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으르렁거림이었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경의와, 동시에 카렌프에 대한 적개심이란 상반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카렌프는 무수한 키메라들을 죽 둘러보았다. 포위 당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카렌프가 포위 당했다는 것이 아니다. 수십 마리의 키메라들에 의해, 야영지 전체가 포위 당해있었다. 수십, 수백일까. 적은 수도 없이 넘쳐 났다. 각자 날카로운 금속을 위협적으로 들며 카렌프를 위협해갔다. 카렌프는 칼자루를 더욱 옥죄었다. 갑작스런 거친 힘을 받은 칼날이 부르르 떨렸다. 카렌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수많은 키메라들이 내뿜는 살기에 버금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살기를 느꼈는지, 말들이 하나하나 눈을 떴다.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말들. 그들의 몸부림에 갈기가 흩날렸다. 야성의 냄새가 풍겼다. 무거운 살기가 말들을 눌렀다. 하지만 유독 카렌프가 탔던 말만이, 그에 대항해 몸부림을 쳤다.
말의 열정적인 몸부림과는 대조적으로, 이 황무지의 분위기는 찬물을 뿌린 듯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키메라들은 한 걸음씩,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느긋한 걸음이 오히려 카렌프의 정신을 더 억눌렀다. 하지만 카렌프가 내뿜는 살기와 기운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키메라 부대의 위압감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검 하나를 대지의 품에 안겼다.
푹
검이 매끄럽게 땅에 박혔다. 카렌프는 땅에 박힌 검을 쥐고 있던 한쪽 손으로 마탄을 장전했다. 이런 다수의 적을 상대할 시에는, 검보다는 마탄 총의 폭발이 제격이다. 당연히 속성은 폭발성이 강한 화염(火焰).
화아아악
쏟아진 화염의 불길이 키메라들을 감싸안았다. 카렌프는 검을 뽑으며,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져 가는 불길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열기가 그의 몸에 땀을 요구했다. 검의 빛을 요구했다. 그리고…… 피를 요구했다. 잠시나마 대지에 스며들어 오그라들었던 기운이 솟구쳤다. 넘치는 기운은 검기를 이루었고, 검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키메라 하나의 살을 갈랐다.
불꽃과 폭발에 이은 검기의 공격이라서 인지, 아니면 여기 있는 키메라들이 방금 전의 키메라 보다 약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쉽게 베어졌다. 카렌프의 두 검은 연이어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밤하늘은 붉은 빛과 섞여, 더욱 짙어졌다.
칼부림. 미친 칼부림이다. 카렌프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수십의 키메라들의 포위를 적절히 피해내며, 마탄을 한발씩 날려가며, 그야말로 정석 적인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은 정말 괴이했다. 그 어떤 팔라딘에게서도 느낄 수 없을 기운. 카렌프는 팔라딘이 아닌, '인간'으로 싸우고 있는 듯했다. 조금 전 그토록 경멸했던 키메라의 삶의 집착. 카렌프는 그때 그 키메라의 눈동자와 닮아있다.
카렌프의 미친 듯한 칼부림도 엄연히 한계란 벽은 존재했다. 카렌프의 기력은 서서히 그 벽이 보이고 있었고, 점차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키메라의 한계는 아직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기량의 한계는 이미 높다랗게 세워져있었지만, 아직 수의 한계는 보지 못했다. 아직도 수십 마리의 키메라가 남아 있었고, 카렌프가 벤 것은 기껏해야 십여 마리에 불과했다. 카렌프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흐르는 땀방울도 많아졌다. 검기는 들쭉날쭉했다. 눈꺼풀을 힘겹게 들고 있는 그의 녹색 머리칼이 연해졌다. 몇 개는 이미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하지만 카렌프의 눈만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젠장"
가벼운 욕을 씹어 내뱉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었는지, 다시 십여 마리의 키메라가 달려들었다. 카렌프의 칼부림도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신들린 듯한 동작은 아니었고, 휘두를 때마다 피가 춤을 추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카렌프의 손발은 점차 어지러워져만 갔고, 동작은 필요이상으로 커졌다. 힘이 들어갔다는, 무리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카렌프는 이를 악물었다.
"크릉"
"예잇!"
키메라의 손톱과 카렌프의 칼날이 교차했다. 서로의 목표에 깊숙이 박힌다. 키메라가 쓰러졌다. 카렌프는 아직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핏덩이는, 카렌프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배를 꿰뚫고 있는 검에는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키메라들은 그것만으로는 동료들의 목숨 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거친 몸짓으로 달려들어 카렌프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나갔다. 끝. 절망. 단편적인 단어가 끝없이 떠올랐다. 피로 물든 몸. 눈을 희미하게 떴다. 배에서 빠져나가는 뜨거움이 느껴지며, 온 몸이 식어 가는 듯했다.
펑
무언가 터졌다. 그 소리는 어떤 풍선이 터지는 듯, 공기가 팽창하여 터지는 듯한 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풍선'은 고무가 아닌…….
후두둑
뼈와 살. 그리고 내장과 피로 되어 있었다. 몸과 내장이 떨어졌다. 튀어나온 눈은 나중에서야 땅에 떨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지옥이 현신 한다해도 이런 광경은 나타날지 의심이 갔다.
"후훗, 뭘 하고 있는 거냐. 팔라딘이 이런 키메라들에게 쩔쩔 메고 있다니."
익숙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 수도 없이 들어봤으나, 이토록 차갑게 말한 적은 없었다. 차갑다. 팔라딘들은 언제나 차가웠다. 하지만 이것은 팔라딘 특유의 차가움과는 그 차이가 완연했다. 팔라딘이 얼어 있는 호수라면…….
이자의 목소리는 만물을 얼려버리려는 매서운 냉풍(冷風)이다. 그 차가운 바람의 주인공. '바람'의 이름을 지닌, 바람 그자체인 그의 이름은, 아네모네. 그의 동안의 얼굴은 차가웠다. 여느 어른도, 여느 무사도 내뿜지 못할 차가움이었다.
"훗"
그의 코 바람이 흘러나왔다. 비웃음일까. 이자는 비정하다. 카렌프는 느낄 수 있었다. 카렌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올려다 본 아네모네의 얼굴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단지 기분 나빴던 그런 어린 아이가 아니다. 흡사 남의 생을 거두기 위해 온 죽음의 바람과도 같았다.
카렌프의 머리 속에서 아주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단 한번도 제대로 기억한 적이 없던 어린 시절. 하지만 불행히도 그 기억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옛날의 전설을 듣고 밤잠을 설쳤던 그 기억. 그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이야기는…… 사신의 바람(死神風).
사신풍. 그것은 죽음을 몰고 오는 바람. 물론 그 이름 덕에 무수한 전설을 낳았지만, 그것은 사실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막의 한 부족의 이름. 죽음이란 이름을 가진 부족. 그들이 지닌 힘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했다. 그러한 불가사의한 힘을 노린 제국의 귀족에 의해 멸망당한 부족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저 놈의 모습에서 죽음의 부족이 떠오르는 것이지?'
아네모네…… 그의 이름은 바람. 바람이 미소지었다. 겨의 손이 올라갔다. 지금의 그는 분 키메라의 죽음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빠르지만 느린 듯한 동작이었다. 그의 눈은 붉었다. 충혈이라도 된 듯이. 아니, 피라도 묻은 듯이. 그의 얼굴은 냉혹했다. 잠시 후에 불 혈풍을 예고하듯이.
"앗, 저건!"
아네모네가 장난스레 말했다. 얼굴과 어둘리지 않게도. 그 장난스런 외침조차도 한참 긴장하고 있던 카렌프가 당황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카렌프는 무의식중에 아네모네의 손가락이 가리킨 망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 것도 없었다. 카렌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넓디넓은 황무지일 뿐. 하지만 앞이 허전하다고, 뒤쪽까지 평화로울 수는 없는 법.
펑, 펑, 펑, 펑, 펑
조금 전 키메라가 터지면서 낸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의 공통점을 찾자면, 아네모네의 손동작에 맞추어 터졌다는 것. 그리고 피와 내장, 살과 뼈를 동원한 폭죽이라는 점.
아네모네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이날의 밤하늘 역시, 붉은 빛을 빼기엔 그른 듯했다. 무언가에 팰려난 뎟 팽창하던 키메라들은 계속해서 터져 나갔다. 카렌프는 그저 바라만 볼뿐오었다. 하긴 그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살육의 행진은 수십 마리의 키메라가 모두 각자의 내장과 피를 내놓으며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공부 열심히 하시구요 목표 이루어 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