아가 끌어올린 자국이 분명하그던. 아하 토째비(도깨비)가 이 큰돌을 다시 지자리에 갖다 났는게따(놓아든 것 같다). 도깨비가 이렇게 힘을 써가 갔다 놓은 것을 보면 필경 연유가 있겠다. 그래 생각이 들어, 고마 중이 절 세울 걸 포기했어요. 요새도 이 바우가 있는데, 그때 도깨비가 가마니를 이용해서 올려 두어서 약간만 밀어도 건들건들 거리기만 하고 절벽으로 널찌지는 안해요(떨어지지는 않아요). 그래 그 후로 이 바우를 건들바우라 그래.

도산면 토계동 / 1968 / 이의구 , 남 , 35


덤산의구멍

저 선어대 건너편 남선 신석에 말이래. 그 덤산이 안있는가, 약수 나오는 약산, 고 아래 가면 구멍이 요래 있는데, 보기에 꼭 개 음부같이 생겼어. 예전에, 마뜰에서 보면 거가 똑바로 보이거든. 그래서 말하기를 그래 마뜰 처녀들이 음녀가 많이 난다고 그래요. 안동시 옥정동 / 1981 / 김대현 , 남 , 70


임동면 마령리 상당나무

과거시험 점치는 탕건바위 도연폭포 아래쪽에 가면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 돌이 하나 있어. 이전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이 터를 지날 때는, 꼭 바우 앞에서, 올해 과거에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를 점을 쳐요. 바우 앞길에 서서, 왼손으로 돌을 시개(세개)를 던지는데, 한 개라도 바우 위에 걸치면(얹히면) 급제하는 것이고 안 걸치면 허방이래(낙방하는 것이다). 그래 인제 과거에 급제하면 탕건을 쓰그든, 그래가 이 바우를 탕건바우라 그래. 임하면 천전동 / 1968 / 김구익 , 남 , 43


과거시험 점치는 탕건바위

도연폭포 아래쪽에 가면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 돌이 하나 있어. 이전에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이 터를 지날 때는, 꼭 바우 앞에서, 올해 과거에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를 점을 쳐요. 바우 앞길에 서서, 왼손으로 돌을 시개(세개)를 던지는데, 한 개라도 바우 위에 걸치면(얹히면) 급제하는 것이고 안 걸치면 허방이래(낙방하는 것이다). 그래 인제 과거에 급제하면 탕건을 쓰그든, 그래가 이 바우를 탕건바우라 그래.

임하면 천전동 / 1968 / 김구익 , 남 , 43


여자가 만든 여자못(女子池)

옛날에는 산비탈에만 농사를 짓고 강가에는 농사를 짓지 못했거든. 그래서 못 근처에 농사를 질라꼬 여남은 번(여러번) 시도를 했는데, 농사를 지으려면 둑을 쌓아야 홍수가 안 나거든, 그래서 둑을 만들어야 되는데. 근데 이게 막으면 터지고, 막으면 터지고 그그던.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고민을 한참 하는데. 한 40대쯤 되는 여자가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이 그렇게 둑을 백 번 막아봐야 백 번 헛고생 하는 거시더. 하그던. 그래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거 여자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 막 욕을 했어요. 근데 그 중에서도 저리 말하는 게 무슨 연유가 있을 게라고. 그래서 연유를 물어보자. 이렇게 중론이 모아져서 그 여자에게 물어보니, 여자가 하는 말이 서쪽으로 물이 나가는 거랑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거든. 그래 가만히 이치를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 같거든. 그래서 그 여자에게 총지휘를 맡기고 일을 시작했어. 그랬더니 참말로 둑이 막아졌어. 그후로 그 못물로 농사를 잘 지었어. 풍천면 중리 / 1998 / 남종진 , 남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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