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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청산에 살어리랏다!
2020년 4월 섬학교는 <느림의 섬 청산도>
프레시안 기사 입력 2020.02.03. 23:28:04 최종수정 2020.05.08. 01:02:08
슬로시티 청산도는 느림을 지향하는 섬이지만 청산도를 찾는 많은 이들이 느림을 즐기지 못하고 쫓기듯 길을 가기 바쁩니다. 자동차를 타고 와서 포인트만 찍고 서둘러 떠나는 이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걷기 위해 섬에 온 이들마저도 코스를 완주하는 것에만 급급하기 일쑤입니다. 느리게 가기 위해 탈것을 버리고 두발로 걷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쁘게만 걷는다면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겠지요.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청산도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합니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합니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합니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무슨 문제겠습니까.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입니다.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던가요. 3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91강은 느린 섬 청산도 기행입니다. 3월 7(토)-8(일)일, 1박2일 일정으로 떠납니다.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남쪽 섬으로 봄 마중. 15km의 봄길을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걸으실 분들만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20년 3월의 걷는 섬 <청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청산항, 한 남자 이야기
청산항 간이 어판장 좌판에서 초면의 나그네와 한 사내가 돌멍게 한 접시를 놓고 소주를 마십니다. 청산항에서 발이 묶인 길손들이 각자 술 한 잔 하러 나왔다가 합석했습니다. 사내는 목포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일합니다. 사내는 청산도에 전기히터를 설치하러 왔다가 배를 놓쳤습니다. 목포에 오기 전까지 사내는 부산에 살았다 합니다. 낯선 목포 땅에 살게 된 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내는 경북 예천이 고향이지만 조실부모하고 부산으로 이주해 동생들을 키웠습니다. 열한 살 때 전포동에서 재봉 일을 시작했습니다. 열여덟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멸치잡이 배를 탔습니다. ‘조직’ 생활도 했다 합니다. 뱃일을 그만두고 놀던 때였습니다.
사내는 여자친구와 부산 백악관 나이트클럽엘 갔다가 ‘스카웃’ 됐습니다. 옆 좌석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자꾸 여자친구에게 ‘집적’거렸던 모양입니다. 일행은 모두 7명. 세 번쯤 경고했지만 숫자가 많은 취객들 눈에 사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7명과 붙었습니다. 셋을 쓰러뜨린 뒤 나중에는 맥주병을 깨 들고 위협하니 그들도 더 이상 덤비지 못했다지요. 싸움이 수습되자 나이트클럽 매니저가 사내를 불렀습니다. 대뜸 “너 내일부터 일해라. 안 하면 죽는다.”
그 나이트클럽은 부산지역 최대 폭력조직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하다가 한 달 뒤에 정식 조직원이 됐습니다. 또 한 달이 지난 후 조직의 명령으로 경쟁 조직의 조직원을 ‘담그고’ 감옥에 갔습니다. 초범이라 1년 남짓 살았습니다. 출소 뒤에도 5년 쯤 더 조직생활을 했습니다. 인천으로 파견 근무를 가기도 했습니다. 인천 옛 터미널 근처의 나이트클럽을 맡아서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부산으로 복귀했습니다. 부산 남포동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했습니다. 그 사이 번 돈으로 여동생 둘을 결혼시켰습니다.
여자의 권유로 사내는 조직생활을 정리하고 목포까지 왔습니다. 목포는 여자의 고향이었습니다. 둘이 3년을 살았다 합니다. 그러다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가진 돈과 집 모두를 여자에게 남겨주고 몸만 나왔습니다. 그가 집을 나온 일주일 뒤부터 여자는 그 집에서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영영 떠났지만 사내는 목포에 정이 들어 목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청산도 도청항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나그네와 사내는 쓴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내내 먹먹합니다. 이제 또 각자 가던 길을 가겠지요.
고등어로 퇴비 만들고 홍등가로 술렁이던 청산도 파시
청산면 소재지인 도청리 물량장에는 어민들 몇이 다시마 양식 준비에 한창입니다. 슬로길의 시작은 도청리 선창가입니다. 이를 미항길이라 이름합니다. 어민들은 미역 양식을 했던 밧줄을 건져내 손질한 뒤 거기에 다시 다시마 종묘를 붙입니다. 양식되는 청산도의 미역과 다시마는 대부분 전복의 밥으로 쓰입니다. 자연산에 목마른 도시인들은 전복 또한 자연산이 최고인 줄 알고 양식보다 몇 배의 높은 가격에 자연산 전복을 사먹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양식전복도 자연산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공 사료가 아니라 미역, 다시마 등의 해초만 먹고 바다에서 크기 때문이지요. 먹이가 같고 같은 바다에서 자라는데 자연산과 양식이 크게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실상 패류는 자연산이냐 양식이냐가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얼마나 깨끗한 물에서 자랐는지가 관건입니다. 오염된 물에서 자랐다면 자연산이라 해서 좋을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입니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습니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영광 ‘파시평(波市坪)’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성어기가 되면 고기잡이배들이 조업하는 어장에 상선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선들은 생선을 팔고 상선들은 식량이나 땔감 따위를 팔았습니다.
어선과 상선들이 뒤엉켜 서로 사고파는 해상시장이 파시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고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차츰 어장 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갔습니다. 파시는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각종 기관까지 갖추어진 임시 촌락으로 발전했고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겸했습니다. 파시는 조기, 민어, 고등어, 삼치 등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회유(回游)성 어류들로 인해 번성했습니다. 어선들은 산란장과 먹이를 찾아 회유하는 어군(漁群)을 쫓아다녔고 상인들은 어선들을 쫓아가며 장사를 했습니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습니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텅빈 해수욕장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세를 주고 점포를 빌렸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집이었지요.
술을 파는 색시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합니다. 고등어 선단은 한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습니다. 운반선으로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면 일부는 바다에 버렸습니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 소금 간을 해서 간독에 저렸습니다. 그래도 남는 고등어들은 어비(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처럼 생선이 귀한 시절에 고등어 퇴비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요.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다시 맥을 이었습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습니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습니다.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청산도를 기점으로 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 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더 큰 섬인 완도 사람들도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채 3천 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만3천5백 명이나 됐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남획으로 삼치 또한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중반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습니다. 물고기떼가 사라지자 어선도, 사람도 함께 떠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청산도는 한적한 섬이 됐습니다. 청산도 근해에서는 더 이상 물고기들이 잡히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큰 배들이 제주도 부근 바다에서 싹쓸이해버리니 살아남아 청산도까지 올라오는 물고기도 드뭅니다. 잡는 어업은 초어단지를 이용한 문어잡이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지요.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갑니다.
청산도의 신전, 당리 당집
겨울에는 슬로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그네는 내내 혼자 청산도 길을 걷습니다. 꽃피는 시절 청산도 길을 걷는 것도 좋겠지만 진정 고요하게 걷기에는 인적 드문 이 겨울보다 나은 때가 없습니다. 걷다보면 몸의 열기로 추위쯤이야 금방 물러갑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걷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청산도는 온전히 나만의 섬이 됩니다. 나는 오직 내면의 나와 동행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비로소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유야말로 걷기가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요. 들판에는 겨울의 한복판을 뚫고 돋아난 청보리가 푸르러 갑니다.
언덕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속의 그 구불구불한 길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시멘트로 포장돼 버린 서편제길이 아닙니다. 보리밭 가운데 서 있는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지요. 그것은 바로 당리 당집입니다.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 당리마을의 당집입니다. 하지만 <서편제> 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은 대문짝만하게 서 있는데 당집에 대한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신앙의 성소였고 섬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 신전이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만큼도 대접을 못 받고 있습니다.
저 당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지나는 사람들 또한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저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입니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습니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습니다.
청산면사무소 최민교 계장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합니다.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당집에는 한 장군 신뿐만 아니라 부인 신까지 영정을 그려 함께 모셨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영정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봄 농사를 위해 논을 태우던 당리마을 할머니로부터 그 사연을 듣습니다.
"한압씨 함마이가 있었는디 어떤 놈이 불 처질러 부렀소. 아주 기분 나뻐서 죽을 뻔 했어요. 교회 다닌 놈이 그랬소."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습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습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냅니다.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았었지만 지금은 이장님이 제주를 겸합니다. 제관은 제주인 이장님 포함 5명 정도가 맡는다 합니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는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일체 삼가야 합니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합니다. 많은 섬들을 다녔지만 청산도 당리 당처럼 아직껏 당제가 지내지는 곳은 희귀합니다. 참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닌가요.
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고려말 조선초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습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입니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습니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습니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청산도, 추자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성종 21년(1490)에도 청산도와 추자도에 왜구가 나타났습니다.
“추자도·청산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왜적이며….”
중종 27년 <실록> 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 추자도뿐만 아니라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합니다. 전란 전부터 서남해 섬들은 이미 왜구들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한철(1744-?)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합니다. <표해록>은 후일 대정 현감을 지내게 되는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청산도는 이웃 섬 신지도진에 부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섬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진진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 한 사람을 거느리고 어제 저녁 이 섬에 들어와 혹은 이정(理正)을 몽둥이로 때려 주식(酒食)을 억지로 달라 하여 먹으며 혹은 남자 광대를 족쳐서 전재(錢財)를 빼앗기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기까지 합니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왕화(王化)를 입은 육지의 땅들도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감시마저 미치지 못하는 섬은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섬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이 삶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통 또한 그러합니다. 섬으로, 산 속으로 숨는다 해서 삶의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
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습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절박한 농사의 유물이 또 있을까요. 구들장 논.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습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랑이 논입니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저 구들장 논입니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쌀값이 라면값보다 못한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청산도에서 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논은 섬사람들을 먹이고 입힙니다. 청산도 겨울 들녘에는 볏단과 두엄더미들이 움막처럼 쌓였습니다. 두엄, 저 냄새 나는 똥거름을 쌀과 마늘, 유자와 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땅입니다. 오로지 땅만이 똥냄새를 향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지녔습니다. 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소입니다. 육체를 살찌우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생명의 발전소.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입니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있는 마을들입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습니다. 오래된 전통은 싸구려 근대화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혀 버렸습니다. 새마을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 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갑니다. 고흥 득량만의 섬들에서 나그네는 썩어 허물어져가는 시멘트 담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백 년 세월에도 여전히 견고하기만 합니다. 바람이 거센 섬의 돌담은 육지 내륙과 달리 흙을 넣지 않고 돌만으로 쌓은 강담입니다. 섬이나 해안가 집들은 모두 이런 강담이지요. 이 돌담은 바람을 차단하는 바람의 방어벽이 아닙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분산, 통과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습니다. 허술해 보이는 돌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고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 협정의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입니다.
초분, 바람의 장례
노인 한 분이 천변의 논가에서 작년 여름 물난리에 무너진 축대를 다시 쌓고 있습니다. 겨울 청산도의 논에는 온통 마늘이 심어져 있습니다. 나그네의 눈에는 다 같은 마늘처럼 보이는데 노인은 논과 밭에 심는 마늘의 종자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청산도의 밭에는 주로 대만산 마늘을 심습니다. 하지만 논에는 대부분 ‘멍청이 마늘’을 심습니다. 멍청이는 욕이 아닙니다. 스페인산 마늘은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해서 섬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입니다.
오늘, 섬의 땅 절반은 사자의 영토입니다. 밭에도 산 중턱에도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무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저 묘의 주인 중 누군가는 표류해 온 제주 유생 장한철에게 밥과 술을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요.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습니다.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습니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습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습니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습니다.
지붕에는 솔가지가 드문드문 얹혀 있습니다. 솔가지를 꺾어다 올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잘 썩지 않는 솔잎의 기운으로 부정한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까요.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이 선산의 어느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입니다. 솔바람에 솔숲이 일렁입니다. 서로 멀지 않은 완도의 섬들도 초분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지요.
초분을 쓰는 것은 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론 소나 개의 산달에 초상집을 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그네의 고향 섬 보길도에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해에 초상이 나면 초분을 썼습니다. 자녀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놨는데 초상이 나는 경우가 그런 때입니다. 자식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초상이 나도 초분을 썼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합니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치르는 것이지요.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르지요.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합니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초분은 풍장입니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이중 장례 풍습이지요. 하지만 축대를 쌓는 노인이 들려주는 청산도의 풍장은 그것과 조금 다른 듯합니다.
“바람에 말라 수분이 쪽 빠지면 마른 장작 같이 되는디, 그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어라우.”
여름철 습기 많은 섬에서 방부 처리도 하지 않은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노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풍화되지 않고 미이라처럼 육신이 마르는, 그런 경우도 더러 있었던 것일까요, 이 섬에서는.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습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태워 매장되기도 합니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 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습니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합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요. 겨울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습니다. 청산도에 다시 어둠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청산도(靑山島)
사시사철 푸르고 아름다운 섬
요약 :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59′, 북위 34°08′에 위치하며 면적 33.28km2, 해안선 길이 42km, 최고점 385m(매봉산), 인구는 가구 1,177가구 2,271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로도 불렀고 ‘선원도’라고도 했다고 한다.
‘청산도(靑山島)’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렸다.
면적 33.28km2, 해안선 길이 42km로 섬 한가운데에는 385m인 매봉산 이외에 대봉산(334m)·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소하천 연안을 따라 좁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중앙부와 서부 일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룬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5배 정도. 1,50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대부분이 노인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상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이들 왜구들의 침해 사실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 태종(1409년) 때부터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하였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에 이르다가 지리적 요충지로서 크게 부각되어 군대가 주둔했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가 촬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전라남도 끝머리에 위치한 완도에서도 남동쪽으로 약 20km 남짓 떨어진 청산도는 동쪽에 거문도, 서쪽에 소안도, 남쪽에는 여서도와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경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먼 길이지만, 한번 다녀온 후에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두고두고 남는 환상의 섬이다.
완도항에서 비릿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철부선을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나타나는 청산도길은 도청항을 기점으로 당리와 지리해수욕장으로 나뉜다. 어디서 출발해도 한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청산도의 나들목인 도청항. 도청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맨 처음 마을 이름을 ‘경치(鯨峙)’라 하였으나 이후 ‘불목리(佛目里)’라 하였고 조세를 받던 기관 국세미도봉청(國稅米都奉廳)이 설치되면서 ‘도청리(都廳里)’로 불려 오다가 폐진됨에 따라 도봉청(都奉廳)이 폐지되고 ‘도청리(道淸里)’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 도청리는 완도항에서 출발하여 목포로 향하는 여객선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항구이다. 해 뜰 무렵 도청리 선착장에 여객선이 들어오면 깨끗한 햇살을 받으며 물결을 가르고 힘차게 들어오면서 울려 대는 뱃고동 소리와 여객선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유행가는 너무나 구성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목포에서 완도로 가기 위해 여객선이 들어올 때면 황금빛 노을 속에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고, 유행가 〈처녀 뱃사공〉는 섬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하며 그 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로서는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뿐만 아니라 길을 가던 동네 사람들 모두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내일은 무슨 노래가 흘러나올까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청산도 중심의 도청항은 주변 해역의 어장 조건이 비교적 양호하여 과거부터 수산업이 크게 발달되었다.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삼치와 고등어 파시로 인해 전국적으로 이름난 어항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1968년 청산도를 어업 전진 기지로 지정하고 연근해 조업에 대한 보급 지원 유통 기지가 되었다. 면 소재지인 도청리 항구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유명한 곳으로 여름 성어기에는 사방에서 건착선 수십 척이 몰려와 호황을 이루고 전국에서 고등어가 제일 많이 잡히는 섬이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 들어서면서 어업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외지에서까지 몰려든 어선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불법 저인망 어장이 성행하면서 점차 바다가 황폐해져 갔다. 지금 청산도 근해의 어선 어업은 이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훨씬 못하지만 지금도 철에 따라 멸치·삼치·갈치 어장이 형성되고 소라·전복·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도청리에서 바로 옆에 있는 당리. 일반인에게 영화 〈서편제〉의 무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청산도의 중심지이자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당리는 항구가 있는 면 소재지 도청리에서 약 1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도청리에서 청산로를 따라 달리다가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안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언덕에 장독대가 몇 개 놓여 있는 공간이 보인다. 이곳이 당리 언덕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숲 속에 청기와로 된 당집이 있다. 그 문 앞에는 불망비가 있고 그 옆에 초가집 4채가 있는 촬영장이 나타난다. 이곳이 〈서편제〉 촬영장이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돌로 만든 담장, 울퉁불퉁한 마을 길,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들이 한번 찾아가면 오래도록 머물고 싶게 하는 고향 같은 섬이다.
여기서 바라보면 조망이 최고다. 도청항도 보이고 맞은편 도락리 포구도 발아래다. 해넘이 무렵에는 도락포 앞바다에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낙조(혹은 일몰)의 모습이 아름답다. 고향의 정취가 배어 나오는 현대인들의 안식처 도락포 마을 앞에는 또 그 유명한 ‘구들장 논’이 한눈에 보인다.
청산도 삶의 팍팍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다랑논보다 더 희귀한 구들장 논. ‘구들장 논’이란 산비탈이나 구릉에 마치 구들장을 놓듯 돌을 쌓아 먼저 바닥을 만든 뒤, 그 위에다 다시 흙을 부어 다져서 논을 일군 것으로, 청산도에는 돌이 많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한 방편으로 돌을 깔았다. 그러다 보니 흙이 기름지지 않아 매년 퇴비를 해야 했다. 지금도 그리 넉넉지 않지만 청산도에는 항상 쌀이 모자랐다. 돌이 너무 많아 농사를 부칠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뭍으로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만 먹고 가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을까.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한 섬사람의 노고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대봉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천수답 구들장을 논 흔적이 있었다니······.
이곳을 중심으로 길은 다양하게 나 있다. 주변 밭들은 담벼락을 한 것이 특징이다. 직진 방향을 택하면 또 다른 촬영장이 나온다.
몇 년 전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장소로 일부러 심어 놓았다는 탐스러운 유채꽃 너머로 잘 지어 놓은 유럽식 전원주택 한 채가 있는데 전남에서 수억 원의 돈을 들여 지어 준 세트장이다. ‘청산로 136번지’에 들어선 이 세트장 돌담에는 이 드라마에 출연한 4명의 탤런트 사진이 촬영 배경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뒤로 화장실 겸 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세트장 앞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는데 여기가 사진찍기 좋은 위치라고 한다. 청산도에서 도청항 밑으로 펼쳐지는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다. 가르마를 여러 갈래로 타 놓은 듯한 구불구불한 청산도 길과 마을, 유채꽃, 바다, 고깃배, 산 등이 어우러진 이 모습이 바로 청산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트장 앞에서 직진하면 화랑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옛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인정받아 2007년 12월 1일 담양 창평, 장흥 유치, 신안 증도 등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에 지정되었다. 재작년에는 슬로길로 수천 명이 청산도를 찾았고 때 묻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맑은 물과 푸른 바다를 보며 환호했다.
이 주위에도 묘가 한 기 보인다. 입구에 나무 막대기로 막아 놓고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 두었다. 이곳 역시 제주도처럼 나무 막대기를 기둥에 걸쳐 놓은 곳을 수시로 본다. 그리고 이 당리 언덕을 보면 몇 기의 묘지가 보인다. 사실 이곳 청산도는 초분으로 유명한 곳이다. 청산도에는 모두 3기의 초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리에 있던 초분이 이장을 한 상태여서 지금은 도청리에 있는 초분을 합해 2기만이 남아 있다. ‘초분’이란 주검을 묘지에 묻기 전에 목관이나 대발쌈에 넣어 야산에 안치한 뒤, 짚으로 이엉을 덮어 비바람을 막아 주는 임시 무덤으로,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매장 풍습이다. 이렇게 임시 무덤을 쓰고 나면 1~2년 뒤에 주검이 썩는데 그때 뼈만 추려 다시 묘지에 이장하는 것이다.
당리 마을 입구, 마을 복지 회관 맞은편 밭 중간에 성벽이 조성되어 있다. 양쪽에 돌담을 쌓고 그 사이에 황토를 쌓아 두었다. 바로 청산도진성(당리진)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당리진 터는 청산도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좋은 위치이기도 하다.
청산도진(靑山島鎭)은 1866년(고종 3) 이곳에 당리진(堂里鎭, 일명 靑山鎭)이 설치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진이 설치된 이후 이곳은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때 청산도진은 강진, 해남, 완도 일원을 관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규모가 큰 진지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후 청산도진은 1895년(고종 32)에 가리포진과 함께 폐진되었다.
마을 가운데 위치한 경로 복지 회관은 건물 자체가 깨끗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마을은 골목길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골목길 역시 돌담길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들어가는 마을 길이다. 높이는 어른 키 높이 정도로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곳을 몇 발짝 지나면 여 경로당과 당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그 앞은 창문을 낸 성벽 같은 돌담이 있는데 이 돌담은 단순한 담이 아닌 건물이다. 높이가 2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이 주위에는 대부분이 창문이 있는 돌담길이다. 물론 방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창고이고 집도 거의 슬레이트 지붕들이다.
당리 사무소 근처에 허름한 초가가 있다. 바로 〈서편제〉의 주인공들인 유봉이 송화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영화 주인공들의 복장을 한 밀랍 인형을 설치해 촬영 당시의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읍리를 지날 때 오른쪽으로 문화재 표지판과 함께 고인돌이 보인다. ‘독배기’라 부르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선사 시대 석기 유적이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남은 고인돌이 2개의 무리에 23기라고 하는데,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3기의 큰 고인돌이다. 이것이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사람이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고인돌 옆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 높이는 1m 정도, 폭은 약 80cm에 이른다. 자연 화강암인 이 돌은 현재 문화재 자료 제116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이 하마비는 과거 주위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하마비의 뒷면에는 마애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민속 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진 형태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하마비를 선사 시대 때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선돌’로 보기도 한다.
읍리에서 신흥리로 가는 길목에 ‘범바위’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범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청산로’에서 벗어나 섬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보인다는 보적산 8부 능선 가파른 곳에 있는 ‘범바위’는 높이 155m의 작은 봉우리이다. 어미 범이 뒤따라오는 새끼 범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어흥’ 하고 포효했더니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 울음소리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가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범바위가 있는 권덕리는 처음에는 읍리에 속했으며 범바위가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읍리에서 분리되면서 ‘권덕리’라 이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쪽 바닷가 마을인 신흥리는 지리 마을의 정반대 쪽이다. 도로에서 왼쪽은 억새들이 가득한 매립지이자 물을 막아 놓은 저수지다. 이곳은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한 포구로 보인다. 물양장에는 전복 양식장 도구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사리 때 간조가 되어야 바로 앞의 목섬까지 약 2km에 이르는 기다란 모래밭이 생겨난다. 밀물이 들면 백사장이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지만 썰물 때에는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밭을 걸으며 해초와 조개를 줍는 재미를 맛볼 수 있으며, 바다의 해돋이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바로 옆에 있는 항구는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 무인도인데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어 오고 갈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아마도 풍랑의 흐름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 언덕길을 넘으면 전망대로 이곳에서 보면 덕우도, 황제도, 거문도까지 다가선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섬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해 뜨는 마을’ 진산리가 나타난다. 이곳이 지리와 신흥리 중간 지점이다. 진산리에는 갯돌이 깔린 몽돌해변이 600m 정도 펼쳐져 있다. 돌의 크기는 손톱만 한 것에서부터 어른 머리만 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 색깔도 검은색, 흰색, 노란색 등 가지가지다. 이곳의 갯돌밭은 청산도 바닷가에 있는 일곱 군데의 갯돌밭 가운데 가장 곱고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지리해수욕장이 낙조가 아름답다면, 진산리 갯돌밭은 아름다운 해돋이로 이름나 있다. 지리의 낙조처럼 이곳의 해돋이도 다도해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푸름 사이를 뚫고 솟아오르는 붉은 해의 모습은 지리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풍경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포구는 해변 왼쪽에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다.
방파제 뒤로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이 섬이 바로 해돋이 광경이 아름답고 경관이 좋아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노적도이다. 날씨가 좋으면 거문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진산리에 가기 위해서는 정규 노선 버스 대신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봉고차인 청산도 마을버스는 청산도에서 낙후된 마을을 운행하는 보조 버스다. 이런 작은 마을에는 배 시간에 맞춰 이렇듯 마을버스가 운행된다.
청산도의 가장 북쪽인 국화리. 국화리라는 명칭이 참 좋다.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 ‘굴거리’로 되었다가 완도군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진산리와 합하여 국산리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 국화가 많이 자생해 가을이면 들국화가 만발하여 국화리로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마을 뒤편으로는 까마귀 오산, 우측으로는 방마산, 어형 형태로 된 금산이 초변의 협곡으로 병풍 치듯 둘러싸여 호위하고 있다.
청산도에는 해수욕장이 세 군데 있다. 그 중에서 모래밭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은데 해수욕장으로서 자연조건이 좋고 사람들도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청산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 중의 하나인 지리해수욕장이다.
‘지리해수욕장’은 1km가 넘는 은빛 모래밭을 따라 수령 200년이 넘는 800여 그루의 해송이 쥘부채처럼 펼쳐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포 해변에 인력으로 둑을 쌓아서 해수를 막고 소나무를 식목하여 현재와 같은 방풍림이 육성되었다. 또한 해수욕장 오른쪽으로 산을 슬쩍 돌아가면 작은 돌에서부터 호박만 한 돌까지 크고 작은 자갈이 깔려 있는 자갈밭이 있다. 청산도에서 낙조 하면 지리해수욕장을 꼽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해가 질 무렵이면 온통 붉게 물든 다도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해송밭에서 왼쪽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길은 구불구불, 전형적인 농촌길이다. 좌우로 논밭이 있다. 남쪽으로 보이는 큰 산이 ‘대성산(385m)’이다. 그리고 시멘트 길바닥에는 방향 표시가 잘 되어 있고 곳곳에도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바로 ‘슬로길’ 표시다.
청산도 부속 도서인 장도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자 도청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池里) 마을’은 연혁에 의하면 처음 부락을 형성할 당시 마을 중앙에 큰 연못이 있어 ‘못김’이라고 칭하였으나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인 1789년에는 ‘지구미리’라 불렀으며 이후 1876년에는 ‘지리’라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 인조 말엽인 1640년경 김해 김씨가 강진에서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숙종 시대에는 지리의 중앙에 사정(활터)을 설치하여 궁장으로 무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이 ‘쏠지개’라 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변에 나무를 식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 마을 옆에 도로가에 큰 소나무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열녀각이 두 개 있다. 두 개 다 ‘김해 김씨 효열각’이다. 그런데 왼쪽 것은 비교적 큰 규모에 붉은 글씨로 도배하다시피 했고 오른쪽 것은 상대적으로 작고 검은 글씨로 도배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청산도를 네 번 방문하였지만 청산도는 과거의 시간 속에 정지해 있는 섬이었다. 청산도는 파시로 성시를 이루던 60년대 이후 ‘잊혀진 섬’이었다. 〈서편제〉 이후로 관광의 섬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그 이유는 청산도는 잔잔한 다도해의 다른 섬과는 달리, 홀로 떠 있는 섬이기 때문에 바람과 풍랑이 심해 예로부터 이곳은 기르는 양식과 거리가 멀다.
아직도 섬 곳곳에 초가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찾는 이들을 과거의 한때로 이끌고 간다. 아직도 초분이 있으며, 농사도 거의 손으로 짓는다. 그 흔한 경운기를 가진 집도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섬들은 바다를 논밭으로 여기며 살면서 무궁무진한 바다에서 산업을 낳는데 청산도는 바다보다는 논과 밭에서 벌어먹고 살아왔다. 이웃 섬인 소안이나 노화, 보길, 신지, 고금, 평일, 생일, 금당 같은 완도권 큰 섬들과는 생활양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청산도에는 24개 자연 부락이 있는데 해변 산중의 마을이 많다. 마을에 따라 산업 구조가 매우 다른데 청산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해변 산중이라 할 수 있는 신풍리, 부흥리, 양지리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국화리와 도락리는 멸치잡이와 미역 양식을 한다. 이 두 마을은 낭장망 멸치잡이가 한창이던 15년 전만 해도 마을 주민들 수입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고 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먼 섬인 청산도는 멸치잡이 외지 어선들로 인해 해마다 멸치 어획량이 감소하면서 삶이 피폐해져 갔고 벌이가 줄어들자 집집마다 농·수협에서 빚을 내어 생활해야 했다. 특히 최근에 청산 앞바다에 외지 멸치잡이 어선들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많이 몰리면서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멸치잡이를 포기하고 전복 양식업이나 낚시업으로 전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 이제 청산도는 수자원의 고갈로 최고 10,000여 명이 넘던 주민들 중에 상당수는 육지로 떠나고, 현재 거주하는 2,271명의 주민들 대부분은 노령화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남해의 많은 섬이 그렇듯 청산도 또한 어족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은 천혜의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여 1996년부터 관광 유료 낚시터로 지정되었다. 청산도는 섬 전체가 낚시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데, 지금도 발길 닿는 곳마다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사계절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다. 도미, 우럭, 농어가 잘 잡히는데 특히 감성돔이 지나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전국에서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룬다.
청산도는 아름다운 비경도 자랑거리이지만, 삭막한 도시 생활 속에서 그리워했던 고향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되찾아 준다. 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 모습이 그 자체로 남아 있어, 그야말로 섬 전체가 ‘살아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섬 곳곳에는 청산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초가집, 흙돌집, 돌담길, 구들장 논, 고인돌 등과 같은 옛 풍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흔한 돌이 가장 귀한 생활 방편이 된 것이다.
관광명소 : 〈서편제〉 촬영지, 지석묘와 하마비, 지리 해수욕장, 신흥리 해수욕장, 진산리 몽돌 해수욕장이 있다.
청산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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