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쁜 이유♡
과학자들의 연구로 푼 육아 궁금증… 황혼 육아
▲ 통계에 따르면 부부 2쌍 중 1쌍이 부모에게 양육 도움을 받는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며 ‘황혼육아’
를 진행 중인 조부모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할마할빠’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GettyImages
최근 까까(태명)는 애착 순위를 확정 지은 모양이다. 가족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있어도 선순위에게만 손을 뻗어 안아달라며 칭얼댄다. 다행인지 부동의 1순위는 엄마인 필자다. 2순위 자리를 두고 꽤나 다툼이 치열했지만, 결국 외할머니가 아빠를 제치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 ‘엄빠’가 모두 출근하며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애착 순위가 결정되지 않았나 싶다. 까까의 외할머니 사랑은 양방통행이다. 황혼육아를 진행 중인 필자의 어머니는 ‘너 키울 때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종종 하시기도 한다. 웃어넘겼던 이 말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것이 최근 증명됐다.
황혼육아의 진화적 이유 설명한 ‘할머니 가설’
여성은 약 200만 개의 난모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매달 난자를 하나씩 배출하며 월경을 거듭하다, 난모세포를 모두 소진하면 폐경에 이른다. 폐경은 자연계 최고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는 쪽으로 적응하는 것이 생물학 진화의 철칙이다. 그래서 유인원은 번식 임무를 완수하면 곧 죽는다. 반면, 인간 여성은 50세 전후로 폐경을 한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산다. 이렇게 폐경을 하는 동물은 인간과 고래가 유일하다.
인간과 같은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의 폐경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다.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번성시키는 방향으로 여성의 몸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 영장류와 인간의 평균 마지막 출산 및 사망 나이를 표시한 그래프. 영장류는 마지막 출산과
사망 시기가 유사하지만, 사람은 마지막 출산 후에도 오래 생존한다. ⓒPNAS
실제로 할머니의 역할은 자손의 번성에 도움이 됐다. 역사적으로 아동 사망률이 높은 시기에 할머니의 양육 참여는 사망률을 낮췄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 손주의 생존율이 높아진다고 분석한 과학 연구들도 많다. 더 나아가 유전적 친밀도가 높을수록 손주의 생존율이 더 높아진다는 결과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2009년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보고한 연구다. 손자는 외할머니와,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더욱 높다는 내용이다. 이들이 유전적으로 더 친밀하기 때문이다.
난자는 X염색체를 가지고, 정자는 X나 Y염색체 중 하나를 갖고 있다. 난자와 Y염색체 정자가 만나면 아들(XY)이 태어나고, X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만나면 딸(XX)이 태어난다. 아들은 어머니와 X염색체가 100% 동일하고, 딸은 부모로부터 X염색체를 물려받기 때문에 50% 동일하다.
3대 째로 가면 손녀는 부모로부터 X염색체를 반반씩 받은 손녀는 친할머니와 X염색체를 50% 공유하고, 외할머니와는 25% 공유한다. 손자는 어머니로부터만 X염색체를 받기 때문에 외할머니와 X염색체를 25% 공유한다. 하지만 손자와 친할머니는 전혀 관계가 없다. X염색체를 기준으로 유전적 친밀도를 정리하면 친할머니-손녀, 외할머니-손자‧손녀, 친할머니-손자의 순서다.
▲ X염색체를 기준으로 친할머니(PGM)와 손자는 50% 유전자를 공유한다.
외할머니(MGM)는 손자, 손녀 모두와 25% 유전자를 공유한다.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연구진은 17세기부터 현재까지 7개국 농촌 및 도시 지역 인구 데이터를 토대로 조부모의 양육 형태와 아동 생존율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전적 친밀도와 생존율이 일치했다.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가장 높았으며, 외할머니는 손자‧손녀 모두의 생존율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생존율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유전적 친밀도에 따른 차이는 없다고 보고한 연구도 있다. 2018년 핀란드 투르크대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Biology Letters)’에 게재한 연구다. 연구진은 아동 사망률이 높았던 18~19세기 핀란드의 인구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전적 친밀성 차이가 손자 생존율에 미치는 유의미한 영향을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손주 웃으면 할머니도 따라 웃는 뇌과학적 이유
종족 번식이라는 거창한 이야기까지 하지 않아도 할머니의 양육 참여가 주는 이점은 많다. 여러 학술연구들이 할머니의 양육 참여가 아이의 학업 성취도 향상, 사회성 증가, 신체 건강 등 다양한 지표에서 긍정적 효과를 보인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할머니와 손주의 특별한 유대감은 어디서 시작될까. 미국 에모리대 연구진은 할머니의 뇌에 있는 부모와 유사한, 때로는 부모보다 강력한 ‘양육회로’가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연구진은 3~12세의 손주가 있는 50명의 할머니를 모집하여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에게 손주 사진과 다른 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 변화를 살폈다. 참가자들은 손주의 사진을 볼 때 정서적 공감과 관련된 뇌 영역이 눈에 띄게 활성화됐다. 흥미롭게도 활성화되는 정도는 아빠보다 할머니가 더 컸다. 할머니의 뇌에는 손주의 감정에 잘 공감할 수 있는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는 지난 해 11월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실렸다.
▲ 양육 행동에 관여한다고 알려진 뇌 부위들.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연구를 이끈 제임스 릴링 미국 에모리대 교수는 “참가자들은 자신의 자녀를 키울 때에 비해 시간과 경제적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할머니로서의 삶을 만족해했다”며 “어쩌면 아이들은 부모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뇌까지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참가자들에게 자녀(아들, 딸, 며느리, 사위)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재밌는 결과가 나왔다. 손주를 볼 때 감정적 공감 영역이 활성화된 것과 달리 자녀의 사진을 볼 때는 인지적 공감과 관련된 영역이 더 활성화됐다.
이에 대해 릴링 교수는 “성인 자녀의 모습을 볼 땐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의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만, 손주를 볼 땐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려 한다는 것”이라며 “성인이 된 자녀는 더 이상 아이 같은 ‘귀여운 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동일한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추론했다. 어쩐지 까까에게 질투가 나기도 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