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8경
제 1 경 項島歸帆(항도귀범)
동촌리의 목섬에 새목아지 끝이 있으며 그 생김새가 꼭 새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예전에는 청산도에서 동력선은 보기 어려웠고 범선이 많았는데, 수 척의 돛단배가 일몰 직전에 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목섬은 동촌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인도 였으나, 1969년에 연륙으로 목을 막아 동촌리와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
우리 선조들은 먼동이 트면 고기잡이 어선을 타고 파도 따라 바람 따라 노 젖는 배 1척에(4인승) 조를 짜서 어장을 했다. 즉 방질 그물로
방을 놓았다가 두 사람이 한조가 되어 방줄을 잡아당겨 끌어 올렸고, 이렇게 어장을 한 후 일몰 때 돛을 달고 목섬을 향하여 들어오는 돛단배의 모습을 볼만한 경치로 꼽아 "항도귀범"이라 이름하였다.
갯바위 낚시도 대나무장대로 감성돔, 농어, 노래미, 솜팽이 등을 잡았고 미끼는 갯지렁이나 쏙(가재)을 사용하였다.
여서리 앞바다 거문도(삼도)바다로 범선을 타고 나가 낚시질을 하는데 낚시줄은 퉁근 면사에 감물을 들여 낚시줄을 만들었고 대나무로 활등과 같이 휘어서 중앙에 낚시 원줄을 묶어 달고 봇돌을 가운데 달아 중심을 잡았다. 또한 양쪽에 경심을 달고 낚시바늘을 묶어 미끼로 미꾸라지나 낚은 갈치로 포를 떠서 미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여 왔었다.
그러나 1970년대 청산도에 어장이 발달되고 형성되면서 어구도 현대화하여 경심줄로 1부, 2부로 바꿔 사용하였다.
동촌리 새목아지끝 갯바위 낚시터에 먼동이 트면 저 멀리 거문도 황제도 사이에 떠오르는 빨간 풍선같은 아침 햇살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멀리 수평선은 빨간 노을 빛으로 물들고 물결은 잔잔하고 풍성한 어획의 꿈에 부풀어 갯바위 낚시꾼들은 낚싯대를 던져 감성돔이나 농어를 낚고 일출의 아름다운 광경과 항도귀범을 감상하기 위하여 경향각지 낚시꾼들이 끊이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사방에서 많이 찾아오고 있다.
제 2 경 烏山落照(오산낙조)
오산이라는 산은 중흥리 위에 위치하고 있다. 까마귀산이라 부르는 이 산은 큰 돌바위가 있는 산으로 가을에 갈까마귀가 떼를 지어 난다 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붙여 오산이라 하였고 그 까마귀 돌산 바로 아래 서북쪽으로 재가 있는데 소풀을 먹이는 곳이기도 하다.
까마귀돌 바위 위에 올라서서 보면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일몰 직전 모도의 산정에 붉게 물든 황혼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오산낙조"라 이름하였다.
제 3 경 大峰蓮寺(대봉연사)
대봉산은 청산면 부흥리 뒷쪽에 있는 해발 379미터의 높은 산이다.
대봉산 120번지에 백련암이란 절을 지어 지금은 백련사라고 부르고 있다. 해남 대흥사 사찰 등록을 보면 1819년에 등록되어 있다.
청산지도에 대봉산의 봉자(字)가 새 봉(鳳)자로 되어 있으나 청산팔경이나 부흥리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봉우리 봉(峰)자라고 한다.
백련사 주위에 수백년 묵은 동백꽃은 겨울에만 피기 때문에 유독 사랑을 받는다. 완도군화(郡花)이기도 한 동백꽃은 새들이 날아와서 조매화의 한 예가 된다. 더욱이 "백설이 산천에 가득할 때 샘물 흐르는 좁은 길에 이끼도 늙었는데 누구 한사람 오는 사람 없네. 사면이 구름에 쌓였는데 솔문 깊이 닫고 노경을 지내면서 목탁을 두드리니 그 목탁소리 대봉산에 메아리 친다. 찬바람 처마 끝에 울릴 뿐 백련암 앞에서 노는 나그네 하나 없구나.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한가이 사는 것이 낙(樂)이요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먹으니 중(僧)의 본분이 퇴색하였네."라고 백련사의 어느 스님 한 분이 지은 글에서 보듯이 예로부터 청산도에는 동백꽃이 지천에 수도 없이 피어 있었다.
백련암에 김봉춘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절 부근 산에다 국화를 많이 심었고 국화꽃을 따서 술을 빚어 숭묘사의 모성계원을 전부 초대하여 시(詩)를 읊고 국화주를 마셨는데 모성계원들은 모두가 청산 유림들이었다고 전 노인회장 이정섭씨가 귀띔해 주었다.
제 4 경 大城夜雨(대성야우)
대성산은 도청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산(청산중학교 뒷산)에 올라서니 산 넘어 산이요 물 위에 섬이로다. 연기 잠긴 상봉에 명산은 좋지만 시인은 어디 가고 보이지 않네.
바로 앞을 바라보니 두억도(두레이섬)요 섬 중의 섬이어라. 두억도(斗億島) 지초도(芝草島) 장도(長島) 삼도(三島)가 병풍 치듯 둘러 쌓여
청산항을 호위하며 두 방파제도 사이 좋게 청산항을 감싸주네.....
대성산 봉우리에 구름 연기 쌓여 밤비 내리는 것을 보니 너무도 좋은 경치라 "대성야우"라 이름하였다.
제 5 경 古城歸雲(고성귀운)
고성산(明頭山)은 신풍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성은 임진왜란 때 외적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석성을 쌓고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성터 넓이는 2m, 길이 100m, 둘레 1리의 수백년 된 성으로 무심한 세월 속에 허물어져 빈터가 되어 잡초만 우거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심한 가뭄 때는 이 성터에 제(祭)를 지내고 불을 질러 비를 내리게 하였고 상서리 매봉산, 동촌리 봉수산 감시봉과 서로 교신한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산마루 고성산에 구름도 돌아가는 경치를 보고 고성귀운이라 이름 지었다.
제 6 경 寶積靑藍(보적청람)
청산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보적산(일명 백산)은 330m의 높은 산으로 청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사면이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진 산으로 보적청람이란 寶積山에 있는 청람을 말한다. 청람이란 쪽빛(남빛) 풀을 말하는데 옷이나 천에 물들인 쪽빛의 아름다운 색상을 떠올리면 된다.
어느날 목포에서 "蘭" 전시회가 있어 김갑도씨가 참석하였는데 청산의 보적산 "난"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보적산 난이 아름다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푸르다 못해 쪽빛으로 물든, 마치 보석을 쌓아올린 듯한 보적산(백산)의 한 낮에 산 아래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이 시내란 말은 계천(溪川)고랑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청산에 침입하게 되자 청산 주민들은 왜놈들에 의해 거의 몰살되고 잔여 주민들은 청산을 사수하기 위하여 왜적을 전멸하겠다는 중론을 모아 청계리 보적산으로 은신하여 밤마다 바닷가에 있는 갯돌을 보적산으로 날라 옮겨 두었다가 왜군을 산으로 올라 오도록 군중이 유인작전을 펴서 왜군이 침공해 오자 주민들이 일제히 돌을 던지고 바위를 굴러내려 왜군을 크게 섬멸하니, 주위가 얼마나 피바다가 되었던지 보적산 기슭 계천을 일명 피 내리는 고랑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수백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비가 오려고 하면 맑았던 물이 갑자기 불그스름한 물로 변하여 흐른다고 하니 마치 그 유명한 선죽교의 전설을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제 7 경 虎岩宿霧(호암숙무)
청산 권덕리 위에 범바위가 있는데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 하여 범바위라 이름하였고 그 범바위의 생김새가 아침 안개가 걷히자 마치 바위 위에 호랑이가 기지개를 켜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범바위는 큰바위와 작은바위 이렇게 2개가 있는데 그 바위들은 부엉새가 앉아 있는 것 같다 하여 부엉바위라고도 불렀다.
1900년에 권덕포이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권덕리라 부르게 된 이 마을은 열아홉호에서 스무호(20호) 그 이상으로 호수가 늘어나지 않는 마을이며, 또한 불구자가 끊이지 않는 마을이었다 한다.
어느때 지관(풍수) 한 분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 "저 바위가 무슨 바위요"하고 물으니 "저 바위는 부엉바위요"라고 말하자 지관이 하는 말이
"부엉바위라고 부르면 이 마을에 불구자와 재앙이 많이 생길 것이요"하고 말하고 "다음부터는 금(金)바위라고 부르지요"라고 말하여 금바위라고 부른 후에는 권덕리 청년 한사람이 타동네 세 사람을 당하고 불구자도 없어져 그 지관을 명관으로 여기며 살다가 다시 범바위(호암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어느 해 호열자(괴질)가 번져 마을 사람들이 큰 곤욕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날 도복을 입은 노(老)스님이 시주 와서 마을 주변을 살피며 "저 바위가 무슨바위요"라고 물었다. "저 바위가 범바위요"라고 하자 "저 바위를 범바위라고 하지 말고 쥐바위라고 부르시오. 그래야 이 괴질이 없어질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그 노승이 마을을 떠난 후 마을 사람들은 범바위를 쥐바위라고 부르자 호열자는 없어졌으나 그 대신 쥐 떼가 들끓어 거의 파농이 되다시피 하여 흉작이 계속되었고 곡식을 말리기 위하여 덕석(멍석)을 널어 놓았다가 밤이면 멍석을 개여 덮어도 수많은 쥐가 멍석 속의 곡식을 먹어서 쥐의 피해가 너무 많아 하는 수 없이 범바위라고 다시 부르게 되었는데 그 후로는 별 이상이 없는 평온한 마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 8 경 鷹峰秋月(응봉추월)
해발 384.5m인 매봉산의 상봉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위에 다도해(多島海)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봉산은 상서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산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매봉산이란 이름은 매(鷹)의 형국과 같다 하여 산 이름을 매봉산이라고 하였으나 鷹峰山이 맞다고 한다.
청산도 입대조들이 맨 처음 입도할 때 매봉산이 높고 산세가 좋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매봉산 밑에 있는 상서리(덜리)에 제일먼저 터를 잡고 움막집을 지어 한씨(韓氏)가 살았다고 하나 충분한 자료는 없지만 선조들의 전언에 의하면 청산 입도 시초지(始初地)가 "덜리"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김현식 김정남 박종신 임영기 외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1998년 현재는 빈 터만 남아 있다.
"높이 솟은 매봉산에 가을이 다가오면 뭉게구름이 매봉 위에 떠있고 매는 매봉산 주위를 감돌며 하늘 높이 날고 있네. 산아 산아 매봉산아
비가 오면 안개산아 돌개꼭지 넘기면서 여기 떨고 저기 떨고 고루고루 때려주소. 못떨겠네 못떨겠네 배가 고파 못떨겠네......"
청장년들의 노래소리는 매봉산에 얽힌 전설과 함께 보리타작의 힘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산에는 꿩이 자라지 못한다.
완도 관내에는 무인도까지도 꿩이 살고 있는데 유달리 청산에만 꿩이 살지 않는다. 아니 사는 것이 아니라 살지 못한다. 그것은 매 형국을 하고 있는 매봉산이 있어 그렇다고 한다. 꿩은 매가 제일 좋아하는 밥(먹이)이다. 어느 날 시험 삼아 꿩을 청산의 여러 곳에 풀어 놓았으나 오랜 기간이 지나도 꿩의 모습을 본 이가 한사람도 없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변하여도 매봉산의 물줄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흐르고 있다.
매봉산 상봉에 올라가 보면 여서도, 거문도, 황제도, 신지도, 소안도 등 다도해 섬들은 물론 청명한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물위에 기묘한 자세로 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술쟁이 동자스님이 일부러 갖다 놓은 듯 날씨가 궂은 날이면 섬들이 마치 원숭이, 호랑이, 코끼리 등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한다.
옛 선조들은 신기하다고 말하였으나, 아마도 썰물 때와 밀물 때의 조류 간만의 차에 따라 섬 모양이 그렇게 바뀌어 보이는 것으로 짐작된다.
청산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