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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의 정결의식
레 12:1-8
(레 1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 12: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레 12:3)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레 12:4)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레 12:5)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레 12:6)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 12: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 12:8)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 12:1-8 / [산모를 깨끗게 하는 절차]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여자가 아이를 가져 사내아이를 낳았으면 달거리를 하는 동안 부정한 것처럼 이레 동안 부정하다. 3)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그 사내아이의 포피 끝을 잘라내는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 4) 그는 이레 동안을 지내고 나서도 산혈이 멈출 때까지 33일 동안을 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몸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기간 안에는 거룩한 물건은 어떤 것이든지 만져서는 안 되며 성소에 들어가서도 안 된다. 5) 여자가 계집아이를 낳았으면 달거리를 할 때 부정한 것처럼 두 이레 동안 부정하다. 그는 산혈이 멎어 깨끗해질 때까지 66일간을 집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한다. 6) 딸을 낳았든 아들을 낳았든 아이를 낳은 여자가 몸을 깨끗이 하는 기간이 끝났으면 번제물로 한살박이 어린 숫양을 마련하고 속죄제물로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마련하여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장막 문간으로 가지고 와 제사장에게 드려라. 7) 제사장은 산모가 바친 그 제물을 여호와께 드려라. 그러면 아기를 낳느라고 피흘려 부정해진 몸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 규정은 계집아이를 낳든 사내아이를 낳든 산모가 지켜야 할 규정이다. 8) 만일 산모가 어린 양이나 염소 한마리조차 바칠 여유가 없으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마련하여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속죄제로 바쳐 제사장이 그의 부정을 벗겨 주면 그의 몸은 깨끗해질 것이다.'
본문은 아이를 낳은 산모에 대한 규례입니다.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을 때와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의 부정한 기간과 정결 의식에 대한 규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1-4) / 사내 아이를 낳은 여인은 의식법상 일주일 동안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는 할례를 행하고, 33일이 지나기까지 성물을 만지지도 말고,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산모는 총 40일이 지나야 의식적인 부정 상태에서 벗어나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정 기간을 두고 있는 것은 산모나 신생아가 모두 외부 저항이 약해진 상태이므로 외부와 격리한다는 위생상의 의미도 있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부정한 존재(원죄)라는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를 낳으면(5) / 여자 아이를 출산했을 때 정결하게 되기까지의 기간은 사내 아이의 출산할 때보다 두 배나 길었습니다. 이 사실만 보면 하나님께서 남녀 성차별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는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볼 때 성차별의 차원에서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부정한 기간에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하여 성경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을 때 남자가 아닌 여자가 유혹받고 먼저 죄를 범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고, 또한 임마누엘의 앞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할 남아를 낳는 것을 선호하는 사상이라고 이해합니다(딤전 2:13-14).
정결하게 하는 기한이 차면(6-8) /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찬 산모는 최종적인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려야만 했습니다.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드린 제사로서 산모의 가정 형편이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린 양이나 비둘기 중 선택하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을 제거하는 정결 의식으로 드렸습니다. 율법의 규례는 인간을 얽어매고 괴롭게 하는 의미가 아니라 죄악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기 위함으로 받아야 합니다(롬 3:30; 7:7).
적용: 산모는 정결 예식을 위하여 자기 형편에 따라 감사함으로 정성껏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한나는 율법에 명시된 규정을 따라 7일 동안 산모의 방에 격리되었습니다. 율법은 아이를 낳은 산모를 부정한 상태로 규정하여 격리를 명령했는데 격리 기간은 딸 출산은 14일, 아들일 경우 7일이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산모인 한나의 방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했는데 만일 이 7일 동안에 누군가 부정한 산모와 접촉한다면 그 사람도 부정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식사와 수발을 위해 엘가나의 여동생인 엘리사벳이 그녀의 방을 출입했습니다. 물론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부정케 되는 것을 감수했을 것입니다.
산모의 정결 규례
레위기 12:1-8 / 피영민 목사
서론
레위기 12장은 성경을 순차적으로 강해하는 사람 이외에는 잘 설교하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으니, 한 번쯤 꼭 읽고 생각해 봐야 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은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복음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2세기 경에 활동했던 이단에 속한 장로요, 신학자였던 ‘마르시온’(Marcion)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계, 신약의 하나님은 영계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열등하고, 신약은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도 복음이고, 신약도 복음입니다. 구약은 ‘예표로 증거된 복음’이고, 신약은 ‘실체로 증거된 복음’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구약은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이고, 신약은 논문의 형식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산모의 정결규례에 대한 말씀은 이미 폐지된 의식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원의 복음을 놀랍게 제시하고 있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2장은 세 가지 규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Ⅰ. 산모의 정결케 되는 기한에 관한 규례
이스라엘의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7일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경도할 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5장 19절에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일반적으로 생리를 하는 것과 같이 해산을 하면 7일간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7일은 부정한 기간이고, 33일은 정결케 되는 기간입니다. 둘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결케 되는 기간에는 단지 성물을 만지지 못하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며, 부정한 기간에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남아를 낳은 경우 산모는 7일과 33일을 합쳐 도합 40일 동안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아를 낳으면 그 기간은 두 배가 됩니다. 부정기간이 14일이 되고, 산혈이 깨끗해지는 정결기간도 66일 소요됩니다. 그러니까 딸을 낳은 산모는 도합 80일 동안 성소나 성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여인이 자녀를 많이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겨지는데, “왜 이 복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기간을 거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복된 기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다산이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큰 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장례식장을 가보면 자녀가 많은 분은 화환도 많고 손님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녀가 한 명 밖에 없는 분의 장례식장에는 손님도 많지 않고 한산하고 쓸쓸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망하게 되면 북한의 김정은 때문이 아니라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서 망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이대로 계속 줄어들게 되면 2050년 기준으로 필리핀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으셔야 합니다. 젊은 가정들은 자녀 많이 낳기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별로 억울할 것이 없지만,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 되려면 우선 인구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큰 복입니다. 물론 자녀를 양육하고 기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훗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시편 127편 3~5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9절에도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많이 낳아서 집안이 번성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신명기 28장 11절에도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의 소생이 많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 딸을 해산하면 80일의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했을까요? 왜 부정한 기간이라는 용어로 어감도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우선 이 질문에 대해서 생물학적인 답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해산한 산모는 온 몸의 뼈마디가 풀어지고 연약해졌기 때문에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고 난 이후 제대로 회복하지 않으면 평생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은 산후조리를 보통 따뜻한 곳에서 하는데, 미국 여자들은 산후에 찬 물로 샤워를 한다고 합니다. 산후조리 방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후에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입니다.
둘째, 자녀를 낳은 후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그럴 듯합니다.
셋째, 해산 후 요리나 빨래, 청소와 같은 가사 활동을 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으면 남편이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병이 들기 쉽습니다. 산후 조리하는 아내에게 가사 활동을 요구한 사람은 반성과 회개가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도 미역국을 제 손으로 직접 끓여 먹었는데, 도저히 맛이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장모님이 오셔서 끓여주는 미역국을 한 달 동안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넷째, 태아에게 신선한 초유를 공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소젖을 먹이게 되면 소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이 머리가 소처럼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우유를 잘못 먹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유를 잘 먹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격리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물학적인 설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러면 회복기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명명했을까요? 생물학적인 답변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모가 정결케 되는 기간 40일과 80일은 단순히 가사 활동을 쉬고,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간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정한 기간이고, 정결케 되는 기간으로 성소와 성물로부터도 분리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격리 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부정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남자나 여자나 태어날 때에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기간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원죄를 지닌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원죄’(Original Sin)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원죄사상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같이 훌륭한 사람도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욥기 14장 4절에도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25장 4절에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출생은 원죄를 지닌 남자와 원죄를 지닌 여자가 결혼을 해서 원죄를 지닌 자녀들을 출산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범죄를 짓기 이전에도 이미 원죄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리가 구약성경에 산발적으로 계시되어 있다가 신약성경에 와서 명확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2장은 이 복음을 그림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죄 사상을 하나의 논문 형태로 명확하게 선포했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정립한 사람이 5세기에 활동했던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입니다.
산모에게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원죄를 지닌 존재이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범죄를 짓기 때문에 비로소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고, 딸을 낳으면 8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할까요? 학자마다 견해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들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간을 반으로 줄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합당한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딸을 낳은 경우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순서를 잘 보면 원래 8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4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80일로 늘어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일이란 기간은 시험의 기간 또는 준비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40주 40야 동안 비가 내려 산까지 덮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거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여 주시도록 기도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어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가는데도 40주야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일간 부활의 몸을 보이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해산한 후에도 정결기간의 기준은 40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아의 경우는 80일로 늘어났을까요? 여기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이 대답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를 열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남자는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동성끼리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로 후손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입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자연적인 임신의 과정을 거쳐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특권이자 여자만 갖는 기능입니다.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100% 하나님이시고,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인간구원을 위한 경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순종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집행하셔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시는 것뿐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순종하신다고 해서 성부 아버지보다 본질상 열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하고, 남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여자도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어”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아담의 말을 대충 듣고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범죄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무 죄가 없다고 말을 하지만,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죽지 않아야 합니다. 사망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원죄를 초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 아이를 낳을 때 정결케 되는 기간을 두 배로 하신 것입니다. 원죄를 초래하는데 여자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대부분 원죄를 초래한 여성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유념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주제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고다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사람이 이 문제로 씨름하며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로병사가 그 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를 통해 극복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언약으로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Ⅱ. 남아가 팔 일 만에 받아야 하는 할례의 규례
남아의 경우 난지 7일이 지나고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숫자 ‘7’은 완전수를 의미하고, ‘8’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7일인 안식일이 지나고 제8일째 되던 날 부활하셨습니다. 숫자 ‘8’은 부활의 숫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할례는 영어로 ‘Circumcision’이라고 합니다. ‘표피를 잘라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브리트 밀라’라고 합니다. ‘브리트’는 ‘언약’을 뜻하는 ‘베리트’에서 변형된 단어이고, ‘밀라’는 ‘자르다’를 뜻하는 히브리 동사 ‘물’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리트 밀라’라고 하는 것은 ‘언약의 할례’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두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너희와 언약을 맺었다”는 증거로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0~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피를 베고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너희가 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할례는 단순히 예표일 뿐입니다. 그 실체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 2장 29절에도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도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의 할례, 마음의 할례 곧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하나님의 택하신 아브라함 후손들과 맺은 언약의 표증인 것처럼 신약에 마음의 할례는 곧 거듭남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원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은 원죄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언약으로 택하신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 즉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에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Ⅲ. 정결기한 후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규례
정결케 되는 기한이 끝나면 산모는 제사장에게로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40일 또는 80일이 지난 경우 일 년 된 어린양을 제사장에게 번제물로 가져다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려야 합니다.
번제와 속죄제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가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순종하셔서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고 다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사신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치를 수 없는 죗값을 대신 치르시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공로로 죄인들은 원죄와 자범죄를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를 옷처럼 입혀주실 것입니다.
또 가난해서 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는 은혜의 대상이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 론
레위기 12장은 인간이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고, 원죄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습게 여길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언약적인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시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갖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회를 주시는 주님
레 12:1-8 / 박봉수 목사
운동경기 진행방식 가운데 ‘토너먼트’(tournament)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 경기 때마다 승자는 올라가고 패자는 탈락하는 방식으로, 우승은 최후에 남은 두 사람 또는 두 팀이 대결하여 승자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참가자가 많은 경기에서 비교적 단기간에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에 중요한 단점이 하나있습니다. 승자만을 뽑는 방식이기 때문에 패자는 더 이상 대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합에서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거나 또는 실수를 해서 패하면, 더 이상 실력을 발휘해볼 기회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경기방식이 이 토너먼트 방식을 보완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패자부활전입니다. 이 방식은 두 개의 경기조가 있습니다. 하나는 승자조이고, 다른 하나는 패자조입니다. 승자조는 승자들끼리 경기해서 올라가는 조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패자조는 패자들끼리 경기해서 올라가는 조를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승자조의 최종 승자와 패자조의 최종 승자가 결승전을 갖습니다. 물론 이 결승전에서 승자가 이기면 우승입니다. 만일 승자가 지면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줍니다.
이 패자부활전은 패자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한 번의 실수로 패한 사람을 ‘루저’(loser)라고 내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경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실패한 사람도 다시 한 번 실패를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이 패자부활전은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됩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토너먼트처럼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시험에 실패하면 루저가 되어버립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습니다. 패자부활전과 같은 기회가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최근 우리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신조어 가운데 ‘수저계급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는데, 그것을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금수저’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흙수저’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고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신조어가 크게 공감을 얻게 되고 널리 확산되게 된 것은 오늘의 청년들의 딱한 상황 때문입니다. 참 많은 청년들이 능력이 있고 최선을 다해서 실력을 쌓아도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부모라는 배경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홀로 몸부림쳐보지만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청년들은 대입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제대로 된 스펙을 쌓지 못했습니다. 취업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청년들은 능력도 없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잘나갑니다. 단지 부모의 든든한 배경 때문에 앞길이 창창해 보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많은 청년들이 그 불평등한 상황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패자들은 다시 기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약자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수한 사람들, 실패했던 사람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이 절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선 약자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대표적인 약자였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여덟 형제들 가운데서도 눈에 띠지 않던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셔서 다윗을 택하게 하시고 그를 왕으로 기름 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자였던 다윗에게 남다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한 예로 모세가 그렇습니다. 그는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 숨어 40년을 살았습니다. 세상나라에서 그는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이 80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패자였던 모세에게 남다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어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일 지라도 기회를 주십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을 지라도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더욱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새롭게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해하시는 주님
오늘 본문은 출산한 여인에 대한 정결예식의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임산부가 출산할 때 피를 흘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정해지게 되는데, 다시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밟아야 할 절차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4절입니다.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임산부가 출산 후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여인이 생리로 출혈이 생길 때는 7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출산도 마찬가지로 이 기간만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산은 생리와 달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쓴 시들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한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너무도 정확하고 세밀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최상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 139:1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세하게 살펴보셔서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2-5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아시고, 자기가 하는 말도 다 아시고, 그리고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를 다 아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 55편을 보면 자신이 당하는 핍박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도 다 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시 51편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도 낱낱이 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 63편을 보면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묵상하는 것과 그리고 시 51편을 보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다윗은 시 139:6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아시는 그 지식이 너무도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 놀라고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도 잘 이해하시고 자신에게 꼭 맞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속속들이 아셨던 것처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다윗을 이해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맞는 기회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배려하시는 주님
오늘 본문을 보면 출산한 산모가 7일간 부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33일이 더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야 정결하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은 성물을 만질 수도 없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뿐이 아닙니다.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게 하고, 외부인을 만나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모와 아기를 위생보건 측면에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전에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양에 관한 프로그램입니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같은 산비탈에 살고 있었습니다. 길도 없는 바위틈을 따라 오르내립니다. 때론 그곳을 뛰어내립니다. 거의 곡예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산양이 사는 곳 주변에 히말라야 표범인 설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산양을 주된 먹이로 삼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때는 설표가 이 산양을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산양이 살고 있는 곳이 너무도 가파르고 험해서 다가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숨어서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산양을 잡는다든지, 산양이 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를 기다렸다가 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별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산악지형은 산양들에게는 피난처요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 104:18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하나님께서 이런 산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 높은 산들을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짐승을 보호하시기 위해 이렇게 특별한 배려를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을 지켜주시기 위해 특별한 피난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패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특별한 요새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저들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딜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배려하십니다. 특히 자기 힘으로 삶을 지탱하기 힘든 연약한 사람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리고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곁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십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우리를 암탉이 새끼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보호하듯 따뜻하게 배려해 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 6-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 말씀은 출산을 통해 부정해진 여인이 다시 정결하게 되는 구체적인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부정해 진 여인이 다시 정결해 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 기회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한 절차를 통해서 규례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큰 실수를 저질렀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 26:7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뒤 마침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 회개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미리 아시고,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실패한 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은 단연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런데 링컨의 삶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대부분 실패의 고통 속에서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만 27번이나 실패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언론은 “실패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부분인 51살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보란 듯이 성공합니다. 사람들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링컨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누구보다 실패를 많이 한 것이 성공을 이룬 비결입니다. 전 실패를 할 때마다 실패에 담긴 뜻을 배웠고, 그것을 징검다리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또 링컨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제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미끄러져 길 바깥으로 곤두박질 치곤했죠. 하지만 저는 곧 기운을 차리고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하지만 낭떠러지는 아니야.“
그렇습니다. 링컨은 흙수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늘 기도하면서 실패 후에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출산한 여인이 가난하여 율법에 규정된 제물을 바칠 수 없다면 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셔도 잡지 못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쉬운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얻을 때는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링컨이 그 많은 실패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다시 기회를 얻을 때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나의 믿음과 용기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하여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실패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더욱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잘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모의 정결 규례
레 12:1-8 / 전희성 목사
죄악 중에서 출생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리니 하였는데 출산을 부정한 것이라고 했다. 출산에 대한 규례는 영적이면서도 성서적인 의미를 주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의 죄과가 출생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출생과 함께 죄악이 전달되는 것이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라고 했다. 인간은 날때부터 죄의 씨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도 인간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없다. 산모는 정결법을 지키므로 깨끗하여질 수 있다.
산모의 정결기간
출산으로 인하여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며 딸의 경우는 14일간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깨끗케 된다. 그러므로 아들의 경우는 40일, 딸의 경우는 80일 동안 산부는 성물을 먹거나 성소 출입이 금지된다. 딸을 낳으면 아들보다 두배의 정결기간을 요구하였다. 성경에서 40일간은 특별한 연단의 기간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시내산에서 40일간 보냈고(출24:18) 엘리야가 호렙산까지 40일간 걸어왔으며(왕하19:8)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이 40년이었고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하시기전 40일간 금식하셨다.
죄악의 정결방법
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죄의 근본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못된 죄악의 본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해결의 방법은 속죄의 피다. 남자아기를 위해서는 할례를 행할 것과 산모를 위해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였다. 할례를 행할 때 피를 흘리므로 성별의 표를 갖게 되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므로 희생의 피로써 성결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성결케 하심을 뜻한다.
지난 주일에는 레위기 11장을 통하여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동물을 말씀하여 주셨고, 오늘 12장에서는 산모의 정결규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 성결케 하라,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같이 느껴질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레위기를 우리가 많이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깨끗하게 하시려고, 또한 우리를 더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시려고 세밀하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12장 서두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하고, 믿으라 하시면 믿고, 기도하라 하시면 기도하고, 사랑하라 하시면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사정과 상관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보라고 하시면 보아야 합니다. 누가 보아야 합니까?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사람은 공중의 나는 새를 보아야 합니다. 들의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면 보아야 합니다. 입을 옷 때문에 고민하고, 옷 때문에 마음 상하여 있는 사람은 들의 핀 백합화를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입히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순종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레위기의 내용을 저 먼 옛날 구약시대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씀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그런 것은 지켜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였기에 영적교훈을 얻고 믿음으로 지키면 됩니다. 실천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산모가 출산을 했을 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산모가 출산을 하면 왜 부정하다고 하신 겁니까? 창 1:28을 보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고, 시 127: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며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산모의 출산이 부정한 것입니까? 12장 4절, 5절, 7절에 보면 산혈 때문입니다. 피의 유출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모는 산후 정결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어야 하고, 출생한 자녀가 하나님의 주신 기업으로서 축복과 상급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산모가 출산할 때 언제나 인간의 죄악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리니 하셨는데 출산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출산에 대한 규례는 영적이면서도 성서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의 죄과가 출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유전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부정한 것인데 죄의 유전이라는 차원에서 출산을 부정하게 본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를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 고 하셨고,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 수고하여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자녀를 낳는 기쁨 뒷면에는 원죄에 대한 참혹한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해산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없습니다. 여자이니까 그 고통을 참아내지, 남자 같으면 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참는데는 남자보다 여자가 9배나 더 참는다고 합니다. 해산의 고통,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아니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해산의 고통을 당해 보았습니다. 해산하는 제 아내 곁에서 해산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첫 아이를 해산할 때, 의사가 촉진제를 미리 놓아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해산의 고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호기심도 생기고, 또 위로도 할 생각으로 침대 옆에 서 있었습니다.
마지막 진통을 시작하는데 침대를 꽉 붙잡은 제 아내의 손안에 제 손가락 한 개가 끼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잡고 진통하며 힘을 주는지 그 손가락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 손가락이 새파랗게 죽었습니다. 이틀 동안 그 손가락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람 속에서 사람이 나오는 고통은 손가락 열 개가 부서지는 고통보다 클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비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찾아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5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면 생명을 잉태한 기쁨과 감사와 함께 하나님께 죄와 허물을 생각하고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임신의 기쁨만 가지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배가 불러올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임신만 하면 교회도 안나오고, 기도도 잘 안하고 신앙생활을 접어 둡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이지만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날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 앞에 기도하지 않는 임부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그 순간에는 도와 달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 간호사 보고 도와 달라고 합니다. 간호사가 좀 참으라고 하면 너는 애 안 낳느냐 고 소리지릅니다. 해산할 때 도와주지 않으면 오래오래 한이 됩니다. 해산의 고통은 범죄한 결과임을 믿고 주님 앞에 용서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구석구석에 만연한 죄악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류의 시조가 범죄한 때문입니다. 로마서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원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모든 사람이 행동으로 범한 죄가 아니고 아담 안에서 범한 죄입니다. 인류의 시조에서 유래된 것이고, 출생 때부터 가지고 오는 죄악입니다.
사람이 태어날때는 순수하고 죄없이 태어났는데 악한 세상의 영향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때부터 죄악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하기를 흑인의 피부를 희게 할 수 없고, 표범의 얼룩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죄에 물든 너희는 스스로 선할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렘13:23) 레 12장은 인간의 의로움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출생하면서부터 부정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렘 17:9) 마음이 부패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비방하는 것입니다.(마 15:19)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칼빈과 같은 성자도 그의 유서 첫머리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썼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리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여야 합니다. 부정한 가운데 태어난 인생, 주님의 보혈로 씻김 받도록 믿음으로 주앞에 서야 합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산모의 정결기간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처음 7일간은 부정한 기간으로 그 7일이 지나면 가정에서 활동할 수 있으나 그후 33일간 부정상태는 계속 되기 때문에 성소에 나아가는 것과 성물을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40일이 지나야 산혈이 끝나 정결하게 되어집니다.
성경에서 40은 특별한 연단의 기간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때 시내산에서 40일을 보내었고(출 24:18)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를때에 40일을 걸어 왔으며(왕상 19:8)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한 것도 40년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하기전 금식하신 것도 40일간이었습니다.(마4:2) 지금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키는 사순절도 부활절 전 40일간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후 40일간 땅위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40일이 지나야 정결케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입니다.
그리고 딸을 낳으면 14일간 부정한 기간으로 정하고 그후 66일이 지나야 정결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남자를 낳으면 40일간인데, 여자를 낳으면 그 배가 되는 80일간입니다. 왜 여아를 낳으면 배나 부정하게 됩니까? 남아를 선호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여아를 낳은 것만도 마음이 상하는데 부정한 기간이 배나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녀를 차별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니 알 수가 없으나, 여기에 대한 몇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히포크레테스 같은 학자는 여아를 분만했을 때 유출이 더 많고 길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부라운 같은 학자는 인류의 범죄가 하와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14 말씀을 보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인 15절을 보면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주님이 명령하신 정결기간을 지켜 거룩함과 건강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한 지금 시대라 하더라도 이 규례를 잘 이해하고 지키며 영적인 교훈을 받아서 깨끗하고 정결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죄악의 정결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산의 부정을 어떻게 정결케 하며 나면서부터 죄로 인해 부정하게 된 악의 근본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겠습니까?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의 본능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또한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레위기 12장에서 그 방법을 말씀하시는데 오직 속죄의 피가 해결한다고 말씀합니다. 남자아기를 위해서는 할례를 행할 것과 산모를 위해서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첫째로 할례는 출생한지 8일만에 남자아기의 성기 표피를 베는 의식입니다. 이 할례는 당시 유대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벨론 사람들이나 애굽 사람도 표피를 베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애굽인이나 바벨론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생리적 이유로 베었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성결을 위해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증표이며 죄악을 짜르고 성별과 구원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후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멸시하였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성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은 선언하기를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고 하셨고(골 2:11) 갈라디아 6:15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심령의 할례를 받은 자라야 하는데, 참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산모가 모든 더러운 세력에서 회복되어 성소에 다시 들어가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비결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가능합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뜻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양과 소가 죽으므로 사함을 얻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려주신 보혈만이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건져 주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에베소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고 하셨고, 베드로전서 1:8에서는 우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모의 정결규례는 죄에서 잉태하고 죄에서 태어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그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산모의 정결 규례
레 12:1-8 / 피영민 목사
레위기 12장은 성경을 순차적으로 강해하는 사람 이외에는 잘 설교하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으니, 한 번쯤 꼭 읽고 생각해 봐야 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은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복음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2세기 경에 활동했던 이단에 속한 장로요, 신학자였던 ‘마르시온’(Marcion)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계, 신약의 하나님은 영계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열등하고, 신약은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도 복음이고, 신약도 복음입니다. 구약은 ‘예표로 증거된 복음’이고, 신약은 ‘실체로 증거된 복음’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구약은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이고, 신약은 논문의 형식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산모의 정결규례에 대한 말씀은 이미 폐지된 의식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원의 복음을 놀랍게 제시하고 있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2장은 세 가지 규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Ⅰ. 산모의 정결케 되는 기한에 관한 규례
이스라엘의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7일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경도할 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5장 19절에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일반적으로 생리를 하는 것과 같이 해산을 하면 7일간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7일은 부정한 기간이고, 33일은 정결케 되는 기간입니다. 둘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결케 되는 기간에는 단지 성물을 만지지 못하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며, 부정한 기간에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남아를 낳은 경우 산모는 7일과 33일을 합쳐 도합 40일 동안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아를 낳으면 그 기간은 두 배가 됩니다. 부정기간이 14일이 되고, 산혈이 깨끗해지는 정결기간도 66일 소요됩니다. 그러니까 딸을 낳은 산모는 도합 80일 동안 성소나 성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여인이 자녀를 많이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겨지는데, “왜 이 복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기간을 거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복된 기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다산이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큰 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장례식장을 가보면 자녀가 많은 분은 화환도 많고 손님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녀가 한 명 밖에 없는 분의 장례식장에는 손님도 많지 않고 한산하고 쓸쓸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망하게 되면 북한의 김정은 때문이 아니라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서 망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이대로 계속 줄어들게 되면 2050년 기준으로 필리핀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으셔야 합니다. 젊은 가정들은 자녀 많이 낳기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별로 억울할 것이 없지만,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 되려면 우선 인구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큰 복입니다. 물론 자녀를 양육하고 기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훗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시편 127편 3~5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9절에도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많이 낳아서 집안이 번성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신명기 28장 11절에도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의 소생이 많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 딸을 해산하면 80일의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했을까요? 왜 부정한 기간이라는 용어로 어감도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우선 이 질문에 대해서 생물학적인 답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해산한 산모는 온 몸의 뼈마디가 풀어지고 연약해졌기 때문에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고 난 이후 제대로 회복하지 않으면 평생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은 산후조리를 보통 따뜻한 곳에서 하는데, 미국 여자들은 산후에 찬 물로 샤워를 한다고 합니다. 산후조리 방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후에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입니다.
둘째, 자녀를 낳은 후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그럴 듯합니다.
셋째, 해산 후 요리나 빨래, 청소와 같은 가사 활동을 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으면 남편이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병이 들기 쉽습니다. 산후 조리하는 아내에게 가사 활동을 요구한 사람은 반성과 회개가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도 미역국을 제 손으로 직접 끓여 먹었는데, 도저히 맛이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장모님이 오셔서 끓여주는 미역국을 한 달 동안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넷째, 태아에게 신선한 초유를 공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소젖을 먹이게 되면 소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아이 머리가 소처럼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우유를 잘못 먹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유를 잘 먹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격리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물학적인 설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러면 회복기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부정한 기간이라고 명명했을까요? 생물학적인 답변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모가 정결케 되는 기간 40일과 80일은 단순히 가사 활동을 쉬고, 몸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간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정한 기간이고, 정결케 되는 기간으로 성소와 성물로부터도 분리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격리 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부정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남자나 여자나 태어날 때에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기간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원죄를 지닌 부정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원죄’(Original Sin)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원죄사상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같이 훌륭한 사람도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욥기 14장 4절에도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25장 4절에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출생은 원죄를 지닌 남자와 원죄를 지닌 여자가 결혼을 해서 원죄를 지닌 자녀들을 출산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범죄를 짓기 이전에도 이미 원죄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리가 구약성경에 산발적으로 계시되어 있다가 신약성경에 와서 명확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2장은 이 복음을 그림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죄 사상을 하나의 논문 형태로 명확하게 선포했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정립한 사람이 5세기에 활동했던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입니다.
산모에게 정결케 되는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원죄를 지닌 존재이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범죄를 짓기 때문에 비로소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아들을 낳으면 4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고, 딸을 낳으면 80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할까요? 학자마다 견해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들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간을 반으로 줄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합당한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딸을 낳은 경우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순서를 잘 보면 원래 8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40일이었던 정결기간이 80일로 늘어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일이란 기간은 시험의 기간 또는 준비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40주 40야 동안 비가 내려 산까지 덮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거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여 주시도록 기도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어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가는데도 40주야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일간 부활의 몸을 보이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해산한 후에도 정결기간의 기준은 40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아의 경우는 80일로 늘어났을까요? 여기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이 대답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를 열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남자는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동성끼리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로 후손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입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자연적인 임신의 과정을 거쳐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특권이자 여자만 갖는 기능입니다.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100% 하나님이시고,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인간구원을 위한 경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순종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집행하셔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시는 것뿐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순종하신다고 해서 성부 아버지보다 본질상 열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하고, 남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듯 여자도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어”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아담의 말을 대충 듣고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범죄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무 죄가 없다고 말을 하지만,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죽지 않아야 합니다. 사망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원죄를 초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 아이를 낳을 때 정결케 되는 기간을 두 배로 하신 것입니다. 원죄를 초래하는데 여자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대부분 원죄를 초래한 여성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유념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주제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고다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사람이 이 문제로 씨름하며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로병사가 그 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를 통해 극복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언약으로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Ⅱ. 남아가 팔 일 만에 받아야 하는 할례의 규례
남아의 경우 난지 7일이 지나고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숫자 ‘7’은 완전수를 의미하고, ‘8’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7일인 안식일이 지나고 제8일째 되던 날 부활하셨습니다. 숫자 ‘8’은 부활의 숫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할례는 영어로 ‘Circumcision’이라고 합니다. ‘표피를 잘라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브리트 밀라’라고 합니다. ‘브리트’는 ‘언약’을 뜻하는 ‘베리트’에서 변형된 단어이고, ‘밀라’는 ‘자르다’를 뜻하는 히브리 동사 ‘물’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리트 밀라’라고 하는 것은 ‘언약의 할례’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두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너희와 언약을 맺었다”는 증거로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0~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피를 베고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너희가 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할례는 단순히 예표일 뿐입니다. 그 실체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도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 2장 29절에도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도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의 할례, 마음의 할례 곧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하나님의 택하신 아브라함 후손들과 맺은 언약의 표증인 것처럼 신약에 마음의 할례는 곧 거듭남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원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은 원죄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언약으로 택하신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 즉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에만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Ⅲ. 정결기한 후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규례
정결케 되는 기한이 끝나면 산모는 제사장에게로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40일 또는 80일이 지난 경우 일 년 된 어린양을 제사장에게 번제물로 가져다가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려야 합니다.
번제와 속죄제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가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순종하셔서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고 다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사신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치를 수 없는 죗값을 대신 치르시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공로로 죄인들은 원죄와 자범죄를 사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를 옷처럼 입혀주실 것입니다.
또 가난해서 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는 은혜의 대상이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 론
레위기 12장은 인간이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고, 원죄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원죄와 자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서 영생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습게 여길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언약적인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시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갖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12:1-8
김효진 목사 / 찬송가 28장(복의 근원 강림하사)
성경은 ‘피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피’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요즘 나누고 있는 이 레위기에는 각종 제사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소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에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피가 없는 제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실, 레위기는 매우 따분하고 지루한 책 같지만,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레위기를 읽어보면 여기저기 피가 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주 금요일(11월25일) 임용완 목사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규정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속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죄사함의 원리입니다.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말 못하는 짐승이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며 도륙되는 참혹한 현장에서 사람들은 죄의 무서움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생명은 피로 말미암는 생명으로써만 되찾을 수 있음을 처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제사는 ‘피’의 가치와 중요성을 각인시켜주는 실물교육이었습니다.
피를 생명으로 여겼기에 몸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 생명을 건강하게,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5장에는 월경을 하는 여자도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월경이라는 것이 임신을 하지 않았을 때 자궁의 내막이 떨어져 몸 밖으로 배출되는 현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월경을 한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이 없는 출혈이기에, 이러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산모에 대한 규례는 생명의 소중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2~5절)
여자들이 출산을 하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피를 흘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출산은 또 다른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출혈은 반드시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성경은 출산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즉 정결하지 못하다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월경을 한 여자를 부정하다고 규정짓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되지만, 생명을 출산했다는 이유로 부정하다는 것은 왠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즉 성경에서 피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면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출혈이 있었던 여인을 굳이 부정하다고 규정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아 출산시는 일주일, 여아는 2주일 동안 부정하고, 산혈이 온전히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남아는 33일, 여아는 66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산모는 성물을 만지지도,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산모는 화목제물에서 나오는 고기를 함께 먹을 수 없었고, 가족이나 공동체가 참여하는 모든 거룩한 제사에서 완전히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몸에서 피가 흘러나온다는 이유로 ‘부정한 여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의 경우는 일시적인 격리가 아니라 무려 12년 동안이나 부정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마가는 이 여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이 여인은 일시적인 출혈이 아닌 만성적인 자궁출혈을 앓고 있었고, 이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간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자신의 병도 병이지만, 그 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 속에 사회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여인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출혈을 한다는 이유로 부정하다고 규정짓는 것이 때로는 그 사람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출산한 여인이 그 생명으로 인해 오히려 부정하다고 규정된다면, 그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 규정은 산모를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규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그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십시다. 출산 후에 산모더러 그 가정이나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제사에 참여하라고 강요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생명을 출산한 산모를 안중에 두지 않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갓 출산한 가정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집안이 부요하다고 하면 산모는 나귀나 낙타를 타고 성막이 있는 곳까지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성막에 들어가면 그 산모는 나귀나 낙타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계속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면 산모는 집에서부터 제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줄곧 선 채로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의무를 받으시기 위해 산모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산모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6~7절)
하나님께서는 출산한 여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아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산모의 산혈이 깨끗해지기를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회복된 모습으로 나아와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하심 속에서 산모는 ‘생명’을 출산한 기쁨을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속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짐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능력이 많으시지만 연약한 우리를 배려하셨기에 오히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권능이 온 우주에 충만하지만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기에 오늘도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여셔서 아버지의 계명들을 통해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을 힘입어 오늘 하루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신 주님, 우리 또한 주님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기쁨과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산모의 정결 규례
레위기 12;1-8 / 김근중 목사 / 창녕감리교회
1-15장까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친교에 방해되는 저해 요소들 곧 부정한 것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동물, 식사, 출산, 질병 등에 있어서 부정한 것들을 지적하고 정결케 하는 규례를 다루었습니다. 12장에는 아이를 낳은 산모에 대한 부정함과 정결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까지는 산모의 정결 규례가, 6-8절 까지는 정결 예식에 드려야 할 제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규례들은 오늘날 자녀 출산과 양육에 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해 줍니다. 특히 영적인 자녀를 들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알게 해 줍니다.
1. 산모의 정결 규례 (1-5)
① 산모(産母)가 일정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 동안 의식상(儀式上) 부정(不淨)한 기간으로 간주됩니다. 7일 동안은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고 그 다음 날부터 33일 동안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자를 아이를 낳을 경우에는 80일 동안 부정한 기간으로 간주됩니다. 14일(두 칠일) 동안은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고 66일 동안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므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이를 낳은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 출생과 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창1:28). 아이를 낳은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이를 낳을 때 흘러나온 유출물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경도(經度)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경도'는 히브리어로 '닛다'로서 원형 '니다드'는 '흐르다'의 뜻입니다. 여자들이 주기적으로 하는 생리 현상인 월경(月經)을 말합니다. 산모가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는 것은 아이를 낳을 때 유출된 분비물 곧 피를 흘리는 것 때문인 것입니다.
피의 유출 현상을 부정하게 여긴 것은, 산모의 몸조리와 위생 문제에 있어서 깨끗한 보건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피흘림'에 대한 상징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3:16에 보면 해산의 고통은 죄의 결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편51:5에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해산에 따른 분비물도 같이 취급하여 죄에 대한 결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의 본질로서 피가 신체 내에서 파열되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레17:11).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고 그것을 죄의 결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아이를 낳을 때도 목적 뿐 아니라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② 산모가 남아(男兒)를 낳을 때와 여아를 낳을 때의 부정 기간이 다릅니다.
남자 아이를 낳았을 때는 부정한 기간이 40일이지만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는 80일입니다. 그것은 피의 유출과 분비물의 유출이 남아를 출생했을 때보다 여아를 출생했을 때 더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아담의 범죄가 하와의 유혹으로 시작되었기에 원리상 여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창3:6). 그리고 남아는 할례를 통해 정결케 되어 죄책이 감소되지만 여아는 할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산모의 부정 기간이 짧아지지 않은 것입니다 (3절).
할례는 남자 아이를 출산했을 경우 8일만에 남자 아이의 양피(陽皮)를 베는 의식으로서 오늘날 포경 수술 같은 것입니다 (창17:10-14).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은 우선 보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성적 불결이 해소될 뿐 아니라 8일째 되는 때에는 지혈도 잘되고 진통효과도 많을 때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8일은 재창조의 의미도 있습니다. 정욕의 상징을 제거하므로 죄악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인(印)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가 맨 처음 행해진 것은 아브라함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고 그 아들을 통해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게 하겠다는 약속(언약)을 해주었습니다 (창12:2-3). 그리고 그 언약에 참여한다는 징표로 할례를 행하도록 했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언약에 참여하지 않는 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창17:14). 그 언약의 핵심은 자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갈3:16, 요8:56). 그 언약대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남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없이해 주시고 성령으로 인쳐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사9:6, 전7:28).
그런 언약적 관점에서 구약시대에는 남자에게 더 많은 특권를 부여했습니다. 여자는 족보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기업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계대혼인법과 고엘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구조사를 할 때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수(數)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남아 선호 사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영적으로 남자와 아들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하면서 남자 이이와 같이 생명력을 가진 자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출1:22, 계12:4 참조). 고린도전서16:13에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했습니다.
③ 산모는 40일이 되어야 정결케 됩니다.
산모가 남아를 낳았을 때는 40일이 지나야 정결케 되고 여아를 낳았을 때는 80일이 지나야 정결케 되었습니다. 산모에게 정결 가간을 둔 것은 우선 보건상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출산 후 약 6주 주간은 성적 접촉을 금하고 있는데 그것은 균의 침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산모에게 정결 기간을 둔 것은 무엇보다도 상징의 의미가 큽니다. 여아를 낳았을 경우에는 80일이 지나야 되지만 80일도 상징으로 볼 때 40일의 연장입니다 (겔4:6). 성경에서 40일 기간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엘리야가 천사의 음식을 제공받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호렙산에 이르는 기간도 40일이고 (왕상19:5-8),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기도 했던 기간도 40일이고 (마4:1-11),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받은 기간도 40일이고 (행7:29-30), 이스라엘 백성이 광에서 연단받은 기간도 40년이었습니다 (민14:34-35). 교회와 성도는 일정한 연단 기간을 통해 정결케 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10일 환난이 있었고, 바울은 3년 동안 아라비아광야에서 훈련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므로 온전케 되었습니다.
2. 산모의 정결 예물 (6-8)
산모가 부정한 기간이 다 지난 다음에 정결 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번제로는 1년된 어린양으로 드리되 어린양을 드리지 못할 자는 산비둘기과 집비둘기들 드리도록 했고, 속죄제로는 일률적으로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 새끼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제물을 비둘기 새끼로도 드릴 수 있게 한 것은 극빈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①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6上절).
번제는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게 된데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언약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해 주신 언약에 대한 감사인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 성취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며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을 바라보고 그 목적을 두고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삼상1:28,삿11:29-40).
②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6下-8절).
속죄제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게 한 것은 사람이 해산을 할 때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 고통이 인류의 범죄 때문인 것을 기억하게 하고 해산 때에 그 고통으로 인하여 범죄한 것을 회개 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녀를 얻는 데 있어서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양육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녀가 없는 자는 없는 것으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고통을 느낄 때마다 우리의 원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죄를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시켜 줄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자녀를 낳을 때와 양육할 때에 범죄한 자범죄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선한 뜻을 이루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꼭 해산에 관한 고통이 아니더라도 모든 삶에서 한 사건이 지나고 고통이 지나갈 때마다 믿음으로 통과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5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4:19에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자녀를 낳든 영적인 자녀를 낳든 그 해산과 양육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마다 감사와 헌신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실수 않는 것이 옳지만 불가불 실수하여 범죄 했을 지라도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산모가 정결기간을 갖는 이유 -
레 12:1-8 / 손달익 / 서문교회 목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자식을 낳는 것과 자식의 자식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시편은 노래한다.
그래서 자식을 얻지 못하면 불행으로 여기거나(창 15장, 삼상 1장)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기도 했다.(레 20:20, 신 28:18) 그런데 왜 위기 레12장에서는 출산을 속죄가 필요한 정결치 못한 일로 간주하고 해산한 여인을 일정기간 동안 부정하게 취급하는 것일까? 임신과 출산은 과연 죄된 것이며 부정한 일인가? 이 부분의 말씀은 몇 가지를 의미하고 있다. 첫째는 임신과 출산행위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임신하는 자나 낳는 자는 모두 죄인임을 의미한다.
다윗은 "내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음이여!"라고 탄식했다.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하나님 언약의 성취이며 신성한 축복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사용되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정화를 위한 정결 예식이 필요하다고 보아서 정결규례가 제정된 것이다.
둘째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의 본성을 유전 받은 죄인임을 의미한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롬 5:12) 인간 본성은 순수하게 태어났으나 성장하면서 악한 세상의 영향을 받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죄인이라는 점을 산모의 정결법의 배경으로 본다. 즉 태어난 아기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결의 은총을 입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어머니로 하여금 성결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케 함이 이 정결법의 목적인 것이다.
셋째는 피흘림과 연관된 의미이다. 레위기는 시종 "피는 곧 생명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피흘림은 생명의 낭비이며 이는 곧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여성의 생리적 유출까지도 부정하게 취급했고 남자들의 설정도 그렇게 취급했다.
이는 곧 생명의 낭비라는 의미에서 부정하게 여겨진 듯 하다. 그래서 출산을 통한 산혈로 인하여 산모는 부정하게 여겨지고 그 산혈이 깨끗해지기까지를 정결 기간으로 정하여 진 것이다. 넷째는 정결 기간의 문제이다.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했고 딸을 낳으면 14일간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 했다.
딸을 낳았을 때 부정기간이 갑절이나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어떤 이는 히브리인의 남아선호사상이 그 배경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하와(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규정이 남녀의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딸의 경우 정결 기간이 배나 되는 것은 아들처럼 할례를 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는 생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여 부정을 제거하는 의식을 가지나 여아는 그렇지 못하므로 산모의 정결 기간이 더 길수도 있다. 그리고 레위기 12장이 남아, 여아를 특별히 선호하거나 한편을 더 가치있게 보지 않는 것은 아들이나 딸이나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더욱이 당시의 이방세계에서는 여성의 경우 성소에서 제물을 드리는 자체가 철저히 금기시 되었으나 율법은 절차를 거쳐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고 있다. 여성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총이 남성과 동일하게 보장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레위기 12장의 산모 정결법과 관련된 제규정들은 본래적 죄인이면서 죄성을 지닌 생명을 출산해야 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격과 은총을 얻게 되는가를 가르쳐준다. 출산의 과정 속에 인간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의 복을 누리게 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제 이 모든 성결과 정화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 안에 있음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벧전 1:18-19, 엡 1:7)
출산 규례를 통해 보는 정결의 원리
레위기 12장 1-8 / 성경과학창조세계관신학
가. 들면서
1. 인간의 출생과 번성
(1) 인간의 출생과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2)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다
(3) 인간의 출생은 하나님의 축복이다(창 1:28)
4) 오히려 아이 없음을 불행으로 여겼던 것이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였다(창 15장, 삼상 1장 참조)
(5) 무자(無子)한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했다(레 20:20; 신 28:18).
(6) 그런데 이 귀한 생명의 출산에는 경도할 때와 같은 출혈의 고통이 동반된다.
(7) 성경이 생명("피")의 책임을 늘 기억하라!
2.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1) 인간의 타락 이후 출산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2) 출산에 따른 출혈과 고통이 생겨났다(창 3:16)
(3)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해산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즉 출산은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일이 되었다)
(4) 이것이 바로 산후 조리의 필요성이 발생한 이유다
나. 본문
1. 산모의 부정(1-5절) :
산모의 부정은 다른 부정과 다르다. 윤리적 부정이 아니라 청결과 산후 회복을 위한 조치로서의 경향이 강하다.
1) 남아 출산의 경우
(1) 남아 출산의 경우 산모는 경도할 때와 같이(생리 기간 중의 부정과 마찬가지로) 7일 동안 부정하였다.
(2) 그리고 생후 8일이 되면 그 아이의 표피를 잘라 피의 할례를 베풀어야 했다.
(3) 양피를 베는 이 할례의 법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법이었다.
(4) 해산한 여인은 그때부터 33일이 지나야 피의 부정에서 깨끗해졌다. 그때까지는 거룩한 물건을 만져서도 안 되며 성소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5) 이 법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라.
1. 할례의 성경적 기원
1) 할례의 용어
할례는 히브리말로 “브릿트 밀라”, 헬라어로는 “페리토메”peritome라고 한다. 영어의 circumcision은 'cut around'의 뜻을 가진 라틴어 “키르쿰키시오”(circumcisio)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계약(언약)이란 뜻이고 “밀라”는 할례를 뜻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할례”하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2) 할례 의식
할례는 남자 성기 귀두 위에 덮여 있는 표피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은밀한 표식을 몸에 가지게 된다.
할례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실시하는 데 이 날이 안식일일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심지어 대속죄일(욤 키푸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날 행해야 하는 의식이다. 할례 예식에는 유대인 공동체 성인 10명(회당 설립에 필요한 최소 인원) 이상이 모여서 시행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부모는 할례 일에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초청하게 된다.
할례는 가정이나 회당 또는 병원에서 행해지는 데, 전날 밤에 아버지는 밤새 성경을 읽으면서 아들을 사탄으로부터 지킨다. 할례 일에 하객들은 일찌감치 와서 축하 파티를 열며 덕담을 나누며 기다린다. 이를 “샬롬 자코르”라 한다. 시간이 되어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하객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서면 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환영합니다.”하고 인사말을 한다. 하객은 할례가 끝날 때까지 모두 선채로 기다려야 한다.
할례는 과거에는 아버지가 직접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정통파 유대인인 “모헬”이라고 통칭되는 특별히 훈련을 받은 할례전문 종교의식 집행자에 의하여 실시된다. 이때 어머니와 하객들은 다른 방에 서서 기다린다. 모헬은 할례 시술을 하면서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린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레위기 17:11)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할례가 실시되는 방에는 “엘리야의 의자”라 불리는 빈 의자를 하나 준비한다. 이것은 “언약천사”라고 불리며 아이들의 보호자로 알려진 선지자 엘리아가 와서 앉도록 하기 위한 자리이다. “모헬”은 할례를 실시하기 전에 “나의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천지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립니다. 당신은 율법으로 우리를 신성하게 하셨고, 우리들에게 할례의 의식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행할 준비가 되었으니 행합니다”라고 먼저 기도를 한 후 할례 시술에 들어간다. 할례는 비교적 간단히 끝난다.
할례를 마치면 “모헬”은 포도주를 한잔 따르고 축원하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하객들에게 할례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면, 하객들은 “이제 이 아이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인도된 것처럼,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율법의 공부와 결혼과 좋은 행실의 사람이 되게 인도 하시기를 기도”한다. 할례를 마친 아이는 어머니 품에 안기고 이어 간단한 축하 잔치가 벌어진다. 잔치 음식에는 생선과 단 과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생선은 많은 자식의 출산을, 단 과자는 아이의 장래가 평탄할 것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3) 할례의 의미
이스라엘이 하나님 과 맞은 언약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 데 첫째 안식일 언약(출 31:16-17= 시간적 언약)이요 둘째 무지개 언약(창 9:12-15= 공간적, 자연적 언약), 셋째 할례 언약(창 17:10-14= 육체적, 영적 언약)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징표이며, 상징이었고, 또한 표시(mark)였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였다. 할례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예식이며 증거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였던 것이다.
2. 할례의 성경 밖 풍습
1) 성경 밖의 할례
할례는 성서 시대 이미 이스라엘뿐 아니라 셈족들에게 광범위하게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 밖 사람들은 할례의 기원을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적으로 본다면(창 17장)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표시로서 아브라함이 99세, 그 아들 이스마엘이 13세 때 일가(一家)의 남성이 할례를 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유대인 외의 민족들에게도 할례 예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세상 고고학에서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한다는 점과 대체로 금속제보다 돌로 만든 작은 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습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유럽어계 ·몽골어계 ·우랄어계의 민족 사이에는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이다.
오늘날 성경 밖 할례는 여성의 음핵 또는 소음순(小陰脣)의 절개도 포함한다. 아프리카와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의식은 여성 인권 차원에서 아주 큰 문제가 되어 있다. 무함마드는 강제적 여성 할례를 제정한 적이 없음에도 일부 그릇된 이슬람교도들이나 정령 숭배 사상의 풍습을 가진 일부 족속들에게서 보이는 비윤리적 풍습이다.
할례가 전통적인 의식으로서 이른바 ‘통과의례(通過儀禮)’로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로 사춘기 전이나 사춘기에 시행하고 있으나, 아랍 민족처럼 결혼 직전에 실시하는 곳도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BC 4000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며, 남자는 보통 6∼12세에 할례를 받았다. 이슬람교도 ·유대인 ·에티오피아인이나 약간의 다른 민족은 출생 직후에 행하였다.
2) 할례의 목적과 의미
할례의 목적에 대해 성경에서 해답을 찾지 않는 경우 수많은 설이 등장한다. 신들에 대한 피의 제물이라는 공희설(供犧說)과 그 밖에 고통을 견디는 수단, 결혼 준비, 성기의 신성화, 성교의 위험에 대한 상징적 인지(認知), 위생상의 수단, 상징적인 거세(去勢), 혹은 생명을 준 신에게 남성을 보상하기 위해 바치는 희생이라고 하는 설 등이다. 미개사회에서 할례는 성년식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보며, 예컨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성년식에서는 모든 부족이 할례를 하는 것은 아니며 문신(文身)이나 이빨을 빼는 것으로 대신하는 부족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의 어느 한 가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3. 할례의 위생상 효과
1) 역사적 해석
할례의 위생상 효과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기원전 5세기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os, BC 484?~BC 425?)였다.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던 그는 애굽인들의 할례 행위에 대해 개인의 건강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왕조의 고대 무덤에서는 그 할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헤로도투스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 할례의 방법을 유대인과 시리아인에게 전수하였다고 보았다. 이삭의 형 이스마엘이 일찍이 할례를 받고 아버지 아브라함을 떠나 중동 광야를 다녔으므로 성경적으로도 그 말이 그리 잘못된 묘사로 보이지는 않는다.
2) 위생상 효과가 있는가(현대적 해석)
1935년 담(H. Dam)은 닭의 출혈을 방지하는 유효한 음식물 성분을 발견하고 비타민 K라 하였다(히브리어로 피가 'dam'<창 4:10>이라는 데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비타민 K는 기름에 용해되는 지용성 비타민의 하나로 빛과 알칼리에는 불안정하고 열에는 강하며 간에서 프로트롬빈의 생성을 도와, 혈액의 응고 작용을 촉진하여 출혈을 막아 준다. 비타민 K가 혈액응고에 필수적인 비타민으로 항출혈성 비타민(antihekdcnorrhagic vitamin)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비타민 K와 혈액응고의 관계를 규명한 덴마크 학자는 '응고'의 덴마크 철자인 'Koagulation'의 첫 자를 따서 비타민 K라고 명명하였다.
비타민 K는 박테리아에 의해 인체의 소화관 내에서 합성되어 간에 의한 프로트롬빈 합성에 관여한다. 비타민 K는 필요량이 적어 보통 정상성인은 결핍증이 거의 유발되지 않고 박테리아에 의해 인체의 소화관 내에서 자동 합성되므로 필요하지 않으나 신생아의 장출혈 등에는 현저한 효과가 있다. 갓난 아기는 세균에 오염될 기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상처가 심하면 비타민 K와 프로트롬빈 부족으로 고통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이 혈액응고(血液凝固, blood coagulation) 과정은 아주 복잡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연구한 스칸질로(Nathan Scanzillo)는 프로트롬빈의 양이 생후 8일이 되면 최고조에 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을 썼다. 즉 이때가 가장 할례에 좋은 날인 것이다. 프로트롬빈 양은 생후 3일이 되면 30%, 8일째는 110%가 되었다가 그 후로는 100%를 유지하였다. 출혈을 피하기 가장 좋은 날이 8일 째였다.
유대 여자들은 자궁경부암이 다른 민족 여자들보다 8.4% 낮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치구균(恥垢菌, Mycobacterium smegmatis)은 외부 비뇨생식기의 요도관에 기생한다. 이것은 할례 받지 앟은 남자들에게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균이 여자들에게 옮겨가면 자궁경부암을 일으킨다. 위생 상태가 좋아진 지금은 할례 받지 않아도 별 탈이 없으나 물이 부족한 과거 아브라함 시대나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문제가 되었을 수 있다.
4. 할례의 초대 교회 논쟁
1) 할례 문제는 교회사 최초의 중요한 문제였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초대 교회에서 대두된 최초의 중요한 교리적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와 선교사들이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바나바 등이 모두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적극 나서게 됨을 보게 된다.
2) 논쟁의 발단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개종자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할례 문제가 대두(행 10:15). 모세의 법을 따르는 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할례 받지 못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신자들을 압박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심한 논쟁을 벌임(행 15: 1-2).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몇 신자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결론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3) 최초 그리스도교 총회에서의 결론(행 15장)
총회를 통해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증거하고 당시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정리하였다(행 15:1-29).
5. 할례의 현대적 의미와 적용
1)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더욱 중요하다(롬 2:29)
바울이 볼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할례가 아닌 믿음이 언약의 근거였다(롬 4:9-12).예레미야도 할례 받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렘 4:4).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 정결해져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소명을 다해야 한다(롬 2:29).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고 있으며(골 2:8-15)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도 할례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의식적 징표가 하나님 언약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는 할례보다 새언약의 징표인 떡과 잔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고전 11:25).
2) 할례의 위생상 효과에 대해 너무 과장 되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할례의 본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믿는 자녀의 언약의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적 은총과 관련된다. 자연적 은총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도 할례의 위생상 효과는 지극히 작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위생상 극히 중요했다면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계속적으로 할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위생상 효과를 그리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나안 지역의 고대 풍토에서는 약간의 위생적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위생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수천년 할례 없이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할례에 익숙했던 중동과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근본주의자들처럼 할례의 위생상 효과를 너무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할례보다 중요한 새언약
지금은 할례의 시대가 아니다. 은혜의 시대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마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처럼 그리스도가 새언약의 주인이 되셨다. 할례 언약이 영적으로든 위생상으로든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한번쯤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새언약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할례의 율법이 아닌 사랑의 율례인 성례를 제정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계시 하였던 그 새언약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할례의 참 뜻을 기려야 한다.
2) 여아 출산의 경우
(1) 딸을 낳으면 2주일 동안 부정하였다, 이것은 생리 기간 중 부정과 마찬가지였다.
(2) 그리고 그 산모는 66일을 더 지나야 그 피의 부정에서 깨끗하게 되었다.
3) 왜 남아, 여아 출생의 차별이 있을까?
(1)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2) 여아 출산은 유출이 더 길다(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주장)
(3) 인류 범죄는 하와로부터 시작(?)
2. 산모의 정결 제사(6-8절)
1) 정결 기한이 차면 제사를 지내 부정을 제거할 것(6-7절)
출산은 축복인 동시에 생명이 되는 피를 유출한다는 점에서 부정한 것이었기에 속죄의 절차가 필요하다.
2) 출산 산모의 경제 형편이 어린 양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할 때(8절)
산모가 너무 가난한 경우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때 산모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고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바치면 되었다, 가난하였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당연히 비둘기로 제물을 삼았다(눅 2:24).
3) 번제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둘기로 충분했다. 제사장을 통해 속죄 받고 정결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정결케 되며 죄와 절망에서 깨끗함을 입고 소망과 영생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다. 본문이 주는 도전과 교훈
1. 하나님의 최대 관심 생명에 대해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역시 생명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 생명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기억하라!
2. 산후 조리를 통해 안식의 복을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을 깨달을 것
산후 조리를 통해 생명("피")의 소중함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은 안식의 복을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은 늘 약자를 편드신다
생명은 소중하나 산모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약자를 편드신다.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번제와 속죄 제물로 바치면서 산모는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산모를 한결같이 배려하시는 하나님임을 기억할 것이다(6-8절)
4. 임신과 출산은 당사자들의 신앙적 태도를 드러나게 한다.
오늘 본문은 임신과 출산의 과정 안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태도를 드러내게 됨을 교훈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을 자연스레 깨닫도록 유도하신다.
5. 영생을 주시는 유월절 그리스도의 참 된 십자가 "피"를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