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16기인 전남 고흥 출신 장세동과,
육사 11기인 경북 대구 출신 전두환은 월남에서 처음 만났다.
부하 장세동이 부상을 입어 입원한 병원에
상급자인 전두환이 위문을 온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장세동은 전라도 출신이면서도
전두환을 중심으로 뭉쳐진 육사 출신 하나회 멤버가 되었고,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오른팔 격인 그림자가 되었다.
12월 12일이었다.
암호명 '생일 잔치' 라는 정승화 현역 계엄사령관이며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연행 작전이 시작되었다.
장세동 대령은 보안사 옆, 청와대 정문 앞의
경복궁 30경비단장이었다.
전두환 사람들이 속속 장세동 방으로 왔다.
정승화를 잡고, 군권(軍權)을 장악하기 위함이다.
게엄 정국에서 군권을 장악하면 정권(政權)은
거의 자동적으로 수중(手中)에 들어 오게 되는 것이
'국토가 협소한 미개 국가(國家)'의 통상적인 일이다.
우리나라는 땅도 좁다.
정치적으로도 박정희가 18년간 군사통치를 했던 터였다.
12.12사태는 전두환의 승리를 가져왔다.
정승화는 계급장을 떼이고 군복을 벗긴채
영어의 몸이 되었다.
이어서 5.17 정변이 나고, 5.18 광주 항쟁이 일어났다.
역사는 어두운 골짜기를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었다.
이 때, 광주 시민을 비롯한 일부 대학생들은 전두환을
전두환이라 하지 않고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악한인
절두한(切頭漢)이라는 어마어마한 닉네임을 붙여 주었다.
허수아비가 돼버린 대통령 최규하가 물러나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룻 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는 말이 있듯이
12월 12일 그 하룻 밤은 장세동과 전두환 사이에
'5공'이라는 만리장성을 쌓은 밤이다.
장세동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재임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과 중앙정부부장을 한다.
전두환이 빛이라면 장세동은 그림자였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지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신변과 정무(政務)까지 좌지우지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장세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장세동은 한술 더 떠 경호실장이란
대통령의 육신뿐만 아니라 심기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소위 심기경호론까지 들고 나온 인물이다.
이리하여 장세동은 전두환 권부에서
명실상부한 제2의 권력자가 되었고,
한 때 권부와 세간에서는 전두환을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
적임자로까지 부상한 일이 있다.
당시 후계자는 전두환 맘대로였다.
지명만 하면 집권 여당의 통과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전두환이 육사 동기 동창생인 노태우를 낙점하여,
대한민국 육사 11기생들은 대통령을 두 명 씩이나 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희한한 육군사관학교가 되었고,
후배 장세동은 야인(野人)이 된다.
그 때부터 대통령이 되어 한 때 물태우라 불리우던 노태우는
불태우가 되어 제일 먼저 불방망이를 장세동에게 던진다.
가만히 있을 장세동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링에 올라가 입을 열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
장세동의 일갈에 노태우는 물론 정가가 싸늘해 졌고,
국민들의 호기심이 장세동에게 집중되었다.
그런 장세동이 하이라이트를 받기는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였다.
청문회에 나온 장세동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한치의 비굴함도 없는 태도로 그 무서운 청문회 태풍과
맞섰다.
"아! 저 사람이 장세동이냐, 진짜 사람이다."
"의리가 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청문회에 선 장세동을 보고 시청자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서울특별시장 감이라는 말도 나왔다.
청문회는 장세동을 잡는 청문회가 아니라
완벽한 장세동의 이미지 상승 효과만 가져왔다.
노태우 캠프에서 던진 불덩이를 다시
청와대 노태우한테 받아 던진 꼴이 되었다.
그러나 날개를 잃은 새는 날지를 못한다.
권력을 잃은 권력자 역시 날개 잃은 가냘픈 새와 같다.
이승만이 그랬고, 장면이 그랬지 않던가.
장도영이 그랬고, 송요찬이 그랬다.
드디어 장세동은 법정에 선다. 첫 번째 구속이다.
흔히 일해재단 사건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퇴임 대통령 전두환의 기거지 건설 비리로 알려져 있다.
형집행 정지로 풀려 나온 장세동은 연희동 전두환 집으로
달려갔다.
2002년 16대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사퇴했다.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 왔습니다!"
감방에 갔다 온 것을 휴가 다녀 왔다며
거수 경례를 올리는 쾌남아 장세동이었다.
전두환은 그에게 큰 위로격려금을 주었고,
이 돈이 뒤에 또 화제가 된다.
보통 사람은 권력도 한 번 잡지 못하고,
감방도 한 번 가지 않고 일생을 마친다.
그런데 장세동 팔자에는 권력행과 감방행이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던지,
그 뒤에 줄줄이 네 번이나 감방에 간다.
용팔이사건 때는,
'용팔이 사건은 나 이상의 배우가 없다'는
법적 책임을 자기에서 끝내려는 명증언을 남겼고,
이 사건으로 장세동이 다시 구속되자
세인들은 그가 청문회와 법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기개에 감탄했던 터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구속되니 안되었다' 는
동정론을 펴는 사람도 있았다.
노태우가 대통령에서 퇴임하였다.
노태우의 지명으로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장세동이 살던 청와대로 갔다.
김영삼은 청와대에 들어가자마나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칼을 갈아 전두환과 노태우와 장세동의 목을 겨누었다.
전직 대통령 두 세 명을 한꺼번에 감방으로 보낼
시퍼런 칼이었다.
'역사바로세우기' 로 두 전직이 구속됐다.
장세동은 12.12사태와 5.18 사건, 그리고 비자금사건 등으로
다시 두 번을 더 감방에 간다.
네 번이나 구속된 것이다.
팔자 치고 참으로 모진 팔자였다.
그의 얼굴 어느 구석에 그런 모진 액운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액운의 연속이었다.
노태우의 경호실장도 감방에 갔다.
전직 두 대통령의 두 경호실장이 다 감방에 간 것이다.
이 때에 장세동과 이현우를 비교하는 세론(世論)이 일어났다.
장세동이 의리의 사나이로 추앙(?) 되었다면
이현우는 자기가 모시던 분의 비자금을 폭로한
비열한 인간으로 추락했다.
감방에서도 이현우가 나타나면 재소자들이 욕을 해대고
장세동이 나타나면 환성을 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장세동, 그는 의리에 관한한 이 시대에 둘도 없는
의리의 화신이다.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구속이라는 역경에서 남긴 피의자로서의 명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른을 구속하려들 경우에는,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한이 있더라도 막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어른의 뒤를 따라 가겠다.
-정승화에 대한 조사는 가혹하나 진실은 영원하다.
-12.12 전야의 군대는 척추의 마디마디가 빠져나와
제멋대로 소리가 나 몸과 머리가 따로 논 거와 같다.
-정승화는 기회주의자이다.
이번 재판 같은 역사의 오점은 어떤 큰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다.
중령을 고소 고발하는 총장은 참모총장이 아니라 소인배이다.
-장태완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에
나는 탱크 한 대 당 72발 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될뻔한 것은 사실이다.
감방을 네 번을 가건 골백번을 가건 '장세동의 소리'는
거침이 없다.
아마도 그에게는 아직도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소리를 또 들을 세상이 올런지 자못 궁금하다.
[ 글출처 : 송우 사이버기념관 ]
Once Upon a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