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날 법주사 무상 큰스님(가운데)을 모시고 혜민 스님(오른쪽)과 함께.
참 궁금했다. 미국 햄프셔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스님이 한국을 찾으면 늘 서둘러 달려가는 곳이 있다. 바로 대전 화암사다. 의형제로 맺어진 사형 혜광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젊은이들의 힐링멘토 혜민 스님이 의지하고 따르는 스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이제부터 그 좋은 만남을 시작해본다.
| “절 에서 머리 깎고 살면 안 죽는 방법을 알게 된다”
: 혜민 스님과의 인연이 돈독하다고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들려준 말들이 상당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반영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두 분이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지인 스님들의 소개로 이뤄졌어요. 혜민 스님이 미국에 살다보니 한국에 오면 같이 이야기하고 상의해줄 스님이 없었나봐요. 지인 스님들이 보기엔 우리 둘이 서로 얼굴도 많이 닮고 비슷한 점도 많다고 여겼는지 잘 어울린다며 의형제로 맺어줬어요. “우리가 훌륭한 수행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데, 큰스님이 되기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스님이 되자”고 서로 언약을 하고 사형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혜민 스님이 저를 많이 도와줘요. 해마다 한두 번씩 후원의 밤 행사를 열어주고, 휴대폰 광고 수익금은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서 전액 이곳 도솔노인복지센터에 기부했어요. 또한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비나눔콘서트를 열어 수익금을 구청에 전달하기도 했구요. 여기에 오면 항상 편안해 하고 함께 산행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저도 고모스님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수행이 수반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깊은 수행의 결정체에서 자비심이 우러나오는 거죠.”
: 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합니다.
독실한 불교집안이었고, 고모님이 전주 정혜사의 혜명 스님이셨어요. 어린 시절 고모스님의 모습을 보며, ‘스님은 저렇게 사는 거구나’ 하고 늘 감동을 받았어요. 주지를 사시면서도 권위의식이 전혀 없고,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관 살 돈이 없으면 관을 사주고 끼니 못 때운 사람들에게는 쌀을 사주셨어요. 그때 이미 복지사업을 하신거죠. 고아들도 많이 키우셨는데, 좋은 일을 하시면서도 전혀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상이 없으셨어요. 열반하시는 날까지 손수 화장실과 도량 청소를 하실 만큼 소탈하시고 자애로운 모습이셨습니다. 스님을 뵈며 항상 마음에 출가를 품고 있었는데, 대학 1학년 때 아침에 뵌 스님이 오후에 갑자기 열반하셨어요. 꽤나 큰 충격이었죠. 스님의 49재 때 일타 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 때 제가 일타 스님께 “사람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겁니까? 안 죽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여쭈니, 스님께서 “절에서 머리 깎고 살면 안 죽는 방법을 알게 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이후에 출가를 하게 됐는데, 아마도 고모스님이 제가 출가할 수 있도록 무상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 고모이신 혜명 스님의 영향으로, 사회복지에 뜻을 두고 도솔노인복지센터를 운영하게 되신 건가요?
저도 고모스님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수행이 수반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깊은 수행의 결정체에서 자비심이 우러나오는 거죠. 예전부터 21세기의 새 불교는 복지를 통한 수행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사찰이 단순히 기도하고 법회보고 교육하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며 삶에 지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 위로를 주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한 생각으로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대전서구노인복지관에서 부관장 소임을 보면서 사회복지를 통한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조그만 포교당을 얻어서 하루 8시간씩 천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복지시설을 간절히 발원했고, 마침 천일기도 끝나고 보름이 지나서 지인의 도움으로 불사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5년 전 도솔노인복지센터를 개원하게 됐습니다.
: 도솔노인복지센터가 노인 주간보호시설로는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 일본에 공부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어느 절에서 소규모로 주간보호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보며, 크게 법당을 짓는 것보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주간보호시설은 치매 어르신들을 주간에만 보호해주는 시설로서, 우리나라엔 특히 노보살님 신도가 많은데 그분들께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 도솔노인복지센터엔 33분의 어르신들이 생활하고 계시는데, 주간보호시설로는 가장 많은 인원입니다. 대기자는 훨씬 더 많구요. 다른 주간보호시설은 운영이 굉장히 어렵다고 하는데, 저희는 아마도 직원들이 성심성의껏 열심히 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희는 영리 목적이 아닌 철저히 복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매일 아침 직원들과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독송한 후 업무를 시작해요. 그리고 모든 직원이 저와 인연을 맺으면 안 떠나려고 해요. 하하. 가장 오래된 직원은 22살에 와서 35살이 되었네요. 모든 직원을 한 가족처럼 생각하고 늘 사랑과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 우리 스님은 항상 절에 있다
: 하안거 기간 동안 100일기도를 하고 계시는데요. 건물 바깥에 걸어놓은 “밥값했는가?”라는 글귀가 인상 깊습니다.
하안거・동안거 기간 동안, 1년에 200일 사분정근(四分精勤, 하루에 새벽・오전・오후・저녁 4번 올리는 기도)을 합니다. 망상 안 피우고 밥값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은 하는데, 일이 많아질수록 조금 벅차기도 합니다. 이쪽 지역이 무속이 번창해서인지 불교세가 약하고 비구스님이 많이 없어 활동력이 부족해요. 그래서 나부터 좀 잘해보자 해서, 본의 아니게 여러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도와줘서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지난 해 일요법회를 시작했는데, 처음 참석자가 12명이었는데 현재 9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올해 거사회 회원 목표가 108명인데, 지금 절반이 넘었으니 연말까지 다 되리라 봅니다. 절 살림은 신도회에 맡기고 저는 그분들이 잘할 수 있게끔 비전 제시 정도만 하고 있어요. 신도들이 아무 때나 오더라도 밥 먹고 기도하며 쉬어갈 수 있도록, 절 문은 새벽에 일찍 열어밤 12시까지 개방합니다. 제가 신도님들께 약속하기를, 이번 한 생은 이곳에서 그분들과 더불어 이고득락하겠다고 했어요. 화암사 사훈寺訓이 ‘이고득락 불청지우(離苦得樂 不請之友,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청하지 않아도 도울 수 있는 벗이 되자)’인데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절을 비우지 않고 있어, 신도님들이 ‘우리 스님은 항상 절에 있다’ 생각하고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어요.
: 트위터에 꾸준히 좋은 글들을 올리며, SNS를 통해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계십니다. 트위터는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됐나요?
제가 항상 주머니에 수첩을 넣고 다니며 순간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수첩이 꽤 많이 쌓였는데 혜민 스님이 우연히 보고, “형님, 이거 트위터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겠는데요.” 해서 트위터를 하게 됐습니다. 팔로워는 4만 명쯤 됩니다. 지금은 기도 중이라 바빠서 며칠에 한 번씩 깊이 생각해서 짤막한 글을 올리고 있어요. SNS를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전화나 쪽지를 통해 저에게 고민을 토로하는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잘 들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제 임무가 되었네요. SNS를 통해 젊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트위터를 보고 서울에서 일요법회에 참석하는 분도 생기고, 템플스테이나 명상강좌에도 젊은이들의 참여가 늘었습니다.
: 다시 천일기도 입재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천일기도의 원력으로 이곳 불사를 할 수 있었고, 여기 와서도 천일기도를 한 번 더하며 지금까지 순조롭게 모든 일들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의지할 곳 없는 노스님들의 요양시설 준비와 숲유치원 설립을 구상하고 있는데, 3년 정도면 정비가 될 것 같아요. 불사를 잘 회향할 수 있도록 원력을 담아 가을쯤 또다시 천일기도를 입재하려고 합니다. 사찰 운영에 있어서는, 사찰을 경영하되 철저히 사회에 환원하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처음 시작한 게 무료급식과 무료한방진료입니다. 신도들의 헌공금이 지역사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여야, 그 공덕이 신도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베푸는 마음이 풍부해야 절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들들 볶아서 병을 만드는 것 같아요. 고통이 생기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자기한테 있습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듯이, 내 안에 있는 보물창고에서 지혜를 꺼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최선을 다해서 살면 행복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까 스스로 불행의 요소를 만들고 있어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할 뿐이지 우리에게 다른 답은 없어요. 그리고 자기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멘토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도 네 분의 멘토가 계시는데, 그 분들이 저를 쓸모없는 인간에서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신 분들입니다. 부산 영주암 정관 스님은 출가자가 어떤 모습으로 수행해야 되는지 보여주신 분이고, 법주사 무상 스님은 하심하면서 물러설 줄 아는 것을 행으로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걸어다니시는 원공 스님은 무소유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신 분이고, 양평 보타암 기현 스님은 글씨 쓰시면서 청빈 그 자체로 사시는 분입니다.
혜광 스님
2001년 대전서구노인복지관 인연으로 대전에 걸망을 풀었다. 이후 소임을 마치고, 2007년 도솔산 화암사와 도솔노인복지센터를 건립하여, 치매어르신 30여 분을 돌보는 주간보호시설의 관장 및 화암사 주지를 맡고 있다. 현재 노스님 요양시설과 숲유치원 건립을 준비 중에 있으며, 복지를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공생할 수 있는 불교의 역할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