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군의 뮬러의 군사적 특징을 비텐펠트와 마찬가지로 분류해보면
공세적 측면보다는 방어형의 수세적 측면에
더 뛰어난 역할을 했던 장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장수들을 예를 들면 촉나라의 "제갈공명"에 대항한 위나라의 "사마의",
"유비"가 직접 대군을 이끌어 온 촉군을 격파한 오나라의 "육손"
손권이 직접 이끈 10만 오군으로부터 7000명을 지휘해 합비를 지켜낸 위나라의 "장요"는
모두 뛰어난 방어전을 구사했던 장수들입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활약한 영국의 웰링턴은 신중한 성격으로 인해
항상 먼저 공격하기 보다는 방어를 통해 적을 막아낸 후에야
비로소 예기가 꺽인 적을 공격하는 전술을 취했고 이를 통해 전장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의 신중한 군사행동은 젊은시절의 방탕햇던 생활을 정리하면서 생긴 듯 하며,
젊은시절 도박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된 그는 여러번 좌절을 경험하다가
이후 군에 입대한 후, 착실한 생활로 거듭나게 됩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스페인점령 기간에 있었던 "반도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독립전쟁을 벌이던 스페인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한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 상륙군을 지휘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프랑스군의 리스본공격을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으로 저지시켜
포루투갈 지역을 지켜내게 되고 유럽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원정(1811-1812)을 시작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은
점차 병력과 장비부족을 겪게되고,
이를 틈타 웰링턴은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해방시켰으며
1813년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주르당 원수"를 패배시킴으로써
사실상 반도전쟁을 종결시키게 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 년 동안 훌룡한 방어전을 벌임으로써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에 끊질기게 후방을 교란한 공로로
그는 웰링턴 공작으로 임명됩니다.
라이프니츠 전투에서 패배하여 엘바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자
웰링턴은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의 동맹군 약 6만 8천명을 지휘하였으며
프로이센의 블뤼허 휘하의 프로이센군 4만 5,000명과 공동작전을 펼치기로 되었습니다.
프랑스군 10만 5천명을 지휘하던 나폴레옹은 이를 간파하고
두 군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프로이센의 블루허군을 격파해버리지만
전투로 지쳐버린 나폴레옹은 추격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자 버립니다.
뒤늦게 휘하의 그뤼시원수를 추격대로 보내지만 프로이센군을 놓쳐버리고
이후 블루허는 프로이센군을 재정비하고
뒤늦게나마 나폴레옹군과 웰링턴군 사이의 워털루 전장에 합류하여
웰링턴과의 약속을 지키며 나폴레옹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됩니다.
우세한 병력의 나폴레옹군을 맞아서
블루허군이 도착할 때까지 끊질긴 방어전을 구사하던 웰링턴은
이미 4차례나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고
뒤늦게 나마 전장에 도착한 블루허군이 프랑스군의 측면에 공격을 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측면을 방어하면서 프로이센군이 후미로 기동하려는 것을 견제하느라
웰링턴군에 대한 마지막 총공세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고
마지막 공격이 실패하자 프랑스군은 패퇴하게 됩니다.
(이 전투 이후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에서 프로이센이 대두되게 되고
이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시대에 독일 제 2제정이 시작됩니다.)
은영전에서 제국군의 침공에 대항한 동맹 측의 도리아성역 전투를 기억하신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군과 블루허군에 대항하여
나폴레옹이 취한 전술이 비슷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동맹 측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각개격파를 시도한 라인하르트의 전술은
소설이니 만큼 동맹 측의 함대 사령관들을 전사시킴으로써 완벽하게 진행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의 각개격파에서 패한 후 후퇴에 성공한 블루허가
군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고, 자신을 추격하던 프랑스의 그루시장군을 따롤리고
나폴레옹군을 잘 막아내고 있던 방어전의 대가 웰링턴을 측면지원 함으로써
나폴레옹의 전술을 무력화 시킵니다.
두 상황은 유능한 지휘관의 유무에 대한 차이도 보이이지만
한 번 전투를 벌이면 일주일을 날 밤을 깐다던 젊은시절의 나폴레옹과는 달리
집중력과 체력을 잃어버린 배나온 아저씨가 된 후의 나폴레옹에게는
매우 씁쓸하고 아쉬운 패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