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러시아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몸 담으면서 비밀 정보를 건넨 뒤 영국에 망명한 이중첩자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고 BBC가 21일(현지시간) 전했다. 방송은 그가 서리주 자택에서 평안하게 세상을 등진 것으로 파악했다. 대테러 경찰이 부검의를 도왔지만, 그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다뤄질 만한 것은 없었다.
고인은 러시아 첩보 기관들 내부를 두루 알아 기억만으로도 영국에 가장 가치있는 스파이였던 것으로 거론돼 왔다. KGB 대령으로 근무하던 1974년부터 1985년까지 이중첩자로 영국 MI6와 MI5에 핵심 정보를 넘겼다.
그러다 모스크바 당국이 의심하기 시작하자 1985년 간신히 빠져나갔다. 처음 체포됐을 때 약을 먹인 뒤 심문했다. 어찌어찌 풀려났는데 MI6는 탈출할 수 있는 비행 편을 마련했는데 오르기 전에 다시 체포됐다. 두 번째로 풀려난 그는 자동차 아래 몸을 숨겨 핀란드 국경을 몰래 넘었는데 당시 적발됐으면 곧바로 총살될 운명이었다. 그를 놓친 소련은 같은 해 11월 궐석 재판을 열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영국 고달밍에서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다. 냉전이 최고조로 이른 2년 전, 그는 KGB의 런던 주재원으로 그는 영국 관리자들에게 모스크바 지도자들이 서방의 핵무기 공격을 상정한 공포에 휩싸여 먼저 공격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경고했다. 그의 제보를 받아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암호명 '에이블 아처'(Able Archer)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아 핵전쟁 위기를 모면했다.
2007년 고르디예프스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주로 고위 외교관에게 포장하는 성 미카엘과 성 조지 기사단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훈장은 영국의 가공 비밀요원 제임스 본드에게도 주어졌다.
그는 같은 해 병원으로 달려가 모스크바 당국이 획책한 탈륨에 중독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려 34시간이나 의식 없었다가 깨어나 MI6가 제대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다고 공격했다.
고인이 넘긴 정보는 영국에서 언더커버 요원으로 암약하던 소련 첩보기관 요원 25명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그가 망명하자 당시 영국 외무장관 제프리 하우는 "우리 안보 위력을 위해 가장 중대한 쿠데타"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고인은 KGB 작전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1938년 10월 10일 태어난 고인의 생애를 돌아본 책 '스파이와 배신자, 냉전기 가장 위대한 스파이 이야기'(벤 매킨타이어 씀 열린책들)가 2023년 번역됐다. 아버지와 형, 장인과 장모 모두 KGB에서 근무한 첩보 가문 출신이었다. 1966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근무하게 됐을 때 서방 세계의 자유와 풍요에 큰 충격을 받았고, 2년 뒤 체코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고 결정적으로 공산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모스크바의 아내와 전화하며 자신의 고민을 토로했는데 덴마크 정보당국이 이를 감청해 MI6에게 알린 것이 그를 이중간첩으로 포섭하는 작전으로 이어졌다.
그는 돈 때문에 변절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MI6에게 미행하거나 사진을 촬영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MI6는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나아가 그가 승진하는 데 필요한 고급 정보를 건넸다. 이런 신뢰 관계가 오랜 기간 이중첩자로 소련의 비밀 정보를 수집해 넘길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우리에게는 고인 덕에 핵전쟁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와 함께, 고인과 MI6의 협력이 조금 더 일찍 진행됐더라면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격추되는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