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풍접초가 어둑해질 때까지 벌들이 윙윙거린다 근처에 밀랍의 상자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마을에는 벌을 키우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먼먼 채취의 본능이 들판을 펼쳐 놓았을 뿐, 모으는 맛과 내어 주는 맛이 벌과 꽃 사이에서 연대기를 기록 중이다 산 너머 절벽 아래 벌통 몇 개가 있다는데 아, 단맛의 거리란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꿀에 빠져 죽은 개미를 본 적이 있다 꿀 속에서도 눈을 뜨고 있다 쌉싸름한 맛에 길들여지는 역설의 혀는 자꾸 두꺼워지고 어린 맛, 들뜬 단맛은 점점 나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오후의 꽃밭을 유영하다 되돌아가는 일벌들의 행로는 까마득하고 밀원지는 멀다 단맛의 반경 안엔 분명 내 입안에서 뛰어놀던 노래와 철 따라 채밀되던 꽃들이 있었을 터, 쓴맛을 본 아이들은 한 뼘씩 자랐다 벌들이 모두 떠났는데도 저녁놀 속으로 풍접초가 붕붕거린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3.01.09. -
벌들은 이른 아침부터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쉴 새 없이 꿀을 딴다. 벌통 근처에는 꽃이 부족해 점점 더 먼 곳으로 날아간다. 기후위기와 지나친 채취 본능이 생존마저 위협한다. 풍접초의 꽃말처럼 불안정한 삶이다. 여기에 애써 모은 꿀을 빼앗으려는 자들도 있다. 약탈이라는 “들뜬 단맛”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꿀에 빠져 죽은 개미”처럼 파멸로 이어진다. 꿀벌들은 양식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내가 노력해 얻은 것이라야 진정 가치가 있다.
일벌만 그러할까. 시인은 꿀의 단맛을 통해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한다. 여왕벌처럼 단맛을 즐기는 사이 “쓴맛을 본 아이들”을 환기하며 반성한다. 해종일 꿀을 모으는 일벌은 노동자로, “절벽 아래 벌통”은 집으로 환치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빼앗기고, 부양하느라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노동자들 탓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이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멸종하고, 인류도 4년 이상 존속할 수 없다고 했다. 노동을 천시하면 결국 공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