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의 문화유적을 따라(1)
(2019년 8월 10일∼11일)
瓦也 정유순
아! 요즘 너무 덥다. 삼복염천 끝 무렵에 배롱나무 자주색 꽃 따라 충청남도 논산시로 문화유산 탐사를 떠난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지를 논산(論山)의 계룡산 신도안(현재 충남 계룡시)에 정하여 역사를 시작했으나 반대의견으로 이를 중지하고 한양으로 옮긴다. 조선조 때 은진현 노성현 연산현 등이 1914년 일제강점기 때 논산군으로 통폐합 되었다. 논산의 강경읍은 개성 대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상업도시였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하였다.
<논산시 지도>
새벽공기 가르며 아침 일찍 도착한 곳은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종학당이다. 충남 유형문화재(제152호)인 종학당(宗學堂)은 1643년(인조 21) 윤순거(尹舜擧)가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건립한 사설교육도장으로서,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 강압에 의해 280여년 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호암산을 배산(背山)으로 병사저수지를 임수(臨水)로 하여 종학당과 정수루(淨水樓)를 두고 있다. 종학당은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서 있으며 주변은 담을 둘러 구획하였다. 이곳에서 42명의 문과와 31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종학당 전경>
종학당 입구에 당도하자 울안의 배롱나무는 붉게 달구어진다. 자주색 꽃잎이 백일동안 핀다하여 ‘목백일홍’으로 불리는 배롱나무는 ‘자미화(紫薇花)’라고도 부르고,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꺼칠꺼칠한 투박한 나무껍질을 봄이면 스스로 다 벗어 버리고 반질반질한 피부로 여름 내내 끊임없이 꽃을 피우듯 세속의 번뇌를 벗겨내어 승려들이나 선비들이 배롱나무를 곁에 두고 사랑한 이유다.
<배롱나무 꽃>
<종학당 배롱나무>
나무껍질은 연한 붉은 갈색이며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무늬가 생기는데, 이는 수행(修行)하고 정진(精進)하는 승려와 선비들이 때가 되면 허물을 벗어내는 것과 같아 서원과 사찰에 많이 심어져 왔다. 화사했던 봄꽃들은 열매로 변해 흔적만 남길 때 배롱나무는 모내기가 끝나는 7월부터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여 여름 내내 화사한 모습으로 나락이 익어갈 때까지 유지한다. 그래서 배고팠던 시절에는 ‘저 꽃잎이 빨리 져야 쌀밥 한 그릇’이라는 기대 섞인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배롱나무 가지>
홍살문을 지나 바쁜 발걸음으로 자미화의 자태에 빠져든다. 배롱나무 군락지를 지나 위로 올라서면 본 건물인 종학당이다. 종학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형적인 한옥으로, 대청마루와 방 앞 툇마루 높이가 서로 다르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평면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로 하고, 양측에는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방 아래로는 아궁이가 있고 기단 석축도 살림집과 달리 4단으로 높게 쌓았다. 오랜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있어 보는 즐거움이 더한다.
<종학당>
종학당의 우측으로는 보인당이란 건물이 보인다. 원래 ‘보인당(輔仁堂)’은 윤순거가 노성면 두사리에 본당과 동·서제를 설립해 운영하던 유림의 교육장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진 것을 1987년 종회에서 서울 가회동의 한옥을 매입해 이곳으로 옮겨 당호만 ‘보인당’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원래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상상만 할 수 밖에 없다.
<보인당>
보인당에서 우측 중문을 지나면 정수루가 떡 버틴다. ‘정수루(淨水樓)’는 일반서원과 마찬가지로 강당으로 사용하던 누각이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내부의 기둥과 들보, 서까래의 짜임이 그 당시의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정수루 뒤쪽으로 백록당(白鹿堂)이 겹쳐 있다. 백록은 ‘하얀 사슴’을 지칭하는데, “1,500년을 살아야 백록(白鹿)이 되고 또한 신록(神鹿)이 된다”는 이야기대로 가문의 교육을 통해 백록과 같이 훌륭한 인물을 길러 낸다는 의미가 아닌 가 생각해 본다. 이 두 곳은 상급교육을 했던 곳이다.
<정수루>
<백록당과 정수루>
정수루 앞으로는 병사저수지가 임수를 대신하고, 아래로는 네모진 연못에 중앙에는 조그만 섬이 자리한다. 이는 구색을 맞추거나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낸 것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뜻이다. 조선 이전에 만들어진 저수지와 고택의 연못 등에는 천원지방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강화 마니산과 태백산의 천제단(天祭壇)에도 이런 원칙으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연못과 병사저수지>
<종학당의 하얀꽃 배롱나무>
종학당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홍살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 돌아 나오는데 오석(烏石)에 이상한 글씨가 낙서된 것처럼 보여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구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2008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소나무를 기념식수하고 남긴 기념비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개혁과 개방을 통해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어 냈고, 그 공으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가 종학당을 찾았다는 것은 상당히 뜻이 있는 일이지만 다른 설명이 없어 그의 속내는 알 수 없다.
<고르바초프 기념식수 소나무>
종학당을 나와 이곳의 초대 사장(師長)을 지낸 명재 윤증의 ‘명재고택’이 있는 노성면 교촌리로 이동한다. 중요민속문화재(제190호)로 지정된 명재고택(明齋故宅)은 윤증(尹拯, 1629∼1714)이 살았던 1709년에 아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것이지만 명재는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셔서 명재고택의 “고”자를 옛“古”가 아닌 연고“故”자로 쓰고 있다.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실용주의 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구조적인 면과 배치 형태 등에서 기능성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명재고택>
특히 곳간채의 통풍과 안채의 일조량까지 계산한 과학적인 건물 배치, 안채에 거주하는 여자들의 독립된 공간 확보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 할 수 있도록 만든 내·외벽, 효율적인 공간창출의 지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큰사랑방의 안고지기(미닫이와 여닫이를 동시에 작동)문 등 집안 곳곳에 많은 삶의 지혜가 숨어있다. 사랑채 앞의 축대와 샘, 연못과 나무에는 조선시대 정원의 미(美)가 스며있으며, 뒤 안의 장독대와 울창한 숲은 옛 우리나라의 살림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명재고택>
<명재고택과 장독대>
명재는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그의 학문적·정치적 위상에만 반영할 뿐 현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 등으로 소신을 나타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이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명재 윤증-네이버캡쳐>
노성산을 배산으로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인 명재고택 바로 옆에는 노성향교가 나란히 있다. 향교(鄕校)는 조선시대 관립교육기관으로 각 고을마다 세워진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곳이다. 노성향교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처음 위치는 현재 노성초등학교였던 것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東齋)와 양현재(養賢齋),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 공자의 영정을 비롯한 5성(聖) 20현을 모신 대성전이 있으며, 봄·가을로 제향(祭享)한다.
<노성향교 명룬당>
노성면의 ‘노성(魯城)’이란 지명은 조선 전기에 니성현(尼城縣)을 노성현(魯城縣)으로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熱也山縣), 신라후기시대에는 니산현(尼山縣)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니성현(尼城縣)으로 바뀌었다. 노성은 역사적으로도 충청도의 큰 고을이었으며, 호남지방에서 한양을 가려면 거쳐야 했던 삼남대로(三南大路)의 요지였다. 특산물로 딸기·토마토·멜론 등을 생산하고 있고, 특히 노성멜론은 상품화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노성산과 명재고택 사랑채>
첫댓글 이번 여행은 역사 공부도 할수 있는 걷기을 하고 하고 왔습니다 .
와야님 덕분에 복습을 확실히 하고 설명까지 해주시니 이해가 됩니다 .다른길에서 또 뵙겠습니다 .
함께 해서 더 즐거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자세한 설명으로 다시
볼수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날 수고하셨습니다 ~^^
화사한 배롱나무 꽃이 또 그립네요.
항상 미소 가득한 나날 되세요~~~
학술적 해설이 있는 와야님 의 후기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지나온 과거가 아니고
오늘을 사는 바로 지금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관심을 좀 갖고 있다고나 할까요~~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와야님의 자상한 역사 해설이 곁들인 명품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군요.
제 부족한 해설에 덧붙여 주신 여러 설명 많은 도움이 되었고 분위기도 더 업시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삼복염천(三伏炎天)에 좋은 길
안내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많이 보았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와야님^^
해설과 함께한 후기
고맙습니다.
덕분에 걸었던 길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이번 기행은 흘러가는 세월이 아니라
흘러오는 뜻 깊은 도보였습니다.
함께해서 더 즐거웠습니다~~~
와야님의 해설을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후기도 올려주시니
다시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선현(先賢)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음 도보에서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와~~
우리가 다녀온 곳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해설과 사진
넘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박현정님이
찰칵찰칵 셔터 누르는 소리마다
역사의 현장이 한 땀 한 땀 추억으로
송글송글 맺혀지는 구슬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