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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회남자』의 갈석산으로 보는 고조선 위치
글쓴이 : 김봉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1. 들어가는 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중심지에 설치된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역사학계의 최대 쟁점이다. 그런데 위만조선 및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사료가 『회남자』에 나온다. 아래의 사료 A-1, A-2이다.
사료 A-1 : “동방의 경계는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 푸른 땅 수목의 벌판이다. 태호 구망이 다스리며, 12,000리 이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青土樹木之野. 太皥句芒之所司者, 萬二千里).” 『회남자』「시측훈」
사료 A-2 :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측훈」 -고유註-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위만조선(BC 194 ~ BC 108)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므로 위의 사료 A-1은 위만조선의 위치에 대한 생생한 1차 기록이다.
위 기록에 따르면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회남자』의 갈석산을 찾으면 조선의 서쪽 국경을 알 수 있다. 이 『회남자』의 갈석산에 대하여 윤내현을 비롯한 많은 재야사학자들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난하 하류 갈석산 주변을 위만조선 중심지이자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으로 보고 있다.
반면 강단사학자들은 갈석산을 난하 하류 갈석산으로 인정하면서도 위 사료에서 갈석산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서 조선이 있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갈석산 주변이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난 2015년 11월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에서 강단사학계 대표로 나온 윤용구(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부장)의 주장을 살펴보자.
“『회남자』하고 『한서』 ‘가연지’에 있다고 하는 ‘갈석산을 지나면 고조선이 있다’고 하는 기록을 말씀하셨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뒤를 이은 한사군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갈석산 근처에 있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고 계셔요. 사료를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갈석산에서 얼마만큼 지나서 조선이 있다는 기록은 없어요.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 있다는 막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 바로 옆에 있는지 한 정거장 다음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료는 이덕일 소장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많이 얘기되어 온 건데, 확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료라는 겁니다.”
<[마방] ‘한국 상고사-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_20151116’ 1시 26분 04초 ~ 1시 26분 44초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NrALsUDAtUM&feature=youtu.be)
윤용구 주장대로 위 『회남자』 기록이 조선과 한나라 낙랑군 위치를 확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료일까? 그렇지 않다. 위 사료가 나오는 문장의 전후를 살펴보면 갈석산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갈석산이 한나라와 고조선(위만조선)의 국경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2. 갈석산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에 위치하였다.
『회남자』에서는 이 세상을 다음과 같이 중앙, 동방, 서방, 남방, 북방의 다섯 방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중앙 : 곤륜산에서 동쪽 갈석산碣石山까지 12,000리의 땅
동방 : 갈석산에서 동쪽 부목지지榑木之地까지 12,000리의 땅
서방 : 곤륜산에서 서쪽으로 삼위국三危國까지 12,000리의 땅
남방 : 북호손에서 남쪽으로 위화委火까지 12,000리의 땅
북방 : 구택에서 북쪽으로 영정지곡令正之谷까지 12,000리의 땅
<그림 1> 『회남자』의 중앙,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앞의 사료 A-1은 동방을 설명한 구절이며, 다음 사료 B-1이 중앙을 설명한 구절이다. 중앙은 한나라 영토를 가리킨다. 중앙과 동방의 경계인 갈석산 위치는 중앙에 관한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사료 B-1 : “중앙의 경계는 곤륜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두 개의 항산을 넘어선다. 해와 달이 운행하는 길이며, 장강과 한수가 나온다. 뭇 백성들이 사는 들판으로 오곡이 풍성한 곳이다. 용문 황하와 제수가 서로 이어지고, 식양으로 홍수를 막은 땅이다. 동쪽으로 갈석에 이른다. 황제 후토가 다스리며, 12,000리 이다(中央之極, 自崑崙, 東絶兩恒山. 日月之所道, 江漢之所出. 衆民之野, 五榖之所宜. 龍門河濟相貫, 以息壤堙洪水之州. 東至於碣石. 黄帝后土之所司者, 萬二千里).” 『회남자』「시측훈」
사료 B-2 : “자自는 종從이다. 절絶은 ‘오히려 넘는다’는 뜻이다. 항산은 상산이다. 항산이 두 개라는 것은 듣지 못했다(自從也. 絶猶過也. 恒山常也. 言兩未聞).” 『회남자』「시측훈」 -고유註-
사료 B-1, B-2를 통하여
첫째, 중앙의 경계는 곤륜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두 개의 항산을 넘고, 동쪽으로 갈석산에 이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두 개의 항산’에 대하여 고유는 주석하기를 “항산은 상산이다. 항산이 두 개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인 항산恒山은 상산常山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 문제 유항(劉恒, 재위 BC 180 ~ BC 157)의 이름인 항恒을 피하여 뜻이 같은 상常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
당나라 시대 학자인 공영달은 『상서정의』에서 “곽박이 말하기를 항산은 다른 이름으로 상산인데, 한 문제의 이름을 피한 것이다(郭璞云恒山一名常山避漢文帝諱).”고 하였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에 따르면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 항산의 동쪽에 갈석산이 위치하였다.
둘째, 중앙의 땅은 “식양息壤으로 홍수를 막은 땅이다(以息壤堙洪水之州).”고 하였다. 식양이란 저절로 부풀어 산도 만들고 제방도 만드는 전설상의 흙이다. 『산해경』 『수경주』등 여러 사서에 따르면, 옛날 요순시절 중국에 대홍수가 났을 때 우禹의 아버지 곤鯀이 하늘나라 식양을 훔쳐서 제방을 쌓아 홍수를 다스렸는데, 하느님이 알고 노하여 식양을 거두어 버렸다. 결국 곤鯀은 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벌을 받아 귀양가서 죽었으며, 뒤를 이어 아들인 우禹가 홍수를 잘 다스려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곤鯀과 우禹가 홍수를 다스린 곳은 같은 지역이다. 우禹가 홍수를 다스린 지역은 『서경』에 사료 C-1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동쪽으로 항산과 갈석산까지이다. 『회남자』의 사료 B-1에 나오는 항산과 갈석산은 『서경』의 사료 C-1에 나오는 항산과 갈석산과 동일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경』(사료 C-1)의 갈석산을 통하여 『회남자』(사료 B-1)의 갈석산을 찾을 수 있다.
사료 C-1 : “견산에서 물을 인도하여 기산을 거쳐 형산에 이르며, 황하를 넘어 호구와 뇌수로부터 태악에 이르며, 저주와 석성으로부터 왕옥에 이르며, 태행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導岍及岐于荊山, 逾于河 ; 壺口雷首至于太岳 ; 底柱析城至于王屋 ; 太行恒山至于碣石, 入于海).”
『서경』하서, 우공 제84장
사료 C-2 : “『사기집해』 : 공안국이 말하기를 ‘이 두 산(태행산과 항산)은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에 접하여 창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사기색은』 :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 서북쪽에 있다. 상산은 항산으로 상산군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集解孔安國曰:「此二山連延,東北接碣石,而入于滄海」. 索隱太行山在河內山陽縣西北. 常山,恆山是也,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 『사기』권2, 하본기 제2
사료 C-3 : “안사고가 말하였기를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의 서북쪽에 있다. 항산은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두 산이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과 접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師古曰:「太行山在河內山陽西北. 恆山在上曲陽西北. 言二山連延, 東北接碣石而入于海).” 『한서』권28 상, 지리지 제8 상
사료 C-1은 하나라(기원전 2070?~기원전 1600?) 우임금이 산맥을 따라 황하를 치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견산에서 시작하여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태행산과 항산을 거쳐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서경』에 기록된 사료 C-1의 내용은 『사기』「하본기」와 『한서』「지리지」에도 각각 실려 있는데, 태행산과 항산 및 갈석산에 대하여 사료 C-2, C-3와 같은 자세한 주석이 붙어있다. 이 주석들을 통하여 갈석산의 위치를 찾아보자.
사료 C-2, C-3에 의하면 ‘두 산(태행산과 항산)이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과 접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으므로 항산의 위치를 찾으면 갈석산의 위치는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런데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북악을 현 중국 산서성 혼원현에 위치한 항산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 만력 14년(1586)에 항산의 명칭이 대무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그림 2> 참조).
<그림 2> 항산(대무산)과 갈석산(백석산)의 위치
『회남자』(사료 A-1)와 『서경』(사료 C-1)에 나오는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라는 것은 아래 『수경주』(사료 D-1)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료 D-1 : “『상서우공』은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산해경』은 ‘갈석산에서 승수가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옛날 갈석이 있었다( 『尚書禹貢』 曰:夾右碣石入于河. 『山海經』 曰:碣石之山, 繩水出焉. 東流注于河. 河之入海, 舊在碣石).” 『수경주』 권5, 하수
사료 D-1에 따르면 ‘갈석산에서 승수가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따라서 갈석산은 황하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산해경』‘북산경’은 북쪽으로 가면서 황하로 들어가는 강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갈석산에서 나온 승수가 가장 북쪽에서 마지막으로 황하로 들어가는 강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도 갈석산이 백석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회남자』의 갈석산으로 보는 고조선 위치
지금까지 『회남자』(사료 A-1, B-1)와 『서경』(사료 C-1)에 나오는 갈석산 기록을 통하여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회남자』(사료 A-1, A-2)의 기록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구체적인 위치를 살펴보자.
사료 A-1 : “동방의 경계는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 푸른 땅 수목의 벌판이다. 태호 구망이 다스리며, 12,000리 이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青土樹木之野. 太皥句芒之所司者, 萬二千里).” 『회남자』「시측훈」
사료 A-2 :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측훈」 -고유註-
사료 A-1에 따르면 갈석산으로부터 위만조선이 시작된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동쪽에 대인국이 있고 그 동쪽에 ‘부목의 땅’이 있다. 위만조선, 대인국, 부목의 땅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자(아래의 <그림 3> 참조).
(1) 위만조선
사료 E-1 : “이때는 마침 효혜·고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만滿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가 되었다(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사기』 권115, 조선열전 제55
위 『사기』「조선열전」(사료 E-1)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전성기 때 강역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사기』「조선열전」을 토대로 위만조선의 강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북경지역의 조백하를 기준으로 서쪽 하북성 지역이다.
② 진번: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진번은 조백하를 기준으로 동쪽 하북성 지역이다.
③ 임둔: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 일대이다. 한 무제 원삭 원년(BC 128) 동이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④ 옥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초기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현 요하 서쪽의 요령성 지역이다. 옥저는 단단대령 동쪽에 있었는데, 단단대령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이다.
⑤ 니계: 『사기』「조선열전」 본문에서 조선의 항복한 장상들 중에 니계상尼谿相 참이 나오는데, 니계상尼谿相은 니계 지역 책임자이다. 이를 통하여 니계尼谿 지역이 위만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기』「공자세가」에서 제나라 경공(BC 547~490)이 ‘장차 공자를 니계 땅에 봉하려고 하였다(将欲以尼谿田封孔子)’는 구절이 있다. 니계 지역은 춘추시대 제나라 땅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산동성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강역은 조선, 진번, 임둔, 옥저, 니계의 다섯 나라 땅이다. 현 중국 하북성 전체와 요령성 서부 및 산동성 동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사방 2천여 리의 땅이다.(『고조선으로 가는 길> 347~349쪽 참조)
<그림 3>『회남자』에 기록된 갈석산과 위만조선, 대인국, 부목의 땅
(2) 대인국
『회남자』(사료 A-1)에 따르면 위만조선 동쪽에는 대인국이 있었다. 이 대인국은 어떠한 나라인지 살펴보자.
사료 F-1 : “『위략』에 이르기를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魏略曰: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삼국지』 위서 30, 동이전, 한
사료 F-2 : “과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初, 朝鮮王準為衛滿所破, 乃將其餘眾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為韓王. 準後滅絕, 馬韓人復自立為辰王).”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삼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사료 F-1)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동쪽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다. 이 진국辰國은 『후한서』(사료 F-2)에서 보듯이 마한을 가리키며,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당시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 『회남자』(사료 A-1)에 나오는 대인국은 진국辰國(마한)을 가리킨다.
(3) 부목榑木의 땅
부목榑木은 해가 돋는 곳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목神木이다. ‘부목榑木의 땅’은 일본을 가리킨다. 『회남자』(사료 A-1)에서 갈석산으로부터 ‘부목의 땅’까지 12,000리라고 하였는데, 『후한서』(사료 G-1)에서도 다음과 같이 낙랑군으로부터 일본까지의 거리를 12,000리로 기록하고 있다.
사료 G-1 : “왜는 한국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산과 섬들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무릇 100여국이다.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한 후로 역관을 보내 한나라와 통한 나라가 30여국이다. 나라마다 왕을 칭하였으며, 대를 이어 다스렸다. 대왜왕은 사마대국에 살며, 낙랑군과는 12,000리 떨어져 있다(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왜
4. 마무리 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회남자』(사료 A-1, B-1)는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가 갈석산이며, 그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갈석산 동쪽으로 사방 수천 리의 위만조선 영토가 있고, 그 동쪽으로 대인국(진국, 마한)이 있으며, 또 그 동쪽에 ‘부목의 땅’ 일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내현을 비롯한 많은 재야사학자들은 『회남자』(사료 A-1)의 갈석산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회남자』(사료 B-1)와 『서경』(사료 C-1)에 의하면 갈석산은 중국의 북악인 항산과 인접한 산으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이다. 그리고 갈석산에서 강물이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난하 하류 갈석산은 이런 조건들과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다.
또 『사기』「조선열전」(사료 E-1)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전성기 때 강역이 사방 수천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회남자』(사료 A-1)의 갈석산을 난하 하류 갈석산으로 비정하면, 그 동쪽의 위만조선 강역은 사방 일천리도 나오기 어렵다. 난하 하류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다(필자의 저서 『고조선으로 가는 길』 35쪽 ~ 85쪽 참조).
윤용구 등 강단사학계는 『회남자』(사료 A-1)의 사료가 갈석산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서 조선이 있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갈석산 주변이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회남자』의 사료 A-1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인 사료 B-2와 함께 보면, 갈석산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끝>
첫댓글 무척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요^^ 사료의 모든 거리가 12,000리로 나오는군요?
매우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백리는 과연 어느정도의 거리일까요?
40km?
35km?
30km?
모두 아닙니다.
백리는 사람이 해가 지기 전에 걸을수있는 최대한의 거리입니다. 사람마다, 계절따라, 길 사정이 제각각이니 km로 나타낼수 없는 거리죠.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면... 남쪽끝에서 북쪽끝가지 한 달만에 도달할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지... 1,200km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현대과학으로 측정하면 1,200km에 가깝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4km가 10리다라는 주장은 오류에 가까운 주장이라는 겁니다.
일례를 들면... 어른들께 "여기서 xx마을까지 거리가 얼마나 돼요?" 라고 물으면... "내가 언제, 아침밥 먹고 나섰는데, 점심때가 안되서 도착했으니 30리쯤 될거다."
이게 고대 거리를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설명일 것입니다.
제 얘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드리지요.
사리원, 조치원 등 '원'자가 들어간 지명은 예전 역사가 있는 곳이지요.
그곳의 기준점이 경복궁이었으니까... 경복궁에서부터 홍제원, 퇴계원등의 거리를 각각 확인해보면... 약간씩 다른 거리가 나올겁니다. 그게 도로 사정에따라 역사를 설치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