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우동 외 2편
현택훈
때로는 허기만 채워도 벗님을 잊어버린다
오래전에 누군가 밤에 불을 피운 것이
이 마을의 설촌 유래로 전해온다
밤에 우동 한 그릇이 여기 있어
내가 있는 이곳은 따뜻한 마을이 된다
추억은 고명이 되어 라디오 주파수를 흐르고
낯선 집 앞을 지날 때는
조금 움츠러들긴 하지만
밤구름이 돌담 틈에서 넘살거리는
이곳은 개 짖는 소리부터 그리운 세계
때깔 고운 사람이 되어
무반주
어둠이 도마뱀을 삼키자 제법 빨라졌다
반나절 동안 구름은 바람의 호흡을
따라 하느라 많이 묽어졌다
서둘러 떠난 너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여기겠지만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파도는 혼자 꾸는 꿈이기에
기회다 싶으면 사라질 것
노루 출몰 경계 표지판처럼
경고 메시지가 불쑥불쑥 도착한다
산 몇 번 넘으면 계절이 바뀌는 들개에게도
안온한 영역이 존재해야 하므로
어둠을 끼얹은 당신은 팔짱을 낀 채 휘파람을
불고 짙은, 검푸른, 산남에서
목소리조차 모두 여음이다
우리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기를
살아있는 음악들의 밤
그때는 꽤 살아있었다
자정을 넘기면 귀신이 나올 것을
두려워할 줄도 알았다
손전등이 생활필수품일 정도로
어두운 마음이 살가웠다
음악은 좀비처럼 끈질기게 질척거리고,
금성카세트라디오는
낮에는 엄마의 베란다가 되어 주었고,
밤에는 나의 다락방이 되어 주었다
노래는 상비약처럼 곁에 둘 만했다
엽서에 적었던 마음은
시의적절하게 잠들었으니
동네 입구 버스 정류장에 내리는 일이
꿈만 같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음악들이
동서남북 종이접기 운명에 맡기며
그때는 어느 정도 살아있었다
사랑하는 음악들이
지금 되돌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적당히 살아있었다
그럭저럭 살아있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쿨피스를 대접하는 마음의
음악들이
― 현택훈 시집, 『마음에 드는 글씨』(한그루 / 2023)
현택훈
제주 출생.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제주어 마음사전』, 『제주북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