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쓴 맛’이라는 말이 있다. 조폭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더 가열차게 진행되기도 한다. 비합법 운동 시절이라고 불리던 80년대 초, 철벽보안을 유지하며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조직 내에서는 더욱 그랬다.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구성원에게는 혹독한 자아비판을 거친 뒤 제명 조치가 따르기도 했다. 나도 아끼는 후배를 조직에서 제명하는 결정을 해보기도 했고, 나 스스로는 제명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버금가는 결정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 사연을 구구절절 만연체로 엮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 저녁, 공단 입구 전자제품 가게를 지나가는데 TV 뉴스 화면에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람의 얼굴이 얼핏 아버님처럼 보였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을 사서 보니 아버님이 ‘국민교육헌장 반포 기념일’ - 이런 웃기는 기념행사가 몇 년 전까지도 있었다 - 에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으신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똥물’이 튀어 수배되는 바람에 10개월 넘게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수출공단 입구에 방을 하나 얻어 야학 일을 하며 지내고 있던 나는 모처럼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했다.
“아버님, 축하드립니다.”
“집안 꼴이 이게 뭐냐. 애비는 훈장을 받는데, 아들은 도망이나 다니고...”
“죄송합니다...”
“보안사에서 학교까지 좀 안 찾아오게 할 수 없냐? 내가 선생님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예...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잘 지내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은 훈장과 함께 황금색 대통령 봉황 문장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하나 선물로 받으셨다. 시계 뒷판에 대통령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시계였다.
결혼할 무렵, 변변한 시계가 없던 나는 아버님이 15년 쯤 차고 다니셨던 일제 시계 하나를 물려받았다. 동경올림픽인가 만국박람회인가를 기념해 일본의 기술력을 모아 만들었다는 ‘25석 맷돌 시계’라고, 아는 사람들은 꽤 알아주는 모델이었다. 따로 결혼 예물을 마련하지 않은 채, 그 시계를 차고 결혼식을 올렸다.
몇 년 뒤 아버님은 정년퇴임 하시면서 동백장인가 하는 국민훈장을 하나 더 받으셨다.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시계도 또 하나 받으셨다. 결혼할 때 물려받았던 시계가 자꾸 고장을 일으켜 불편했던 나는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먼저번 대통령한테 받은 시계는 저 주시지요.”
“그래라.”
나는 시계를 또 아버님께 물려받았다. 우리들이 ‘살인마’라고 부르며 규탄했던 대통령의 이름이 뒷판에 새겨진 게 꺼림칙했지만, 그냥 차고 다녔다. 한 번은, 검문하던 경찰이 그 시계의 황금색 대통령 봉황 문장을 보더니 “공직에 계시군요.”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공손해지기도 했다. 그때는 권력의 위세가 그렇게 등등했다. 작은 권력의 맛이라도 본 사람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할 만도 하다.
몇 년 뒤, 나는 ‘조직의 쓴맛’을 아주 제대로 겪었다. 유난히 가까운 사이였던 어제까지의 동지가 어느날 갑자기 적이 되었다. 내가 참석하지 못한 회의에서 내 후배였던 그 ‘어제의 동지’는 활동가로서 적합하지 못한 하종강의 문제점들을 주욱 적어와 사람들 앞에서 조목조목 열거했는데, 비판 받아 마땅한 반동으로서의 내 비리들 중에는 “살인마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무감각하게 차고 다닐 만큼 역사의식을 상실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 외에도 열 몇 가지의 이유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는데, 사람들은 그 후배의 모습을 보며 “하종강에게 배운 실력을 저렇게 써 먹나?”라면서 혀를 찼다고 한다. 모두 침소봉대이거나 허무맹랑한 왜곡이었지만 나는 그 후배와 똑 같은 사람이 돼 맞서 싸우기를 포기했다. 그것이 나와 조직을 모두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 지나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지적 받은 나의 문제점들 중에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며 웃는다.
“하종강은 조직의 모든 교육 사업 일체에서 손을 뗀다”는 결정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 편을 드는 후배들은 분노했지만 “나의 부족한 계급성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잠시 활동을 쉬었을 뿐이지만, 나를 조직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후배는 과도한 욕심이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돼 정치적 생명에 큰 손상을 입었고 그 뒤 활동이 어려워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버렸다. 지방을 돌아다니느라 시계가 없으면 많이 불편했지만 불편을 느낄 때마다 ‘다시는 사람을 잘 못 보는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자는 깊은 뜻이 있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그렇게 시계 없이 살았다.
그 비슷한 일을 호되게 한 번 더 겪었다. 한동안 “하종강이 정보기관의 프락치 같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그것 역시 또 다른 ‘어제의 동지’가 은밀히 퍼뜨린 소문이었다. 내 자취방으로 찾아와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총력을 모아 전면적으로 대응하자”고 흥분하는 후배들을 타일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계속 만나면 자연스럽게 풀릴 오해이고, 앞으로 만날 일이 없어 오해를 풀 기회가 없다면, 만날 일이 없는 관계이니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공자님처럼 말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오해는 한낱 웃음거리가 됐고, 은밀히 소문을 냈던 친구는 한동안 무역업을 하다가 사기 혐의로 도피 중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요즘은 소식을 아는 이가 없다. 그토록 치열했던 동료들보다 내가 더 오래 노동자들 곁에 남아있는 셈이다.
‘다시는 조직사업 근처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그런 연유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과업이지만 그러한 상처들을 계속 이겨내야 하는 가혹한 싸움이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작은 단체라도 조직을 책임지는 직책을 맡은 활동가들을 가끔 만나면 존경심이 우러난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일을 여전히 감당하고 있는 활동가들이기 때문이다.
노동 상담을 나의 영역으로 선택했을 때, 비판하는 후배들이 많았다. “기껏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선배라고 여기지 않았다”고 했고 “그만 편하게 살아라. 빨리 거기서 기어나와라”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단체나 조직들이 총회를 열어 새로운 책임자들을 뽑는 연말이 되면 한동안 시달렸다. 그때마다 나는 “노동 상담을 선택했다는 것은 운동권 내에서도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담 활동을 통해 조직에 중심에 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배 째라”는 식으로 버티었다. “어제 회의를 했는데 ‘하종강은 자학 증세가 있는 것 같다’고 결론 내렸어요. 그것밖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없어요”라고 농담처럼 말한 후배들도 있었다. 문래공원 벤치에 앉아 그 최후통첩을 전해주러 왔던 이들 중 한 사람은 지금 실력 있는 여성학 전공 학자가 됐고, 또 한 사람은 공인노무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내가 30년 동안 한 길을 걸었다고,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대학교 총학생회 간부 청년들이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나이 먹도록 그런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 답했다. “두 가지만 결심하면 됩니다. 첫째, 돈을 많이 벌지는 않겠다. 둘째, 반드시 출세하지는 않겠다. 운동권 내에서라도 꼭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겠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학생들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우리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결심이군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다행히도 그 결심이 쉬운 경우에 속했다. 그래서 가능했을 뿐이다.
우리 집 아이들이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진보단체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고 했을 때,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이 있다. “철학이나 세계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어 변절했다기보다 동료들에게 받은 상처를 이기지 못해 운동을 떠난 사람들이 더 많았다. 활동하다보면 언젠가는 동료들로부터 상처 받게 되는 날이 올 테니, 그때 그 상처를 이겨내야 오래 활동할 수 있다.”
진보정당에 자원봉사하러 첫 출근하는 아들아이에게도 말했다. “운동권이라고 다 인격이 훌륭한 것은 아니니까, 혹시 꼴사납게 구는 놈이 보이더라도 꾹 참고 열심히 일해.” 아들아이가 답했다. “그건 내가 잘 알지. 평소 집에서 아빠를 봐왔으니까... 흐흐”
6년 동안 강의했던 대학에서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이번 학기에 시간강사직에서 해촉됐다. 고상하게 해촉이라고 하지만 ‘짤렸다’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는 표현이다. 개강한 뒤에 보니 “예외적 상황(변호사, 회계사 등)을 제외하고는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만 채용한다”는 원칙을 유독 나한테만 엄격하게 적용했다는 후문이다.
같은 시기에 20여 년 동안 운영했던 한울노동문제연구소도 문을 닫았다. 명실상부하게 실직자가 됐다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평소 노동문제에 대해 온정적으로 접근해 온 하종강이 자신의 해고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두고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이도 있었고 “프롤레타리아 무장투쟁을 강조하지 않는 앵벌이 노동운동가의 한계”라고 따끔한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말들이 대부분 일리 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한 말을 들을 만한 면이 나에게 전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내세워 대중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중요한 내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설사 그것을 신봉한다해도 대중 강연이나 언론매체 칼럼에서 무장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올바른 전술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사실, 대학 강의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10년쯤 전,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로부터 대학 강의를 한번 해보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우리 연구소에서 그 문제로 간단한 회의가 열렸는데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가 복잡하게 얽힐 때마다 칼날처럼 예리한 판단으로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공인노무사 연구실장은 “우리 남편이라면 하라고 권하겠는데, 하 선배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봐요. 정체성에 변화가 생길 거예요”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수업 준비하랴, 시험 보랴, 과제 내고 평가하랴, 학점 매기랴... 등의 업무들을 제대로 해 내려면 생활 패턴에 변화가 오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우리 노동문제연구소나 노동운동가로서 하종강의 알량한 정체성이 자칫 지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염려였다. 몇 년 뒤, 건강 때문에 두어 번 크게 고생하고 나서야, 인천대학교에서 강의 제의를 받았을 때 ‘지방 일정을 좀 줄여보자’는 요량으로 넙죽 받았다.
한홍구 교수는 “우리 대학 강의를 못하겠다고 한 사람이 나중에 인천대 강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사실 좀 섭섭했다”며 이제야 뒤끝을 드러냈다. “성공회대에는 노동문제를 강의할 수 있는 교수들이 많지만 인천대는 그렇지 못하니 취약한 곳을 도와주기로 했나보다”고 좋게 받아들였다는 ‘꿈보다 해몽’도 곁들였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수강신청일 며칠 전, 총학생회 간부 학생이 “이번 학기에 강의가 개설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대학 당국과 싸워 다시 개설하려고 합니다”라는 연락을 했을 때, 나는 참 못나게 말해버렸다. “대학 강의를 못하게 된 것이 나로서는 꼭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어서, 나는 이미 마음을 비웠으니까, 너무 힘들게 싸우지는 마.” 학생이 점잖고 진솔한 목소리로 답했다. “교수님이 강의를 계속 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계셔야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나는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다”고 사과했다. 스승보다 훌륭한 제자란 바로 이런 때 하는 말이다.
인천대학교와 언론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기대보다 몇 배나 많은 글들이 올라와서 놀랐다. 한 언론매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백 개가 훨씬 넘었다. 악플이 거의 없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반대하는 댓글들도 대부분 “박사학위 소지자를 임용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그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였는데, 박사학위 없는 다른 강사들은 여전히 강의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게시판에 쓴, 내 강의가 계속돼야 하는 구구절절한 이유들이 나에게는 모두 감동스러운 내용들이지만 학교나 정부 당국자가 보기에는 모두 ‘강의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 주소다.
최근 한 대학에서 아주 좋은 제안을 받았다. 나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주변 가까운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송구스럽게도 “연구실은 벌써 마련했으니 빨리 마음을 결정하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망설이고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나는 아직 노동운동가로서의 알량한 정체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공동선> 2011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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