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는 숙명론이 아니라 진취적 희망
일부의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혹시 "흥,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21세기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아직도 인과를 맹목적으로
믿다니" 하고 반박할 수도 있겠습니다.
21세기의 과학시대에 인과 업보를 믿는 것은 미신입니까?
선악인과의 업보야말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문명적입니다.
우리의 시시각각이 오묘한 인과율因果律 속에서 생활하고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 곳곳이 인과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은 결과 배가 부르니
더는 고프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곤하면 휴식이 필요한데 기운을 돋고
정신을 쉬면 마침내 피로회복되어 활력이 충분해집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한 방울, 한 부분, 내지 지知, 情, 意의 심령활동
그 어느 것이 인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만약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고 싶다면 선한 인, 좋은 씨앗을
심어야만 달콤하고 아름다운 과실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에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농산품은 접을 붙이는 과학 방법을 써서 수박과 자두를 교배해
새 품종을 내는데 이러한 경우에 인과를 말한다면 어떻게 해석됩니까?"
심은 것은 수박과 자두의 혼합종으로 자라나오는 것은 물론 수박 같지도
자두 같지도 않은 새로운 품종입니다. 이 새로운 품종은 두 가지 인認이 합하여
생겨난 새로운 과果이니 변함없이 인과율에 위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관 아기의 예도 그렇습니다. 비록 모체 내에서 수태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부모의 정혈이 필요하고 거기에 과학적인 것을 더해야만 키워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연이 합하여진 것으로 변함없이 인과관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만약 시험관에 정혈을 집어넣지 않는다면 더없이 발전된 과학이라도
사람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시험관이 아기를 만들어
낼 수있다면 시험관더러 만들라고 하면 일이 다 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결코 이러하지 못한 것이고 시험관 속의 인이 없으면 절대로
과果를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단지 생겨나는 방법이 다른 것에 불과 합니다.
세상에 인과율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악업을 심으면 필연적으로 악보를 받아야 합니다.
악업이 모이면 설사 우리에게 고난의 삶을 가져오게 되지만 언젠가 악업을
다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무한한 광명과 희망을 줍니다.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요? 마치 한 사람이 곳곳에서 돈을 빌려 빚이
주렁주렁 하더라도 단지 어느 날인가 빚을 깨끗이 갚았으면,
빚이 없는 홀가분한 몸이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흉악하기 그지없는 죄업이 그득한 사람도 어느 날엔가 받야할 업보를
다 받았다면 역시 자유롭고 죄 없는 몸이 됩니다.
죄업이 가득한 사람은 마치 법의 그물에 저촉된 사람이 법률의 제재를 거쳐
감옥에서 형벌을 마친 후 다시 자유 광명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업보도 상환시킬 수 있는 그 날이 있습니다.
업보를 다 상환했을 때 인생은 역시 변함없이
한 편의 아름다운 풍경이며 밝은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찹니다.
불법에 "우주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
(諸行無常)" 했습니다. 죄업도 덧없이 변화하여 자성이 없으니 단지
우리가 악업을 계속해 만들지만 않고 선업을 널리 심는다면
어느 땐가는 틀림없이 고통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인연을 따라 옛 업(舊業)을 없애고, 새로운 죄를 짓지 않는다" 했듯이
자연히 괴로움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업보는 결코 소극적인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무한한
희망으로 가득 찬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뜻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의 깊은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집고集苦의 원인부터 없애
새로운 고업高業을 다시 짓지 않으면 즐거운 인생은 결코 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고통을 이루는 원인인 '집'을 철저히 아는 것은 우리들이 행복을
좇아가는 데 있어 가볍게 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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