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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한 즉 너희도 거룩하라
레 11:41-47
41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43 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레 11:41-47 / [부정한 작은 짐승은 먹지 말아라] 땅위에 기어 다니는 작은 짐승은 너희에게 부정하므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42) 배를 땅에 대고 기어 다니는 짐승이나 네 발 또는 그 이상의 많은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은 무엇이든지 너희에게 부정하므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43) 너희는 기어 다니는 작은 짐승에 몸이 닿거나 그 고기를 먹거나 해서 자신을 더럽혀 부정 타지 않도록 하여라. 그 짐승들 때문에 너희가 부정 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44)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내가 거룩하므로 너희도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땅 위에 기어 다니는 작은 짐승들때문에 너희 몸을 더럽혀 부정 타서는 안 된다.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여호와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만 한다. 46) 지금까지 말한 규정은 집짐승과 날짐승과 물에서 사는 온갖 짐승과 땅위에서 기어다니는 갖가지 짐승들에 대해서 너희가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를 알리는 규정이다. 47)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짐승 가운데에서 어떤 것이 깨끗하고 어떤 것이 더러워 부정한 것인지, 또한 어떤 짐승은 먹어도 상관없으며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일러준 규정이다.'
본문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이 가증하니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먹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자기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하고(41-43) 본 단락은 길짐승에 대한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배로 밀어 다니는 것(뱀, 도마뱀), 네 발로 걷는 것(배가 땅에 닿은 상태에서 걷는 것, 파충류), 여러 발을 가진 것(거미, 지네) 등은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라는 말은 '오염되다'라는 뜻으로 부정한 것과 가까이하여 자기를 부정한 것에 오염시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출 19:5-6). 모든 죄의 기본적인 속성은 하나님에 대해 적의를 품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과 구별되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하고(44-45)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시기에 그 백성들도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하다'의 본래의 뜻은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으로 세상의 속되고 부정한 것에서 분리하고 구별시켜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의 자녀인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의 모든 부정에서 분리하여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참고 시 107:14; 136:11)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한 것이니라(46-47) 11장에서 언급한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에 대한 결론 부분입니다. 부정한 생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사체는 그것을 만지거나 옮기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혹시 부지중에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면 정결 규례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규례를 주신 것은 위생학적인 이유보다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규정들이 대부분 폐지됩니다(행 11:11-16). 이는 참된 성결이 종교적 표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6:11; 엡 2:14; 요 6:37; 고후 5:17).
적용: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한 것처럼 자기 자녀들이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을 닮았습니까?
'거룩'이란 '분리성'과 '완전성 / 온전성'을 내포하는 개념입니다. 거룩한 것은 저만큼 '떨어져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속된 것과 분리되었습니다. 동시에 '완전한 상태'로 존재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질서 정연하고 흠과 결점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 너머에 초월해 계시면서 완전체로 존재하십니다. 거룩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장소와 사람의 거룩함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최고의 은총입니다.
< 설 교 >
거룩한 백성의 삶
레 11:44-47 / 이기복 목사
할렐루야!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 진 결실의 계절, 풍요로운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요즘 시내를 빠져 교외로 나가보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고 풍요로움을 느끼는 계절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지친 심신을 새롭게 하며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경건생활을 새롭게 출발하는 축복의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9월을 맞아 우리교회 표어를 “헌신의 달”로 정하고 모든 일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맡겨진 일에 헌신하길 원합니다. 모든 일에 헌신하는 일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구도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라”는 골 3:23절로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거룩한 백성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삶이 곧 헌신하는 삶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지 않고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을 호칭하는 명칭이 많습니다. 가장 흔한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인이라 하여 교인(敎人) 또는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용어로는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는 호칭으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이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 또는 성별된 백성이라 하여 성도(聖徒)라고도 합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하하여 “예수쟁이(예수장이)”라는 말도 섰습니다. 당시에는 대개 쟁이라는 직업을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소리꾼들은 소리쟁이, 냄비나 솥을 때우는 사람을 땜쟁이, 고집이 센 사람을 고집쟁이, 허풍을 떠는 사람을 허풍쟁이, 멋을 내는 사람을 멋쟁이,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장장이, 간판 일을 하는 사람을 간판장이, 옹기 장사를 옹기장이 등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러한 부류로 불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리 전택부 선생은 “예수쟁이”라는 말이 우리의 순수한 말임을 강조하면서 천한 말이 아니라 전문가라는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예수쟁이라고 부를 때에는 비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철저하다고 할 정도로 거룩한 생활과 바른 신앙생활을 함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나 교회를 모르고 살다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적으로 보면 그의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 2:9절에 말씀하길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엡 2:19절에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빌 3:20절에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상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의 신분은 물론이고 그의 국적인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삶은 거룩한 삶, 성별된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모든 면에서 구별이 됩니다. 구별되고 성별한다는 의미의 거룩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다쉬 또는 카도쉬”라고 하고 신약의 헬라어로는 “하기오스”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Holy, Sanctify, Holiness라고 번역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성경 전체에 152회나 나옵니다. 모세 오경 중의 하나인 레위기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도 레위기를 인용한 구절이 자그마치 100회가 넘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레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한문으로 거룩할 성(聖)자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모든 용어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일주일 7일중 주일을 다른 요일과 구분하여 빨간 색으로 표시하고 성일(聖日) 또는 주일(主日)이라고 합니다. 모든 서적과 구분하여 기독교의 정경을 성경(聖經)이라고 합니다. 건물인 교회를 성전(聖殿) 또는 성당(聖堂)이라고 하고 교회에 드려진 모든 기물들을 성물(聖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레위기 전체 27장 중에 11:44-45절을 핵심구절(key verse)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Be Holy, because I am Holy)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레 11장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성별된 삶을 사는 일에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레위기 11장을 통하여 배우고 실천하길 원합니다. 거룩한 백성은
1. 예수 믿기 이전의 불신앙의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이전과 믿은 이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고후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한 마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성경 용어로 ‘거듭남’ 한자로 ‘중생(重生)’ 그리고 영어로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지도자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요 3:5).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 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전의 모든 불신앙의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초기의 기독교 역사에 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술꾼들이 술을 끊고, 담배에 인이 박힌 골초들도 담배를 끊고, 노름에 빠진 사람들이 노름행위를 끊고, 흔히 말하는 난봉꾼(주색에 빠진 사람들)들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던 일들을 일소하고 가장 소중히 여기던 조상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은 추도식으로 바뀌고 기독교 관혼상제로 변화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천지개벽적인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백성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변화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소위 말하는 짝뚱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짜가 판을 치듯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하고 철저한 예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다음에는 그동안의 부정한 삶을 청산하고 자기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동안 남의 것을 토색(討索: 남의 것을 불법이나 억지로 빼앗은 것)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결단하고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모습이고 불신앙의 뿌리를 뽑은 것입니다.
2. 거룩한 삶은 예배생활이 첫째입니다(레 1장-6장).
레위기의 중심 주제는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전의 애굽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늗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배생활입니다. 예배를 구약에서는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리는 예배였기에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 더 이상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신앙생활의 핵심일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근원이요 핵심입니다. 예배생활에서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예배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최고의 헌신입니다.
레위기 전체가 27장까지 있는데 그 중에 1장-6장까지 전체 레위기의 거의 사분의 일이 예배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예배가 다섯 가지입니다. 즉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5가지 예배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1) 번제(번제: Burnt offering)입니다(레 1:1-17).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 제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제사는 흠없는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예배가 너무나 형식적이고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냥 시간을 보내고 헌금하면 예배드린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흔하게 유행하는 언어 중의 하나가 Sunday Christian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성도가 아니라 휴일을 즐기는 차원에서 예배드리고 사람들 만나 먹고 쇼핑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과거에 주일성수가 힘들었던 시대에도 온 가족과 함께 주일 새벽부터 저녁예배까지 철저하게 성일로 지키던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변질 된 것입니다. 요즈음은 교회에 예배 회수가 많아 편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번제가 짐승을 잡아 나를 대신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2) 소제(素祭: Grain Offering)입니다(레 1:1-16).
다섯 가지 제사 중 유일하게 소제만 피가 없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자신이 손수 지은 농산물 즉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 밀가루 등 식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곡식을 의미하는 Grain Offering라고 합니다. 이 제사의 의미는 자신의 땀 흘린 수고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의미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땀 흘리는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농촌 계몽가는 말하길 쌀 한 톨이 밥상에 오르려면 농민들의 땀 흘리는 수고가 100번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할 때마다 밥 한 톨을 남기거나 버리지 않는 훈련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농민 운동을 일으킨 고 김용기 장로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소제의 예배를 드리는 정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구경하는 예배나 즐기는 예배가 아니라 나의 힘과 정성과 생명을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과거에는 “예배 보러 간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은 예배 드리러 간다는 말로 고쳐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성소와 같은 예배 드리는 일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말씀을 예배생활에서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예배생활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모든 삶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3)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입니다(레 3:1-17).
화목제란 말 그대로 서로의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화평를 위한 제사라 하여 영어로 Peace Offering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쉴라밈’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평화’ ‘화평’을 의미하는 ‘샬롬’에서 온 말입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억지로 의무로 하는 화평이 아니라 언제나 자원하는 화평이 되어야 합니다.
화목제의 다른 이름은 “낙헌제사”입니다. 낙헌제사란 즐겁게 헌신하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회목제의 분위기는 다른 제사와 달리 아주 즐거운 분위기입니다. 화목제는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목이고(롬 5:1) 둘째는 이웃들과의 화목이고(롬 12:18) 셋째는 하나님의 평화를 함께 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롬 5:11).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를 만들거나 화목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늘 화평을 도모하는 Peace maker가 있고 화평을 깨고 분란을 일으키는 Trouble maker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말씀했습니다(롬 3:25).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롬 5:10), 하나님의 자녀 된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후 5:18절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예수님은 마 5:23-24절에 말씀하길 “예물을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회목하고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경고한 것입니다.
4)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입니다(레 4:1-5:13).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제사는 자원함으로 드리는 제사라면 남은 두 가지 제사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하타트”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인데 죄를 뜻하는 “하타”에서 온 말로 “목표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in offering”이라고 합니다.
속죄제는 부지불식간에 범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계명 중 하나라도 범하였거나(레 4:2),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을 경우(레 4:13,22,27)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누구든지 모든 백성이 드려야 하는 의무적인 제사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레 4:1-35절에 네 종류로 나누어 제사 드려야 할 규례가 나옵니다. 즉 제사장, 교회 회중, 족장(정치 지도자), 그리고 평민 즉 개개인입니다. 의도적이거나 알지 못하고 부지중에 죄를 범하였을 경우 깨닫는 즉시 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이런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지만 그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때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을 때는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러한 깨달음을 자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 18:9-14절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외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세리였음을 말씀하였습니다.
5)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입니다(레 5:14-6:7).
속건제는 이웃들과의 관계성을 중요시 하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범죄가 고의적이든 비고의적이든 하나님과 사람에게, 이웃에게 가시적인 손실을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재산상의 피해나 손실을 입힌 경우의 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손실을 입혔다는 것(레 6:2)은 하나님의 공동체인 성전에 손실을 입혔을 경우이고, 이웃에게 손실을 입혔다는 것은 타인의 재상에 손해를 끼친 경우를 말합니다. 즉 성물을 침해한 죄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칭하여 남의 재산을 가로챈 죄를 말합니다. 특히 이웃의 재산을 탐하는 행위(레 6:1-7)는 다분히 고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속임수, 도둑질, 거짓말, 사기 등을 통해 남의 재산에 소실을 끼칠 경우 이러한 경우 원금과 합당한 베상과 더불어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3. 거룩한 삶은 생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라 하여 세상과 결별하고 속세를 떠나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중세기에 종교가 본질을 상실하고 세상이 너무나 타락하였을 때 속세를 떠나 격리생활을 한 수도원이 많이 생겼습니다. 수도원 중에도 봉세수도원은 세상과 아주 결별을 하고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 뼈를 묻는 수도원입니다. 일가 골육지친과 결별을 하고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자기 자신이야 얼마나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영적인 각성과 재무장을 위하여 일정기간 세상과 멀어진 곳에서 경건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도 가정도 이웃도 세상도 결별하고 혼자서 아니면 집단으로 생활하는 것은 성경적인 경건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로 파송을 하시면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신령한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속세로 내려오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했습니다. 그 순간 변화산의 환상적인 모습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되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거룩한 삶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1)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향기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향기가 되려면 특징이 자기희생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녹여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빛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게 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새로움을 창조합니다. 향기도 자기를 다 날려 보내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합니다. 향품을 향기를 발하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생활입니다.
2) 섬김과 봉사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신앙, 사이비 경건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득을 취하고, 이웃을 자기를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경건의 열매는 섬김과 봉사입니다. 얼마나 섬기는 삶을 사느냐가 경건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도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하늘나라에서는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에서도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 정말 성숙한 사람익 ㅗ어른입니다. 큰 희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삶입니다. 교회에서 주말마다 교회 청소를 합니다. 작은 것 하찮은 것 같지만 이것이 경건의 모습입니다. 남이 하기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일을 앞장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가 교회 화장실 청소를 하기 좋아하겠습니까? 주방에서 봉사하길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는 성도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의 재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는 이웃을 섬기는 일에 기부를 하는 것도 아주 소중한 경건생활이요 헌신의 삶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4-45 / 전라상 목사
성경 66권 중에서 ‘거룩한 생활’을 주제로 하는 책은 레위기서입니다.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의 유대교에서는 성경 전체 중에서도 레위기를 중요시하여 자녀들에게 가장 처음 읽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레위기서에서 강조하는 거룩한 생활이 어린 나이에서부터 체득되어 평생토록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한 기초학습의 일환입니다.
오랫동안 레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제외된 성경이었으며 지금도 66권의 성경 중 레위기에 관한 책이나 주석이 가정 적은 소외된 책이었습니다. 이렇듯 레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제외되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첫째는 레위기가 어떠한 활동이나 사건의 기록이 거의 없는 따분한 율법의 책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수백 가지의 규례와 율법이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매우 지겨워 보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레위기에 나타난 많은 상징들의 난해한 해석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제외되거나 쉽게 간과해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책으로서 구원의 진리와 성도의 생활 규범을 세밀하게 기록해 놓은 진리의 보고입니다. 1장에서 10장까지는 제사법, 즉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잘못된 예배를 드릴 때,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 가지 알 수가 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시대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고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거룩한 공동체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예배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룩한 공동체,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복 받기 위해 예배드리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가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11장은 전체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1-23절 말씀은 깨끗한 음식과 깨끗하지 못한 음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47절 말씀은 오염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구태여 이렇게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 구별하느라고 신경 쓰면서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짐승, 어떤 곤충, 어떤 새를 먹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가 더 이상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가복음 7장 19절 말씀에서는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결한 동물, 부정한 동물, 즉 깨끗한 동물, 더러운 동물의 구분을 폐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음식에 있어서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장 말씀에 보면 복음이 유대에서 이방으로 전파되었을 때, 이방인이 정결법을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의 문제로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예루살렘 총회가 회집되었고, 거기서 구약의 의식을 가지고 더 이상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한테는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음식들을 왜 그 당시에는 깨끗하지 못하니 먹지 말라. 깨끗하니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음식에 대한 정결법을 주신 이유는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서 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물을 구별하는 사고방식은 삼분법입니다. 거룩과 정결과 부정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은 정결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진 밖은 부정한 곳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중에서 가운데 있는 성막은 거룩한 곳입니다. 사람을 보는 시각도 삼분법입니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사람,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이스라엘 사람은 정결하고, 이방인은 부정합니다. 동물의 세계도 삼분법으로 보았습니다. 즉 제사용으로 쓸 수 있는 정결한 동물과, 먹을 수 있는 정결한 동물, 그리고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이러한 삼분법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음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음식은 거룩한 제사장과 연결하고, 정결한 음식은 정결한 사람, 즉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하고, 부정한 음식은 부정한 사람, 즉 이방인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음식을 먹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결법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결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6-7)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 가장 적은 민족 중에 가장 못난 민족, 연약한 민족, 부족한 것이 많은 민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음식을 먹을 때마다 기억하며 지속적으로 은혜 가운데 거하라는 뜻입니다. 본문 45절 초두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지속적으로 그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정서가 하나님의 은혜로 촉촉이 적혀 있을 때에 거기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자세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결법을 지켜서 먹을 음식 못 먹을 음식을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정결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여전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현재의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줄로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여 끊임없이 은혜로 내 생각과 삶을 적히는 것입니다.
2. 음식에 대한 정결법을 주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정결법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접할 수 있는 모든 동물을 일일이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느냐? 안 드렸냐?’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람답게 일상생활에서도 깨끗한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배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44절과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는 목적이 거룩과 상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 구별해 주셨고, 백성들에게 이 수단을 사용함으로서 계속하여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하신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매일 매일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음식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 거룩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은 구원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따라서 이 땅을 사는 성도로서의 우리의 목표는 구원이 아니라, 거룩이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춤추고 기뻐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리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7). 이 말씀은 미가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는 냉소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질문한 이후에 다시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무슨 말씀입니까? 외형적인 제사. 예배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함께 행하는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격적 육체적인 깨끗함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도덕적 기준이 낮아져서 ‘결혼 전에 동거하는 것이 괜찮다. 한 술 더 떠서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이 훨씬 안정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 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러한 생활을 정상이 아닌, 부정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하기를 원하시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삶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거룩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해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됨을 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복음 전파에 장애요인이 됩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정결법을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정신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상 가운데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원하신다
레 11:45 / 조상호 목사
어느 사이트에서 “‘왕따 아버지'를 살립시다”라는 글을 읽고 느낀 것이 많았는데, 그 글의 일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엔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버지가 큰 소리로 깨웠다. 그러나 요즘엔 "얘야, 엄마가 일어나래. 혼나지 말고 어서 일어나렴”이라며 작게 속삭인다.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켜자 엄마가 보지 말라고 했다며 아이가 경고를 한다. 그래도 텔레비전을 계속 보자 리모콘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가 이른다. "엄마, 아빠가 텔레비전 켜셨어. 그냥 놔둘까, 끌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영향력이 형편없이 추락해 있음을 보여주는 우스갯소리다. 아이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가 받자 다짜고짜 "엄마 바꿔주세요"한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이는 "엄마 바꿔줄게요"라고 한다. 이 정도 되면 아버지는 가정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중요한 문제를 엄마하고만 상의하려 한다면 그 아버지는 이미 왕따 아버지다....> 저도 남편이자 아버지이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점점 ‘왕따 아버지’가 늘어가는 시대입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남편'과 '아버지'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월간잡지 '아버지와 가정'의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들의 46%가 아들이 자신을 닮기 소망하고 있지만,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아들은 3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다는 아들은 37%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닮고 싶은 아들보다 닮고 싶지 않은 아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자녀들 가운데 "이 다음에 나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들 가운데도 "내 아들이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버지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요즘의 아버지들과 다르십니다. 세상의 아버지들과 달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닮아 가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요즘의 아버지들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내 자녀들이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나의 자녀들이 나의 모든 면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본문 레위기 11장 45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데쉬’라는 이름입니다. 이 ’카데쉬’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 단어 ‘카도쉬’(kadosh)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holy', ’거룩’에 해당됩니다. 거룩하신 야훼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그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야훼 카데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복습해야죠? 6주 전부터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매주 살펴보고 있는데, 다 기억하십니까? 6주 전에는 ’야훼 삼마‘,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5주 전에는 ’야훼 샬롬‘,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4주 전에는 ’야훼 이레‘, ’미리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3주 전에는 ’야훼 치드케누‘,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2주 전에는 ’야훼 로이‘, ’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야훼 닛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야훼 하나님의 이름 시리즈 일곱번째, ’야훼 카데쉬‘, ’거룩을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레위기서입니다. 레위기는 창세기, 출애굽기에 이어 세 번째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아무 의미나 목적 없이 레위기가 세 번째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성경인 창세기는 시작을 알려주고 있는 성경인데,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성경인 출애굽기는 구원에 대해 기록된 성경인데,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해방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성경인 레위기는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 레위기 11장 45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선택 하상이 아니라, 꼭 해야 명령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후, 다른 말씀보다 먼저 ‘거룩’에 대해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1)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첫째로, 십자가의 보혈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처음에 마르틴 루터는 거룩해지려고 아우구스띠노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2년 후에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하루 일곱 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는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로마에 순례도 갔습니다. 교황이 약속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희망을 갖고 그는 로마에 있는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거룩해질 수 없어서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무릎으로 계단을 올라가던 것을 멈췄습니다. 마치 큰 빛이 그게 임한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마르틴 루터를 변화시킨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의 ‘믿음’이란 무슨 믿음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 위해 피 흘리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2001년도 뉴질랜드 KOSTA 강사로 오신 적이 있는 황형택 목사님이 쓴 <끈질긴 사랑의 추적자>라는 제목의 책에서 ‘화환녀들의 슬픈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636년 12월9일은 중국의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시작된 날입니다. 당시 왕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였는데, 남한산성에서 25일을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1월3일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왕실의 왕자와 왕족들이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자 청나라에 부인을 빼앗긴 남편들이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로 잡혀간 부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이 여인들을 가리켜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여인들‘이라는 의미가 있는 “화환녀”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많은 여인들이 청나라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기 남편이 이미 다른 여인과 재혼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들마다 큰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새장가를 가지 않은 가정에서도 청나라에 끌려가서 정조를 잃고 온 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큰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인조 임금은 모든 신하들을 다 불러놓고 “과인이 부덕하여 엄청난 국난을 당하였으니 그런 연고로 죄 없고 힘없는 부인들이 뜻하지 않게 욕을 당한 것은 불가항력이었도다”라고 말하면서, 부인들의 무죄를 선언하고 새로운 국법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지금의 서울 은평구 홍제동에서 녹번동으로 넘어가기 전에 꽤 넓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홍제천입니다. 화환녀들이 속옷차림으로 그 홍제천을 건너오면 청나라 사람에게 당한 모든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진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제천을 건너온 화환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허물을 다시 들추어내서는 안 된다는 어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조 임금은 멋진 임금이었습니다. 가정의 회복을 위해, 나라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임금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할까요? 여러분, 이렇게 한다고 그 여인들의 치욕과 과거가 한꺼번에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홍제천을 건너왔다고 그 여인들이 거룩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과거의 치욕과 허물을 들추지 말라는 임금의 어명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여인들이 완전히 거룩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 여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어떠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께 고백하기만 하면, 어떠한 죄라 할지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우리가 거룩해질 수 없지만,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몸 찢기시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구별됨으로 말미암아
둘째로, 구별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새사람이 되었다고 항상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 아담과 하와 이후 우리에게 유전되어 오는 죄(Sin)를 회개함으로 용서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이 아직도 연약하기 때문에 죄(Guilt)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룩하게 살기도 하고, 때때로 죄에 미혹되어 불의를 행하기도 합니다.
청교도 시대가 남긴 에피소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드리기 위하여 입교 문답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문답을 하는데,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이 자매는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장로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자매는 이러한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a sinner running to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레위기 20장 26절에서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야훼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다’ ‘분리하다‘(separate, set apart)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별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어디로부터 구별해놓으셨습니까? 만민으로부터 구별해놓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해놓으셨을까요?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무엇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행실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 모든 행동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는 제목의 책을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김성주라는 여성입니다. 그는 대기업 총수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여자가 무슨 공부냐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거의 도망가다시피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외국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에서 패션유통업을 하려고 하자, 주위에서 이렇게 충고를 하더랍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잘하려면 첫째, 술자리를 많이 만들고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돈 봉투, 즉 뇌물을 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적당히 거짓말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서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영락교회 집사인데,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과 흰 봉투와 거짓말을 멀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후로 백화점에서 쫓겨나고, 왕따를 당하고, 미친 여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서서히 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모든 무역업체를 통 털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체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면세점 공급 물량 1위, 공장도 가격으로 6천만 달러 상당의 물품을 납품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린 것은 아닙니다. IMF를 맞아 82개 매장 중 40개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300억 원을 손해 보았고, 부도위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편법을 쓰지 않고 정도를 갔습니다. 한 매장을 일본 사람에게 매각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그 일본 사람은 헐값에 사려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기업은 이중장부, 과대 포장을 하는 일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장부는 정확하고 투명했습니다. 결국 그 일본 사람은 265억에 이 분의 회사를 인수하는 바람에, 그 돈으로 300억의 부채를 청산할 수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은 스위스 다보스에서 모이는 ‘세계 월드 이코노믹 포럼’이라고 하는 WEF에서 지명한 21세기를 이끌어갈 차세대 경제인 100인에 지목된 유일한 한국 여성으로 뽑히기까지 했습니다. 이 분은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는 책에서 ‘나는 교회 안에서의 삶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거룩한 왕따로 살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거룩보다 순결보다 더 큰 능력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을 위해 힘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오럴 로버트 목사님은 “당신이 준비한 축복의 그릇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면 주님은 당신의 모든 요구를 채워 주실 것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축복을 담을 그릇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릇이 준비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축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시키고, 항상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북유럽에 살고 있는 족제비과의 포유동물인 흰 담비는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흰 담비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흰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 담비를 굴 쪽으로 몰아가면,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기보다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거룩한 사람들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아직까지 주님의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몸 찢기시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모든 행실에서 구별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택하는 흰 담비와 같이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의 자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능력으로, 기도의 자리에서 임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행실을 깨끗케 함으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결과 부정에 대한 결론
레 11:41-47 / 조덕영 박사(조직신학, 식품제조가공기사 1급, 품질관리Q.C. 1급)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전 김천대, 안양대, 평택대 겸임교수
사람이 짐승을 돌보듯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41-47절)
1. 구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 요약(41-43절, 46, 47절)
1)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하다
본문은 11장 29-31절의 반복 확대 언급이다. 뱀이나 지렁이처럼 배로 밀어 다니고 악어나 도마뱀처럼 짧은 네 발로 걷는 짐승들과 지네, 전갈, 거미 등 다리가 많은 곤충들은 정결치 못한 짐승들이었다.
2) 반복 설명
성경은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의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이 히브리어의 강조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처럼 히브리인들의 강조 용법을 사용하셨다. 본문의 레위기 본문도 구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 요약하고 있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거룩할 것(44-45절)
1)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이 구별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물 규례를 어겨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2) 은혜 시대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말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성도는 구별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즉 교회는 어둠 속 빛을 발하여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바) 레위기 11장이 주는 도전과 교훈
1. 하나님의 돌보심
1) 하나님은 인간의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갖고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까지 다 아신다(시 103편).
2) 레위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식품학자, 영양사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세심한 사랑과 배려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3)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점에서 부모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부모와 달리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항상 옳다!
2. 성경은 다중적 의미를 가진 책이다.
1) 음식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적 건강과 영적 거룩한 구별을 모두 배려한 하나님의 다중적 의미가 담긴 규례이다.
2) 즉 하나님은 본문의 음식물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위생적 환경 아래서 닥칠지도 모르는 공동체적 위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은혜 시대를 맞아 본문의 의식법(음식 규례 등)은 오늘날 폐하여진(고전 10:25-26) 법이긴 하나 그 다중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잘 분별하고 때론 삶에 있어서 분리할 것은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고후 6장). 하나님은 그 결단을 요구하심을 잊지 말자!
성도의 거룩한 삶
레 11:41-47 / 이종복 목사(대흥제일교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새해 첫 주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복이 금년 내내 오늘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의 표어를 작년과 같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11:45의 말씀을 그대로 정했습니다. 금년에도 이 말씀을 표어로 정한 것은 어느 때 보다도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이 더욱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도의 거룩한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거룩의 의미
그러면 거룩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성스럽고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극히 도덕적이고 사상이 위대하고 또 그 업적이 훌륭한 것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구별을 의미합니다. 분리을 의미하며 따로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된 거룩한 집입니다. 성물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구별된 물건입니다. 성일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된 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 업적인 차원을 넘어서 구별을 의미합니다. 삶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이방인 하나님 없는 사람과 구별된 삶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는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삶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구별된 삶 이것이 거룩입니다.
Ⅱ. 왜 거룩해야 하나?
성도는 왜 거룩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44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스스로 몸을 더럽히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스랍들에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이 세상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벧후1:4) 구원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 거룩한 성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신의 성품 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자녀는 그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를 닮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세째 하나님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44절) 하나님의 명령이자 요구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이라고 합니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민이라"(신7:6) 신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성도라고 합니다.(롬1:7, 고전1:2) "거룩한 무리" 참으로 엄청나고도 귀한 이름입니다. 성민 삼아 주신 것, 성도 삼아 주신 것 이것은 정말로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성도로 살아야 한다는 큰 의무도 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으로 삼아서 성민다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출애굽을 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해 내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로 성도를 삼아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라고 하는 그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삶은 구원을 받은 자의 의무인 것입니다.
네째 거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그릇 금그릇, 은그릇이라고 해도 깨끗하지 않은 그릇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하지 않은 사람, 성결하지 않은 사람,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무용지물입니다. 교회도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거룩하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Ⅲ. 어떻게 거룩할 수 있나?
그러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고 했습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나니"(히4:12) 성경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케 하시고, 바로 살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므로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거룩해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의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회개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하면서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십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을 도와주시고, 우리의 성결생활을 도와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거룩한 삶을 살수 가 없습니다.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기도하시므로 성령충만함을 받아 성도로써의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 이 사회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습니까? 얼마나 부정직한 사회입니까? 바닷물은 3-5%의 염분만 있으면 자정능력이 있다는데 이 땅의 30% 가까운 크리스찬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룩한 삶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거룩하지 못한 신자는 아무리 많아도 쓸모 없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요구입니다. 금년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거룩한 삶을 열망하고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레위기 11:24-47
찬송가 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앞선 단락에서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에 대해 설명했다면,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만일 사람이 먹지는 않았지만 실수로 부정한 것을 만질 경우 그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졌을 경우, 그리고 땅에 기어 다니는 짐승들의 주검을 만졌을 경우, 또한 정결한 짐승의 주검을 만졌을 경우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음식에 대한 정결 규례의 목적을 정리하여 설명합니다.
짐승의 주검에 대한 규례(24-40)
(24-25) 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모든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먹을 수 있는 짐승들을 제외하고 부정한 짐승들은 그 사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하다고 규정합니다. 누구든지 정한 방법에 따라 짐승을 도살할 경우, 예를 들어 소와 양과 염소 등 제사를 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짐승의 주검을 만질 경우 부정하게 됩니다. 또한 저녁까지 부정하다는 것은 그날 저녁 곧 사체를 만진 그 날 저녁을 뜻합니다. 앞선 5장 2절에서 사체를 만진 후 모르고 있다가 자기가 만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만진 사실을 저녁이 되기까지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경우를 말하며 이는 새날이 됨과 동시에 부정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짐승의 사체를 물건 나르듯이 옮기면서 만졌을 경우에도 부정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지나치다가 우연히 주검을 만진 자에 비해 부정함이 더 크기 때문에 그의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제사까지는 드리지 않아도 되기에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와 잘못에 대해 돌이키고 회개하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 옷을 빨아 부정함을 면하게 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미워하시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속죄제, 속건제이고, 또 그 옷을 빠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는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사함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느냐입니다. 죄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주님의 보혈로 사함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26-28) 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서 쪽발이 아닌 것은 앞선 4절의 낙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바닥으로 다니는 짐승은 굽으로 다니는 동물과 대조되는 개나 고양이, 사자, 곰 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진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며, 주검을 손으로 들고 옮긴 자는 그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는 땅에 기는 길짐승의 주검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32절에서는 부정한 짐승의 사체가 그릇이나 의복이나 자루 등에 떨어지게 될 경우 역시 그 사람이 부정하게 됨을 설명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필요한 도구나 기구에 부정한 짐승의 사체가 접촉되었을 때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 물에 저녁까지 담가두면 이후 부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져도 부정하게 되어 그것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36절에서는 반면 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에 떨어지면 부정하게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데 아마도 흐르는 물로 인해 물이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이거나 물 자체가 정결하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37절, 38절에서는 파종할 종자 씨에 떨어질 경우에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종자에 물이 묻은 경우에 그것에 떨어지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묻음으로 생명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어서 먹을 수 있는 짐승이 죽은 경우에 대해 설명합니다.
(39-40)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용된 짐승 곧 소, 양, 염소 중에서 그 짐승들이 자연사를 한 경우를 뜻합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죽인 경우에는 그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자연사한 짐승을 접촉한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죽음 자체가 부정한 것과 연결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검 곧 사체를 만지는 경우에만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고 혐오하라고 하신 짐승들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부정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모든 동물을 본래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진 죽음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이 생명에 반하는 것이고 죽음 자체가 창조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역사적으로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어 왔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가정을 더럽히는 것들, 직장과 이 사회를 더럽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또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들, 누군가를 죽이고 파괴하는 모든 것들은 반기독교적인 것임을 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한 일에 교회는 힘써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 무엇인지 늘 점검하고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음식 정결법의 결론(41-47)
(41-43)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1절에서 43절은 앞에서 먹지말라고 구분했던 짐승에 이어서 땅에 기는 길짐승 곧 곤충을 비롯한 파충류와 설치류 등의 짐승을 먹지도 말고 접촉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왜 이렇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44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몸을 구별하여 바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이 생명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짐승들과 곤충들을 부정하게 만드심으로써 이 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금하여 오히려 그 개체와 생명을 보존하려 하시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제한된 짐승들 중에 꼭 필요한 만큼만 먹을 것으로 취하되, 나머지 짐승들과 곤충들은 끊임없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이어 나가도록 하라는 취지로 보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어서 나오는 부정한 짐승에 대한 말씀의 결론을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5-47)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세상의 생물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처음 3일 동안 구분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빛과 어둠, 하늘의 물과 땅의 물, 바다와 육지를 구분하셨습니다. 이러한 창조 섭리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처럼 선과 악을, 옮음과 그름을,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결한 것은 생명, 건강 그리고 거룩에 부합하는 반면, 부정한 것은 죽음, 병 그리고 속된 것에 부합합니다. 매일의 정결 의식 준수는 이스라엘의 사회적이고 영적인 발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정결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유대를 강화시켰습니다. 이것을 충실히 준행하면 모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깊이 심어줌으로써 그 민족의 영적인 발전을 촉진시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결법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일정한 표준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헌신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음식에 대한 규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합니다. 일상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 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성결한 삶은 주의 백성이 예배 처소를 찾았을 때, 혹은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서 매일 요구됩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비윤리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들을 구분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보다 근원적으로,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정결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먼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또한 로마서 12장 1절 말씀처럼,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위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정결의식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신 의미를 묵상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죽음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며, 우리 자신을 주님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매 순간 저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삶을 위해 더욱 더 눈을 들어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던 주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긴 호흡, 깊은 호흡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우리에게도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가정과 직장에서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부정하게 되었을 때 그 옷을 빨아서 정결하게 되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자백하며 정결하게 되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앞장 서서 힘써야 할 생명 살리는 일은 무엇일지 묵상해 봅시다.
4.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일상에서 부정하게 되는 것을 분별하고 보혈로 씻으라.
레 11: 24-47 / 조용호 목사
◈ 주 해
1. 하나님은 첫 예배에서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드리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즉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1)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소제와 친교제의 남은 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라고 하셨다.
2) 레 11: 1-23절은 먹어야할 음식과 부정하게 됨으로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말씀하신다.
3)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위해 먹어야 할 것이 있다면, 생명의 교제를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신약에서도 우리에게 피하라고 하신 말씀은 생명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할 음식, 거절해야 할 음식이 있다.
1)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도 먹어야 할 음식(그리스도), 거절해야 할 음식(세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2) 먹을 것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지 않아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3. 부정한 짐승들을 먹어서도 안되며, 그 주검(시체)을 만져서도 안된다(24절).
1)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아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다(25절).
2) 부정한 동물의 주검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이 5번 반복된다(24-28절).
- 주검을 만지면 부정할 것이며...주검을 옮기는 자는 부정하리라...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주검을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며...주검을 옮기는 자는 부정하니라.
4. 31-38절은 기는 짐승의 부정함과 그 주검과 접촉함으로 부정케 되는 내용이다.
1) 주검을 만지는 모든자는 부정할 것이며...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떨어지면 부정하여...떨어지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여...떨어지면 부정하리라 => 6번 반복
2) 여기에서는 시체와 접촉되면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정한 시체와 접촉한 나무 그릇, 의복, 가죽, 자루까지 부정하게 된다(32-33절).
3) 예외조항: 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저수지), 심을 종자는 부정하여지지 않는다(36-37절). 즉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외다.
5. 39-40: 먹을 만한 짐승도 그 주검을 만지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39절) => 2번 반복됨.
1) 41-43: 기는 짐승은 가증함으로 먹지 못한다고 하심으로 부정한 음식을 먹지말라는 말씀이 다시 강조된다.
6. 오늘 본문에서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부정한 것(시체)과의 접촉”이다.
1) 오늘 본문에서만 총 13번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이 나온다.
2) 시체는 죽은 것이다. 죽음은 부정의 상징이다. &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
3) 접촉 중 가장 깊은 접촉은 먹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한 것을 먹으면 부정해진다.
7. 접촉은 전염시키는 효력이 있다.
1) 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하면 거룩해진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거룩해진다.
EX) 성막의 기구와 제사장은 거룩한 관유를 바름으로(접촉) 거룩해진다. 구별된다.
2) 반면 부정한 동물이나 시체와 접촉하면 부정해진다.
EX) 코로나에 접촉되면 전염되므로 전염되지 않기 위하여 접촉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8.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위하여 정결하며, 구별되는 방법은 접촉과 연관되어 있다.
1) 레위기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거룩한 하나님과는 접촉하고, 세상의 부정한 것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반복하여 말씀한다.
2) 5대제사: 하나님과의 접촉 즉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이다.
a)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정하게 된 우리, 죄로 오염된 우리를 정결하게 한다.
b) 소제, 번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함으로 언약안에 거하게 한다.
c) 특별히 제사장과 예배자가 제물을 먹는 것은 거룩과의 강력한 접촉을 말한다.
9. 하지만 언약백성이어도 부정하게 되는 일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1) 불순종으로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것처럼 짐승의 주검(시체)이 발생하면 그 주검을 옮기는 일은 해야만 한다. 즉 부정하게 되는 줄을 알면서도 주검을 옮겨야 한다. 이것은 불순종이 아니다.
2)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경제생활을 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면 부정하게 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의 부정한 것과 접촉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 심지어는 갈등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오해와 반목과 거짓이라는 부정에 접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10. 하나님은 이러한 부정은 하루동안 유지된다고 하신다.
1) 그러므로 옷을 빨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 후에 그 부정함이 없어진다고 하신다.
2) 부정과 접촉한 자는 자신의 부정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옷을 빨아야 한다.
- 신약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오염되었으면 그 오염을 인식하고 보혈로 씻어야 한다.
11. 부정하지 말도록 하는 정결규례, 부정해졌을 때 정결해지는 정결규례는 일상의 삶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구별된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일상에서 항상 기억하게 하셨다.
1) 성막,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2) 하나님은 삶의 여정에서 부정하게 되는 것도 이해하신다. 그러나 부정하게 되었음을 인식하고 보혈로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라고 말씀하신다.
12. 정결 규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정결규례의 목적은 언약백성이 되기 위함이다.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 출애굽 구원의 목적은 시내산의 “언약관계”이다.
2) 정결규례의 목적도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13.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절대 부정하게 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라고 하신다.
레 11: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1) 성도는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2) 내 영혼이 부정해졌는지,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지도 분별해야 한다.
3) 분별해야 복음을 통하여 생명의 교제로 깊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4.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하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다.
1)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듣는 것, 우리가 말하는 것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신다.
2)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마음을 드려야 하지만, 몸도 드려져야 한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3) 거룩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거룩은 몸의 거룩으로부터 시작되고 유지된다.
- 마음이 중요하나 몸이 묵상의 자리,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와야 구별된다.
4) 마음과 영은 몸이 거룩과 접촉하는지, 부정과 접촉하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15.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므로 구별된 집으로 보전해야 함이 마땅하다.
1)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셨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2)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은 만물 위 영원에 거하시면서 동시에 우리 몸 안에 내주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방해를 받는다.
3)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영적 예배, 생명의 사귐을 위해 중요하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
◈ 나의 묵상
비참해지는 용기
부정한 것과 매일 접하면서도 나는 부정하게 된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란하고 악한 것부터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까지 부정한 것들과의 접촉이 너무나 많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있는 세상에서 부정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핑계로 부정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 때마다 그 부정함을 보혈로 씻고 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다. 부정함이 반복되자 내가 부정하게 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기주장의지가 나타나고 있음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철저히 죄의 세력에 속아서 부정함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생명의 교제가 단절되는 시간은 곧 부정한 것과 접촉하는 시간이었는데, 생명의 교제 없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세상의 부정함에 오염되자 내 영혼은 교만으로 오염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된 내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된 나의 몸을 떠났는지도 모르고 사역에 매진하였다.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음을 알려 주셨다. 세상에는 비참한 것이 많다. 죄짓는 비참함, 문제로 인한 비참함...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보다 비참한 것은 없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사람의 인정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자 가장 비참했다. 그래도 감사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주님의 영광이 없으면 비참한 자임을 알게 하셔서... 그리고 메마름과 비참함을 통해 주님이 가장 귀한 분임을 알게 하셔서...
2. 복음: 구속의 은총으로 용납받는 존귀한 자.
복음서에서 주님은 부정한 자를 만지시며 치유하신다. 그 부정함을 담당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세상은 부정하다고 외면하지만 주님은 부정한 나를 만지시며 그 부정함을 담당하신다. 부정함을 보혈로 씻어 주시는 주님은 나에게 이제는 분별하라고 하신다. 정죄당하지 말고 분별하라고 하신다. 낙심하지 말고 분별하라고 하신다. 부정하게 되는 것도 분별해야 하고, 일정한 빛같이 인자하심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이 있음도 분별하라고 하신다.
죄인된 나를 사랑한 십자가의 확증,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복음으로 나아간다. 종일토록 거역하는 나를 두 팔 벌려 기다리신 예수님 품안에 거한다. 십자가의 보혈로 오염된 내 영혼을 씻는다. 그리고 나의 옛사람과 자기주장의지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무덤에서 성전을 지으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린다. 내가 죽은 그 십자가에서 새로운 산 길이 열렸다. 그리고 복음은 새로운 산 길, 생명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자녀된 권리, 하나님의 생명도 주셨다.
3. 생명: 아버지 품안에 거함,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함
내가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아버지 품으로 내 영을 인도한다. 복음이신 예수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벌거벗은 나에게 그리스도로 옷입혀 주시고, 나의 두 손을 붙들어 은혜의 보좌로 데려가신다. 목자되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영혼은 따라간다. 화목제에서, 아버지의 식탁에서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맛본다. 여기까지 지내온 것,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다. 그 은혜의 식탁에서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신 은혜로 인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
◈ 묵상 기도
주님, 먹어야할 그리스도는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세상것을 많이 먹었습니다. 목회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로 내 영혼은 날마다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교만과 하나님 노릇과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부정함이 가득찼었습니다. 주님, 지금도 그 부정성이 내 영혼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제발 저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탐심으로 붙잡으려는 것들, 안정감의 추구, 내 맘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하나님 노릇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이 인도하는 그 모든 환경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인도함따라 주 안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정하게 될 때마다 보혈로 씻고, 죄인된 나를 품으신 십자가 사랑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부정하게 되는 현실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 부정성을 통하여 낙심하기 보다는 에노스요 연약한자요 먼지와 티끌임을 아는 겸손을 나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먹는 일, 주님과 교제하는 일(접촉하는 일)에 마음이 열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결함과 부정함
레 11:1-47 / 진광교회 윤봉원 목사
1. 구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배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된 자들입니다(고후 5:17). 그래서 우리는 불신자들과는 생명도 다르며, 삶의 목표와 방편도 다르며, 그 결과도 천국과 지옥으로 완전히 다른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이 말씀을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재차 말씀하셨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거룩은 ‘구별하다’,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거룩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세속적인 것,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레 11:44).
2. 구별해야 할 것들
2.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11:1-23)
레위기 11장은 의식적인 청결에 하나의 중요한 관계가 될 수 있었던 일상적인 생활에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특징상 거룩하며 구분되고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달성할 수 있는 실제였다. 그러므로 율법은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상세한 지침들을 제공하여 모든 오염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하였다.
음식은 인간 생존의 기본이기에 식사를 고려한다는 것이 실천적 관심의 중심에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지식(folk wisdom)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직접 받는 것이다. 그런 입법들이 희생 규정으로서 동일한 권위를 분명히 가진다. 만약 그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왕국과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음식 규정들을 준수한다는 것은 의무이다.
레위기 11장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한다. 처음에는 땅-하늘-물이라는 삼중구조 속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1-23절), 나중에는 생활(生活)반경(半徑) 속에서 그것을 확인한다(24-47절).
레위기 11:1-23에서 정결한 짐승은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가축들이다(11:3). 이런 조건에서 벗어난 짐승들은 모두 부정한 것이다. 물고기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11:9-12), 새들 중에는 육식하는 것들이 부정하다(11:13-23). 이스라엘은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된 것들을 식용해서는 안 된다.
가축 중에도 식용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낙타, 사반, 토끼, 돼지 같은 것들이다(11:4-8). 이것들은 모두 외관상 되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이것들은 반추동물이 아니다. 토끼는 입놀림만 그럴 뿐 결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바위 절벽이나 돌이 많은 언덕꼭대기에 무리지어 사는 다람쥐과의 사반도 되새김질과는 거리가 멀다.
낙타도 해부학적으로는 반추동물이 아니다. 낙타를 식용으로 금한 것은 낙타가 사막의 운송수단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낙타는 고기와 젖을 내지 못한다. 번식률도 소, 양, 염소에 비해 현저히 낮다.
돼지는 고대 가나안의 황량한 기후에서 사육하기에 비효율적이다 젖도 공급하지 못하고 농사일에도 쓸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먹는 곡식(옥수수, 감자, 콩 등)을 먹고 자란다. 이것은 소나 양, 염소가 들판에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풀이나 나뭇잎을 먹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2.2. 이스라엘의 생활을 부정하게 하는 것들(11:24-47)
레위기 11:24-47은 이스라엘의 생활을 부정케 하는 것들을 규정한다. 먼저 짐승의 주검(24-40절)과 파충류가 일으키는 부정을 다룬다(41-42절). 또 정결한 짐승이라도 예배용으로 도살되지 않고 그냥 죽은 경우라면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39-40절).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나르거나 담거나 치우고 나면 부정하게 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쓰는 그릇이나 입는 옷까지도 부정하게 된다. 만약 이런 일로 누군가가 부정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한 채로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부정하게 된 자는 그 옷을 빨아야만 된다.
본문에 소개된 부정한 짐승은 모두 여덟 종류이다(29-30절). 쪽제비. 쥐, 도마뱀, 합개, 육지 악어, 주궁. 사막 도마뱀. 칠면석척이다. 이 짐승들은 모두 팔레스틴의 생활환경에서 접촉할 수 있었던 파충류이다. 만약 나무그릇, 의복, 가죽, 부대, 질그릇, 보관해 놓은 음식 등이 이들의 주검에 닿은 것으로 여겨지면 그것들은 모두 부정하게 된다.
부정하게 된 질그릇은 깨뜨려 버려야 한다. 목기 같은 것은 물로 씻어내면 된다(32절). 질그릇은 부정을 흡수하지만, 목기는 겉표면만 부정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자의 경우, 물에 담겨 있을 때에만 부정에 노출된다(37-38절).
이스라엘은 생활 속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세심하게 판별해야 한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이(11:43-45). 의식주를 구별하고, 생각을 구별하고. 몸을 구별하고, 행동을 구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누구도 부정한 상태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부정한 상태로는 하나님의 성소마저도 부정으로 오염시킬 수 있다 제사장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이 부정에서 비켜나 있어야 한다. 부정한 삶에 대한 엄격한 조처는 그래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가리울 수 있다는 것이다.
3. 초대 교회의 할례 문제로 말미암은 갈등
초대 교회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 사이에 문화적 갈등을 지니고 있었다.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우기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로 초대 교회는 시끄러웠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 종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의 멍에를 지울 필요가 없다고 확정하였다(행 15장).
유대인들은 레위기 11장과 같은 정결 규정을 자기 의를 내세우는 수단으로 남용하였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레위기 11장이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겉껍데기만 남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신앙의 참된 힘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깨끗한 손과 정결한 마음’(시 24:4)이지 어떤 형식이나 외적인 절차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 백성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결할 것을 촉구하였다(삼하 22:21-25. 욥 17:9; 22:30: 시 10:21-25; 51:9-12; 사 6:5). 죄에서 용서받아야지 외적인 조건만 깨끗해서는 안 된다고 선포한 것이다(렘 33:8; 사 35:8).
예수 또한 바리새인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의 청결을 통한 인간 구원에 그 참뜻이 있음을 밝히셨다(막 7:13-23).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악독, 속임, 살인, 탐욕,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지적하셨다.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가 우리를 부정한 굴레 속에 살게 한다고 꾸짖으셨다. 새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율법적인 의식이 사람을 깨끗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사람을 정결케 한다(딛 2:14; 히 9:14; 요일 1:7).
4.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날마다 대하는 식탁을 정결하게 간수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식탁(제단)에 올리는 음식(예물)이 정결하고 온전해야 하듯이, 사람이 날마다 대하는 식탁에서 먹는 음식도 정결하고 온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먹는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먹는 것이 결코 사람의 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몸의 보신(補身)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먹거리를 찾는 인간의 욕심이란 결코 정결한 태도가 되지 못한다. 몸보신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
사람이 조절해야 될 욕심 중에 식욕이 있다. 식욕은 성욕(性慾), 명예욕, 권세욕, 재물욕 등과 함께 사람이 다스리고 절제해야 할 대상이다. 식욕이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먹으려는 욕심을 절제하는 것은 먹는 입을, 곧 몸을 정결하게 다스리려는 노력이다.
신앙인은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레위기 11장의 결론이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레 11:44)는 말씀임을 주목해야 한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이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지켜야 할 덕목이다(참조 고전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
먹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레위기 11장의 규례나 신약의 거룩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신약의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배려는 육체적인 건강, 민족적 단일성, 하나님께 대한 예배, 마음의 순결과 육체의 순결, 경건함에 대하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여 살아감으로 현세에서의 안녕과 내세에서의 우리의 행복에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의 관심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무한히 받고 살아가는 자들로서 우리에게 주신 법칙을 따라서 매사(每事)에 구별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인공이 됩시다. 주인공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