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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존재 증명 (一般啓示의 價値)
물론 한계는 있습니다만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신 존재 증명에 관한 여러 견해들의 가치와 한계점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성을 먼저 믿음으로 전제한 후, 다음으로 변증을 시작하는 '전제주의(前提主義的)인 입장'이 개혁교회의 견해입니다만, 여기서 다루려고하는 이른바 '유신논증'(有神論證)은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접근방법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이와 같은 이론들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일반계시의 가치와 한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1. 우주론적 논증(宇宙論的 論證)
우주론적인 논증은 인과율에 근거한 것으로서 일명 인과논증(因果論證)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이 논증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는 시공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요, 따라서 인과율이 존재하는 한, 최후의 원인이되는 비의존적인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증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중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와 17-8세기의 죤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라이프니쯔(Leibnitz) 등에 의해 재진술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形而上學) 12권 7장 2절에서, 이 우주의 원인들을 소급해 올라가면 (더 이상) 원인이 없는, 영원하고 순수한 원인 곧 최종적인 원인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제일 원인'(prima causa)이 바로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삼단논법을 통하여 재진술 하였습니다.
①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변화하며, 변화하는 모든 존재는 그 변화에 대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대전제).
②이 우주 자체도 변화하고 있다(소전제).
③그러므로 우주도 변화에 대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원인은 他를 변화시키기는 하나, 그 자체는 변화되지 않는 영원한 원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결론).
이리하여 토마스는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 The unmoved Mover)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주장하였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로크도 위와 동일한 맥락에서 같은 사상을 존재론적 개념으로 재진술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실유(實有)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非存在는 존재를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우주와 인간을 산출한 존재가 그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존재는 가장 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이 논증이 가진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데이빗 흄(D.Hume)은 인과율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고, 밀(J.S.Mill)이나 소위 실증주의자 꽁트(August Comte)나 스펜스(H.Spencer) 같은 자들도 우주론적인 논증을 반박한 적이 있으며, 특별히 칸트(I.Kant) 같은 이는 인과율이 역시 하나님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 시도는 결국 끝 없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이 우주론적 논증은 이 우주가 우유적(偶有的)이고 유한하며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시작과 끝이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유한한 것이 무한한 영속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면, 용어상 자체의 모순이며 자가당착에 빠지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주론적인 논증에 있어 무엇보다 이 세계의 시작과 끝이 증명되지 않는 다면 이 논증은 아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비록 세계가 시작이 있고 따라서 그것의 제일 원인자가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고 할지라도, 그 제일 원인자가 과연 인격적인 성부 하나님이신지, 혹은 무인격적인 一者(unum)인지, 초월자인지 아니면 內在者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논리를 따라 추론한다면 제일 원인은 일련의 원인들 가운데 그 첫째이므로 유출설이 되어 무인격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인의 연속은 피조세계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신에게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과 피조세계 사이에 현격한 질적 차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증으로서는 우주가 단일한 원인, 즉 인격적이고 절대적인 원인을 가졌다는 사실을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2. 목적론적 논증(目的論的 論證)
목적론적인 논증에는 정서론(定序論)과 의장론(意匠論)이 있습니다. 전자는 거시적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리학적이며 천문학적인 증명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고, 후자는 미시적 방법으로서, 유기생물학적이며 인체생리학적인 논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서론에 의하면 우주만상이 일정한 법칙을 따라 조화와 통일을 가지고 운행되는 것을 볼 때,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신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장론에 의하면 모든 생명현상과 유기물들을 자세히 관찰해 볼 때, 그들 속에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와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의도와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대이지(大理智) 곧 신의 역사하심에 대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이 논증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바닷가를 거닐다가 시계를 하나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시계가 어떻게 해서 거기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겠습니까?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시계공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타당성을 지닐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우주만상을 바라볼 때, 형언할 수 없는 조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조화를 가능케 하신 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있는 논증입니다. 그러나 이 우주 안에는 합리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요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때로 다리가 셋인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하고, 뇌가 없는 아이가 출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불치의 병으로 어이없이 죽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경우들을 고려할 때, 이 논증은 매우 약해지고 맙니다.
3. 본체론적 논증(本體論的 論證) *존재론적 증명[存在論的證明]
우주론적 논증이 경험적인 우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귀납법적이고 경험론적이라면, 본체론적 논증은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연역적인 논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논증은 안셀무스(Anselmus: 1093-1109)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으며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와 쿠잔(Cousin: 1792-1867) 등에 의해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바 있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 영원과 최고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를 통괄하는 신의 존재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안셀무스(Anselmus)는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논증을 시도하였습니다.
①인간은 보다 더 큰 이가 사유되기 불능한 존재, 즉 무한히 완전한 실유(實有)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대전제).
②존재는 완전에 포함되는 속성이다(소전제).
③따라서 완전한 실유로서의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결론).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안셀무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두 가지 형식으로 발전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1)제 1형에 의하면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마음 깊이 느낀다. 그런데 유한과 무한, 불완전과 완전은 대비개념이다. 인간이 자기 실존에 대해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완전과 무한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과 무한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그와 같은 관념을 일으키는 완전하며 무한한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며,
(2)데카르트의 본체론적인 논증의 제 2형은 안셀무스의 논증과 유사합니다: ‘신관념 자체가 존재의 개념을 포함한다. 삼각형의 합이 2직각이라는 사실이 삼각형이란 관념 속에 포함되듯이,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성질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쿠잔의 논증은 데카르트의 본체론적 논증의 제 1형에 해당됩니다. ‘무한의 관념과 유한의 관념은 논리적 상관물로서, 그 관념을 획득하는 순서에 있어서 유한과 불완전의 관념이 무한과 완전의 관념보다 앞선다. 그럼에도 양자는 대응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유한과 불완전의 관념이 있다는 자체가 무한과 완전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무한과 완전의 관념이 단지 관념으로만 머물 뿐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기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본체론적 논증은 중세교회의 수도사였던 가우닐로(Gaunilo)나 칸트(I. Kant: 1724-1804)에 의해 심각한 비평을 받았습니다. 비평의 요지를 간추리면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됩니다.
첫째, 안셀름이 시도한 본체론적인 논증의 치명적인 과오는 관념에서 존재를 유추해 내려는데 있습니다. 예컨대 여기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꿈 속에서의 사과나무는 관념상으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 존재 여부는 천양지차입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 어떤 존재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 존재가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셀무스는 잊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 의한 비평은 가우닐로에 의해 먼저 행해졌고 칸트 역시 수납하였습니다. 둘째, 만일 안셀무스가 내세운 전제 -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재한다 - 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관념을 인정할 경우에는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하나님의 관념을 부인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또한 데카르트의 본체론적 논증 제 2형에서와 같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이 된다는 것은 삼각형의 관념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공리입니다. 그런데 증명해야 할 바를 증명하지 아니하고 삼각형의 속성을 논했으니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의 속성을 거론한 모순을 범한 셈입니다.
또한 데카르트의 논증 제 1형과 쿠잔의 논증에 대해서는 그것이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평을 할 수 있습니다. 완전과 불완전, 무한과 유한은 '언어상 상관물'로서 내용에 관한 진술이 없는 형식적인 언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무한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한하지 않은 것이 무한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또한 유한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무한하지 않은 것이 유한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데카르트와 쿠잔의 논증에서와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과 불완전의 의식 속에서 비록 무한하고 완전한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확인된 실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의견의 합일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우주론적 논증과 다른 논증들이 가지고 있었는 동일한 한계를 이 역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본체론적 논증은 칸트가 지적한 대로 관념에서 존재를 유추해 내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시도는 중세철학에 적용되었던 실재론(實在論)의 근거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일 관념이 동시에 존재를 의미한다는 중세철학의 실재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논증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칸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신존재 증명의 타당성에 대해 여지없이 비평하였습니다. 그는 다만 목적론적 논증과 도덕적 논증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을 뿐,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유추해 내려는 전통적인 유신논증의 타당성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4. 도덕적 논증(道德的 論證)
이 논증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양심이 인간의 내재적인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법칙에 의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법칙의 입법자로서 신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논증은 사람의 도덕적 행위와 그들의 현세적 번영 사이에 놓여있는 불일치를 근거로 하여,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의로운 중재자가 내세에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이 논증 역시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못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러 논증들이 상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논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한계란, 첫째, 논증을 통해 상정된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참 하나님이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논증을 통해서는 결코 신앙을 가지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며, 마지막으로, 학문적인 논증에는 항상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이 모든 한계들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有限性)과 죄성(罪性)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